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집(益齋集) 해제(解題)

야촌(1) 2010. 10. 3. 02:17

■ 익재집(益齋集) 해제(解題) 

 

장덕순(張德順 : 1921년 7월 9일~1996년 8월 20일. 현대 국문학자. 본관은 울진(蔚珍)이다. 

호는 성산(城山)이다. 본적은 서울 서대문구(西大門區)이고, 출생지는 간도(間島) 용정(龍井)이다.

 

●머리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초명(初名)은 지공(之公)이요, 자(字)는 중사(仲思),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서, 검교정승(檢校 政丞) 진(瑱)의 아들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13년(1287)에 태어난 그는 15세에 등과(登科) 입신(立身)하여, 6대 왕(王)을 섬기면서 네 번 재상(宰相)에 오른 대정치인이며, 이 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을 처음 전교(傳敎)한 대학자요, 

 

그리고 시(詩)ㆍ문(文)이 고루 갖추어 빛나지 않은 것이 없는 문호(文豪)로서, 81세를 일기(一期)로 졸(卒)하여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된 고려 말기의 위인이다.

 

나라 안팎을 두루 누빈 익재의 모든 경륜(經綸)은 중망(重望)으로 받들어진 그의 준일(俊逸)과 기덕(耆德)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물론이요, 이들의 정채(精彩)가 더욱 현저함은 특히 그의 대문장(大文章)에 힘입은 것이었다.

 

1. 필봉(筆鋒)으로 진무(鎭撫)한 외교(外交) 드라마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합하(執事閤下)께서는 여러 황제(皇帝)가 우리나라의 공로(功勞)를 생각한 도리를 본받으시고, 세상을 훈계(訓戒)한 중용(中庸)의 말을 명심(銘心)하시어, 그 나라는 그 나라에 맡기시고, 그 나라의 백성은 그곳백성끼리 살게 하십시오.

 

자기들의 정사(政事)는 자기들 스스로 닦도록 직책(職責)을 부여하여 번리(藩籬)를 삼으시며, 우리 임금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받들게 하신다면 이 어찌 다만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집집마다 서로 경하(慶賀)하여 천자(天子)의 성덕(聖德)을 노래할 뿐이리까."

 

이 완곡(婉曲)과 늠연(凜然)을 겸전한 외교의 서장(書狀)은 익재가 충숙왕(忠肅王) 10년(1323) 37세 때 원(元)의 중서도당(中書都堂)에게 보낸 항소극론(抗疏極論)의 한 대목이다. 당시 고려는 국약주소(國弱主少)하여 원의 압제(壓制)가 심지어 국왕(國王)의 여탈폐립(與奪廢立)에 까지 미치고 있었던 터였다.

 

이에 사대(事大)ㆍ간세(奸細)의 무리인 유청신(柳淸臣)ㆍ오잠(吳潛) 등이 원제(元帝)의 의중(意中)을 헤아려 중서성(中書省)에 주청(奏請)하되, 고려 국호(國號)를 폐하고 한 행성(行省)을 두어 원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자 하고, 원제 또한 이를 받아들여 이 땅에 정동성(征東省)이라는 이름의 행성을 설치하려고 획책(劃策)하였다.

 

때마침 연도(燕都)에 다다른 선왕(先王) 충선(忠宣)이 분만(憤懣)한 익재에게 변박(辨駁)의 명(命)을 내리자, 그는 곧 불가론(不可論)의 필봉(筆鋒)을 휘둘렀다. 이 도도(滔滔)한 수천 언(數千言)에 담긴 '유원인(綏遠人)의 의(義)' - 《중용(中庸)》구경(九經)에서 도출한 ‘그 나라는 그 나라에 맡기고, 그 백성은 그곳 백성끼리 살게 하라[國其國 人其人]’는 그의 말은 행성 설치의 망념(妄念)으로 들뜬 중원(中原) 천하(天下)를 조용히 잠재워 버렸던 것이다.

