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한계희『韓繼禧, 1423년(세종 5) ~ 1482년(성종 13)』
사가집(四佳集) 보유(補遺)) 제1권 / 비지류(碑誌類) / 서거정(徐居正) 著
추충정난익대 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서평군(西平君) 증시(贈諡) 문정공(文靖公)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아, 내가 어찌 차마 공의 비석에 명을 쓴단 말인가. 나는 나이 15세에 학궁(學宮)에서 유학하였고, 공은 나보다 3세 아래인 12세에 두각(頭角)이 드러나 글을 읽으면 대의(大義)를 통달하였으니 역시 학궁에 와서 배웠다. 인하여 그와 교제를 맺어 어릴 적부터 정이 절친하였으니, 겉으로만 사귄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사귄 것이어서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교제의 도가 쇠하지 않았다.
내가 요행히 공보다 먼저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4년이 지나 공이 과거에 급제하여 또다시 동료로서 함께 시종(侍從)하는 자리에 있었으니, 소매를 나란히 하고 출입을 함께한 세월이 10여 년으로 정의가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하여 사적으로 넌지시 말하기를, “나를 낳아 주신 이는 부모이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공이다.” 하였건만 이제는 공이 떠나갔으니, 아, 애통하다. 공의 자제들이 나에게 울며 청하기를, “선친을 선생만큼 아는 분이 없으니, 선친의 덕을 드러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오직 선생께 바라는 것입니다.” 하는데,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어찌 차마 명을 짓는단 말인가.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성은 한(韓)이고, 휘는 계희(繼禧)이며, 자는 자순(子順)이다. 한씨는 본래 서원(西原 청주(淸州))의 대족(大族)으로 원조(遠祖) 휘 란(蘭)은 삼한공신(三韓功臣)이다.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휘 악(渥)이라는 분이 고려의 충숙왕(忠肅王)을 보좌하여 지위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니,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사숙공이 청성군(淸城君) 휘 공의(公義)를 낳으니,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평간공이 중대광(重大匡)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 휘 수(脩)를 낳으니, 문장과 도덕이 한때의 사범(師範)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문경공이 우정승(右政丞) 휘 상경(尙敬)을 낳으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간공이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휘 혜(惠)를 낳으니, 바로 공의 황고(皇考)이다. 후한 덕에 비해 수명은 짧았으나 덕을 쌓아서 후손에게 공덕을 물려주었다.
황비(皇妣) 정경부인 성씨(成氏) 또한 창녕(昌寧)의 대성(大姓)으로 판중추(判中樞)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영락(永樂) 계묘년(1423, 세종5) 9월 을사일(2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특한 데다 성품 또한 단정하고 중하여 함부로 웃거나 말하지 않았으며, 행동이 자연스럽게 예에 맞아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웠다. 조금 자라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자 잠잘 때나 먹을 때나 피곤한 줄을 모르니 학문이 나날이 성취되었다.
정통(正統) 신유년(1441, 세종23)에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주감(冑監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평소에 터득했던 것과 의심했던 것을 현명한 스승과 벗에게 질정하였으며, 마음을 집중하여 연구하고 깊이 들어가 궁리하여 포함된 의미를 궁구하려고 애썼으니,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소견이 더욱 고명해지고 터득한 바가 더욱 정밀해져 동료들에게 대단한 추앙을 받았다.
정묘년(1447)의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 얼마 안 되어 집현전 정자로 선발되었고, 자리를 옮겨 부수찬 지제교(副修撰知製敎)에 이르렀는데 항상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으며, 다시 옮겨 부교리에 이르렀다.
이때에 세종이 전적(典籍)에 뜻을 두어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고, 중국 전역의 서적들을 구입하여 동우(棟宇)에 가득 채워 놓았는데, 공이 항상 책을 펼쳐 열람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이에 널리 섭렵하고 광범위하게 기억하여 수많은 지식을 뱃속에 넣고 있으니, 사람들이 세남 비서(世南秘書)에 비하곤 하였다.
평상시 공무 중에 여가가 생기면 동료들은 모여 앉아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고 훌륭한 문장을 번갈아 지어 뽐냈는데,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안색을 바르게 한 채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서 눈으로 주시하고 마음으로 음미하며 좌우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지 않으니, 좌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이는 마음속에 중심이 있어 마음이 바깥으로 치달리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능히 그럴 수 있겠는가.
