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집 제23권 / 비(碑)
[생졸년]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 ~ 1633년(인조 11)』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비음기(碑陰記)
근세의 명신(名臣)으로 그 도학과 덕행이 가장 드러난 분은 우복(愚伏) 선생 정 문숙공(鄭文肅公)이시다.
공(公)은 조정에서 벼슬한 40년 동안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쳤고 지위가 경재(卿宰)에까지 이르렀다.
경연(經筵)에서 논사(論思)하여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했고, 대각(臺閣)의 직임을 맡아 임금의 잘못을 바루었으며,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정(彝鼎)에 새기고 책서(策書)에 기록해서 후세에 드리우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공은 증직된 벼슬이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고 품질(品秩)이 종1품이며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니, 또한 당연히 격식을 따라 신도비(神道碑)를 세워 사적을 드러내야 할 일이다.
효묘(孝廟) 갑오년(1654, 효종 5)에 자의공(諮議公)이 용주(龍洲) 조공 경(趙公 絅)에게 공에 대한 신도비 명을 청하고 비석까지 이미 마련했었는데, 물력이 부족하여 결국 세우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공의 증손 석교(錫僑)가 그 외제(外弟) 조원붕(趙遠朋)과 함께 힘을 모아 장차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새기려 하면서, 현일에게 그 일의 전말을 쓰고 손자와 증손들 가운데 비문에 들어 있지 아니한 자들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공이 세상을 떠나고부터 올해 임신년(1692, 숙종18)에 이르기까지 갑자(甲子)가 이미 1주기가 지났다. 여러 세대가 바뀌도록 아무도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에게 책임이 돌아왔으니, 아아, 그 또한 운수가 있나 보다. 이에 감히 비석의 뒷면을 빌려 이렇게 기록한다.
석교는 자의공의 맏아들로서 지금 영양 현감(英陽縣監)이다. 그 아우 석현(錫玄)은 일찍 죽었고 후사가 없다. 네 자매는 참봉(參奉) 이원지(李元祉), 참봉 이윤해(李允諧), 사인(士人) 황종대(黃鍾大), 사인 신강제(申康濟)에게 시집갔다. 서제(庶弟)가 한 사람 있는데 석윤(錫閏)이다. 현감(縣監)은 2남 5녀를 두었다.
장녀는 사인 황종수(黃鍾粹)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 황연(黃沇)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도징(道徵)은 6남을 두었으니, 석빈(錫璸), 석유(錫瑜), 석장(錫璋), 석구(錫球), 석린(錫璘), 석기(錫琦)이다.
조원붕은 봉사공(奉事公)의 둘째 아들로서 지금 청도현 지사(淸道縣知事)이다. 내외로 손, 증손, 현손 남녀가 약간 명이 있다. 금상(今上) 18년 임신(1692) 9월 병진 일에 이현일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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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우복(愚伏) 선생 : 정경세(鄭經世)의 호로, 자(字)는 경임(景任)이고, 호는 하거(河渠)ㆍ승성자(乘成子)ㆍ
석중도인(石潨道人)ㆍ송록(松麓) 등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563년(명종18)에 태어나 1633년(인
조11)에 세상을 떠났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수찬, 장령, 부교리, 좌승지 등을 거쳐 1600년(선조33)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1610년(광해군2)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도승지, 대사헌, 우참찬, 이조 판서, 대제학,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주02] 자의공(諮議公) : 정경세의 맏아들 심(杺)의 아들로, 세자시강원 자의를 거친 손자 도응(道應)을 가리킨
다.
[주03] 도징(道徵) : 정경세의 서손(庶孫)으로 서자(庶子)인 력(櫟)의 아들이다.
[주04] 봉사공(奉事公) : 정경세의 손서(孫婿) 조한수(趙漢叟)이다.
[주05] 청도현 지사(淸道縣知事) : 청도(淸道)는 군(郡)인데 당시에 읍호(邑號)가 강등되어 현(縣)이 되었던 것으
로 보인다. 강상죄(綱常罪) 등의 중죄를 지은 사건이 일어나면 그 고을의 등급을 낮추고, 관직도 바꾸어 군
수(郡守)를 현감(縣監)으로 강등한다. 지사(知事)는 군수, 현감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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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愚伏鄭先生碑陰記
近世名臣其德學行誼之最著者。曰愚伏先生鄭文肅公。公立朝四十年。歷敭中外。致位卿宰。論思經幄而君心沃。正笏臺端而衮闕補。按節分符而民不勝懷。固當銘彝鼎而垂策書。公 贈官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秩從一品。諡文肅公。又當準格立碑。表于神道。 孝廟甲午。諮議公請龍洲趙公絅銘公之德。石旣具。力綿不克立。今公之曾孫錫僑與其外弟趙遠朋合謀幷力。將建石琢辭。使玄逸書其事顚末。且記孫曾未傳于碑者。余惟自公捐館。距今年壬申。甲子已一周矣。更數世莫克興起。卒歸於兩君。嗚呼。其亦有數也耶。乃敢假其陰以記。錫僑則諮議公之長子。今爲英陽縣監。其弟錫玄早卒無后。其姊妹四人。適參奉李元祉,參奉李允諧,士人黃鍾大,士人申康濟。庶弟一人曰錫閏。縣監有二男五女。女長適士人黃鍾粹。次適士人黃沇。餘幼。道徵有六男。曰錫璸,錫瑜,錫璋,錫球,錫璘,錫琦。趙遠朋則奉事公之第二子。今知淸道縣事。內外孫曾玄男女凡若干人。
上之十八年玄黓涒灘九月丙辰。具位李玄逸記
갈암집 제23권 / 비(碑)
↑우복 정경세 선생 묘역 / 소재지 : 경북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산53-1
우복 정경세愚伏鄭經世1563-1633는 상주시 청기면 율리에서 태어나, 외서면 우산리에 살다가 사벌면 매호
리에서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여 공검면 부곡리에 묻혔다.
↑우복 정경세 선생 묘 후경
↑우복 정경세 선생 묘표
↑우복 정경세 선생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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