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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처사 묘갈명 병서(三處士墓碣銘幷序)

야촌(1) 2018. 3. 7. 00:10

■삼처사 묘갈명 병서(三處士墓碣銘幷序) /光山李氏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삼처사(三處士)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숭정(崇禎) 병자후(丙子後) 무신년(현종 9, 1668년) 10월 일

 

우리 공헌(恭憲) 소경(昭敬) 치세(治世) 연간에 성주(星州)에 세 명의 처사(處士)가 있었으니 이홍기(李弘器) 백용(伯容), 이홍량(李弘量) 중용(仲容), 이홍우(李弘宇) 계용(季容)이라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남쪽 지방에서 선행(善行)을 한 삼용(三容)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씨(李氏)의 계보는 무진(武珍)에서 출발한다. 고려 때 이순(李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판도사(版圖司)의 판도(版圖)를 지냈다. 그 이상은 보첩(譜牒)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에 동정(同正)인 항(恒), 판관(判官)인 임(林), 진사(進士)인 근생(根生), 부사용(副司勇)인 신(莘), 부사관(副司果)인 한손(漢孫), 봉사(奉事)인 수(壽)가 있다. 7세조인 봉사께서 고성이씨(固城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사인(舍人)인 우(佑)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10년(중종 26, 1531년)에 젖먹이 하나를 두고서 두 아들을 낳으니 이들이 홍기, 홍량, 홍우였다. 막내가 두 형보다 네 살이 어렸다. 처음에 선부군(先父君)이 무과(武科)로 발신(發身)하였는데 벼슬길이 달하지 못하였다.

 

공희(恭僖) 말년에 열사(列士)로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를 따라가다가 합포(合浦)에서 객사하였다.

두 아들은 겨우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분상(奔喪)하였는데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차마 눈 뜨고 바라보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며 이에 막부(幕府)의 관리와 병사들이 효자라고 하며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반드시 예(禮)로써 시신을 수습하며 말하기를, “효자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도록 상례를 치름에 힘을 모으자.”고 하였다.

 

시신을 운구하여 돌아와 장사를 지냄에 또한 그 예를 갖추어 3년 동안 곡(哭)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초상(初喪) 때에 어린 동생은 겨우 8세였는데 곡하고 읍(泣)하기를 두 형과 같이 하여 보는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항상 경계하여 말하기를, “예(禮)에 과부의 자식은 가르친 게 없고 배운 게 없다고 한다. 너희들은 의롭지 못한 짓을 하지 말아서 따라 죽지 못한 어미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 효를 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자 세 아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그 후 말마다 책을 읽고 행실을 바로 하는 데에 힘써 의로운 행동으로 이름이 알려져 일찍이 친시(親試)의 주사(主司)가 되었다. 융경(隆慶) 2년(선조 1, 1568년)에 장남과 차남, 두 아들이 함께 선발되어 박사(博士)의 제자가 되었으나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은거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무덤을 지키며 3년 동안 곡읍(哭泣)하며 거상(居喪)하였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골의 부로(父老)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고사(古事)가 되었다. 형제가 반드시 재물을 함께 나누고 같은 집에 살면서 한솥밥을 먹으며 부모가 계시던 때와 같이 하기를 늙어서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제사는 반드시 삼가서 지냈는데, 별도로 제사 음식을 차리는 부엌을 만들었으며 제사 당일에 미쳐서는 어른과 어린아이가 모두 재계하고 안팎이 일을 나누어 맡아 제사를 진행함에 반드시 엄숙하게 하였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절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반드시 함께 제사에 참여하게 하여 말하기를, “절도 있게 걷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위의(威儀)의 시작이다.” 하였다.

 

이에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착하도다. 세 아들의 행실이여. 모두가 세속(世俗)의 풍속을 일깨울 만하구나.” 하였다. 큰아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두 동생들은 모두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는데 둘째아들은 능서랑(陵署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셋째아들은 특별히 진천 현감(鎭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큰아들의 별호(別號)는 용재(容齋)이며 둘째아들의 별호는 육일헌(六一軒)인데 정 선생이 육일헌기(六一軒記)를 지어 남모르게 베푼 덕행과 높은 행실을 갖추어 말하였다. 셋째아들의 별호는 모재(茅齋)이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시골 선비들이 세 아들의 사당을 짓고 배향하고 있다.