세조가 잠저(潛邸) 시절에 공을 보고 깊이 중한 그릇으로 여겼는데, 을해년(1455, 세조1)에 보위(寶位)에 오르자 공을 기대하고 총애함이 남달랐다. 회간왕(懷簡王)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상이 공에게 세자를 보도(輔導)할 책무를 명하고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을 제수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 여름에 좌필선(左弼善)으로 지위가 오르고 중훈대부(中訓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겨울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457) 봄에 예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藝文館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으로 자리를 옮기고, 가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으로 옮겼는데, 관직(館職)은 예전 그대로 지닌 채였다.
예종(睿宗)이 회간왕을 이어 세자가 되자 상이 다시 공에게 명하여 홀로 내전(內殿)에서 시강(侍講)하게 하였는데, 보익(補益)함이 대단히 컸다. 무인년(1458) 1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고 좌보덕(左輔德)에 제수되었으며, 2월에 병조 지사(兵曹知事)로 발탁되고, 얼마 안 있어 참의로 승진되었다.
9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이 일찍 선군(先君)을 여의고 대부인을 섬기면서 효성이 독실하였고, 또 능히 입신양명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대부인이 공의 귀함으로 인하여 작위에 봉해졌고, 또 여러 번 대궐로부터 은혜를 입으니, 일족(一族)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급기야 별세하자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상하면서도 예를 다하였다.
경진년(1460)에 기복(起復)으로 승정원 우승지를 삼았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신사년(1461) 봄에 자리를 옮겨 좌승지에 이르고, 가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으로 승진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옮겼다가 임오년(1462) 여름에 이조참판 세자우부빈객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날 상이 몸져누웠다. 공에게 입시하라고 명하고, 예종이 나이가 어려 뒷일에 속한 모든 것을 일체 공에게 위임하였는데, 비록 종척(宗戚)이나 근시(近侍)라 해도 듣지 못하였다. 공이 친히 약을 조제하여 성상의 건강이 평상시처럼 회복되니 상을 내림이 많고 중하였다.
계미년(1463)에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제수되었다. 상이 ‘공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나라를 위해 부지런히 힘쓴다.’ 하여, 모든 경적(經籍)과 전장(典章)을 편찬하고 찬술함에 있어 완성할 책임을 위임하였다.
공이 날로 더욱 삼가며 애쓰다가 중도에 병이 들어 빈사(濱死) 상태에 빠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상이 몹시 염려하여 손수 기도문을 지어 기도하였으며, 병이 차도가 있자 편전(便殿)으로 불러 보고 공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내 마음을 염려하고 나는 그대의 안색을 염려한다.
내가 일찍이 병들었을 적에 경이 구해 주었으니, 경이 지금 병이 들어 나 역시 근심하였다.
근심하는 것이 깊었기 때문에 경의 성명을 듣지 않았으면 하기까지 하였는데, 오늘 경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하고, 매우 극진하게 위로하였으니, 성상의 사랑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을유년(1465, 세조11)에 이조 판서로 발탁되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랐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모자란 재주로 전형(銓衡)하는 자리를 차지하여 항상 사대부를 우대하고 영접하며 인물을 평가하고 고하를 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현우(賢愚)를 제대로 가려 뽑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자급을 정해진 순서대로 올리는 규정을 만들어 지나친 경쟁을 엄금하고 있으니, 이것은 귀머거리로 하여금 소리를 구분하게 하고 장님으로 하여금 색깔을 가려내게 하는 격입니다. 파직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경의 말과 같으나 왕자(王者)가 법을 세워 헌장(憲章)을 만세에 드리우는데, 만약 경의 뒤를 잇는 자가 모두 경과 같다면 가능하지만 경과 같지 않다면 불가할 것이다.”하였다.
여름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공이 선부(選部)에 있으면서 인물을 주의(注擬)함이 한결같이 지공무사(至公無私)에서 나와 지나친 경쟁을 물리치고 요행을 억제하니, 선발된 자가 모두 한 시대의 명사들이었다.