 

그때 익재가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의 주권(主權)은 없을 뻔하였다. 그뿐 아니라 익재는 그의 문장대도(文章大道)로써 원(元) 도당(都堂)의 경모(敬慕)를 한 몸에 받았으니 참으로 놀랍고 떳떳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앞서, 충숙왕(忠肅王) 7년(1320)에 선왕(先王) 충선(忠宣)은 고려의 환자(宦者)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연도(燕都)에서 1만 5천 리나 떨어진 토번(吐蕃) 땅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때 원으로 향하여 황토점(黃土店)이란 곳을 지나던 익재는 이 소식에 접하자 ‘황토점시(黃土店詩)’ 3편과  ‘명이행(明夷行)’ 1편을 지어 그의 충분(忠憤)을 토로하였다.

 

시제 : 黃土店(황토점)

           황토점을 지나면서....

 

世事悠悠不忍聞(세사유유불인문) / 세사는 시끄러워 귀 담을 수 없는데,

荒橋立馬忽忘言(황교입마홀망언) / 다리 위에 말 멈추고 할 말을 잊었노라.

 

幾時白日明心曲(기시백일명심곡) / 언제나 태양은 내 마음 밝힐지,

是處靑山隔淚痕(시처청산격루량) / 푸른 산 바라보며 눈물지누나.

 

燒棧子房寧負信(소잔자방영부신) / 내 언제 믿음을 저버렸던가.

翳桑靈輒早知恩(예상영첩조지은) / 이국에서 헤매어도 은혜는 아네.

 

傷心無術身生翼(상심무술신생익) / 내 몸 날개 없어 날아가지 못하고,

飛到雲霄一叫閽(비도운소일규혼) / 슬프다 나홀로 애만 태우네.

 

이것은 ‘황토점시’ 중의 한 편이다. 이때 충선왕을 수종(隨從)하던 재상(宰相) 최성지(崔誠之)는 도주하고 박인간(朴仁幹) 등 만이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익재는 풀길 없는 울분을 본국에 있는 승상 유청신(柳淸臣)과 찬성(贊成) 오잠(吳潛)에게 글로써 퍼부어 그들의 그늘진 폐부(肺腑)를 찔렀다.

 

충선왕의 토번(吐蕃) 적거(謫居)는 4년째에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익재는 원조(元朝)에 ‘백주 승상에게 올리는 글[上伯住丞相書]’을 보내어 왕이 무고당하였음을 말하고, 배소(配所)의 신고(辛苦)를 읍소(泣訴)하면서 원에 대한 충선왕의 결연관계(結緣關係)와 지난날 공을 들어, 왕의 여생(餘生)을 위하여 방면(放免) 환국(還國)되기를 탄원하였다.

 

익재의 곡진한 필력(筆力)에 감발(感發)된 승상 백주(伯住)는 드디어 원제(元帝)에게 청하여 적지(謫地)를 타사마(朶思麻)로 옮기게 하였다. 이때 익재는 단신으로 험로(險路)를 무릅쓰고 충선왕의 배소에 가 문안하였다. 도정(途程)에 보인 경물(景物)이 모두 수심(愁心)을 자아내어 이를 읊은 시편(詩篇)마다 조국애(祖國愛)와 충의(忠義)의 의분(義憤)이 넘쳐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충숙왕 후 8년(1339) 익재 53세 때에 왕이 승하하자 정승 조적(曹頔)이 백관을 협박하면서 임금 측근의 악소배(惡小輩)를 쫓겠다는 미명하에 영안궁(永安宮)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나, 실은 충선왕의 장질(長姪)인 심왕(瀋王) 고(暠)와 통모(通謀)하여 정변(政變)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앞질러 알아차린 충혜왕(忠惠王)이 경기(輕騎)로 나아가 조적을 쳐서 죽였다.

 

그러나 조적의 도당은 원도(元都)에서 왕의 죄를 갖가지로 모함하게 되니 끝내 원제가 사자를 보내어 왕을 불러다가 신(臣) 김윤(金倫) 등과 함께 투옥하게 하니 장차 그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이때 익재는 결연히 "나는 내가 우리 임금의 신자(臣子)임을 알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왕을 시종(侍從)하였다.

