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 제34권>청비록 3(淸脾錄三) - 이덕무(李德懋) 著
■ 이 익재(李 益齋)
[생졸년] 1287년(충렬왕 13) 12월 24일[庚辰]∼1367년(공민왕 16) 7월 9일(癸卯日)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신축방(辛丑榜) 병과(丙科) 1위(4/33)
[고려사마]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2위(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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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詩文學)의 대가(大家)로는 언제나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호』을 추앙(推仰)하여 시가(詩家)의 종주로 삼고 소급하여 올라가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를 추대하여 제일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익재집(益齋集)》을 읽고 나서는 단연코 익재『益齋, 이제현(李齋賢)의 호』의 시를 2천년 이래 우리나라의 명가(名家)로 여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우아하여 우리나라의 침체된 습관을 시원스럽게 탈피하였는데, 그는 비록 중국(中國)에 있었다 하더라도 우집(虞集)ㆍ양재(楊載)ㆍ범팽(范梈)ㆍ게혜사(揭傒斯)의 수준에 충분히 이르렀을 것이다.
성용재『成慵齋,용재는 성현(成俔)의 호』가, “익재는 노련하고 건강하나 화려하지는 못하다.” 한 것은 확고한 논평이 못된다. 익재의 시(詩)를 가지고 화려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어떤 시(詩)를 과연 화려하다고 하겠는가?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이제현(李齊賢)이 어째서 ‘익재. 익재’ 하고 추대를 받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그의 자는 중사(仲思), 또 다른 호(號)는 역옹(櫟翁)인데, 경주인(慶州人)이다.
15세에 급제(及第)하여 이름이 한 세상을 덮었으며, 충선왕(忠宣王)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는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놓고 막부(幕府)에 불러들여, 조자앙(趙子昂 자앙은 조맹부(趙孟頫)의 자)ㆍ원복초(元復初 복초는 원명선(元明善)의 자) 등과 교유를 갖게 하였다.
서촉(西蜀)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와강남(江南)에 향(香)을 내릴 때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었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 널리 칭송되었다. 목암(牧菴 요수(姚燧)의 호) 요공(姚公)과 염공 자정(閻公子靜 자정은 염복(閻復)의 자), 그리고 장공 양호(張公養浩)가 모두 도와주어서 모든 것을 다시 듣고 새로 보았으며, 학문을 갈고 닦아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우리나라에 돌아오자 다섯 조정(朝廷)에 네 번이나 총재(冢宰)가 되었으며, 고문사(古文詞)를 제창하여 일으켰는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의 부자(父子)가 동조(同調)하여 우리나라 선비들이 고루함을 버리고 차츰 우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익재의 공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참소를 입고 서번(西蕃)에 귀양 갔을 때, 만 리 길을 달려가 안부를 물을 적에는 충성심과 분개함이 복받쳐 올랐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서는 정승의 일을 섭행(攝行)하면서 모든 일을 적절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그 힘을 입어 편안할 수 있었다.
뒤에 김해 후(金海侯)에 봉작되었으며, 81세에 졸하였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한다.
목은이 그의 묘비(墓碑)에 명(銘)하기를,
"도덕(道德)의 우두머리요, 문장(文章)의 종주(宗主)로다. 그 공은 사직(社稷)에 남아 있고, 그 혜택 백성에게 끼치었네.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 업적의 대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유람(遊覽)했던 곳으로 시에 나타난 것은 대략, 정경(井陘)ㆍ예양교(豫讓橋)ㆍ황하(黃河)촉도(蜀道)ㆍ아미(峨眉)ㆍ공명사당(孔明祠堂)ㆍ함곡관(函谷關)ㆍ민지(澠池)ㆍ이릉(二陵)ㆍ맹진(孟津)ㆍ비간묘(比干墓)ㆍ금산사(金山寺)ㆍ초산(焦山)ㆍ다경루(多景樓)ㆍ고소대(姑蘇臺)ㆍ도장산(道場山)ㆍ호구사(虎丘寺)ㆍ표모묘(漂母墓)ㆍ탁군(涿郡)ㆍ백구(白溝)ㆍ업성(鄴城)ㆍ담회(覃懷)ㆍ왕상비(王祥碑)ㆍ효릉행(崤陵行)ㆍ장안(長安)ㆍ정장공묘(鄭莊公墓)ㆍ허문정공묘(許文正公墓)ㆍ관용방묘(關龍逄墓)ㆍ망사대(望思臺)ㆍ즉천릉(則天陵)ㆍ숙종릉(肅宗陵)ㆍ빈주(邠州)ㆍ경주(涇州)ㆍ보타굴(寶陁窟)ㆍ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월지 사자가 말을 바치다) 등인데, 발자취가 이른 곳마다 모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 그의 시를 어떻게 훌륭하다 않겠는가? 그의 ‘배를 타고 아미산(峨眉山)으로 향해가다’ 라는 시에,