조신(朝臣) 중에 혹시 자제를 위하여 벼슬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심하게 거절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집안 식구를 천거할 경우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하지 않는다.[內擧不廢親]’ 하였으니, 자제가 현능하다면 말한 사람도 잘못이 아니고 그를 쓴 사람도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부귀한 집 자제라 하여 조금이라도 형적을 남긴다면 사람을 임용하는 대체를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하고, 이에 그 자제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따라 쓰고 버리니, 사람들이 그 도량을 깊이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혜 때문에 오랜 친분이 있는 사람을 봐주는 일을 하지 않아 문 앞이 호젓하고 뇌물과 청탁이 이르지 않으니, 공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병술년(1466, 세조 12)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다.
공은 ‘전조(銓曹)는 정사의 권병(權柄)이 있는 자리인 만큼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으면서 뭇사람의 비방을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여겨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인재 선발을 담당하는 중임은 경이 아니면 잘될 수 없으니, 거절하지 말라.” 하였다.
정해년(1467)에 중추부사로 옮겼다. 여름에 역신(逆臣) 이시애(李施愛)가 동북면에서 난리를 선동하여 절도사, 관찰사, 수령을 살해하고 길주(吉州)를 점거하여 반기를 들었으며, 또 조정에 있는 대신을 모해하려고 하였다. 유언비어가 상에게까지 들렸는데, 공의 이름도 그 안에 있었다.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이에 대한 처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을 묻고 논의하였다. 고발을 당한 장상(將相)은 모두 사제(私弟)로 물러가 죄를 기다리는데, 공만은 알지 못하고 규례에 따라 들어갔다. 중관(中官)이 제지하자 공이 머뭇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니, 상이 웃으며 공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찌 이리 늦게 왔는가.”하고, 명하여 여러 신하와 함께 논의하게 하였으며 그대로 대궐 안에 머물게 하여 달을 넘기고서야 돌려보냈다.
공의 충성은 명백하고 훤히 드러났기 때문에 아무리 위태롭고 혐의쩍은 처지에 있더라도 상에게 신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로부터 항상 유악(帷幄)에 있으면서 계획을 짜고 상을 보좌하여 마침내 원악(元惡)의 목을 베고 한 지방을 안정시켰으니, 공의 계책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무자년(1468) 8월에 상이 병들어 편찮으므로 공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수십 일이 지나 상의 환후가 위독해졌다. 세자가 곁에 모시고 있는데 상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평소에 조종의 훈계, 조례(條例), 규장(規章)과 같은 것을 만들어 너에게 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대략 큰 개요만 들어 말해 주겠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섬기는 것이며, 둘째는 선조의 덕업을 받들어 지키고 효도를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재용(財用)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아무쪼록 깊이 명심하여 나의 과명(寡命)을 무너뜨리지 말라.”하고, 드디어 공에게 명하여 마지막 유명을 세자에게 전달하고 현양(顯揚)하도록 하니, 세자가 부복(俯伏)하여 공경히 받들었다.
상이 다시 공에게 이르기를, “경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알기 때문에 경에게 명하여 나의 어린 자식을 보필하게 하는 것이니, 경은 아무쪼록 내 어린 자식을 잊지 말라. 내 자식 또한 어찌 경을 잊겠는가. 서로 도와 이루기를 바란다.”하였다.
9월 모 갑자일에 상의 병환이 차도가 없자 공을 불러 선위(禪位)의 뜻을 유시하니, 공이 아뢰기를, “이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여 조섭하소서.”하였다. 상이 소리를 두 번 가다듬고 공에게 명하여 대보(大寶)와 곤면(袞冕)을 가져다 세자에게 주도록 하니, 세자가 무릎 꿇고 절하여 받은 다음 나가 정문(正門)으로 거둥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이튿날 상이 승하하였다. 상이 병환으로 편찮을 때부터 선위할 때에 이르기까지 일의 기미가 갑작스럽게 발생하여 정신이 없었는데, 공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주선하고 도운 것이 모두 합당하게 맞았으니, 공의 독실한 충성이 아니면 능히 그러할 수 있었겠는가.
