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고경명『高敬命, 1533년(중종 28) ~ 1592년(선조 25)』
유명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증 의정부좌찬성 고선생(휘 경명)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大匡輔國崇祿大夫贈 議政府左贊成 高 先生 諱 敬命 神道碑銘 幷序)
윤근수 찬(尹根壽 撰-윤두수의 동생)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나라가 왜 난을 만나자 참의(參議) 고공(高公)이 그 난에 죽어 큰 절개를 나타내었으나, 십여 년이 지나도록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공의 고자(孤子) 고용후(高用厚)가 나를 찾아와 청하기를, “선인(先人)이 공의 형제(兄弟)와 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국(殉國)한 시종(始終)에 대해서도 공만큼 명확히 아는 분이 없으므로 감히 일언(一言)을 빌어서 인멸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하고, 또 모부인(母夫人)의 명령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아! 공의 사행(事行)을 말하면 절로 눈물이 흘러 설움을 참을 수 없다. 내 비록 글을 못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랴. 왜적이 대거 침범하여 올 적에 공이 광주(光州)의 시골집에 살았었는데,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번번이 패배하여 조령(鳥嶺)의 요새지가 무너졌는데도 호남(湖南)의 순찰사란 자가 왕실(王室)을 보위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조금 뒤에 또 ‘임금께서 의주(義州)로 피난을 떠나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실성(失聲)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였다가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陣)을 파하자 온 도내의 인심이 두려워하며 떨고 있으므로,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뒷일을 잘 하도록 책망하며 진지하고 간절한 말을 많이 하였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은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나주(羅州) 사람 전 부사(府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홍복(興復)을 꾀하여 편지왕복이 있었는데, 공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5월 29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옥과(玉果)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래 군사(軍事)를 익히지 않았지만 개연히 단(壇)에 오르며 노병(老病)을 들어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격문(檄文)을 도내에 발송하니 모집에 응하는 자가 날로 많았다.
6월 11일에 공이 담양에서 출병하였는데, 이때에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와 호남이 더욱 흔들리던 터라, 유독 공에게 기대가 많았다. 공은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하면서 여산(礪山)에 당도하여 손수 격문을 초안하여 여러 도에 차례로 통고하고 관서(關西)로 전달되게 하였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충남 논산의 옛 지명)으로 향하려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으로 넘어드는 바람에 군수(郡守)가 패하여 죽고 적의 세력은 매우 창대하다는 소문이 들리자, 휘하의 군사들은 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려고 하므로 공도 그렇게 여겼다.
7월 3일에 공이 드디어 군사를 진산(珍山-충남 금산지역의 옛 지명)으로 옮기어 금산의 적을 치려고 할 적에 날랜 군사가 많이 모집에 응하여 군사들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9일에 드디어 장병의 부서를 나누어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爃)과 더불어 좌우익(左右翼)이 되었다.
공은 먼저 정예한 기병(騎兵) 수백 명을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을 덮치다가 적에게 눌리어 후퇴하게 되니, 공은 북을 울리고 싸움을 독려하자 군사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서 도리어 적병을 토성(土城)으로 구축하였다.
그래서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워 없애고 또 포를 쏘아 성안을 불사르니 성세가 매우 장하였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에서 공격하며 포위하자, 적은 사상자가 많이 생겨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날은 저물어 가는데 관군은 싸움을 도우려 하지 않고 토성은 몹시 튼튼하여 졸지에 함락시킬 수 없어서 마침내 퇴군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합력하여 싸우기를 약속하므로, 공의 장자(長子) 고종후(高從厚)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군사가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서 적을 곤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밤을 나면 혹시 야경(夜驚)이 있을까 염려됩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네가 부자간의 정의로써 내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책이다.”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을 모의하고 몰래 나와 잠복해 있다가 우리 순라군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인 10일에 공은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전진시켰다.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 진을 치니, 방어사의 진과 서로 바라볼만한 거리였다.
공은 8백여 명의 기병(騎兵)을 보내어 도전하여 미처 어울리기 전에 적이 진을 비우고 나와 먼저 관군에게 침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드디어 광주(光州)ㆍ흥덕(興德)에 육박하여 진을 치자 방어사의 진이 바람에 휩쓸리듯 무너지므로, 공은 혼자서 당해낼 생각을 하여 군사로 하여금 활에 화살을 메워 한껏 잡아당기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어떤 사람이 문득 급히 외치며 말하기를,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하자, 의병이 따라서 무너졌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 타기에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는 날에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우가 공더러 말을 타고 뛰어넘어 가라고 간청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하게 모면하려는 자이겠는가?”하니, 공의 휘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으나 공은 곧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도망갔다.
공의 휘하 선비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제 말을 공에게 주고 도보로 뒤를 따랐다. 공의 종사(從事) 유팽로(柳彭老)는 탄 말이 건장해서 먼저 빠져나가게 되자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하니, 대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하므로, 유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도로 들어가 공을 난병(亂兵)속에서 시종(侍從)하였다.
공이 그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모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나가야 한다.”하니, 유팽로가 말하기를, “제가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길을 찾겠습니까?”하였다. 적의 칼날이 공에게 미쳐 마침내 죽으니,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가로막다가 죽고 안영도 역시 죽었다.
공의 차자(次子) 고인후는 무사를 독려하며 앞줄에 서서 시석(矢石)속을 출입하였는데,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오(部伍)를 정돈하다가 진에서 죽었다. 근방 고을의 인사들은 공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짐을 메고 지고서 자빠지며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죽었다.”고 하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에 진동하였다.
의병이 무너지자 사졸(士卒)들은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차츰 모여들다가 공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울부짖으며 흩어졌다. 그리고 남방 인사들은 공을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서로 조상하며 애도하였다.
공은 백발의 서생(書生)으로 나라가 다난한 때를 당하여 정의(正義)에 의거해 일어나 양호(兩湖)에서 부르짖자, 비록 우부(愚夫)와 한졸(悍卒)로 산중에 도피한 자들도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참여하여 한 달 동안 의병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 발현되어서 남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 봄에 천상(天象)을 우러러보고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된 자가 반드시 불리할 것이다.”하였다.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죽고 삶에 명철하여 의병을 일으키던 그날에 이미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금산의 적을 치게 되자 여서(女婿)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족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죽기로 자처한 것은 대개 평소부터 정하였던 모양이다. 적이 금산을 점거하고 있을 적에 문관 무관으로 병권(兵權)을 쥔 장수들이 기로(岐路)에서 방황하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불구하고 직접 호랑이 굴로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비록 승리를 아뢰고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공이 죽은 뒤로 공의 전사(戰死)한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적이 비록 자주 이겼지만 사상자 또한 반이 넘었고, 군사를 걷어 밤중에 도망하였으니, 나라가 호남을 보유(保有)하여 다음날 회복의 소지가 된 것은 그 공이 공에게 돌아갈 곳이 있게 된 것이다.
