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이문좌 묘갈명(李文佐墓碣銘)

야촌(1) 2017. 6. 26. 20:17

■ 세촌 이공 문좌 묘갈명(細村李公文佐墓碣銘)

    (경북 예천 출신/22世/경주이씨 평리성암공파)

 

옛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의 제자에 세촌(細村) 이공(李公)이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蠹) 등의 대현과 더불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가르침을 받아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조선조 오백년을 통하여 유례가 드물다. 그러나 큰 인재들이 무오사화에 걸렸으니 실로 천재의 액운이다. 

 

곳곳에서 착한 사람들이 혹형을 당하거나 부관참시 되었다. 비록 효자와 효손이라 할지라도 어찌 백(百)이나 천(千) 가운데에서 한둘이라도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세촌 공의 실기가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지고 묘지가 그 당시에 지을 겨를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이름은 문좌(文佐)요. 자는 현도(顯道)이다. 성(姓)은 경주 이씨이니 신라의 1등 공신 알평(謁平)이 그의 시조다. 그 후손에 금서(金書)라는 분이 있는데 고려태조의 외손서(外孫壻:외손녀의 남편)다. 대대로 고관을 지내어 내려오다 상서좌복야 핵(在僕射翮)의 대에 이르렀다. 그의 자제 인정(仁挺)이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다.

 

이분의 자제 규(樛)가 5종형제(五從兄弟:다섯 사촌들)로 더불어 다 같이 대과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에 이르렀다. 고려사에 실려 있다. 공에게는 5대의 간격이 있다.

 

고조 원선(元善)은 공조전서(工曹典書)이고 증조 진(進)은 감무(監務)로서 비로소 우리 조정(조선을 말함)을 섬기게 되어 송도에서 광주로 이사 왔다. 판관 권생(判官 權生)과 사정 계상(司正 繼祥)은 공의 조부와 부친이다.

 

사정이 선무랑(宣務郞) 이귀영(李貴穎)의 따님과 혼인하여 광묘(光廟 : 세조) 신사(1461)에 광주 남쪽 탄동리(炭洞里) 본제(本第:본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자품이 보통을 넘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한 번 보면 곧 익히고 익힌 것은 잊지 않았다.

 

무릇 인륜과 일용의 베품이나 제반 처사의 행함에 있어 일을 꾀하여 슬기롭지 않은 일이 없고 실책하는 일이 없었다. 

보는 사람들이 너무 예민한 것을 걱정하였다.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김 문간공(金文簡公:佔畢齋 金宗直의 시호) 문하에 들어가서 공복 하였다.

 

물러 나와서는 제현들과 도의를 탁마하여

“만약 이러한 환경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평생을 헛되게 보내는 탄식이 있을 쁜 하였다.”고 하였다. 

나이 二十에 경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그 뒤 4년만인 계묘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선발되어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 從九品)에 임명되었다. 곧 박사(博士:성균관의 正7品)가 되었다. 

갑진에 규정에 따라 전적(典籍:성균관의 正6品)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북경에 갔었다.

 

그때 부사가 탐욕스러워서 왕의 사명에 욕이 될 짓을 하였다. 

공이 원칙을 잡아 용서하지 않았다. 일행이 다 두려워 하여 감히 탈선하지 못했다. 

돌아와서 복명하고 정랑을 제수 받았다.

 

교검(校檢) 겸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을 거쳐서 사헌부 대관(臺官)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너무 곧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아 당로자들의 방해하는 바가 되었다. 병오에 밀려나서 안협(安峽) 고을을 살게 되었다.

 

안협의 토질은 하의 하가 되어 여러 번 흉년을 만나고 보니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다. 

공이 드디어 세금을 감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고 정부 창고를 풀어 도와주고 말하기를

“걱정을 나누었는데도 백성이 오히려 병들어 있다면 이것은 목민관의 책임이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덕택으로 편안하게 되면

“백성이 잘 살게 되면 가르쳐야 한다고 한 것은 성인의 교훈이다.”

고 하여 고을의 우수한 선비들을 초청하였다. 선비들이 경서의 어렵고 의심나는 대목을 들어서 질문하였다.

 

선생이 치관(豸冠)과 조대(皂帶)로 예모를 갖추고 중당(中堂)에 앉아서 이리저리 돌아보며 응답하여 즐거워서 피로한 줄도 몰랐다. 이에 있어 찬란하게 진작되는 풍조가 일어났다. 무신에 인끈을 풀어 놓고 돌아가려 하였다. 

현의 부로들이 수레에 매달려서 부러 짓고 울었다.

 

그 뒤 계속하여 6년 동안 벼슬살이하다가 신해(1491) 모월 모일에 관에서 하세했다. 향년이 31세다.

그 지경 내에 사는 백성과 선비들이 다 따라가서 슬퍼하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 갑년(甲年)에 복정동(福井洞) 유좌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숙인 예천 권씨는 별좌(別坐) 선(善)의 따님이고 영중추(領中樞:領中樞府事의 약칭) 문렬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의 외손녀다. 그 소생자 진사 절(節)을 유복하고 영남 예천으로 내려갔다. 예천은 문학과 덕행을 숭상하는 고을이다.

 

아!

공이 하세한지 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으니 하늘과 땅이 닫히고 막히는 때다. 

공의 스승과 학우와 인척치고 연좌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홀로된 과부나 의줄 없는 아이들이 생명을 피하느라고 곤경을 겪고 화가 죽은 사람에게까지 미쳤으니 위험한 시대였다.

 

유덕한 사람들이야 어찌 보존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百세를 지나도 민멸하지 않은 것은 여론이다. 

인산(仁山) 모퉁이에 재향지내는 자리가 있어서 김학사(金鶴沙:金應祖의 號/豐山人)·이식산(李息山:李萬敷의 號 延安人) 등이 있다.

 

권선계(權仙溪:權墉의 호 醴泉人) 등 여러 현인이 혹은 행장을 간략하게 쓰기도 하고 혹은 받들어 제향도 지내고 혹은 자취를 더듬어서 충실하게 수집하였으니 이만하면 선생의 사적과 행실의 실제를 알 수 있다.

 

이미 어두었다가 다시 나타나고 조금 굽혔다가 크게 펴는 것이다. 공의 주손 수현(綬鉉)이 그의 족제 덕현(悳鉉)과 남쪽 3백리 길을 달려와서 이미 안장한지 오래니 묘지는 옛날 지었어야 할 것입니다.

 

창해가 상전 되고 상전이 창해가 되는 많은 변동으로 인하여 10세가 지나도록 겨를이 없었습니다. 

감히 묘지명을 청합니다고 하였다. 누차 못하겠다고 하였으나 안 되어 명을 쓴다.


수를 못했다 말하지 마라
죽은 뒤에 천년만년 전하여지니


때를 못 만났다 말하지 마라
스승은 밝고 벗들은 도움 줬네.


맹자가 등 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왕환(王驩)에게 말이 없었네.


왕환의 두려워함 그 어떠했나.
그 누군가 촉나라에 자사로 가서
학문을 일으키니 흡연이 따라 왔네.

또한 높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인산에 사당 있어 제향 지내니
그 또한 미덥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실천한 행동의 기록이 남아 있네.

연안 이의덕 근찬(延安 李義悳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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