하루는 여러 신하가 모여 대행(大行)의 묘호(廟號)를 논의하는데, 예종이 공에게 명하여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선왕의 공덕은 크고 높아 한두 글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7, 8자의 묘호를 올리고자 한다.”하였다.
겸판예조(兼判禮曹) 박원형(朴元亨)이 2자를 올리는 것으로 논의하니,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누가 이런 논의를 꺼내서 내 뜻을 무너뜨리는가?”하였다. 여러 신하가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공이 아뢰기를, “신이 어지(御旨)를 잘못 받들어 이러한 논의가 있게 되었으니, 신에게 실로 죄가 있습니다.”하니, 상이 위엄을 가라앉혔다.
공이 겸손하고 공손하여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에 앞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도총관(都摠管)이 되고, 남이(南怡)가 병조 판서가 되자 밀계(密啓)를 바쳐 이준은 종친이라 금병(禁兵)을 맡겨서는 안 되고, 남이는 거칠고 사나워 병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상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날로 모두 파직하였는데, 예종이 처음 즉위하자 남이 등이 과연 반역을 도모하여 처형되었고, 이준도 폐출되었다. 책훈(策勳)하여 추충정난익대 공신(推忠定難翼戴功臣)의 철권(鐵券)을 내리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하였다.
기축년(1469, 예종1) 봄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겨울 11월에 예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성종)이 지손(支孫)으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책훈을 정함이 있어 겸지경연사(兼知經筵事)에 제수되고, 신묘년(1471, 성종 2)에 공신 호를 하사받으니, 공 신호는 순성명량경제좌리(純誠明亮經濟佐理)이다.
무술년(1478)에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공은 중년 이후로는 질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형용이 수척하였으므로 대부분 휴가를 고하고 정신을 편안하게 하면서 항상 스스로 겸손히 물러나 높은 벼슬에 뜻이 없는 듯이 하였으니, 그 고풍(高風)과 아량은 더할 수가 없었다. 임인년(1482) 7월에 병이 위독하여 누차 사직을 청하니, 서평군에 봉하였다.
윤8월 을유일(19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다. 부고를 듣고 상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와 시장을 철폐하였으며, 부의로 내리는 것을 정해진 규정보다 더 많이 하였다. 태상시에서 시호를 문정(文靖)으로 정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간결하고 후중하였으며, 지조와 행동이 단정하고 순수하였다. 평소 세운 뜻은 굳건히 옛사람에 스스로 목표를 두어 학문은 조예가 깊고 식견은 고매하였다. 말을 하고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명백하고 정대하여 조그만 허물도 없었다. 관직 생활은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여 정도를 지켰으며 청렴결백함을 유지하였다.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눌 때에는 먼저 자신이 물러나 양보하여 일찍이 남보다 잘난 점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 임하면 확고부동하여 범접할 수가 없었다. 집안 생활은 검약하여 자기 몸을 봉양하는 것을 매우 박하게 하였으니, 귀로는 음악 소리를 듣지 않고 눈으로는 기녀(妓女)를 엿보지 않아 온통 서적뿐인 방의 풍경이 담박하였다.
우리 광릉의 지우(知遇)를 입어 천재일우의 만남을 얻었음에도 총애가 지극할수록 마음은 더욱 조심하고, 지위가 높을수록 뜻은 더욱 낮추었으며,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해서도 특별히 사랑하고 대우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더욱 융성했으면 했지 소홀함은 없었으나 공은 능히 명절(名節)을 갈고 닦아서 처음과 끝을 온전히 보전하였다. 아, 참으로 성대하다.
이해 10월 경인일(25일)에 광주(廣州) 남촌(南村) 영장산(靈長山)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정경부인과 동원이실(同原異室)이다. 부인은 공보다 27년을 앞서 별세하였다. 부인은 증 호조 참판 여계(呂稽)의 딸로, 4남을 낳으니, 사문(士文)은 통훈대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고, 사무(士武)는 통훈대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고, 사신(士信)은 선략장군(宣略將軍) 사맹(司猛)이고, 사개(士介)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이다.
딸은 하나인데, 천안군수(天安郡守) 이영희(李永禧)에게 시집갔다. 서자는 둘이니, 사수(士粹)와 사준(士俊)이다.