참찬(參贊) 성혼(成渾) 공이 행조(行朝)에서 “공의 충렬(忠烈)이 왕실에 큰 공로를 끼쳤다.”고 극구 말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본 것이 있어서이다. 공의 체백(體魄)을 몰래 금산 산중에 묻어 두었는데, 적병이 길을 가로막아 교통이 두절된 터라 바로 수습을 못하였다가 8월에 고자(孤子) 고종후 등이 가서 의병으로 활동하던 승군(僧軍)에게 애걸하여 공의 시체를 찾아내었으니 40여일이 지난 뒤였다.
이에 비로소 염습하였는데, 여러 날의 무더위와 비를 겪었으나 얼굴빛이 산 사람 같아서 보는 자가 이상히 여겼다.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백성들이 탄식하고 슬퍼하며 혹은 좇아와서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대가(大駕)가 의주[龍灣]에 머물던 날에 임금께서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듣고 용안(龍顔)에 희색이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로 임명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위로하였다. 그 교서가운데, “모든 고을을 절제하여 책응(策應)하고 조도(調度)하여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남쪽으로 돌아오는데, 임금께서 면유(面諭)하기를, “돌아가서 고경명ㆍ김천일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바삐 도성을 회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하였는데, 그 작명(爵命)이 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10월 4일 화순현(和順縣) 흑토평(黑土坪)의 산록에 장사지냈는데, 장사지낸 다음날에 풍설(風雪)이 몰아치고 무지개가 무덤 왼편에서 일어나 묘역을 빙 둘러 수십 리를 뻗쳐 광채가 이상하게 하루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충분(忠憤)이 감동하였다고 여겼다.
뒤에 묘소자리가 마땅하지 않아서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 3월 9일에 장성현(長城縣) 오동리(梧桐里) 오좌 자향(午坐子向)의 산록에 이장(移葬)하였다.
공이 순국하였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크게 애도하고 명하여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 관사 세자좌빈객(資憲大夫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으로 추증하였고, 뒤에 또 추가해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하였다.
공이 죽자 순찰사는 전일의 혐의를 가지고 “어두운 밤에 행군하다가 군사가 무너져서 죽었다.”는 장계를 올려 무함하였는데, 그 뒤에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사가 되어 공의 순절한 사실을 포양(襃揚)하면서, “고(高) 아무개는 맨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을 제창하고 몸소 적의 칼날을 맞이하여 적과 혈전을 벌이다 불행하게도 패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죽었다.”하였으니, 이것이 비로소 실상을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 여름에 나라에서 유사(有司)를 시켜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며,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가을에는 문생(門生)인 전 감찰(監察)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광주에 단독 사우(祠宇)를 세울 것을 명하고 포충(褒忠)이란 편액(扁額)을 내림과 동시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이어서 봄ㆍ가을로 제사하기를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였으니, 아! 여기서 군신(君臣) 간의 의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휘(諱)는 경명(敬命)이고,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세계(世系)는 탐라(耽羅)에서 나왔는데, 그의 선세(先世)에 장흥(長興)을 관향(貫鄕)으로 받은 일이 있어 마침내 장흥 고씨(長興高氏)가 되었다.
충좌위 부사직(忠佐衛副司直)으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된 휘 상지(尙志),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된 휘 자검(自儉),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刑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으로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추증된 휘 운(雲)은 바로 공의 고조(高祖), 증조(曾祖) 및 조부(祖父)였다.
고(考)의 휘는 맹영(孟英)으로, 벼슬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는데, 남 평 서씨(南平徐氏)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서걸(徐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년) 11월 3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엄연히 성인(成人)과 같았으므로,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 공이 한번 보고 애중히 여기며 공이 장래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영민하고 특이하여 시서(詩書)에 있어 두어 번 읽으면 바로 외웠으며, 20세 안에 경사(京師)에 유학(遊學)하여 학업이 날로 성취되니, 한 때의 거유(鉅儒)들이 모두 사모하고 사귀어 명망이 대단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20歲) 사마시(司馬試)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진사(進士)에는 1등을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년) 여름에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았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해 전시에서 또 갑과(甲科) 제일로 뽑혔다.
처음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겼으며,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 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임명되고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 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으며, 여름에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체임되었다가 옮겨서 병조좌랑지제교(兵曹佐郞知製敎)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항상 삼자함(三字銜)을 띠었다. 조금 있다가 사가(賜暇)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다.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 봄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고, 여름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헌납으로 천직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전임되었다가, 가을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임명되었으며, 사명을 받들고 관서(關西)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연로에서 지은 시(詩)를 써서 올리라는 특명이 있었다.
겨울에 부교리(副校理)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 봄에 신병으로 전적(典籍)에 체임되었다가, 여름에 수찬에 임명되고, 또 부교리(副校理-從六品)로 승진되었다. 일찍이 명화(名畵) 62폭을 내리어 공에게 시를 지어 써서 올리라고 명하여, 특별히 상을 내려 칭찬하였다.
공은 시를 잘 한다는 소문이 한창 높았으나 명리(名利)에는 담박하여 매양 조회에서 물러나면 책만 보고 날을 보내며, 일찍이 상관들을 찾아가 간청하는 일이 없었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 봄에 순서에 따라 교리(校理-正五品)에 승진되었다가 가을에 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으로 좌천되어 울산군수(蔚山郡守)에 보직되었는데, 부임하지 못하고 파직되어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경전(經傳)을 탐구하고 혹은 산수(山水)에 유람하여 스스로 즐기며 빈척(擯斥) 당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이렇게 19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만력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비로소 다시 기용되어 영암군수(靈岩郡守-從四品)로 임명되었다. 이때에 국가에서 선계(璿系)에 대하여 변무(辨誣)할 일이 생기자, 사신(使臣) 김계휘(金繼輝)공이 공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게 해달라고 주청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正五品)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正五品)을 겸직시켜 북경(北京)으로 떠나게 하였다.
