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려와조선관직

도안무사(都安撫使)

야촌(1) 2018. 2. 25. 01:46

■ 도안무사(都安撫使)

 

1. 정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주로 국방에 관한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임시로 파견하던 관직이다.

 

2. 개설

   1363년(고려 공민왕 12) 원나라가 새로운 고려왕으로 추대한 덕흥군(德興君)과 그가 인솔하였던 군대가 고려를 침략했다. 이를 저지하고자 고려 조정에서 정찬(丁贊)을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임명하여 서북면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때 도안무사가 처음 등장한다.

 

이후 외적의 침공소식 등이 전해지면 종종 도안무사를 파견하였다.

주로 국방에 관한 특별한 일이 벌어졌을 때 임시로 보냈다.

 

조선에 들어서서도 파견되었는데 북방의 방위가 중요한 동계(東界)와 서계(西界)를 중심으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와 제주도 등에 보냈다. 특히 제주도처럼 특별한 지역에서는 군사(軍事) 뿐만 아니라 민사(民事)까지 책임지도록 했으며 정규적 직책으로 파견되었다.

 

3. 담당 직무

   1363년 반원(反元) 정책을 펼치던 고려의 왕을 교체하고자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아들인 덕흥군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게 했다. 이들을 저지하고자 고려에서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였던 정찬을 서북면도안무사로 임명해서 파견했는데 이것이 도안무사의 시초였다.

 

도안무사의 주요 임무는 유군(遊軍)을 거느리고 군영들 사이를 오가면서 각 부대의 전투태세와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도안무사는 비교적 큰 규모의 외침이 있을 때에만 임시로 파견하였다.

 

고려말기로 올수록 왜구의 침입이 격화되면서 이들을 방어할 목적으로 자주 파견하였다.

이때 양광·경상도도안무사(楊廣·慶尙道都安撫使)라든가 전라도상원수겸도안무사(全羅道上元帥兼都安撫使)의 칭호로 보냈는데,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대상으로 원수를 겸해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북방의 방위가 매우 중요했으므로 동계와 서계 지방에도 파견되었다.

1382년(고려 우왕 8) 정료위(定遼衛)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문하평리(門下評理)한방언(韓邦彦)을 서북면도체찰사겸안주도상원수(西北面都體察使兼安州道上元帥), 전지문하사상의(前知門下事商議) 김용휘(金用輝)를 도안무사겸부원수(都安撫使兼副元帥)로 삼았다.

 

이듬해 문하평리문달한(文達漢)을 양광도도찰리사(楊廣道道察理使), 지문하사(知門下事)안경(安慶)을 도안무사, 보안군(保安君)박수년(朴壽年)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았다.

 

1387년에는 요동에 간첩이 횡행하고 있어서 서북면에 방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며 정희계(鄭熙啓)를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원지(崔元沚)를 도안무사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를 통해 국방과 관련하여 특별한 조치를 내릴 필요가 있을 때 중앙의 고관(高官) 중에 파견했으며 그 지위는 부지휘관 정도에 해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정기적으로 보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도안무사는 계속 파견되었다. 1393년(태조 2) 7월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정도전을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로 삼았는데 다음 달에 이지란(李之蘭)으로 대신하게 하며 아울러 갑주(甲州)와 공주(孔州)에 성을 쌓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 8월 2일].

 

태종 때에는 동북면 쪽으로 새로 개척했던 길주도(吉州道)에 도안무사를 별도로 설치하였다[『태종실록』 5년 9월 22일]. 이는 길주도를 수복(收復) 지역으로 간주하여 병력을 집중 배치하면서 군사를 전담시키고자 도안무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동계·서계 지역은 군국(軍國)의 중사(重事), 곧 북방 방위의 주요한 거점이었으므로 군사는 도절제사와 도순문사가 같이 의논하여 시행하게 했다. 이때 도절제사는 도안무사가 이를 겸한다고 했다[『태종실록』 13년 7월 21일]. 그러므로 동계·서계의 도안무사는 군사를 책임지는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1397년(태조 6)에는 박자안(朴子安)을 경상·전라도안무사로 삼아 특별히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을 체포하게 했다. 즉 도안무사를 남쪽의 하삼도 즉,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도 파견하였다.

 

1420년(세종 2)에는 그동안 수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로 바꾸었다. 이후에 이를 줄여서 수군도안무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세종실록』 3년 7월 13일].

 

수군도안무사는 정식 칭호는 아니었지만 본래의 것이 너무 길어 부르기가 어려울 때 간단히 축약해서 일컫는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남쪽의 여러 도에서 도안무사라고 하면 주로 수군도안무처치사를 가리킨다.

 

특히 제주도에 파견된 도안무사가 주목된다. 제주도에 파견된 도안무사로 인해 조선에 들어와서는 도안무사의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제주도안무사는 처음부터 공물 조달에도 관여하는 등 민사 분야까지도 담당하였다. [『태조실록』 4년 7월 1일].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며 풀어놓은 국마(國馬)를 번식시키는 사업도 책임지고 추진해야 했다. 제주도 내의 효자와 절부(節婦)로 포상할 만한 자를 뽑아서 보고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도안무사는 또한 지방관 업적 평가인 전최(殿最)를 실시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형옥(刑獄)의 결송(決訟)과 재정 등에 관한 사항은 제때에 보고하기가 어려워 1년에 두 차례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나라에서 기르는 말이 번식한 것과 죽어서 없어진 것도 함께 기록하여 올렸으며, 이러한 보고 내용을 곧 승진과 퇴출의 근거 자료로 삼았다[『태종실록』 16년 5월 6일]. 손실답험(損實踏驗)하는 일에도 책임을 부여했다[『세종실록』 3년 8월 19일]. 이처럼 제주도가 특별한 지역임을 감안하여 도안무사는 섬 내의 군사뿐만 아니라 민사의 책임자로도 기능하였다.