강화부사는 첨지 김숭해(金崇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으니 적순 부위(迪順副尉) 원여(元畬)에게 시집갔고, 후취(後娶)는 증 무송군(茂松君) 이전(李恮)의 딸로 1녀를 낳으니 어리다.
주부는 현감 변보(邊保)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승원(承源)이고, 다음은 연원(連源)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사맹은 직장(直長) 이정견(李釘堅)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으니, 모두 어리다. 별좌는 첨지 이유인(李有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모두 어리다. 천안 군수는 3남을 낳으니, 이창인(李昌仁), 이창의(李昌義), 이창례(李昌禮)이다.
딸은 셋이니, 하나는 유학(幼學) 박희(朴僖)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봉사(奉事) 진수윤(陳首允)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검열(檢閱) 안당(安瑭)에게 시집갔다. 원여는 2녀를 낳으니, 어리다. 이창인은 부제학 최경지(崔敬止)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과 딸을 낳으니, 모두어리다. 아, 서평(西平)이 이에서 그쳤으니, 내가 어찌 차마 명(銘)을 짓는단 말인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하늘과 땅이 빼어난 기운 잉태하고 / 乾坤孕秀。
별과 산이 정기를 모아 / 星嶽儲精。
위대한 인물 탄생하니 / 寔生偉人。
오직 서평일세 / 曰維西平。
옥병에 담긴 얼음이야말로 / 玉壺置氷。
공의 바른 성품이요 / 維公之雅。
연성과 바꾼 백옥구슬이 / 白璧連城。
바로 공의 진가로세 / 維公之價。
공은 누구보다 빼어나 / 公挺於人。
위의 있는 봉황이요 상서로운 기린이며 / 威鳳祥麟。
공은 세상에 상서 되어 / 公瑞於世。
경성이요 경운이네 / 景星慶雲。
공은 흉금이 확 트여 / 公廓胷襟。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고 / 光風霽月。
공은 성리를 탐구하여 / 公探性理。
천근을 밟고 월굴을 더듬었지 / 天根月窟。
공은 또한 성군의 지우(知遇)를 입어 / 公又遭遇。
공은 이에 높은 벼슬에 올랐으니 / 公乃顯揚。
높은 벼슬이란 무엇인가 / 顯揚伊何。
금마와 옥당이며 / 金馬玉堂。
지우란 무엇을 말하는가 / 遭逢伊何。
인각에 오르고 운대에 오른 것이라네 / 麟閣雲臺。
공은 이에 시행하고 베풀어 / 公乃設施。
공은 그 재주를 펼쳤으니 / 公展厥才。
충성을 다하고 부지런하며 / 曰忠曰勤。
공을 힘쓰고 덕을 힘썼다네 / 懋功懋德。
어찌하여 하늘은 공을 남겨 두지 않아 / 何天不憖。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는가 / 瘁我邦國。
공은 대려의 맹서 있어 / 公盟帶礪。
공은 죽었어도 죽지 않은 것이요 / 公亡不亡。
공은 훌륭한 자손이 있어 / 公有子孫。
번성하고 창대하리로다 / 俾熾俾昌。
울창한 저 광주의 언덕에 / 有欝廣陵。
가지런한 무덤이 있으니 / 有截玄扃。
저 높이 솟은 비석이여 / 有崇者碑。
그 명성 중도에 맞아 성대하리로다 / 有渢厥聲。
성화(成化) 19년 4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
[주01] 세남 비서(世南秘書) : 세남은 당 태종(唐太宗) 때 사람 우세남(虞世南)을 가리키고, 비서는 정부에 비장(秘藏)한 서적(書籍)을 말한다. 당 태종이 출행할 때에 유사가 서적의 부본(副本)을 싣고 따라갈 것을 청하자 태종이 “그럴 필요 없다. 우세남이 여기 있으니, 그는 걸어 다니는 비서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隋唐嘉話 卷中》
[주02] 회간왕(懷簡王) : 세조의 첫째 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하고 2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후에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덕종(德宗)으로 추숭(追崇)하였다. 회간은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국역 연려실기술 1 권5 세조조 고사 본말 덕종고사》
[주03] 무송군(茂松君) 이전(李恮) :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자이다.