 경사(京師)에 들어가자 글로써 혀를 대신하여 일의 그릇됨을 변석(辨析)하자, 원제가 이를 깨닫고 왕을 풀어 복위케 하니, 모두 송연(悚然)하여 이르기를, '익재는 담이 몸보다 크다'고 하였다.

 

충혜왕 4년(1343) 익재 57세 때, 원의 사신 타적(朶赤)의 무리가 와서 교천사조(郊天赦詔)를 반포한다 하기에, 충혜왕이 그런 줄로만 알고 영접차 성밖으로 나갔더니 타적이 칼을 휘두르며 왕을 붙잡아 돌아갔다.

 

신하들이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익재는 석방의 소(疏)를 올렸으나, 왕은 연도에서 2만 리 밖 게양(揭陽)에 종자(從者) 한사람 없이 정배(定配)되어 가다가 중도 악양(岳陽)에서 승하(昇遐)하였으니, 이때 익재가 겪은 비탄(悲嘆)은 비할 데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원과의 질곡(桎梏)의 역정(歷程) 속에서 공민왕(恭愍王) 14년 익재 79세 때, 그는 원의 사신(使臣) 호해조마(湖海照磨)에게서 원에 가기를 권유받지만, 늙음을 빙자하여 ‘호해조마 강남(湖海照磨江南)’이라는 헌시(獻詩)로 사신(使臣)을 달래면서 정중히 사양하였다.

 

2. 덕망으로 충간(忠諫)ㆍ제민(濟民)한 대도(大道)의 재상

 

그의 묘지명에,

"이공(李公)은 재덕(才德)이 완비하여 어떤 일에도 능통하다. 그야말로 그릇이 국한되지 않은 군자(君子)다."

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나라 안 정사(政事)에서 보여준 정치적 국량과 선정(善政)의 치적(治績)을 요약한 적평(適評)이다.

 

17세에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로 환로(宦路)에 들어선 그가 25세에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전임되었을 때는 어느덧 가는 곳마다 적임(適任)이라는 명관(名官)의 칭송을 들었으며, 26세 때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맡자, 모두 옛 안렴사의 기풍을 두루 갖추었다고 하였다.

 

27세 때 내부부령(內府副令)에 임명된 그는 풍저창에서 두곡(斗斛)의 일을 감림(監臨)하고 내부(內府)에서 작은 저울 눈과 몇 자 몇 치의 계산 사무를 교검(校檢)하면서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어, 사람들은 익재의 능소능대(能小能大)에 감탄하였다.

 

충숙왕 7년(1320) 익재 34세 때 그가 지공거(知貢擧)로서 최용이(崔龍伊)ㆍ이곡(李穀) 등을 뽑으니 왕은 익재의 인선(人選)을 가상(嘉賞)하여 은병(銀甁) 50개와 쌀 1백 석을 하사하여 학사연(學士宴)을 베풀게 하였다.

 

충혜왕 5년(1344) 58세 된 익재는 8세로 등극(登極)한 충목왕(忠穆王)을 위하여 설치된 서연(書筵)에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진언(進言)하기를, "옥에 흠이 있는 것은 반드시 훌륭한 공장(工匠)을 기다려서 쪼고 다듬은 뒤에라야 보배스러운 기물(器物)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임금이라고 하여 어찌 다 과실(過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훌륭한 신하의 계옥(啓沃)을 기다린 뒤에라야 그 성덕(聖德)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이어 익재 자신의 부재시에는 원송수(元松壽)로 하여금 좌우에 있게 하여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리고 익재는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현유(賢儒)를 가려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게 하고, 재상(宰相)과 친근하되 소인을 멀리하여 군덕(君德)을 보도(輔導)하게 하고, 정방(政房)을 파하여 청알(請謁)의 길을 끊게 하고, 공과(功過)의 표준(標準)을 세워 요행(僥倖)을 막게 하고, 금은(金銀) 금수(錦繡)의 사용을 금하여 검소의 덕행을 밝히고, 부렴(賦斂)을 경감하여 민생(民生)을 안정시킬 것 등을 낱낱이 들어 청하였다.