이듬해인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 봄에 다시 서산군수(瑞山郡守)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한림편수(翰林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급사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와서 조서(詔書)를 반포하자, 원접사(遠接使) 이이(李珥)가 공은 나라를 빛낼만한 재주가 있다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추천해서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正三品)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어떤 경박하고 글재주가 좀 있는 자가 공을 대신하여 제가 종사관이 되고 싶어서 언관(言官)에게 사주하여 따지고 나오자, 이공(李公)은 또 공의 재주를 조정에 극력 말하여 그 논쟁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종부시(宗簿寺)를 경유하여 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正三品)에 천직되었다. 이공은 본시 공을 알지 못하였는데 한번 보고 문득 경대(敬待)하여 간격 없이 마음을 통했으며, 그가 중국 사신과 창수(唱酬)할 적에는 공의 시를 가장 많이 빌려 썼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봄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從四品)으로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한산군수(韓山郡守)가 되었다. 겨울에 문한(文翰)을 쓸 일이 있어 공을 예조정랑(禮曹正郞-正五品)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은 사양하고 바로 시골 본집으로 돌아갔다.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 여름에 종부시(宗簿寺)ㆍ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正三品)으로 내리 임명되고, 겨울에 사예(司藝-正四品)로 임명되었으며,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 봄에 임금께서 공 같은 문장을 하관에다 오래 머물러 둘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세 단계를 뛰어 군자감정(軍資監正-正三品)으로 임명하였는데, 때마침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공은 병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보직되었다가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파직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 여름에 내섬시 정(內贍寺正-正三品)에 임명되었다. 대신(大臣)이 탑전(榻前)에서 공의 문장을 추천하여, 승문원 판교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承文院判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正三品)에 임명되었다.
이때 재상들이 모두 공을 애석히 여겨 서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는데, 공은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처럼 하였다.
가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동래부사(東萊府使-從三品)에 임명되었는데, 본부는 바다의 관문이라 왜놈들이 머물러 있으며 화물(貨物)이 유통되고 객상(客商)들이 모여드는 까닭에 명목 없는 세금과 몰수된 재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청렴하고 결백하여 티끌 한 점도 물들지 아니하니 서리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듬해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봄에 광 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을 녹선(錄選)하는데, 공도 뽑혔다.
여름에 파직되어 서울로 들어갔는데 언관(言官)이 좌상(左相) 정철(鄭澈)을 논죄(論罪)하며 어떤 사람이 공을 지목하여 정공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공은 필마(匹馬)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
공은 일찍이 호를 제봉(霽峯)이라 하였고, 또 태헌(苔軒)ㆍ태사(苔槎)라고도 하였다. 공은 풍채와 모습이 점잖고 영특하여 학식과 도량이 넓고 깊으며, 후중하여 위엄이 있고 성실하여 가식이 없었다.
희노(喜怒)를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고, 굴신(屈伸)과 영욕(榮辱)에 있어서도 항시 넉넉하게 처했으며, 일에 임해서도 역시 구차스레 이해를 가리려 들지 아니하고 사람을 대하면 별로 허허 웃는 적이 없어도 마음은 항상 즐겁고 평화로웠다.
평소에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을뿐더러 자질(子姪)들이 혹시 그런 말을 하게 될 때는 공이 문득 준절히 책망하였다. 관(官)에 처해서는 간결하고 평이하게 하며 세세히 살피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아니하므로, 공이 떠나간 뒤에도 백성들은 항상 공을 생각하였다.
본집에 있을 적에는 처자(妻子)가 남에게 전곡(錢穀)을 꾸어대는 지경에 이르러도 공은 태연하여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으며, 우애(友愛)가 매우 돈독하여 선세(先世)에서 물려준 노복(奴僕)과 전토를 모조리 그 아우에게 사양하고 자기는 늙은 종과 황폐한 전토만을 가졌다.
다른 기호(嗜好)는 없고 오직 서사(書史) 수천 권을 수장하여 항시 열람하며 침식(寢食)을 위하여 폐한 적이 없었다.
무릇 삼교(三敎)ㆍ구류1)(九流)의 서적에도 다 정밀히 연구하였거니와 상수(象數)의 학에도 밝았으며, 문장이 훌륭하되 더욱 시에 능하여 조탁(雕琢)을 일삼지 않아도 절로 준일(俊逸)하여 무리에서 뛰어났다. 문집 5권이 있는데, 세상에서 글을 논하는 선비치고 그 시를 외우며 그 이름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러 번 군부(郡府)를 맡아 다스렸지만 집안에 남은 재물이 없어서 자신이 죽던 날에도 향린(鄕隣)의 부조를 힘입어 마침내 상사를 치르게 되었다. 비록 출세의 길이 험난하여 녹(祿)과 위(位)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지만, 당세에서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공을 아는 것은 단지 그 문장과 재조(才藻)의 아름다움에 그칠 따름이고, 그가 권세와 이익에 담박(泊然)하고 마음가짐이 성실하며 청고(淸苦)로 가다듬은 그 절개와 나라를 근심하는 그 진지한 충성에 있어서는 반드시 다 알지 못하였다.
공의 배위(配位)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울산김씨(蔚山金氏)로 홍문관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따님인데,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은 곧 고종후(高從厚)로서,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임피현령(臨陂縣令-從五品)을 지냈으며, 상차(喪次)에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영외(嶺外)에서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正三品)에 추증되었다.
차남은 곧 고인후(高因厚)로서,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從九品)에 임명되었다가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었는데, 예조참의(禮曹參議-正三品)에 추증되었다.
다음은 고준후(高遵厚)로 장가들기 전에 요사(夭死)하였고, 다음은 고순후(高循厚)로서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공이 나라에 몸을 바친 것으로 추은(推恩)하여 특별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正六品)에 임명되었다.
다음은 고유후(高由厚)로서, 공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병이되어 상복(喪服)을 벗고 1년을 지나서 죽었다. 막내는 고용후(高用厚)로서,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진사(進士)에 1등으로 뽑히고 이듬해 병오년(丙午年)에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태인현감(泰仁縣監-從六品)이 되었다.