[주04] 옥병에 …… 성품이요 : ‘옥병에 담긴 얼음’은 고결하고 바른 성품의 소유자를 비유한다. 남조(南朝) 시대 송(宋)나라 포조(鮑照)의 시에 “곧은 절조는 붉은 거문고 줄과 같고, 맑은 성품은 옥병 속의 얼음 같네.[直如朱絲繩 淸如玉壺氷]”라고 하였다. 《鮑參軍集 卷3 代白頭吟》
[주05] 연성(連城)과 …… 진가로세 : ‘연성과 바꾼 백옥구슬’은 값이 귀한 보물을 뜻한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초(楚)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얻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15개의 성(城)과 맞바꾸자는 제의를 하자 인상여(藺相如)가 자청하여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화씨벽을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온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주06] 천근(天根)을 …… 더듬었지 : 《국역 성호사설》 11 권29 〈천근ㆍ월굴(月窟)〉에 “월굴은 음의 뿌리이니 음의 뿌리는 양이고, 천근은 양의 뿌리이니 양의 뿌리는 음이다.” 하였고, 또 “사람은 양에 속하고 물(物)은 음에 속하며, 양은 하늘을 맡고 음은 달을 맡았으니, 사람을 알려면 하늘을 알아야 하고, 물을 알려면 달을 알아야 한다.
하늘을 아는 것도 그 뿌리로부터 추구해야 하고, 달을 아는 것도 그 굴(窟)로부터 추구해야 하니, 그러므로 천근을 밟아 사람을 알고, 월굴을 더듬어 물을 안다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소옹(邵雍)의 〈관물음(觀物吟)〉에 나온다.
[주07] 대려(帶礪)의 맹서 : 대려는 산하대려(山河帶礪)의 준말로 태산(泰山)이 닳아 숫돌이 되고 황하(黃河)가 말라 띠가 된다는 뜻인데, 한 고조가 공신(功臣)들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면서 맹세한 말에 “황하가 말라 띠만큼 좁아지고, 태산이 닳아 숫돌만큼 작아지도록 나라를 길이 보존하여 먼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자.[使黃河如帶 太山如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
국역 : 임정기 (역) | 2009
-------------------------------------------------------------------------------------------------------------------------------------
[原文]
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西平君。贈諡文靖公韓公神道碑銘。並序