 

이들은 모두 왕도(王道)의 귀감(龜鑑)이요, 치자(治者) 필수의 요결이다. 그러나 집권자가 불청(不聽)하므로 그는 상서(上書)로써 사직(辭職)을 청하였다. 충정왕(忠定王) 3년(1351) 익재 65세 때, 충정왕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공민왕(恭愍王)은 미처 환국하지 못한 채 익재를 우정승 권단정동성사(右政丞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였다. 

 

익재는 이를 고사(固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또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명하였다. 부득이 부임한 익재는 법사(法司)에게 지방 순찰을 시키는 한편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고, 공과(功過)의 안렴(按廉)과 현준(賢俊)의 등용을 힘쓰며, 간신(奸臣)을 쫓아내어 정령을 바로잡아 나아가니, 그때 임금이 원도(元都)에 머문지 두어 달이 지나 나라가 비어 있었지만, 익재의 온당한 처사로 그 힘을 입어 백성이 안정할 수 있었다.

 

익재는 공민왕 원년(1352) 66세 때 왕을 옹립한 조일신(趙日新)의 시기와 횡포를 피하여 굳이 치사(致仕)하였다. 그 해에 불량배와 작당한 조일신이 궁중에 틈입(闖入)하여 살인극을 벌이다가 복주(伏誅)된 뒤 다시 복직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정승을 사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을 뽑아 또 다시 인재 선별의 능력을 과시하였다.

 

공민왕 5년(1356) 익재 70세 때 역신(逆臣) 기철(奇轍) 등의 복주가 있었다. 왕은 몰수한 그들 재물을 양부(兩府)에 하사하였으나, 익재는 자신에겐 공이 없음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71세 때 그는 본직 그대로 치사(致仕)하여, 국법에 따라 봉군치사(封君致仕)한 자로서의 더 많은 녹봉(祿俸)을 누렸다.

 

그는 한가로워지자 술을 마련하여 두고 손을 맞아 고금(古今) 정사(政事)를 담론(談論)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자문(諮問)을 청하였으며, 때로는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물으면 전례를 들어 소상(昭詳)한 비유(譬喩)로써 아뢰고, 어려운 일을 힘써 다하도록 간곡히 권면(勸勉)하니 왕이 더욱 존중하였다.

 

공민왕 11년(1362) 익재 76세 때, 홍건적(紅巾賊)에게 서울이 함락되어 어가(御駕)는 남으로 파천(播遷)하게 되었다.

익재(益齋)는 달려가 상주(尙州)에서 왕을 뵙고서, 오늘의 파천이 마치 당 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유하면서 눈물로 탄식하였다. 다음해에 왕이 청주(淸州)에 머물면서 환도(還都)할 뜻을 보이지 아니하자, 익재는 여러 재상을 이끌고 나아가 진언(進言)하기를,

 

"송도(松都)는 종묘(宗廟)가 있는 곳으로 국가의 근본입니다. 마땅히 빨리 환가(還駕)하시어 백성들의 바라는 마음을 위안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은 이 간언(諫言)에 따랐다.

 

익재는 그의 생애를 마치기 2년 전인 79세 때 그의 형안으로 신돈(辛旽)을 꿰뚫어 보고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한 번 신돈을 보았더니 그 골상(骨相)이 옛날 흉악한 자와 비슷합니다. 뒷날 반드시 근심을 끼칠 자이오니, 원컨대 임금께서는 너무 가까이하지 마십시오."하였다.

 

이러한 익재의 간언에 신돈은 깊은 원한을 품고 갖은 훼자(毁訾)를 다하였으나, 연로한 익재를 가해하지는 못하였다. 뒷날 신돈이 패망한 다음 왕은 익재의 선견지명에는 미칠 수 없다고 말하였다.