 

특별 조치를 위해 임시로 도안무사를 파견하는 사례도 있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농사와 뽕나무 심는 일에 밝은 자를 지방에 보내 다스리게 했다. 감사와 수령이 사무가 번잡하다는 이유로 제방을 쌓고 뽕나무를 심는 일에 간혹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파견한 관리의 칭호를 도안무사라고 명했다. 그 대상은 경기도·충청도, 전라도·경상도, 풍해도·평안도로 정해졌다[『태종실록』 14년 11월 20일].

 

1433년(세종 15)에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을 정벌했을 때 총지휘관이었던 최윤덕(崔閏德)의 직위도 당시 평안도도안무사였다[『세종실록』 15년 8월 9일]. 이때의 평안도도안무사는 정벌을 위해 보낸 군대를 통솔하는 직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동계·서계에 도안무사를 파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최윤덕에게 맡긴 임무는 원정군을 지휘하는 특별 임무였다.

 

4. 변천

  명칭상 도안무사의 전신으로 보이는 안무사는 1012년(고려 현종 3)에 75도(道)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안무사는 혁파된 절도사제(節度使制)를 대신하여 파견된 것이었다.

 

1018년 안무사제(按撫使制)도 폐지되었으나 1107년(고려 예종 2) 다시 여러 도에 안무사가 파견되었다. 이때의 주 임무는 백성의 어려움과 수령의 근무 태도를 조사하여 고과(考課)를 매기는 전최였다. 이때부터 일이 발생하면 파견하는 임시직으로 운영되었다.

 

도안무사 파견의 시초는 1363년(고려 공민왕 12)이다. 원나라는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 왕으로 추대하면서 덕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도록 했다. 당시 고려왕이었던 공민왕은 덕흥군이 인솔하는 군대를 저지하고자 정찬을 서북면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때 정찬을 도안무사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이전의 안무사와 이때의 도안무사는 역할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 뒤에도 외적의 침공 소식이나 요동에서 첩보전이 벌어진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동계·서계에 종종 도안무사를 파견하였다. 도안무사가 원수직을 겸해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막기 위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도 도안무사를 보냈다. 하지만 정기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국방에 관한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필요에 따라 파견했을 뿐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도안무사는 계속 파견되었다. 1393년 7월에는 정도전을 동북면도안무사로 삼았는데 다음 달에 이지란으로 대신하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 8월 2일]. 1395년에는 제주도에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태조실록』 4년 7월 1일]. 1397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도 파견하였다[『태조실록』 6년 2월 16일].

 

1402년 조사의(趙思義)는 태종이 태조의 뜻에 어긋나게 즉위한 것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김영렬(金英烈)을 동북면·강원도도안무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태종실록』 2년 11월 12일]. 이 역시 난의 진압을 위해 보냈을 뿐 정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405년에 동북면의 길주도에도 도안무사를 파견하였다[『태종실록』 5년 9월 22일]. 연속해서 도안무사를 임명하는 것으로 보아 종전과 달리 점차 정규 직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특별한 지역에 대해서는 정규적으로 도안무사를 파견하여 소기의 성과를 올리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413년 동계·서계가 국방상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지역으로 간주해서 군국의 중대사가 있으면 도절제사와 도순문사가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도절제사는 도안무사가 겸하게 했다[『태종실록』 13년 7월 21일].

 

이를 통해 도안무사를 정규직화하였으며 도안무사에게 군사 문제를 책임지게 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그에 따른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태종실록』 13년 7월 27일]. 아울러 같은 해 10월에는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개명하여 남쪽 지방의 도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자연히 도안무사의 앞에 붙는 명칭도 같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지방 장관이 관내의 부(府)나 목(牧) 등의 행정 책임자가 되어 직접 다스리는 겸목법(兼牧法)을 적용시켰다.

 

영길도도안무사는 판길주사(判吉州事)를[『태종실록』 15년 4월 18일], 평안도는 판안주목사(判安州牧事)를 겸했다[『태종실록』 15년 9월 21일]. 이어서 1417년 도안무사를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바꾸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태종실록』 17년 10월 15일].

 

북쪽 지역과 달리 남쪽에서는 계속해서 도안무사를 사용한 용례가 보이는데, 수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수군도안무처치사의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466년(세조 12)에 수군도안무처치사를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개칭하면서 그마저 사라졌다.

 

제주도에 파견된 도안무사는 성격이 달랐다. 『세종실록』 「지리지」 ‘제주목’조에 따르면 목사(牧使) 대신에 도안무사를 보냈는데, 3품이면 안무사라고 칭한다고 되어있다. 목사가 정3품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그 이상을 품계를 지닌 사람이 파견될 경우에 도안무사라는 칭호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도안무사가 정규의 지방 관직이었으며 아울러 도안무사는 지방 특성상 민사와 군사를 함께 관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조에 의하면 1466년에 안무사를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라고 바꾸면서 제주도에서도 도안무사라는 관직이 사라졌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오종록,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상)」, 『진단학보』 59, 1985.

오종록, 「조선 초기 양계(兩界)의 군사 제도와 국방 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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