송아지는 비에 쫓겨 어 점으로 돌아가고 / 雨催寒犢歸漁店。
갈매기는 물결 타고 뱃전으로 다가온 다 / 波送輕鷗近客舟。
한 것과 ‘고국(故國)을 그리다’라는 시에,
쓸쓸한 가을 비 청신의 숲에 자욱하고 / 窮秋雨鎖靑神。
저물녘 백제성에 구름이 가리누나. / 落日雲橫白帝城。
한 것과 ‘노상(路上)에서’ 라는 시에,
말 타고 다니며 촉도 난을 읊었는데 / 馬上行吟蜀道難。
오늘 아침 비로소 진관으로 들어가네. / 今朝始復入秦關。
저무는 푸른 구름 어부수를 가로막고 / 碧雲暮隔魚鳧水。
가을철 붉은 단풍 조서 산에 연하였네. / 紅樹秋連鳥鼠山。
문자는 천고의 한만을 더하누나! / 文字剩添千古恨。
공명을 뉘라서 한가함과 바꾸랴 / 利名誰博一身閑。
평화로운 이 길을 잊지 못하여 / 令人最憶安和路。
죽장망혜로 임의로 오감이지 / 竹杖芒鞋自往還。
한 것과 ‘함곡관(函谷關)’ 시에,
흙주머니는 황하의 북쪽에 머물러 있고 / 土囊約住黃河北。
지축은 서편으로 이어졌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한 것과 ‘이릉(二陵)에서 일찍 떠나다’라는 시에,
주사가 연단(鍊丹)하던 부엌엔 구름이 끼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이 비 피하던 언덕엔 눈이 덮였다 / 雪壓文王避雨陵。
풍경 소리 요란한데 저녁 조수 포구에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 입고 섰는데 어둔 누에 비 뿌리네. / 煙蓑暝立雨侵樓。
한 것과 ‘어촌(漁村)의 저녁 놀’이라는 시에,
지는 해는 먼 산으로 넘어가는데 / 落日看看含遠岫。
조수는 소리치며 갯벌에 오르네. / 歸潮咽咽上寒汀。
어부들은 갈대꽃 속으로 사라졌는데 / 漁人去入蘆花雪。
몇 줄기 저녁연기 다시금 푸르러라 / 數點炊煙晩更靑。
한 것과 ‘하주(荷洲)의 향기로운 달’이라는 시에,
엷은 파도 출렁출렁 달빛은 일렁일렁 / 微波澹澹月溶溶。
십 경의 연꽃에 한 줄기 바람일세. / 十頃荷花一道風。
임평 산에 유숙하던 그 시절 생각하니 / 記得臨平山下宿。
술 깨자 내 몸은 그림배에 있었지 / 酒醒身在畫船中。
한 것과 ‘소악부(小樂府)’ 시에,
봄옷을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 / 脫脚春衣掛一肩。
친구 불러 채마 밭에 들어갔다네. / 呼朋去入菜花田。
동서로 쫓아가며 나비 잡던 일들이 / 東馳西走追蝴蝶。
어제의 놀이같이 완연하구나. / 昨日嬉遊尙宛然。
한 이러한 시가 우리나라 문집(文集) 가운데 있기나 하였던가?
고협군(顧俠君 협군은 고사립(顧嗣立)의 자)이,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편찬하였는데, 거기에 고려(高麗) 사람의 시는 한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 시를 볼 수가 없어서 그러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때 《익재집》을 갖다 주었다면, 안남국왕(安南國王) 진익직(陳益稷)보다 그 순서가 더 위에 있었을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註解]
[주01]막부(幕府) : 장군이 군무(軍務)를 보는 군막(軍幕). 옛날 중국에서 장군을 상치(常置)하지 않고 유사시(有
事時)에 만 임명하였다가 일이 끝나면 해임하였으므로, 청사(廳舍)가 없이 장막을 치고 집무소(執務所)로
삼은 데서 유래(由來)한 것이다.
[주02]강남(江南)---내릴 때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19), 충선왕(忠宣王)이 강남의 보타굴(寶陁窟)에 향(香)
을 내릴때를 말하는데, 이제현이 그때 따라갔었다. 《益齋集 年譜》
[주03]다섯 조정(朝廷) : 충숙왕(忠肅王)ㆍ충혜왕(忠惠王)ㆍ충목왕(忠穆王)ㆍ충정왕(忠定王)ㆍ공민왕(恭愍王)
의 조정을 말한다.
[주04]쓸쓸한---가리누나 :청신(靑神)은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남쪽에 있는 지명(地名). 백제성(白帝
城)은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백제산(白帝山)에 있다.
[주05]촉도난(蜀道難) : 이백(李白)이 지은 시(詩)의 제목으로, 촉(蜀)으로 가는 길이 험난함을 소재로 하여 지은
것이다.
[주06]진관(秦關): 진(秦) 나라 때 설치한 관소(關所)를 말한다.
[주07]흙주머니 :홍수(洪水)를 막을 때 쓰는 것이다. 《新唐書》 馬燧傳에 “황하수(黃河水)를 가로질러 흙주머
니를 쌓아 물을 막은 뒤에 건넜다.” 하였다.
[주08]주사(柱史)가---부엌 : 주사는 주하사(柱下史)라는 벼슬 이름의 약칭으로 도교(道敎)의 원조(元祖)인 노자
(老子)를 가리킨 말이고, 연단(鍊丹)은 도교에서 말하는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인 단약(丹藥)을 굽는 것
을 말하는데, 노자가 청우(靑牛)를 타고 파촉(巴蜀)에 가서 단약을 구웠다 한다.
[주09]문왕(文王)이---언덕 :《左傳》 僖公 32年에 “효함(殽函)에 두 언덕이 있는데 남쪽 언덕은 하걸(夏桀)의 조
상인 하후고(夏侯皐)의 무덤이 있고, 북쪽 언덕은 문왕이 풍우(風雨)를 피하던 곳이다.” 하였다.
옮긴이 :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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