嗚呼。居正尙忍銘公之碑乎。居正年十五。遊學宮。公弟於我三歲。年十二。頭角嶄然。讀書通大義。亦來赴學。因與之托交。童稚情親。非面也。心也。年雖長。交道不衰。居正僥倖先公登第。選入集賢殿。越四年。公擢第。又忝僚友。同居侍從。出入聯裾者十有餘年。交誼益篤。私竊謂生我者親。知我者公。公今已矣。嗚呼痛哉。公之諸孤。泣請居正曰。知先君莫如先生。較德不朽。亦惟先生是望。居正泫然流涕。可忍銘諸。謹按。公姓韓。諱繼禧。字子順。韓本西原大族。遠祖諱蘭。三韓功臣。世濟其美。有諱曰渥。佐高麗忠肅王。位冢宰。諡思肅。生淸城君諱公義。諡平簡。生重大匡右文館大提學諱脩。文章道德。師範一時。諡文敬。生右政丞諱尙敬。諡文簡。生咸吉道觀察使諱惠。是公皇考。壽不滿德。種德遺後。皇妣貞敬夫人成氏。亦昌寧著姓。判中樞達生之女。以永樂癸卯九月乙巳。生公。公生而穎異。性又端重。不妄笑語。動止從容中禮。屹若成人。稍長知讀書。寢食忘疲。學日就。正統辛酉。中進士科。入胄監。以平日所得所疑者。質之賢師友。硏精覃思。欲究底蘊。不得不止。由是。所見益高。所得益精。大爲儕輩所推。丁卯。擢第。補承文院正字。俄選集賢殿正字。轉至副修撰,知製敎。常兼經筵官。再轉至副校理。時世宗。留意典籍。建藏書閣。購求中國四方諸書。充溢棟宇。公居常披閱。無書不讀。博覽廣記。磊落載腹。人或比之世南祕書。平時公暇。朋僚盍簪。高談異論。英藻遆發。公獨端坐正色。手執一卷。目注心想。不左右酬答。一座嚴憚。非中有所主。心不馳於外者。能然乎。世祖在龍潛。見公深器重之。乙亥。登寶位。眷注殊異。懷簡王在東邸。上命公輔導。授世子右文學。丙子夏。陞左弼善。階中訓。冬。拜司憲執義。丁丑春。遷藝文館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秋移通訓。世子右輔德。館職如舊。及睿宗繼貳極。上又命公。獨於內殿侍講。裨補弘多。戊寅正月。加通政。左輔德。二月。擢兵曹知事。俄陞參議。九月。丁內艱。公早失先君。事大夫人篤孝。又能立揚。以悅其心。大夫人。因公貴封爵。又屢被內恩。一族榮之。及卒。哀毀盡禮。庚辰。起復。爲承政院右承旨。辭不獲。辛巳春。轉至左。秋陞嘉善。工曹參判。尋移中樞院副使。壬午夏。轉吏曹參判,世子右副賓客。一日。上違豫。命公入侍。睿宗年幼。凡屬後事。一委於公。雖宗戚近侍。亦莫得聞。公親調藥餌。聖體平善。寵賚稠重。癸未。授仁順府尹。上以公學問精邃。勤謹奉公。凡經籍典章。裒集纂述。委任責成。公日愼一日。中罹疾恙。濱死者數。上甚軫慮。手製祈文禱之。病間。召見便殿。謂公曰。汝憐我心。我憐汝色。我嘗病。卿嘗救之。卿今病。我亦憂之。其憂之也深。故至不欲聞卿姓名。不圖今日得見卿面。勞慰甚至。其得聖眷如此。乙酉。擢吏曹判書。陞資憲。公啓曰。以臣不才。待罪銓衡。常開閤延訪士大夫。品題人物。尙恐不能甄拔賢愚。况今設循資之格。嚴奔競之禁。是使聾瞽辨聲色。乞罷之。上曰。誠如卿言。然王者立法。垂憲萬世。使繼卿者皆卿。則可。非卿不可。夏加正憲。公之在選部。注擬人物。一出至公。黜奔競。抑僥倖。其所甄拔。皆一時名士。朝臣或有爲子弟求官者。公不甚拒之曰。古人云。內擧不廢親。子弟尙賢。則言之者非過。而用之者非私。苟以謂膏粱子弟。而稍存形跡。非知用人之大體者也。於是隨其子弟之賢否。而用舍之。人服其度量。然不以私恩貸親舊。門庭蕭然。關節不到。物論多之。丙戌。加崇政。公以銓曹。政柄所在。不宜久竊招衆謗。屢乞辭。上曰。掌選重任。非卿不諧。其勿固辭。丁亥。移中樞府事。夏。逆臣李施愛。煽亂東北。殺節度使,觀察使,守令。據吉州叛。又欲謀害在庭大臣。飛語上聞。公名亦在其中。上召引羣臣。咨議處置。被告將相。皆就私第待罪。公獨不知。隨例而入。中官止之。公逡巡不敢進。上笑謂公曰。卿來何後耶。命與羣臣同議。仍留禁中。逾月遣還。公之忠誠。明白素著。故雖在危嫌之地。見信於上如此。自是常居帷幄。謀議贊襄。卒之元惡授首。一方寧靖。公之籌畫。與有多焉。戊子八月。上弗豫。召公入侍。越數十日。上疾大漸。世子侍側。上謂世子曰。平日。欲作如祖訓條章者授汝。今旣不能。略擧大槩。一曰。敬天事神。