 

3. 대인(大人) 기상(氣像)의 학풍(學風)과 덕행(德行)

 

익재는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빼어나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글짓기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학자(學者) 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는 충렬왕(忠烈王) 27년, 15세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壯元)하고, 이어 대과(大科)에서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조숙(早熟)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과거를 본다는 것은 작은 기예(技藝)일 뿐이다. 이것으로 나의 큰 덕성(德性)을 기르기에는 부족한 것이다."라고 한 말이다.

 

이때 익재는 경전(經典)을 토론하여 널리 통달하고 세밀한 연구로 한 곳에 치우침이 없어 알맞은 것을 취하여 마땅한 바에 다다라 있으니, 그의 부친 문정공(文定公)이 기뻐하기를, "하늘이 혹시 우리 가문을 더욱 크게 만들어 주시려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익재를 간파한 권보(權溥)는 선뜻 딸을 익재에게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충렬왕 34년(1308) 익재 22세 때 그가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가자 그의 학문에 압도된 관중(館中)의 사람들은 모두 익재에게 미루고 감히 글을 논하지 못하였다.

 

충숙왕 원년(1314) 익재 28세 때, 정주(程朱)의 학설이 중국에 퍼지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우리나라에는 파급되지 않았는데, 백이정(白頤正)이 원에서 이를 배워가지고 돌아오자, 익재가 맨 처음으로 그를 스승으로 삼아 수학하였다.

 

한편 충선왕은 원도(元都)에 머물러 있으면서 원제(元帝)에게 청하여 왕위를 충숙왕에게 전하고 자신은 원의 태위(太尉)로서 그곳 관저(官邸) 안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 고구(考究)만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중국 서울의 학문하는 선비들은 모두 천하에 선택된 유수한 이들인데 나의 부중(府中)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다."라 하고 익재를 그곳에 불러들였다.

 

그때 원의 학사(學士)인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의 문호(門戶)를 드나들고 있어, 익재는 그들 사이에 추축(追逐)하여 학문이 더욱 진취하니 마침내 제공이 찬탄과 칭상을 마지아니하였다.

 

상왕(上王) 충선(忠宣)이 익재에게,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문물이 중화(中華)에 비견(比肩)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배우는 자들이 다 승려(僧侶)를 좇아다니며 장구(章句)나 익혀서 글귀나 아로새겨 꾸미는 무리가 매우 많아지고, 경서(經書)에 밝고 덕행(德行)을 닦는 선비는 아주 적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익재는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학교(學校)를 넓히고 상서(庠序)를 소중히 여기며 육예(六藝)를 존중하고, 오교(五敎)를 밝혀서 선왕의 도를 천양(闡揚)하신다면 누가 참 선비를 저버리고 승려를 좇아갈 것이며, 실학(實學)을 버리고 장구(章句)를 익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장차 장구나 아로새겨 꾸미는 무리들이 다 경서에 밝고 덕행을 닦는 선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이 말을 가납(嘉納)하였다. 충목왕 2년(1346) 익재 60세 때, 그는 전문(箋文)을 올려 서연(書筵) 강설(講說)의 직임을 사면하여 주도록 요청하고 안축(安軸)과 이곡(李穀)을 천거하여 자신의 일을 대행토록 하였다. 

 

틈을 얻게 된 그는 저술에 몰두하였다. 육십이효찬(六十二孝贊)의 찬술(撰述)과 이것의 서문(序文)을 지어 《효행록(孝行錄)》을 엮었다. 또 명에 따라 민지(閔漬) 찬수의 《편년강목(編年綱目)》중 빠진 것을 다시 찬정하였다. 그리고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의 삼대 왕에 관한 실록(實錄)을 찬수하도록 명을 받들었다.

 

공민왕 6년(1357) 익재 71세 때 그는 본직 그대로 치사하고 나서, 그의 사저(私邸)에서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던바, 사관(史官)과 삼관(三館)이 모두 모여들었다. 이 책은 뒷날 병화(兵火)에 잃고 말았다. 《금경록(金鏡錄)》도 이때에 찬선(撰選)된 것이었다.