장녀(長女)는 광주사인(光州士人) 박숙(朴橚)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박충렴(朴忠廉)이고, 계녀(季女)는 영광(靈光)의 선비 노상용(盧尙龍)에게 출가하였는데,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난리에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손자가 여섯인데, 고부립(高傅立)ㆍ고부언(高傅言)은 고종후의 소생이고, 고부림(高傅霖)ㆍ고부천(高傅川)ㆍ고부집(高傅楫)ㆍ고부량(高傅良)은 고인후의 소생이다. 고부천은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부량은 이듬해 병오년(丙午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아! 공의 2남 1녀가 다 난(難)을 당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어떻게 충효ㆍ의열(義烈)이 한 집안에만 모였단 말인가? 비록 그들의 타고난 성품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도 하였겠지만 그 유염(檽染)과 훈성(訓成)에서 얻은 것이 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의 평생을 일괄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전시(殿試)에서 장원으로 뽑혀 영주(瀛洲, 옥당(玉堂)에서 노닐고 동호(東湖), 호당(湖堂)에서 수양을 쌓아 이해(頤頦)를 세우고 문필에 종사하여 훌륭하다는 명성이 대단하였은즉, 한 시대에 진실로 문인으로써 지목할 만하였다.
장(章)을 품고 군(郡)에 보직되어 지방에서 맴돌게 되어서는 가는 곳마다 청렴결백하였으며, 직무를 받들기는 공평과 용서로 하여 서리와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으니, 곧 예전에 일컬었던 순리(循吏)ㆍ양리(良吏)가 바로 이 분이었다.
나라에 병화(兵禍)가 있어 악독한 왜적이 살육을 자행하자 안신(按臣)은 물러나 몸을 움츠리고 무장(武將)은 무너져 달아나는데, 공은 향리에 돌아온 한 사람의 유신(儒臣)으로서 봉강(封疆)이나 성수(城守)의 책임이 있지도 않으면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강한 왜적과 항거하여 약한 힘으로 강한 자를 쳐서 나라에 보답하기로 맹세하였으며,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아서는 몸을 바쳐 부자가 다 같이 순국(殉國)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절사(節死)에 비하여 더욱 열렬하였다.
세상에서 매양 문인(文人)은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그런 자들도 이에 이르러서는 다시 말을 못하게 되었으니, 공이야말로 한 시대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가형(家兄) 의정공(議政公-尹斗壽를 말함)이 공과 더불어 친하게 교유를 맺은 것은 모두 나이 20세 전이었고, 내 나이 또한 적어서 안행(鴈行)으로 그 뒤를 따랐었는데, 그때 공은 풍채가 매우 뛰어나 빙옥(氷玉) 처럼 환히 비쳐서 신선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에 와서 상상하매 꿈결같이 삼삼하여 50년이 오히려 어제와 같다. 나는 젊어서부터 공을 사모하여 하풍(下風)에 따르기를 원하였고, 늙어서도 쏠리는 마음은 시들지 않았는데, 공은 지금 떠나셨고 나는 이승에 남아 있어, 이 비석을 세우는 날에 그 역사(役事)를 보게 되었으니, 이 또한 무슨 운명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고용후가 손수 기록한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그 대략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장원 급제로 순절한 이는 옛날에 문산2)(文山)이 있었는데,
공께서 번갈아 일어나니 정말 엇비슷한 사이일세.
사람들 또한 말이 있어 헛된 과거 아니로세.
문장은 선비 중에 뛰어나고 절의는 삶을 잊었도다.
나라의 위난에 눈물 뿌리며 적은 군사로 강적 대항하느라,
넋을 훼상하며 천분(天分) 다하다가 부자가 나란히 목숨 바쳤도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같이 그 정신이 열렬하여
눈을 차마 감을 수 없어 맹세코 적의 멸망 보려 했다네.
충성을 정표하고 벼슬을 내려 남은 영혼 위로하니,
공이 구원에서 나라 은혜 감읍하리.
