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하연『河演, 1376년(태조 9) ~ 1453년(단종 1)』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422
'영의정시문효경재하선생신도비(領議政謚文孝敬齋河先生神道碑)
좌의정 의령 남지 찬(左議政宜寧南智 撰)
비서원승 김교덕(秘書院丞 金敎悳)이 서병전(書倂篆)
우러러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세종대왕께서 정치에 정신을 가다듬고 더욱이 모든 옥사(獄事)에 치중하여 조정 신하 중에 크게 쓸만한 자를 마음속에 골라 두고 반드시 지방장관을 삼아 늘 시험해 보았다.
영남 경상도는 옛 신라의 강토로 동쪽에 바다를 끼고 있다. 바다의 섬이 남으로 일본에 닿고 서북으로는 전라도에 접속되며, 빙돌아 관동 강원도에 이르러 지방이 크다. 한 감사 밑에 명령을 듣는 고을이 대소를 합해 칠십 여 고을이 되어 정치하기 어렵다고 호가 났다.
을사(1425년)에 대사헌 하공(河公)을 임명하여 부임하자 정치가 현명하고 성적이 좋았다. 판결하는 일이면 다 적당하였는데 하루는 묵은 문서를 열람하다가 크고 작고 간에 의심스러워 밀린 일이 한 상자나 됐다.
조정 관료들 중에 재간이 있어 판결하는데 참견할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의심스런 것을 판결하는 데는 공(公)이 처리하고도 넉넉히 남는 바이라 특히 겸손하여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한 가지 일이라도 혹은 잘못되어 감사의 직책을 옳게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영리치 못한 내가 아쉬운 대로 막하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알만한 일은 내가 하고 물어야 될 일은 공에게 품신하니 공이 또한 이의하지 않고 판단력이 있다고 칭찬하며, 나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사귐을 허여하니 비록 공은 나를 잘못 알았지마는 나는 얻은 것이 컸다.
그 뒤 수 십 년이 지나 을축(1445년)에 공이 덕망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정묘(1447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기사(1449년)에 나도 외람되게 의정 당상에 올라가게 되니 공이 나에게 이르기를 <수령관(首領官)인 늙은 감사(監司)가 만일에 미끄러졌으면 말이 못될것이라>하니 이것은 영남 막부에 있으면서 서로 좋게 지내다가 이때에 와 황각(黃閣)에 발길을 나란히 하였다는 것이다. 공(公)이 나에게 희롱하면서 기쁜 마음을 표시한 것으로 알겠다.
슬픈 일이다. 공(公)이 벌써 돌아가고, 나 또한 바람병으로 말을 잘 못사는데 공(公)의 아들 우명(友明)이 나에게 신도비문(神道碑文) 요청하니 문장은 내가 능하지 못하다.
대개 글이라 하여도 그 말을 다 하기는 어렵고, 말을 한다 해도 그 뜻을 다 할 수 없는데 더구나 문장도 능하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나로서 병이 발작할 때면 하던 말도 혹은 잊어버리니 어찌 공(公)의 묘지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공에게 알음을 받아 공의 덕업을 사모하고 공의 훈계곌 지켜서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한두 가지 잊지 않은 일이 있기에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여 쓰기로 한다. 삼가 살펴보면, 공의 휘는 연(演)이요,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원대 조상으로 복사공(僕射公)이 있으나 휘가 전해 오지 않았고, 보첩 세계에 휘 진(珍)이 있으니 벼슬이 사직(司直)이다. 그 뒤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휘 즙(楫)에 이르러 진천(晉川) 부원군(府院君)을 봉하고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며, 원정공이 휘 윤원(允源)을 낳았으니 진산부원군을 봉하고 호는 고헌(苦軒)이다.
고헌공은 휘 자종(自宗)을 낳아서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의정에 증직하였고 호는 목옹(木翁)이며 홍무구년(洪武九年) 병진(고료우왕2년,1376년)에 공(公)을 진주(晉州) 이구산( 丘山) 밑에서 낳았다.