 

정 선생은 삼 처사(處士)에 대해 자매 형제와 같다고 말하였다. 큰아들은 52세에 세상을 떴으니 만력(萬曆) 10년(선조 15, 1582년) 9월 7일이었다. 둘째아들은 62세에 눈을 감았으니 만력 20년(선조 25, 1592년) 11월 8일이며 셋째아들은 60세로 숨을 거두었으니 그 2년 뒤인 만력 22년(선조 27, 1594년) 10월 15일이었다.

 

큰아들의 묘소는 살던 곳인 고탄동(高呑洞)의 선영 곤향(坤向)의 좌측에 있으며, 둘째아들의 묘소는 그 오른쪽이다. 셋째아들의 묘소는 삼대촌(三大村) 간향(艮向)의 언덕에 있다. 큰아들은 성산배씨(星山裵氏) 별제(別提) 은(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로(簬), 당(竹+黨), 심(竹+尋)을 낳았다.

 

둘째아들의 전취(前娶)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참봉 백죽(伯竹)의 따님이었으며 후취(後娶)는 완산이씨(完山李氏) 충의(忠義) 양(讓)의 따님인데 난귀(蘭貴), 난미(蘭美)와 또 다섯 딸을 낳았다. 사위는 곽주(郭澍), 이중무(李重茂), 정선(鄭銑), 하홍진(河弘晉), 유무룡(柳武龍)이다.

 

셋째아들은 진양강씨(晉陽姜氏) 참봉 개(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서(竹+舒)를 낳았다.

서는 여러번 관직을 역임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딸 하나는 시집가지 않았는데 임진년(선조 25, 1592년)의 난리를 당해 적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절개를 지켜 죽어서 열녀(烈女)로 일컬어졌다. 로(簬)는 명룡(命龍)을 낳았는데 진사를 지냈으며 두 딸은 장경우(張慶遇), 성창구(成昌耈)에게 시집갔는데 경우는 참봉이다. 당(竹+黨)은 명기(命虁), 명익(命益)과 세 딸을 낳았는데 세 딸은 노각(盧珏), 김징(金徵), 조승조(趙承祖)에게 시집갔다.

 

난귀(蘭貴)는 명직(命稷)과 광언(光彦)을 낳았는데 광언 역시 선행(善行)으로 알려졌다.

사위 세 명은 이진영(李震英), 조시맹(趙時孟), 정승주(鄭承周)이다. 난미(蘭美)는 광영(光英), 광헌(光獻), 광정(侊挺), 광석(光碩)을 낳았으며 사위 네 명은 신함장(辛含章), 허시흥(許時興), 김수륜(金壽崙), 김일주(金一柱)이다. 서(竹+舒)는 명귀(命龜)를 낳았으며 사위 두 명은 김이형(金以亨), 허적(許積)이다.

 

이형(以亨)은 진사로 있다가 바야흐로 영의정이 되었다. 3세, 4세 자손은 심히 많다.

덕이 두터운 집안에 하늘이 보답하니 참으로 믿을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백행의 근본은 오직 효도와 우애일세.

뛰어난 삼용(三容)이여 선한 풍속을 일으켜서 백세에 가르치시도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兼) 영경연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허목(許穆)이 짓고

 

전서(篆書)를 쓰다.통정대부(通政大夫) 수(守)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겸(兼) 순찰사(巡察使) 이관징(李觀徵)이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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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三處士遺墟碑有明朝鮮國三處士墓碣銘 幷序

 

崇禎丙子後戌申十月 日

 