공께선 시에 더욱 조예 깊어 수많은 편장 밝게 빛나는데,
사림에서 조용히 재주 드러내매 글 짓는 이들 선두를 미루었네.
문장이랑 충의를 똑같이 전하는데,
옛날에도 드문 것을 공에게서 보겠구려.
묘역의 수목 울창하여 선대를 본받게끔 크게 비호하니,
앞으로의 천년동안 정광이 하늘을 비추리다.
[각주]
주1) 삼교(三敎)ㆍ구류(九流) : 삼교(三敎)는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이고, 구류(九流)는 유가(儒家)ㆍ도가(道歌)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말함.
주2) 문산(文山) : 남송(南宋) 말 승상(丞相)이었던 문천상(文天祥)의 호(號)임. 당시에 신흥(新興) 왕조(王朝)인 원(元)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연속 패하자, 육수부(陸秀夫)ㆍ장세걸(張世傑) 등이 나이 어린 황제를 데리고 바다 가운데의 애산(厓山)에까지 파천하여 항거하다가 마침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문천상은 원군(元軍)에 붙잡혀 있다가 끝까지 충절(忠節)을 지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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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議高公神道碑銘 幷序 - 尹根壽 撰
蓋歲萬曆之壬辰。國有倭難。參議高公以死難著大節。旣十餘年。而神道之文。未有托也。一日公之孤用厚謁余而請曰。先人獲與公兄弟遊。而死事顚末。公所明知。敢徼惠一言。以爲不朽計。且申以母夫人之命。嗟夫語公事行而泫然悲不已也。余雖不文。安敢辭。當倭賊之大擧來犯也。公里居光州之村舍。聞我軍每戰輒北。鳥嶺失險。而湖南之任巡察者。未有捍衛王室之意。公獨與子從厚,因厚謀擧義。旣而又聞乘輿西幸。都城不守。公日夜哭失聲。巡察領勤王兵到錦江。聞京師已陷。倉皇罷陣。一道人心洶懼。公貽書巡察。責以後效。言多剴切而不見省。公慟邦家傾覆。與羅州人前府使金千鎰。共圖興復。竿尺往復。公首 決倡 義計。五月戊子。會于潭陽府。玉果人學諭柳彭老等。推公爲盟主。公非素閑軍旅。而慨然登壇。不以老病爲解。因傳檄道內。應募者日集。六月己亥。公出師潭陽。時三路之師潰於龍仁。兩湖益搖。獨倚公爲重。公自全州整旅北上。次礪山。手草檄文。遞告諸道。以達關西。公將向尼山。聞賊自黃澗踰錦山而郡守敗死。賊勢猖獗。麾下士爭欲還救本道。公亦然之。七月庚申。公遂移兵珍山。將擊錦山之賊。銳士就募者愈衆。軍聲益振。丙寅遂部分將士入錦山。與防禦使郭嶸爲左右翼。公先遣精騎數百。直趨賊巢。爲賊所乘而退。公鳴鼓督戰。士皆殊死戰。還蹙賊兵于土城。焚城外館舍。又以礮延爇城內。聲勢甚壯。賊冒死突出。義軍四面攻圍。賊多死傷不敢出。會日暮。官軍又不肯助戰。土城厚完。不可猝拔。乃退師還陣。是夕防禦使遣人。約以明日合戰。公之長子從厚言于公曰。今日我軍得利。持此勝勢。全軍而返。可相機更出以困賊。與賊對壘野宿。或虞夜驚。公曰爾以父子之情。畏我死乎。吾爲國一死。職耳。是夜賊果謀犯。竊出設伏。爲邏卒所覺。翌日丁卯。公與防禦使進兵。公去賊五里許止陣。與防禦陣相望。公遣八百餘騎。挑戰未合。賊空壁而出。先犯官軍。防禦管下將金成憲策馬先遁。賊薄光州,興德兩陣。防禦陣望風而潰。公爲獨當之計。令士皆持滿以待。人忽急呼曰防禦陣潰矣。義軍因而崩潰。公嘗曰吾則不閑騎馬。不幸戰敗。惟有一死耳。至是左右請騎馬而跳。公曰吾豈苟免者哉。公之麾下扶公上馬。公旋墜馬。馬逸。公之麾下儒生安瑛下馬授公。徒步從之。公之從事柳彭老馬健先出。問其僕曰大將脫乎。曰未也。彭老遽策馬還入。從公於亂兵中。公顧曰吾必不免。爾可馳出。彭老曰吾豈忍棄大將求活。賊鋒遂及。公竟死之。彭老自以身捍蔽公死之。安瑛亦死之。公之次子因厚率礪武士。在前列。出入矢石。及軍潰。下馬整其部伍。在陣死之。近縣士民聞公敗。老少荷擔顚頓曰。吾屬死矣。哭聲震野。軍潰。士卒不知公存亡。稍稍來集。及聞公不幸。皆號泣而散。南中士民識與不識皆相弔痛惜之。公以白首書生。當板蕩之日。仗義而起。爲兩湖倡。雖愚夫悍卒逃匿林藪者。皆聞風爭赴。旬月之間。義旅至數千人。蓋公之義色發於至誠。有可感動故也。公於壬辰春夏。仰觀天象。語一家人曰。今年將星不佳。將必不利。又曰吾今歲有橫厄。然則公固晢於死生。而擧義之日。已決捐軀之計矣。及討錦賊。與女壻朴橚書。托以家累。公之自處蓋素定也。當賊之屯據錦山也。文武握兵之將。逗撓岐路。而獨公不計事之利鈍。親蹈虎穴。與賊血戰。亡身殉國。雖未能奏搗成功。而公歿之後。視公進死攻賊者繼起。故賊雖屢勝。死傷亦過半。捲甲宵遁。則國家之保有湖南。以爲他日恢復之地者。其功有所歸矣。參贊成公渾在行朝。極言公忠烈大有勞於王室。蓋有見于此也。公之體魄。潛瘞錦山山中。賊兵阻絶。不能卽收。八月某甲。遺孤從厚等乞義兵僧取出公屍。凡四十餘日乃始就歛。累經暑雨而神色如生。見者咸異之。奉還故丘。百姓噓唏嗟悼。或至奔走號泣。大駕在龍灣之日。上聞公擧義而來。動容嘉悅。授公工曹參議知製敎無招討使。賜書勞之。書中有節制列邑。策應調度。恢復都城之語。時工曹佐郞梁山璹自行在南還。上面諭曰歸語高敬命,金千鎰。願爾等及時恢復。俾予得見爾等面目有日也。爵命未至。公已沒矣。十月庚寅。葬于和順縣黑土坪之原。葬之翌日。風雪交作。長虹起於墓左。橫跨塋域。竟數十里。光彩異常。逾日不滅。人以爲忠憤所感。