자라서 정포은(鄭圃隱) 선생에게 수학하여 약관(弱冠) 시절에 벌써 사람들의 명망을 받았다. 병자년(1376년)에 생원진사(生員進士)과에 다 합격하고, 또 병과(丙科) 문과(文科)에 제사등(第四等)르로 급제하여 청환(淸宦)을 차례로 지내 한림(翰林)으로 부터 대각(坮閣)에 들어갔다.
태종대왕 정유(1417년)에 홀로 바른 말을 올려 법을 밝혔다고 표창하여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승급시켰고, 세종대왕이 선위를 받자 지신사(知申事)에 승진 하였다. 조심하고 공경으로써 두 임금에게 융숭한 대우를 받고 쓰이게 되었다.
춘방(春坊)에 문학, 예부(禮部)에 참판 판서, 사헌부(司憲府)에 대사헌, 예문관(禮文館)에 제학 대제학 정부(政府)에 참찬, 좌찬성은 다 일대의 좋은 벼슬이다. 지방관으로는 군수가 두 번, 감사가 네 번인데 영남인즉 사무가 번잡한 곳이므로 명찰한 관계로 감사를 시킨 것이요,
관서(關西)인즉 국경의 중요한 지대이므로 의뢰하기 위하여 도진무(都鎭撫)를 주어 삼도(三道)를 겸해 영솔하여 국내를 편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데 문무(文武) 겸재를 등용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이력(履歷)중에 큰 일이다.
중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중국에 가서 금(金), 은(銀)으로 조공(朝貢) 바치는 겻을 면해주기를 청하고,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대사헌(大司憲)으로써 구담(瞿담)이 임금과 부모를 배반하였으니 절에 시주하는 법을 혁파하여 백성에게 후하게 하기를 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얻었다.
천안(天安)에 귀양을 간일은 말한 자의 잘못이요 공의 과실이 아니지만은 공은 자신의 과실인양 하고 아무런 기미의 빛도 없었다. 임금께서 그 충성과 신의를 알고 일년이 못되어 불러 왔으며, 귀양살이로 있을 때도 넉넉하게 보살펴 주셨으니 특별한 은혜이다.
공(公)이 어렸을 적부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한번도 실수가 없었고, 장성한 뒤에 조정에 벼슬하여 경재상(卿宰相)이 되었지만은 조석으로 효성을 다하여 조그마한 일도 자식, 조카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구경당(具慶堂)을 지어 부모를 모시고 명절이나 생일에는 형제가 차례로 헌수(獻壽)하니 사대부가 부러워하여 시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기었다.
상주 (喪主)가 되어서 백발에 상옷을 입고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상이 끝나나 구경당(具慶堂) 이름을 고치어 부모를 길이 생각하는 뜻으로 영모당(永慕堂)이라 하고 장구(杖구)와 도서(圖書)를 부모가 계실 때와 꼭 같이 해 두었다.
자제(子第)들이 영모당(永慕堂)에 띠로 덮은 것을 기와로 갈자고 청함을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선인이 거처하시던 집이라 고칠 수도 없으며 또 자손들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경오(1450년)에 문종대왕(文宗大王)이 즉위하자 대자암(大滋庵)을 중수하려 할 때 공(公)이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니 공이(公) 사부(篩傅)로 있을 적부터 문종께서 공(公)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중지하였다.
조금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하여 노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신미(1451년)에 비로소 치사(致仕)함을 허락하였다. 금상(今上) 원년 계유(단종 원년, 1453년) 팔월 십오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여 그해 시월에 인천(仁天) 소래산(蘇來山) 자좌(子坐)에 장사지내고 유언으로 불사(佛事)를 하지 않았다.
태상사(太常寺)에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인자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여" 문효공(文孝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사부(師傅)였던 옛 은의로써 명하여 문종(文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아! 장하다! 공(公)이 늙고 덕있는 국가 원로(元老)로써 어진 임금을 만나 묘당 정략을 경륜(經綸)하고 시대에 적당한 일을 논주(論奏)한 것은 국사(國史)에 기재하고 여론이 칭송하니 덧붙여 말할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미천한 나로서 나라 은혜를 입어 지중한 고탁(顧託) 받고서도 백 분의 일도 다하지 못하였다.