 

또한 국사가 정비되지 못하고 있음을 병폐(病弊)로 여긴 그는 기년전지(紀年傳志)를 찬수하였으나, 이것도 뒤에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산실(散失)되고 다만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아 전한다. 

 

이런 가운데 익재의 어전(御前) 경서 강론(經書講論)은 그의 나이 75세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의 학덕(學德)이 어떠한 경지의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익재 선생 본전(益齋先生本傳)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남의 조그만 선행(善行)이 있어도 칭찬하고 기려서 그 선행이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며, 선배(先輩)의 남긴 일이면 비록 미세한 것이라도 자신은 미치지 못할 것임을 걱정하였다. 평상시에 일찍이 침착하지 못한 빠른 말씨와 당황한 얼굴빛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익재선생 묘지명(益齋先生墓誌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 위에 학문으로 보익(補益)하여 고명(高明)하고 정대(正大)하였다. 

그런 까닭에 의론(議論)으로 나타나는 것과 사업(事業)의 처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함께 빛이 나서 볼 만한 것이었다."

 

4. 시(詩)ㆍ문(文)을 두루 통달한 대가풍(大家風) 문인(文人)

 

익재선생 본전과 연보를 보면 그의 시문(詩文) 또는 시화(詩話)에 관한 기록이 산재하여 있다. 그 중 한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익재 28세 때의 일이다. 원에서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에 모인 그곳 학사(學士)들과 더불어 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가운데, 닭소리는 마치 문전의 버들가지 같도다 / 鷄聲恰似門前柳

라는 구절이 있어, 학사들이 문득 그 출처를 물었다. 무심히 그 구절을 읊은 왕으로서는 대답할 길이 막연하여 처신이 난처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익재가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우리 동인시(東人詩)에,

屋頭初日金鷄唱(옥두초일금계창) / 해가 뜨자 지붕위의 닭 울음소리

恰似垂楊梟梟長(흡사수양뇨뇨장) / 그 소리가 마치 수양버들처럼 휘늘어지네.

라는 시구(詩句)가 있는데, 이는 닭 울음소리의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 뜻을 취하신 것이요, 또한 한퇴지(韓退之)의 시에도 이와 같은 시구가 있소."라고 하여, 좌중 학사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지게 하였다. 

 

우리 시의 격조(格調)를 높인 것은 물론 그들이 알지 못한 그들 나라 시구의 작자까지 밝혀 주었으니 이는 선왕(先王) 충선(忠宣)의 체모를 살린것 이상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이런 시가 있다.

 

시제 : 경진년 사월에 동으로 오면서 제화문(齊化門) 주루(酒樓)에 쓰다.

 

離歌昔未解傷神(이가석미해상신) / 이별이 서러운 줄 미처 몰랐더니

老淚今何易滿巾(노루금하역만건) / 늙으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누나.

 

三十年前倦遊客(삼십년전권유객) / 삼십년 전에 권유한 나그네가,

四千里外獨歸身(사천리외독귀신) / 사천리 밖에서 홀로 오는 신세라네.

 

山河雖隔扶桑域(산하수격부상역) / 산하는 비록 부상 지역 가렸으나.

星野元同析木津(성야원동석목진) / 별자리는 석목진의 같은 분야(分野)지.

 

他日重來豈無念(타일중래기무념) / 다음날 다시 올 생각이야 없을까만.

却愁華髮汚緇塵(각수화발오치진) / 화발이 치진에 더럽혀질까 걱정일세.

 

이 시는 익재가 54세 때 원에서 환국하는 도중에 지은 '제화문주루시(齊化門酒樓詩)’다.