我 恭憲昭敬間星州有三處士曰李弘器伯容李弘量仲容李弘宇季容世傳南中善行三容者也李氏系出武珍高麗時有李順者爲版圖司版圖以上譜牒失其傳其後有同正恒判官林進士根生副司勇萃副司果漢孫奉事樹爲七世奉事娶固城李氏舍人佑之女也嘉靖十年一乳而生二子是曰弘器弘量弘宇少二兄四歲云初先府君以武科發身仕不達恭僖末以列士從嶺南節度使客死合浦二子才十二以幼稚奔喪勺水不入口人有不忍見者於是幕府吏士莫不歎息以爲孝子也必歛之以禮曰勉之毋負孝子之心也其返而葬也亦其禮可觀三年哭一如初喪穉弟八歲而哭泣持喪亦如二兄之爲者觀者大悅母李氏常戒之曰禮寡婦子不取敎無敎也不以不義爲未亡之羞可謂孝矣三子者泣曰敬受命日讀書力行以行義發聞嘗爲親試主司隆慶二年伯仲二子同選爲博士弟子不復應擧隱居養親及母歿守塚三年其居喪哭泣至今將百年鄕黨父老相傳爲古事兄弟必同財而居同爨而食一如父母時至老不改祭祀必謹別立齋廚當祭長幼咸戒內外分職將事必嚴雖幼少能拜跪則必令與祭曰周旋進退威儀之則始此寒岡鄭先生稱之曰善乎三子者之行皆足以警俗云伯子最先歿其二弟皆以遺逸拔薦仲子除陵署郎不出叔子特拜爲鎭川縣監以疾亦不就伯子別號容齋仲子曰六一軒鄭先生作六一軒記具言隱德高行叔子別號茅齋檜淵書院有鄕賢祠三子皆享鄭先生於三處士爲姊妹兄弟云伯子五十二歿萬曆十年九月七日仲子六十二歿其二十年十一月八日叔子六十歿後二年十月十五日伯子之葬在所居高呑洞先兆坤向之左仲子之葬在右叔子之葬在三大村艮向之原伯子娶星山裵氏別提垠之女生簬仲子前娶廣州李氏參奉伯竹之女後娶完山李氏忠義讓之女生蘭貴蘭美又有五女壻郭澍李重茂鄭銑河弘晋柳武龍叔子娶晋陽姜氏參奉漑之女生累官至折衝將軍女一人未笄當壬辰之亂遇賊守節死稱烈女簬生命龍進士二女壻張慶遇成昌耉慶遇參奉生命虁命益三女適盧珏金徵趙承祖蘭貴生命稷光彥光彥亦以善行聞女壻三人李震英曺時孟鄭承周蘭美生光英光獻光挺光碩女壻四人愼含章許時興金壽崙金一柱生命龜女壻二人金以亨許積以亨進士積方爲領相至三世四世子孫甚多厚德之家天道之報其信也其銘曰

百行之本惟孝惟悌卓卓三容可以興善俗可以敎百世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春秋館象監事許穆撰幷

篆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李觀徵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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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이서(李舒,1566~1651/茅齋 李弘宇 아들 ) 찬(撰)

 

昔在恭憲昭敬間。有星州三處士出。其一容齋李弘器伯容。其一六一軒李弘量仲容。其一茅齋李弘宇季容。而皆同母兄弟也。孝友篤至。力讀書行義。寒岡鄭先生謂足以範俗。眉叟許文正公銘其墓。至今號三處士門曰三容門。蓋伯子與仲子。俱擧國子。而伯子早卒。仲子與季子。同薦遺逸。仲子除陵署郞不出。季子特拜鎭川縣監不就。而縣監子東湖公諱?。又學於寒岡先生。有名於世者也。日公之六代孫復運氏。使其子宗宅。奉公狀示余。乞銘其墓。噫。一堂中兄弟父子皆賢者。豈不異哉。公字以直。其先出光州。麗奉翊大夫版圖判閣順。其八世祖也。曾祖諱漢孫副司果。祖諱樹奉事。妣晉陽姜氏。參奉漑之女。以嘉靖丙寅十一月十二日生公。岐嶷異凡兒。稍長卽從遊於泗上。日有所就。乙巳中進士。戊申被逸薦。己酉除黃山道察訪。因事棄歸。是時鄭先生遯于野。公亦無進取意。日與同門諸賢。互相講磨。以師命重編五先生禮說。丙寅除司畜署別提。丁卯以扈聖功敍六品。謝病歸。未幾除活人署別提。戊辰除義禁府都事。皆不就。築室于承湖之上。自號東湖野老。日以敎訓後進爲事。庚寅公年八十五矣。例陞通政階。俄拜折衝副護軍。辛卯十月初一日卒。葬承湖東卯向原。門人私謚曰德耀先生。蓋取靖節貞耀之義云。公重厚方嚴。居常沈默自持。莊恪臨下。不動聲氣而家庭肅穆。好儉素。未嘗衣帛兼味。惟酒無量。亦不亂。敦睦任恤。無所不盡心。平生抗志節。不肯俯仰於人。蓋氣象之得於師門者多矣。鄭先生歿。門人以孔門有若擬之。公服心喪已。倡議建檜淵院。立神道碑。刊行文集諸書。多公力焉。嘗戒從姪光彥曰初學勿多言。多言無實。勿恃才。恃才多驕。勿好侈。好侈心不固。勿高論。高論多躐等。又曰學非安靜不成。業非勤苦不精。凡此皆自得之言也。配苞山郭氏。參奉忠贇女。昇平朴氏。參判而章女。一男命龜。有學行。薦剡官直長夭。二女金以亨進士,許積領議政。庶子四命達,命新,命吉,命昌。女二金權,鄭昌謹。命龜三男斗樞,斗晶,斗南。一女李元祿大司憲。以亨一男坖進士。一女兪堧。積無后。斗樞二男賢,蕡。一女金重崑。斗晶三男贄,賞,賓。二女尹鼎來,呂漢基。斗南二男貞,贊。一女柳昌河。曾玄以下不錄。銘曰。