공과 같은 이가 있으면 반드시 퇴폐한 풍속을 진정하여 국가를 태산 반석 같이 편케 할 것이고, 이와 같이 졸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의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일세에 뛰어나 지은 것은 반드시 자필(自筆)로 쓰니 한 조각 편지를 얻은 자는 소중히 하기를 아름되는 구슬같이 하였다.
지난 병인(1446년)에 내가 소헌성후(昭憲聖后)의 수능관(守陵官)이 되었는데 공이 욕되게 시(時)를 지어주니 그 때 제공(諸公)들이 화답(和答)하여 축(軸)이 이뤄졌다. 지금 상자 안에 있어 대대로 전하며 보배로 삼을 것이니 공의 비문(碑文)을 지으려 함에 더욱 감개(感慨)한 바가 크다.
공의 아내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본관이 농서(농西)이고 개성부윤(開城府尹) 존성(存性)의 따님이다. 아들 셋 딸 둘을 낳으셨는데 맏이는 효명(孝明)이요 벼슬이 부정(副正)이며, 둘째는 제명(悌明)이요 벼슬이 좌랑(左郞)이며 막내는 우명(友明)이니 즉 이 비문(碑文)을 청하러 온 사람이다.
이도 지극한 효성이 있어 능히 공의 옛 명성을 이어 받았으며 맏딸은 문화(文化)사람 호군(護軍) 유경생(柳京生)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안동(安東)사람 감찰(監察) 김맹렴(金孟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증손자 누구누구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경태 사년 계유(1453년), 좌의정, 의령 남지(南智) 지음.
후손 기범(箕範) 삼가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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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緬惟我世宗大王勵精治道。尤致詳于庶獄庶愼。凡廷僚之可大用者。旣簡在心。必試之方岳。嶺。新羅舊疆。東邊海。海之島南極于倭。西北接兩湖。迤至于關。地踔遠。環一節聽治大小七十有餘邑。號難治。歲乙巳。命大司憲河公。旣之任。政明修擧。治成績煕。有決輒當。一日。閱久牒得細大疑滯凡一笥。以狀請于朝。擇庶僚之有才幹可參決決疑。公所恢恢爾。特謙邦不自專。恐一事或誤。致曠分憂也。余不佞承乏佐幕。幕禮畢。可辨者專。可質者覆。公亦不異焉。遂猥推詡器局。賜交忘年。雖公之誤知余。而余之得幸於嶺大矣。後數十年乙丑。右揆缺。公以宿德拜右揆。丁卯。陞左。己巳。余亦濫躋政府。公謂余曰。首領官老監司。萬一蹉跌。不可說也。蓋用嶺幕相得。至是而幷武黃閣。公之戲余而寓其喜。可知也。嗚呼。公旣歿。余又崇風瘖。殆不能言。公之胤子友明請余以幽竁之文。文又余不能。夫書者未必盡其言。言者未心盡其意。顧兹文不能言不能。疾病之來。又或忘其言。何能誌公。第余受知於公。慕公德業。佩公良箴。藏之在心。猶有一二事不忘。義不敢辭。謹按公諱演。字淵亮。號敬齋。晉州人。遠祖有僕射公。諱不傳。自譜系來。有諱珍。官司直。歷世簪紳。至諱楫。封晉川府院君。諡元正公。元正生諱允源。封晉山府院君。號苦軒。苦軒生諱自宗。知淸風郡事。贈左議政。號木翁。以洪武九年丙辰。生公于晉之尼丘山下。及長。受學於鄭圃隱。弱冠。已負士林望。丙子。中生進。又登丙科文科第四人歷敭淸要。自翰苑入臺閣。太宗大王丁酉。褒獨奏揚憲。擢拜同副代言。逮世宗受禪。陞知申事。小心莊敬。以誠力受知兩上。際遇交隆。遂秉用焉春坊之文學。禮部之參判,判書。憲府之大司憲。藝館之提學,大提學。政府之參贊,左贊成。皆一代極選。前後在外。再膺郡牧。四受藩鉞。若嶺南劇務。以綜明擧。關西重地。以倚卑。授都鎭撫之命。兼領三道。內綏外禦。用文武才略。此皆履歷之大也。間嘗以禮參赴京。請免金銀貢。竣還。