後以卜地不詳。某年月日。改葬于某邑某地某坐之原。當公死事之聞也。上震悼。命贈資憲大夫,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公之歿也。巡察因前嗛。至以乘暗行師。軍潰而死。誣公於馳啓中。厥後李廷馣繼爲巡察。褒公死事之狀則曰。高某首擧義兵。倡義勤王。身犯賊鋒。與賊血戰。不幸軍敗。父子俱死者。始得其實云。乙未夏。命有司棹楔門閭。辛丑秋。因門生前監察朴之孝等疏。特命建專祠光州。賜額褒忠。遣官致祭。仍春秋祭祀。世世勿絶。嗚呼。此可以觀君臣矣。公諱敬命。字而順。系出耽羅。其先世賜貫長興。遂爲長興人。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行忠佐衛副司直諱尙志。贈通政大夫工曹參議諱自儉。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行承議郞,刑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諱雲。卽公之高曾祖及祖考也。考諱孟英。官至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而娶南平徐氏成均進士傑之女。以嘉靖癸巳十一月三十日戊辰生公。公自髫年。儼若成人。參贊白公仁傑一見稱重。知公爲遠器。公少穎異。於書讀數遍輒成誦。未冠遊學京師。業日就。一時鉅儒皆慕與交。名譽藹蔚。壬子中進士一等。戊午夏。恭憲王臨泮試士。公居首。賜直赴殿試。是歲殿試又擢甲科第一。初拜成均館典籍。俄移戶曹佐郞。己未春。拜世子侍講院司書。庚申春。遷司諫院正言。夏遞授刑曹佐郞。移拜兵曹佐郞知製敎。自是常帶三字銜。尋賜暇讀書于湖堂。辛酉春。拜司諫院獻納。夏拜弘文館修撰。尋遷獻納。轉司憲府持平。秋授弘文館副修撰。奉使關西。其還也。命寫進沿路所製詩。冬陞副校理。壬戌春。移病。遞授典籍。夏拜修撰。又陞副校理。嘗下名畫六十二幅。命公賦詩寫進。特寵賜以褒之。公以能詩方有聲。而顧於名利泊如。每朝退。劌意竹素以竟日。未嘗造請諸公間。癸亥 春序陞校理。秋左遷典籍。補蔚山郡守。未赴。罷還鄕里。唯探頤墳典。或遊覽山水以自娛。不見其檳斥之容。家食者十九年。萬曆辛巳。始起廢拜靈巖郡守。時國家奏辨璿系之誣。使臣金公繼輝請以公爲書狀官。以成均館直講兼司憲府持平。朝京師。壬午春復 除瑞山郡守。秋翰林編修黃洪憲給事中三敬民來頒詔。遠接使李公珥以公有華國才。尉薦從事官。拜宗簿寺僉正。有浮躁而薄有詞藻者。迫欲代公從事。嗾言官論之。李公又極陳公才於朝。其論遂寢。由宗簿遷司贍寺僉正。李公素不識公。一見便敬重。開心無間。其與華使唱酬。用公詩最多。癸未春。拜漢城府庶尹。尋爲韓山郡守。冬以有文翰事。拜公爲禮曹正郞。公辭不就。徑還鄕家。甲申夏。歷拜宗簿司僕僉正。冬拜司藝。乙酉春。上以公文章不宜沈下僚。遂超三階拜軍資監正。時有不悅者。公辭疾不至。夏補淳昌郡守。戊子坐罷。庚寅拜司贍寺正。大臣於榻前。薦公文章。拜承文院判校,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時宰執咸惜。公議欲推輓。公歛退於時事。默然似不能言者。秋陞通政階。拜東萊府使。府濱海。倭奴之所館留。貨物流聚。客商走集。無名之稅。沒入之貲。未易數計。而公廉白自持。一塵不染。吏民胥悅。辛卯春。錄光國原從功。公亦與焉。夏坐罷入京。言者方論鄭左相澈。或有指公爲鄭公所薦者。公匹馬還鄕。翌年壬辰而倭難作矣。公嘗自號霽峯。又稱苔軒。亦曰苔槎。公風姿英偉。識量宏深。嚴重有威。悃愊無華。喜慍不見於色。其於屈伸榮辱。處之裕如。至其臨事。又不爲苟且擇利害計。對人未嘗詡詡強笑語而中心樂易也。平居不言人短。子姪或語及。公輒鐫責。當官簡潔平易。不以察察爲能。而常有去後之思。及其家居。妻子至稱貸於人。而公晏然不以介懷。友愛甚篤。家故所遺臧獲田畝。悉讓其弟。而自取羸老荒廢者。他無玩好。惟畜書史數千卷。每手一編。卽不以寢食廢。凡三敎九流之書。皆所精究而明於象數。爲文章尤長於詩。不事雕琢而後逸不羣。有集五卷。一世論文之士。無不誦其詞而重其名。屢典郡府。家無偫餘之財。身歿之日。賴鄕隣之助。乃克襄事。雖行藏坎坷。祿位不彰。而爲當世所艶稱。然世之知公者。乃其文章才藻之美。若其恬於勢利。秉心誠實。淸苦自礪之節。憂國惓惓之忠。則未必盡知之也。公配貞夫人蔚山金氏。弘文館副提學百鈞之女。有丈夫子六女子二。長卽從厚。丁丑文科。曾任臨陂縣令。自喪次起兵。誓復父讐。轉戰嶺外。晉州城陷。投江而死。贈承政院都承旨。次卽因厚。己丑文科。授權知成均館學諭。隨公同死於陣。贈禮曹參議。次曰遵厚。未娶而夭。次曰循厚。辛卯進士。以公死事。推恩特授司憲府監察。次曰由厚。因哀致疾。服闋逾年而沒。季卽用厚。擢乙巳進士第一名。女長適光州士人朴橚。季適靈光士人盧尙龍。丁酉之亂。罵賊不屈。伏劍而死。孫男七。傅立,傅言。從厚出。傅霖,傅川,傅楫,傅良。因厚出。傅哲。循厚出。傅川中乙巳進士。噫。公之二子一女皆臨難捐生。是何忠孝義烈之萃於一家也。雖其天稟之過人。而得之擩染訓成者深矣。槪公生平。則妙齡。擢殿元步瀛洲。儲養東湖。樹頤頦操觚翰。俊聲蔚然。則一時固以文人目之。奚及其懷章補郡。低徊外服。所至以潔廉奉職。平恕得吏民心。則卽古所稱循良其人也。國有兵禍。蛇豕荐食。按臣退縮。武將奔潰。而乃以還里之儒臣。非有封疆城守之責。而提孤軍抗勍賊。奮弱批堅。誓以報國。旣不效矣則以身殉之。父子俱焉。比他死節者爲烈。世之日訾薄文人鮮實用者。蓋至此而無復措其說矣。公非一世之全人乎。記家兄議政公與公定交。俱在未冠。余齒又少而得以雁行隨焉。其時公丰采渙發。氷玉輝映。神仙中人也。追而思之。夢想森然。五十年猶浹日也。少而景慕願趨下風。迨老大而嚮往之心不衰。公今已矣。而余乃後死。屬此樹石之日。得相其役。無亦有數存乎其間者耶。噫嘻其悲矣。旣因用厚手錄之狀。敍其略而係之銘。銘曰。