난세에 든 고려를 근심하고 노구(老軀)에 시름을 안고 돌아오는 신자(臣子)의 외로움을 읊은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이러한 시문만으로 그의 문학적 장처(長處)를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서거정(徐居正)은 말하기를,

"이 상국[李相國=이규보(李奎報)]ㆍ예산[猊山=최해(崔韰)의 호]ㆍ목은[牧隱=이색(李穡)의 호]등이 모두 큰 문인이었으나 아직 다 미치지 못함이 있다. 오직 익재만이 중체(衆體)를 갖추니, 그 법도는 삼엄(森嚴)하다."

라고 하였다. 더욱이 김택영(金澤榮)은 익재를 일컬어,

 

"공묘 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되어 조선 3천 년에 제일의 대가(大家)다."

라고 극찬하였다. 이 점은 그의 문집인 《익재선생집(益齋先生集)》을 통하여 속속들이 알아볼 수 있다.

《익재 선생집》은 세종(世宗) 14년(1432) 초간 되고 숙종조(肅宗朝)(1693)와 순조조(純祖朝)(1814)에 중간(重刊) 또는 증보(增補) 간행(刊行)되었다.

 

이 책은 연보(年譜)ㆍ익재난고(益齋亂藁)ㆍ습유(拾遺)ㆍ역옹패설(櫟翁稗說) 등과 서(序)ㆍ발(跋)ㆍ중간발(重刊跋) 및 묘문(墓文) 등이 집성(集成)되어 있는 문집인데 문체별로는 시(詩)ㆍ사(詞)ㆍ표(表)ㆍ서(書)ㆍ의(義)ㆍ서(序)ㆍ기(記)ㆍ책문(策問)ㆍ논(論)ㆍ송(頌)ㆍ찬(贊)ㆍ잠(箴)ㆍ비명(碑銘)ㆍ묘지명(墓誌銘) 등이 실려 있다.

 

이들 중 어느 한 문체든지 일가를 이루어 출중(出衆)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함이 정평(定評)이며 특히 사(詞)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익재만이 사다운 사를 지었다고 일컬어진다. 또한 익재의 기(記)ㆍ명(銘)ㆍ서(書)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원(中原)에서도 그 성가(聲價)가 대단한 것이었다.

 

익재난고는 공민왕 12년(1363) 익재 작고 4년 전에 그의 자손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이것은 10권 4책의 시문집(詩文集)인데, 이 중 권 4의 소악부(小樂府)는 국문학사상 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즉 여기 수록된 고려가요(高麗歌謠) 한역시(漢譯詩) 7절(絶) 11수(首)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구비(口碑)ㆍ전승(傳承)되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국문(國文)으로 정착되어 현재 가사(歌詞)를 전하는 고려가요와 부합되는 것으로 처용가(處容歌)ㆍ서경별곡(西京別曲)ㆍ정과정곡(鄭瓜亭曲)이 있다.

 

처용가는 《고려사(高麗史)》고려속악(高麗俗樂)의 그것인 바, 향가(鄕歌) 및 고려속악 처용가의 일부와 배경 설화(背景說話)를 참작하여 의역(意譯)한 것이다. 서경별곡(西京別曲)은 제 5~8절(節:제 2연에 해당)이 한역(漢譯)되어 있으며, 이 부분이 정석가(鄭石歌)의 끝 연(聯)에도 관련되어 이 한역가(漢譯歌)가 고려속악의 판별에 어떤 구실을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더욱이 학자들 중에는 서경별곡의 고증(考證)으로 이와 유형(類型)이나 정조(情調)가 닮은 작품들 - 예컨대 청산별곡(靑山別曲) 등 - 을 고려속요로 유추(類推)하기도 한다. 정과정곡(鄭瓜亭曲)의 한역가는 다음과 같다.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蜀子規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이 시는 《고려사》악지(樂志)ㆍ《동국통감(東國通鑑)》등에 전재(轉載)되어 그 원작(原作)이 매우 처완(悽捥)한 것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가사(歌詞)가 전하지 않는 고려가요로서 그 배경 설화와 부합되는 것에 〈장암(長岩)〉ㆍ〈거사련(居士戀)〉ㆍ〈제위보(濟危寶)〉ㆍ〈사리화(沙里花)〉ㆍ〈오관산(五冠山)〉ㆍ〈도근천(都近川)〉……〈탐라곡(耽羅曲)〉 등 7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도 출처(出處) 불명이다. 그 중 〈거사련〉은 이러하다.