以大憲。論瞿曇棄君父。罷舍施以厚民。得允。至若天安之謫。言者過言。非公過也。公自過。無幾微色。上察公忠諒。不一年召還。在謫亦優恤。蓋異恩數也。公事親孝。自幼未嘗有子弟之過。長而立身王朝。致位卿宰。晨昏惟誠雖小事未嘗使兒姪。作具慶堂。佳節晬辰。晜弟迭次獻壽。搢紳艶稱。歌詠以志之。一世榮之。及丁憂。衰白帶絰。哀毀踰禮。服闋。改具慶爲永慕。杖屨圖書。一如親在時。不許子弟以瓦代茅茨曰。先人舊居不可改。且使子孫法先人儉德也。庚午。文宗卽阼。欲修大慈庵。公固執不可。上自公爲師傅時雅敬公。遂不果。俄陞領議政。以老疾乞退。辛未。始許致仕。今上元年癸酉八月十五日。考終于正寢。十月日。葬于仁川蘇萊山甲坐。遺命不作佛事。太常攷行。勤學好問曰文。慈惠愛親曰孝。遂賜諡文孝公。論師傅舊恩命配文宗廟。嗚呼。公以耆德元老。遭値聖明。其經綸廟略。論奏時宜。國史載之。輿誦記焉。尙安所贅已。第恨賤臣叨荷國恩。負重顧託。百不能有爲。安得如公者在。必有坐鎭頹俗。措國磐泰。不如是湔劣也已。公文章筆藝。妙絶一時。有作必自書。得片翰者。寶重如拱璧。記昔丙寅余守昭憲聖后陵。公辱以詩。起居同朝諸公亦和之。成軸今在篋。擬以爲傳家寶。今於誌公之文。尤有所感慨耳。配貞敬夫人李氏。系隴西。開城尹存性女。生三男二女。男長孝明。副正。次悌明某官。季友明卽乞文者也。有至孝。能業公舊聞。女長適文化人護軍柳京生。次適安東人監察金孟廉。孫曾某某。不能盡記。景奉四年月日。宜寧南智撰。<끝>
경재집 > 敬齋先生文集卷之五 / 附錄
남지선생이 찬한 신도비/1944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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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문의 설왕설래(說往說來)
위의 비문은 조선 문종때 좌의정을 역임한 충간공 남지선생이 쓴 비문이다.
이 비문은 문효공선조님께서 돌아가시고 연당공(우명)께서 남지선생께 부탁을드려 쓴 비문인데, 여기에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소개를 하자면 남지선생이 지은 비문은 문효공 선조님이 돌아가시고 처음부터 건립된게 아니고 일제시대인 1940년에 옛 어른들이 문헌기록을 보고 문효공 선조님 묘소밑에 건립한 것인데 세월이 지나 1994년때 쯤 소산서원 건립과 문효공 선조님 묘소를 단장할 시기에 한학을 공부 많이 하신 후손이 말씀하기를 비문을 쓴 시기와 내용을 볼때, 신도비문이 아니고 지석문 또는 묘지명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문중 어른들의 회의를 거쳐 신도비문은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땅에 묻기로 결의를 하고 문학박사(文學博士)이신 이가원(李家源) 박사께 부탁을 드려 신도비명을 지어 소산서원 입구에 신도비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몇년이 지난후 집행부가 바뀌고 문효공파 중앙 종친회의에서 또 주장이 강한 일부 후손들이 남지선생이 지은 신도비의 대해 옛 어른들이 하신일을 그대로 두지 왜 땅에 묻었냐고 강력하게 항의를 하니까. 문효공파 중앙종친회 집행부가 뚜렸한 주간이 없었서 그런지 몰라도 다시 땅속에서 꺼내어 좌랑공 설단앞에 세웠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소산서원 주위에는 문효공선조님의 신도비가 두개나 세워져 있어 운영자가 볼때도 큰 문제로 보인다.
출처 : 신도비명(神道碑銘) ㅣ 진양하씨 사직공파(jinjuh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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