壯元死國。古有文山。惟公代興。寔伯仲間。人亦有云。不愧科名。文冠多士。節則忘生。灑泣國難。孤軍抗勁。毁魄全天。父子駢命。死而不死。其神烈烈。目不可瞑。誓見賊滅。旌忠錫秩。以慰遺魂。公在九京。再拜湛恩。公深於詩。炳琅千篇。掉鞅詞林。作者推先。文苑忠義。合爲一傳。在古鮮覯。於公乃見。新阡鬱然。大庇象賢。有來千年。精光燭天。<끝>
월정집 >月汀先生集卷之六 / 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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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議政府左贊成霽峯高公諡狀
公諱敬命。字而順。系出耽羅。卽高乙那之後也。其先世賜貫長澤。遂爲長興人。九代祖諱福林。檢校軍器監。子諱合。知寧州事。子諱伯顏。左右衛保勝別將。入我朝。子諱臣傅。於太宗大王有潛邸之舊。恩寵殊異。以武班。官至戶曹參議。兼判司僕寺事。卽公之六代祖也。子諱悅。早世不仕。忠佐衛副司直贈通禮院左通禮諱尙志。贈戶曹參議諱自儉。刑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贈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諱雲。卽公之高曾祖及祖考也。考諱孟英。官至司諫院大司諫。贈左議政。娶南平徐氏成均進士傑之女。以嘉靖癸巳十一月三十日戊辰。生公。公自髫年。儼若成人。參贊白公仁傑宰南平縣時。一見知公爲遠器。公少穎異。於書讀數遍。輒成誦。未冠。遊京師業日就。一時鉅儒皆慕與交。名譽藹蔚。壬子司馬俱中。而進士則一等。戊午夏。恭憲王臨泮試士。公居首。賜直赴殿試。是歲殿試。又擢甲科第一。初拜成均館典籍。俄移工曹佐郞。己未春。拜世子侍講院司書。庚申春。遷司諫院正言。夏遞授刑曹佐郞。移拜兵曹佐郞,知製敎。自是常帶三字銜。尋賜暇讀書于湖堂。辛酉春。拜司諫院獻納。夏拜弘文館修撰。尋遷獻納。轉司憲府持平。秋授弘文館副修撰。奉使關西。其還也。命寫進沿路所製詩。冬陞副校理。壬戌春。移病遞授典籍。夏拜修撰。又陞副校理。嘗下名畫六十二幅。命公賦詩寫進。特寵賜以褒之。公以能詩方有聲。而顧於名利泊如。每朝退。劌意竹素以竟日。未嘗造請諸公間。癸亥春。序陞校理。秋左遷典籍。補蔚山郡守未赴。罷還鄕里。惟探賾墳典。或遊覽山水以自娛。不見其擯斥之容。家食者十九年。萬曆辛巳。始起廢拜靈巖郡守。時國家奏辨璿系之誣。使臣金公繼輝請以公爲書狀官。以成均館直講兼司憲府持平。朝京師。壬午春復命。除瑞山郡守。秋翰林編修黃洪憲,給事中王敬民來頒詔。遠接使李栗谷珥以公有華國才。尉薦從事官。拜宗簿寺僉正。有迫欲代公從事者嗾言官論之。李公亦極陳公才於朝。其論遂寢。由宗簿遷司贍寺僉正。李公素不識公。一見便敬重。開心無間。其與華使唱酬。用公詩最多。癸未春。拜漢城府庶尹。尋爲韓山郡守。冬以有文翰事。拜公爲禮曹正郞。公辭不就。徑還鄕家。甲申夏。歷拜宗簿司僕僉正。冬拜司藝。乙酉春。上以公文章不宜沈下僚。超三階拜軍資監正。時有不悅公者。公辭疾不至。夏補淳昌郡守。戊子坐罷。庚寅夏。拜內贍寺正大臣於榻前薦公文章。拜承文院判校,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時宰執咸惜。公議欲推挽。公斂退。於時事默然似不能言者。秋陞通政階。拜東萊府使。府濱海。倭奴之所館留。貨物流聚。客商走集。無名之稅。沒入之貲。未易數計。而公廉白自持。一塵不染。吏民胥悅。辛卯春。錄光國原從功。公亦與焉。夏坐罷入京。言者方論鄭左相澈。或有指公爲鄭公所薦者。公匹馬還鄕。翌年壬辰。而倭亂作矣。于時公里居光州之村舍。聞我軍每戰輒北。鳥嶺失險。而湖南之任巡察者。未有捍衛王室之擧。公獨與子從厚,因厚謀擧義。旣而又聞鑾輿西行。都城不守。公日夜哭失聲。巡察聞京師已陷。蒼黃罷陣。一道人心洶懼。公貽書巡察。責以後效。言多剴切。公慟邦家傾覆。與羅州人前府使金千鎰,光州人前正朴光玉。共圖興復。竿尺往復。公首決唱義計。五月戊子。會于潭陽府。玉果人學諭柳彭老等。推公爲盟主。公非素閑軍旅。而慨然登壇。不以老病爲解。因傳檄道內。應募者雲集。六月己亥。公出師潭陽。時三路之師潰於龍仁。兩湖益搖。獨倚公爲重。公自全州整旅北上。次礪山。手草檄文。遞告諸道。以達關西。檄書所至。雖深山窮谷避亂之人。無不謄書傳看。至有流涕者。公到恩津。將向尼山。聞賊自黃澗踰錦山。而郡守敗死。賊勢猖獗。麾下士爭欲還救本道。公亦然之。七月庚申。公遂移兵珍山。將擊錦山之賊。銳士就募者愈衆。軍聲益振。丙寅。遂部分將士。入錦山。與防禦使郭嶸爲左右翼。公先遣精騎數百。直趨賊巢。爲賊所乘而退。公鳴鼓督戰。士皆殊死戰。還蹙賊兵于土城。焚城外館舍。又以礮延爇城內。聲勢甚壯。賊冒死突出。義軍四面攻圍。賊多死傷不敢出。會日暮。官軍又不肯助戰。土城厚完。不可猝拔。乃退師還陣。是夕。防禦使遣人約以明日合戰。公之長子從厚言于公曰。今日我軍得利。持此勝勢。全軍而返。可相機更出以困賊。與賊對壘野宿。或虞夜驚。公曰。爾以父子之情。畏我死乎。吾爲國一死職耳。是夜。賊果謀犯竊出設伏。爲卒所覺。翌日丁卯。公與防禦使進兵。公去賊五里許止陣。與防禦陣相望。公遣八百餘騎挑戰未合。賊空壁而出。先犯官軍。防禦管下將金聲憲策馬先遁。賊薄光州,興德兩陣。防禦陣望風而潰。公爲獨當之計。令士皆持滿以待。人忽急呼曰。防禦軍潰矣。義軍仍而崩潰。公嘗曰。吾則不閑騎馬。不幸戰敗。惟有一死耳。至是左右請騎馬而跳。公曰。吾豈苟免者哉。公之麾下扶公上馬。公旋墜馬。馬逸。公之麾下儒生安瑛下馬授公。徒步從之。