 

까치는 울타리 꽃가지에 지저귀고 / 鵲兒籬際噪花枝

상머리 낮거미 방 안에다 줄을 치네 / 蟢子床頭引網絲

어여쁜 우리 임 머지않아 돌아오렴 / 余美歸來應未遠

이내맘 오늘따라 그러하구나 / 精神早已報人知

 

이 노래는 행역(行役)에 나간 남편을 그리는 아내가 부른 노래로 까치와 거미의 탁의(托意)가 훌륭하다.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익재문학의 진수(眞髓)라 할 만하다. 충혜왕 3년(1342) 익재 56세 때, 그는 환로(宦路)에서 물러나 본제(本第)에 칩거(蟄居)하면서 이것을 저술하였다.

 

체재는 전(前)ㆍ후집(後集)으로 나누어 각각 1ㆍ2권으로 되어 있어 도합 4권이다. 전집(前集)은 1권에 17화(話), 2권에 43화(話) 합 60화(話)이며, 후집은 1권에 28화, 2권에 25화 합 53화로서 총 1백 13화이다. 전집(前集)에는 서(序)ㆍ역사(歷史)ㆍ인물일화(人物逸話)ㆍ골계(滑稽) 등이 실려 있고, 후집에는 서(序)와 시문이 주로 실려 있다.

 

역옹패설은 패관문학(稗官文學)의 압권(壓卷)이다. 홍만종(洪萬宗)은 이 속에 실린 시화와 기사(記事)의 글을 극찬한 바 있다. 이 점을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역옹패설은 그 속에 담긴 것이 경수필(輕隨筆)이건 중수필(重隨筆)이건 모두 문예화(文藝化)된 문학적 수필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또한 문학사적(文學史的)으로는 한국(韓國) 고전수필문학(古典隨筆文學)의 백미(白眉)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전집 1권의 서(序)에서,

"처마의 낙수를 받아 벼룻물을 삼고 벗들과 오고 간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그 종이 뒷면에 되는 대로 기록하여 놓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이라 이름지었다."라고 하였으며, 후집 1권의 서에서는 "한가하고 답답함을 몰아내려고 아무 것이나 붓 가는 대로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 두 인용문은 역옹패설의 수필문학적 성격을 잘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옹패설은 중원(中原)의 문학 내지 문화를 수용하면서 우리의 것을 찾아 간직한 넓은 국량(局量)의 문학이라는 점에 더욱 값진 의의가 있는 것이다.끝으로 이색(李穡)의 익재선생 묘지명(益齋先生墓誌銘)에서 한 구절을 따내어 여기 적어 둔다.

 

이름은 천하(天下)에 넘치고 몸은 해동(海東)에 있었네. 도덕(道德)은 유자(儒者)의 수령(首領)이었고, 문장은 선비들의 종장(宗匠)이었네……. 공덕(功德)은 사직(社稷)에 머물러 있고, 은택(恩澤)은 생민(生民)에 흘러 내리네.

 

참고로 본 역본의 대본(臺本)에 대하여 부기하여 둔다. 조선조의 수삼차에 걸친 중간본 중 순조(純祖) 14년(갑술, 1814) 중간본이 내용이 가장 완비되었으나, 중간 때마다 보각(補刻)을 한 관계로 자획이 마멸되어 글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부득이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후손이 1929년 안동(安東) 노림재(魯林齋)에서 중간한 판본(성균관대 소장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익재선생집(益齋先生集)》/《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櫟翁稗說)》/ 서거정(徐居正) :《동인시화(東人詩話)》 /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홍만종(洪萬宗) :《시화총림(詩話叢林)》 /이승규(李昇圭)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 李齊賢)》/이석래(李石來) :《한국의 인간상》(5) /이상보(李相寶) :《역옹패설》(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