猗三處士。有名南州。公生其門。允襲厥休。從遊泗上。所學亦優。仕不求進。樂彼林丘。尊師編禮。徽蹟永留。尤可法者。威如之孚。銘以詔後。我言非諛。<끝>

 

동호집 > 東湖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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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宣務郞鎭川縣監府君。妣宜人晉州姜氏合祔墓表。

 

嗚呼。我先府君諱弘宇字季容。光山人。判閣諱順。於府君七世祖也。寔生同正諱恒。同正娶判書孫得齡之女。生判官諱林。判官娶莊襄公金萬壽之女。生進士諱根生。進士娶牧使魚仲淵之女。生司勇諱萃。司勇娶司成張繼弛之女。生副司果漢孫。司果娶副司果李長植之女。生奉事諱樹。奉事娶舍人李佑之女。生府君。府君官至縣監也。姜氏系出晉州。考諱漑早世。觀察使子平。夫人之高祖也。弘文校理李希騫。夫人之外祖也。合葬于星州加利縣三大邨坤坐艮向之原。孤?前娶參奉郭忠贇之女無後。後娶工曹參判朴而章之女生二女一男。長適進士金以亨。生一男一女。男曰坖。女兪堧。次適巡察使許積。男命龜娶僉正鄭宗懋之女。生三男一女。男斗樞。娶晉陽姜大遂之女。男斗晶娶咸平李潗之女。女適李元祿。男斗南未娶。

 

동호집 > 東湖先生文集卷之二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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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李氏三賢行狀

 