公之從事柳彭老馬健先出。問其僕曰。大將脫乎。曰未也。彭老遽策馬還入。從公於亂兵中。公顧曰。吾必不免。爾可馳出。彭老曰。吾豈忍棄大將求活。賊鋒遂及。公竟死之。彭老自以身扞蔽公而死之。安瑛亦死之。公之次子因厚。率礪武士在前列。出入矢石。及軍潰。下馬整其部伍。在陣死之。近縣士民聞公敗。老少荷擔顚頓曰。吾屬死矣。哭聲振野。軍潰。士卒不知公存亡。稍稍來集。及聞公不幸。皆號泣而散。南中士民識與不識。皆相弔痛惜之。公以白首書生。當板蕩之日。仗義而起。爲兩湖倡。雖愚夫悍卒逃匿林藪者。皆聞風爭赴。旬月之間。義旅至數千人。蓋公之義色。發於至誠。有可感動故也。公於壬辰春夏。仰觀天象。語一家人曰。今年將星不佳。將必不利。然則公固晳於死生。而擧義之月。已決捐軀之計矣。及討錦賊。與女壻朴橚書。托以家累。公之自處蓋素定也。當賊之屯據錦山也。文武握兵之將。逗撓岐路。而獨公不計事之利鈍。親蹈虎穴。與賊血戰。亡身殉國。雖未能奏捷成功。而公歿之後。視公進死攻賊者繼起。故賊雖屢勝。死傷亦過半。捲甲宵遁。則國家之保有湖南。以爲他日恢復之地者。其功有所歸矣。參贊成公渾在行朝。極言公忠烈大有勞於王室。蓋有見於此也。公之體魄。潛瘞錦山山中。八月某甲。遺孤從厚等。乞義兵僧取出公屍。凡四十餘日。乃始就斂。屢經暑雨。而神色如生。見者咸異之。奉還故丘。所過百姓。噓唏嗟悼。或至奔走而號泣。大駕在龍灣之日。上聞公擧義而來。動容嘉悅。授公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賜書勞之。書中有節制列邑恢復都城之語。時工曹佐郞梁山璛自行在南還。上面諭曰。歸語高敬命,金千鎰。願爾等及時恢復。俾予得見爾等面目有日也。爵命未至。公已歿矣。十月庚寅。葬于和順縣黑土坪之原。葬之翌日。風雪交作。長虹起於墓左。橫跨塋域竟數十里。光彩異常。人以爲忠憤所感。後以卜地不祥。己酉年三月庚寅。改葬于長城縣梧桐里午坐子向之原。當公死事之聞也。上震悼。命贈資憲大夫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後加贈議政府左贊成。公之歿也。巡察因前嗛。以乘暗行師。軍潰而死。誣公於馳啓中。厥後李廷馣繼爲巡察。褒公死事之狀。則曰。高某首擧義兵。倡義勤王。身犯賊鋒。與賊血戰。不幸軍敗。父子俱死者。始得其實云。乙未夏。命有司棹楔門閭。辛丑秋。因門生前監察朴之孝等疏。特命建專祀光州。賜額褒忠。遣官致祭。仍春秋祭。世世勿絶。嗚呼。此可以觀君臣矣。歲在甲午之春。上下諭于全羅監司曰。聞高敬命妻子在光州云。卿令其所在官月俸題給。但我國公事。例不施行。此則必着實施行。實異數也。今上反正之初。特遣禮官。賜祭于褒忠祠。其賜祭文。若曰。子紹寶命。思植民倫。睠言忠節。慨不爲臣。緬惟南服。士之冀北。不有敦勸。于何矜式。肆擧愍章。庸酹精魂。尙冀九原。欽我湛恩。于時道內士夫無不聳動而傳誦焉。公嘗自號霽峯。又稱苔軒。公風姿英偉。識量宏深。嚴重有威。悃愊無華。喜慍不見於色。其於屈伸榮辱。處之裕如。至其臨事。又不爲苟且擇利害計。對人。未嘗詡詡強笑語。而中心樂易也。平居不言人短。子姪或語及。公輒鐫責。當官。簡潔平易。不以察察爲能。而常有去後之思。及其家居。妻子至稱貸於人。而公晏然不以介懷。友愛甚篤。家故所遺臧獲田畝。悉讓其弟。而自取羸老荒廢者。他無玩好。惟蓄書史數千卷。每手一編。卽不以寢食廢。凡三敎九流之書。皆所精究而明於象數。爲文章。尤長於詩。不事彫琢而俊逸不群。有集五卷。一世論文之士。無不誦其詞而重其名。屢典郡府。家無峙餘之財。身歿之後。賴鄕隣之助。乃克襄事。雖行藏坎軻。祿位不彰。而爲當世所艶稱。然世之知公者。乃其文章才藻之美。若其恬於勢利。秉心誠實。淸苦自礪之節。憂國惓惓之忠。則未必盡知之也。公配貞敬夫人蔚山金氏。弘文館副提學百鈞之女。丈夫子六。女子二。長卽從厚。丁丑文科。曾任臨陂縣令。自喪次起兵。誓復父讎。轉戰嶺外。晉州城陷。投江而死。贈承政院都承旨。後加贈吏曹參判。次卽因厚。己丑文科。權知成均館學諭。隨公同死於陣。贈禮曹參議。後以子傅川原從功臣一等。推恩加贈領議政。次曰遵厚。未娶而夭。次曰循厚。辛卯進士。以公死事。特授司憲府監察。官至刑曹正郞。次曰由厚。因哀致疾。服闋愈年而歿。季卽用厚。擢乙巳進士第一名。登丙午文科。官爲掌隷院判決事。女長適光州士人朴橚。有一男曰忠廉。中庚戌進士。顯陵參奉。季適靈光士人盧尙龍。丁酉之難。罵賊不屈。伏劍而死。孫男六。傅立,傅言。從厚出。傅立慶基殿參奉。傅霖,傅川,傅楫,傅良。因厚出。傅川乙巳進士。乙卯文科。司憲府掌令。傅楫中癸丑生員。傅良中丙午進士。曾孫男斗一等若干人。噫。公之二子一女。皆臨難捐生。是何忠孝義烈之萃於一家也。雖其天稟之過人。而得之濡染訓成者深矣。槪公生平則妙齡。擢殿元步瀛洲。儲養東湖。樹頤頦操觚翰。俊聲蔚然。則一時固以文人目之矣。及其懷章補郡。低徊外服。所至以潔廉奉職。平恕得吏民心。則卽古所稱循良其人也。國有兵禍。蛇豕荐食。按臣退縮。武將奔潰。而乃以還里之儒臣。非有封疆城守之責。而提孤軍抗勁賊。奮弱批堅。誓以報國。旣不效矣。則以身殉之。父子俱焉。比他死節者爲烈。世之日訾薄文人鮮實用者。蓋至此而無復措其說矣。公非一世之全人乎。公文章節義。卓絶古今。昭揭日星。不但一國之所景仰。實天下之共艶慕。宜有易名之典。以傳示無極。明漢方待罪太史。論載忠臣死義之事。職也。謹摭月汀尹相公所撰神道之文。狀之如右。
백주집 > 白洲集卷之十八 / 諡狀[上]
↑제봉 고경명선생신도비
↑高敬命先生의 齋室인 霽峰閣 ㅣ 사진>물찬돼지(hyeng19)
↑高敬命先生의 齋室인 霽峰閣重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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