二曰。奉先思孝。三曰。節用愛民。汝其體念。毋壞我寡命。遂命公導揚末命于世子。俯伏祗承。上又謂公曰。知卿忠赤。命卿輔幼子。卿其不忘幼子。幼子亦豈忘卿。庶幾相濟。九月某甲。上疾彌留。召公諭以內禪之意。公曰。此大事。勿煩聖慮。以靜調攝。上厲聲者再。命公取大寶衮冕授世子。世子跪拜受。出御正門。受百官賀。翌日。上昇遐。自上違豫。至于內禪。事機蒼黃。公在宥密。周旋左右。咸中其宜。非公篤棐之忠。能然乎。一日。羣臣會議大行廟號。睿宗。命公諭羣臣曰。先王功德隆高。非一二字可旣。欲上七八字。兼判禮曹朴元亨。議加二字。上怒曰。誰立此議。沮敗我意。羣臣莫敢出言。公曰。臣奉旨不稱。致有此議。臣實有罪。上霽威。公之謙恭自損。類如此。先是。龜城君浚爲都揔管。南怡爲兵曹判書。密啓浚宗室不宜典禁兵。南怡麁悍。不可授兵柄。上嘉納。卽日皆罷。睿宗初卽位。怡等。果謀不軌。伏辜。浚亦廢。策勳。賜推忠定難翼戴功臣鐵券。封西平君。己丑春。加崇祿。冬十一月。睿宗上賓。今上入繼大統。有定策勳。兼知經筵事。辛卯。賜功臣號。曰純誠明亮經濟佐理。戊戌。拜議政府左贊成。公中年以後。疾病沉綿。形容消瘦。多時告謁。怡養精神。常自退挹。若無意於名宦者。其高風雅量。不可尙已。壬寅七月。病劇。累辭。封西平君。閏八月乙酉。卒于正寢。訃聞。上震悼。輟朝市。賻贈有加。太常易名文靖。公資性簡重。操履端純。平生立志。毅然以古人自期。學問精詣。識見高邁。出乎辭氣。發於議論者。明白正大。無纖毫瑕纇。居官履事。奉公守正。淸白自持。與人語。先自退讓。未嘗表襮崖異。及臨决大事。確不可犯。居家儉約。自奉甚薄。耳不聽絲竹。目不睨粉黛。圖書一室。淡如也。知遇我光陵。千載奇逢。寵極而心愈小。位高而志愈卑。列聖相承。眷遇之勤。有隆無替。公能砥礪名節。保全終始。嗚呼盛哉。是年十月庚寅。窆于廣州南村靈長山東向之原。與其貞敬夫人。同原異室。夫人。先公二十七年卒。夫人。贈戶曹參判稽之女。生四男。曰士文。通訓。江華府使。曰士武。通訓。軍器主簿。曰士信。宣略司猛。曰士介。朝奉。尙衣院別坐。女一。適天安郡守李永禧。庶子二。曰士粹。曰士俊。江華娶僉知金崇海之女。生一女。適迪順副尉元畬。後娶贈茂松君恮之女。生一女。幼。主簿娶縣監邊保之女。生三男一女。男長曰承源。次曰連源。餘皆幼。司猛娶直長李釘堅之女。生三男。皆幼。別坐娶僉知李有仁之女。生二男。皆幼。天安生三男。曰昌仁。曰昌義。曰昌禮。女三人。一適幼學朴僖。一適奉事陳首允。一適檢閱安瑭。元畬生二女。幼。昌仁娶副提學崔敬止之女。生男女。皆幼。嗚呼。西平止於斯。居正尙忍銘諸。銘曰。
乾坤孕秀。星嶽儲精。寔生偉人。曰維西平。玉壺置氷。維公之雅。白璧連城。維公之價。公挺於人。威鳳祥麟。公瑞於世。景星慶雲。公廓胷襟。光風霽月。公探性理。天根月窟。公又遭遇。公乃顯揚。顯揚伊何。金馬玉堂。遭逢伊何。麟閣雲臺。公乃設施。公展厥才。曰忠曰勤。懋功懋德。何天不憖。瘁我邦國。公盟帶礪。公亡不亡。公有子孫。俾熾俾昌。有欝廣陵。有截玄扃。有崇者碑。有渢厥聲。
成化十九年四月 日立」
사가집 > 四佳文集補遺一 / 碑誌類
'■ 보학 > 신도비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복 정경세 신도비명 병서 (0) | 2018.03.13 |
---|---|
김우옹 신도비명 병서 - 이현일 찬 (0) | 2017.12.18 |
고경명 신도비명. 시장(高敬命 神道碑銘. 諡狀) (0) | 2016.04.26 |
영의정 하연 신도비명(領議政河演神道碑銘) (0) | 2016.03.02 |
서문유 신도비명(徐文裕神道碑銘) (0) | 2015.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