吾鄕舊有光州李氏三子。曰弘器字伯容號容齋。曰弘量字仲容號六一軒。曰弘宇字季容號茅齋。皆以儒行著名。一妹歸于寒岡鄭先生。先生方未有室。常曰不願富貴婿。願入李氏門。安有三子者之行而閨閫無範者乎。卒委禽焉。是時先生年甚少。才豪氣逸。於人少許可。聞三子之風而愛重至此。此足以知三子之所蓄矣。其先在高麗有諱順。官至判圖判閣。歷同正諱恒判官。諱林進士。諱根生隱君。諱萃副司果。諱漢孫。至訓鍊奉事諱樹。聘固城李氏。議政府舍人佑之女。是其考妣也。家于加利縣之高呑村。伯仲以嘉靖辛卯。一乳而生。季乙未生。奉事公晩雖投筆。少以文學爲業。善隷書。且有識鑑。謂兒子輩氣質異常。蒙養不可不端。命從表叔李上舍煕明,承旨景明受學。蓋二公謹飭有學行。爲士林所推故也。奉事公初捷武擧。從戎于合浦之節度營。以疾暴逝。伯仲時年十二。奔赴數百里。勺飮不入口。號擗不絶聲。節度判官曁幕府羣吏。莫不傷感。斂棺之資。務令致精曰。當使孝子無憾。及葬喪具略備。而猶以爲不恔。多賣臧獲。人或以喪具稱家爲言。泣曰送終不獲自盡。雖有臧獲焉用。三年哀戚。終始如一日。季氏纔八歲。執喪如成人。母夫人生長禮家。習聞義方。常戒之曰汝曹亦嘗聞寡婦子不取之言乎。不聞嚴訓。自行己志。鮮不歸於暴棄。汝曹宜加省念。不以不義之名聞於汝母之耳則可謂孝矣。三子涕泣受敎。各自刻勵。以敦孝悌修行義。爲循省自勉之工程。所讀書皆聖賢爲己之學。若繪飾翰墨。從事擧業。非其志也。年踰三十。始因慈旨。暫試有司。伯仲於隆慶戊辰。聯名司馬榜。不復入試圍。奉母夫人敬養備至。其歿也廬於墓三年。距家數百步。而足未嘗一及門。兄弟作室。不別門牆。寢食出入。必與之同。非有事故。未嘗暫離。故弟兄家皆備三子燕器。隨其所在而供奉焉。一有出遊不返。則必待歸共餐。家有疾病患故。則晨夕不相捨。以分其憂。土田僮僕。俱不分析。同力而耕。計口而食。以終其世。人不知某田某僕爲某家之有。尤謹於奉先之儀。廟宇精麗。不限工力。前建一室。左庖右齋。凡遇時祀忌祭以及俗節薦享。長幼男婦咸聚齊潔。內外分職。各責所事。儀物條理。俱有定式。子弟年及紀者。皆令與祭。習熟奠獻拜跪之節曰。此士君子周旋進退動作威儀之始於家者也。每黎明。盥漱衣帶。謁廟而退。相與陳說禮法。訓誨子弟。日以爲常。鄭先生每至其家。輒旬月忘返。金東岡,金松庵,李玉山諸賢。有時來訪。留屢日方還曰纔入室。便覺孝悌之心油然而生矣。與吳德溪,崔守愚,朴大庵,郭存齋爲道義交。一時薦紳先生皆重其名。以遺逸薦于朝。仲氏授恭陵參奉。季氏超敍鎭川縣監。皆不就。伯氏已先卒矣。縣監公一女年十九而未笄。壬辰之亂。遇變不屈而死。其家庭制行。預養於平日者。斯可驗矣。鄭先生嘗謂三子平生言行。關世敎甚大。不可使泯無傳焉。將立言垂後而卒不果。惜哉。雖然今距三賢之世。將百年。鄕黨後學。稱慕如昨日。是豈無自而致歟。吾生也後。雖未及親炙於門墻。亦嘗稔聞前輩之論矣。賢人君子之盛。莫當時若也。而內行之篤。家道之正。未始不以三賢相推重云。噫人之於兄弟也。原隰同其憂。塤篪共其樂者亦難矣。况知有兄弟之身。而不知有其身者。一家而得三人焉。此豈非難之尤難者乎。鄭先生之所取。宜在於是也。伯氏以壬午九月七日終。享年五十二。娶星州裵氏別提垠之女。生三子簬,?,?。仲氏壬辰十一月八日終。享年六十二。娶完山李氏忠義衛讓之女。生二子蘭貴,蘭美。四女適郭澍,李重茂,鄭銑,河弘晉。季氏甲午十月十五日終。享年六十。娶晉州姜氏參奉漑之女。生一子?。累官至折衝副護軍。簬一子命龍進士。二女適參奉張慶遇,士人成昌耉。?二子命夔,命益。蘭貴二子命稷,光彥。三女適李震英,曺時孟,鄭思周。蘭美四子光英,光獻,光挺,光碩。四女適愼含章,許時興,金壽崙,金一柱。?一子命龜。二女適進士金以亨,左議政許積。命龍之子曰長亨,久亨。命夔之子曰泰亨,允亨,景亨。命益之子曰世亨。命稷之子曰景耼。光彥之子曰景O, 景裕。餘三子幼。光英之子曰景膺,景觀。光獻之子曰景燾。光挺之子曰景東。餘三子幼。命龜之子曰斗樞,斗晶,斗南。內外曾玄孫幷皆蕃衍。殆不可盡載。猗歟盛哉。光彥甫亦以孝友世其家。早與不佞有舊。袖家乘來示。仍要一言以敍之。義不可辭。遂略記梗槩。以竢夫立言之君子。<끝>

 

귀암집 > 歸巖先生文集卷之九 / 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