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역봉 이개립 묘갈명.묘지명.행장。

야촌(1) 2017. 1. 31. 00:18

[생졸년] 26世 이개립『李介立,1546년(명종 1) ~ 1626년(인조 4)』

 

■ 역봉 이공 묘갈명 병서

    (櫟峯李公墓碣銘 幷序)

 

지은이 : 조경(趙絅:1586~1669/漢陽人)

 

명(明)나라 융경(隆慶)ㆍ만력(萬曆) 연간에 우리나라에 행실이 독실한 군자가 있었다.

그분의 성은 이(李), 이름은 개립(介立), 자는 대중(大中)으로 경주(慶州) 사람인데, 배우는 이들이 역봉 선생(櫟峰先生)이라 불렀다.


공은 어려서부터 우뚝하게 두각을 드러내었고, 조금 자라서는 하는 말마다 속기(俗氣)라곤 전혀 없었다.

선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같은 분이 유독 훌륭하게 여겨서 빈말로만 권장하지 않았으니, 그 명성이 사림에 자자하였다.


공이 가정에서의 행실은 실로 남보다 몇 배나 훌륭하였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는 그 뜻을 받들어 봉양하여 가난하다는 이유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병들었을 때에는 똥을 맛보고 노천에서 비는 등 모든 방법을 다해 병구완하였으며, 돌아가셨을 때에는 3일간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서 시묘 살이 하는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는데, 슬픔에 잠긴 공의 용모에 보는 자들도 슬퍼하였다. 뒤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몸을 훼손하지 말아야 할 나이가 지났는데도 앞서 치렀던 부친상처럼 거상(居喪)하였다. 그런데도 상을 치르다 죽었다는 비난에서는 벗어났으니, 훌륭한 군자는 신명(神明)이 지켜준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병술년(1586, 선조19)에 이조에서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여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늙은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신묘년(1591)에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또 참봉에 제수되자 비로소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그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갚아야 한 다’는 의리를 내세워 한 도의 사우(士友)들을 선도하여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때 마침 의주(義州)에서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가 내려졌다.

 

공이 서쪽을 향해 절하고 교서를 읽는데, 의리에 복받쳐 멈추었다 읽으면서 말끝마다 눈물을 흘리니, 무지한 백성이나 천한 병졸들조차도 귀 기울여 듣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전쟁과 기근이 이어져 재물과 곡식이 전혀 없었는데, 명나라 군사가 왜적을 추격해서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군량과 말먹이를 신속하게 운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관찰사가 둔전(屯田)을 경작할 방책을 세웠으나 그 일을 주관할 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공은 사양하지 않고 부지런히 경영하여 언덕과 습지를 살피고 비옥하고 척박한 곳을 분별하였으며 사람을 잘 선발하고 때를 잘 이용하였다.

 

또 호남(湖南)에 가서 조곡(糶穀>봄에 백성에게 꾸어 주던 곡식)을 청해서 종자로 삼았는데, 가을에 그 곡식이 잘 익자 군량이 풍족해졌을 뿐만 아니라, 굶주리던 이웃 고을의 많은 백성들도 이에 힘입어 회생하였다.

 

갑오년(1594)에 자여 찰방(自如察訪)에 제수되고, 을미년(1595)에 발탁되어 낭 천 현감(狼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병신년(1596)에 산음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고 또 사은숙배를 생략하고 부임하라는 명이 뒤따랐다.

 

공은 마침내 마음을 바꾸어 말하기를,“거만한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임지로 가서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소생시키니,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정유년(1597)에 왜군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유린하자 체부종사관(體府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이 공을 추천하여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삼았다. 병사(兵使)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이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을 싫어하여 거짓말로 공을 무함하여 조정에 아뢰어 공이 성단형(城旦刑)에 처해지게 되었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공이 마침 승지로 있다가 공의 무함 당한 실정을 드러내었기에 감형되어 향리로 돌아왔다.공은 이때부터 수십 년 동안 문을 닫고 찾아오는 사람을 물리치니, 친구들조차도 공의 얼굴을 보는 것이 드물었다.

 

오직 수업을 청하여 연구하고 강습하러 온 옛날 문도들의 신발만 항상 문밖에 가득하였는데, 이렇게 만년에 이르렀다. 동향의 기로(耆老)들과 함께 향산(香山) 백거이(白居易)의 고사를 본받아 철따라 좋은 날이면 술 마시며 시를 읊는 좋은 모임을 가졌는데, 백발에 여윈 얼굴로 구장(鳩杖)을 짚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모습을 바라보면 신선처럼 보였다고 한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공은 늘 탄식하면서 더러 종일토록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는데, 집안사람이나 자제들조차도 그 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을축년(1625, 인조3) 9월에 공이 며칠 동안 감기를 앓았으나 정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또렷하였는데, 절구 한 수를 입으로 불러서 친구에게 주니 바로 영결하는 말이었다.

 

또 시종하는 아이에게 동쪽을 향해 자리를 바로잡게 하고, 또 술을 내와 자제들에게 마시게 하면서 분명한 말로 위로하였다. 공은 스스로 붓을 들고서 몇 줄의 글을 썼는데 죽음을 앞두고 쓴 선한 말이었다.

이는 군자가 생을 바르게 마친 것이니 보통사람들과는 달랐다.

 

공은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태어나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 9월 20일 을축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80세였다. 영천군(榮川郡) 서쪽 석종산(石宗山) 감좌(坎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효종(孝宗) 계사년(1653, 효종4) 가을에, 공이 선조조(宣祖朝)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공이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만큼 한번 문과에 급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뜻이 과거 공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에게 수업하면서 일찌감치 학문을 하는 대방(大方)을 들었으니, 고기가 입을 기쁘게 하는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성현의 글을 좋아하였다.

 

글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충신과 효자들이 충렬과 효성을 다하는 대목에 이르면 직접 그 사람을 본 것처럼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자제와 손자들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이를 표준으로 삼았는데, 강개하고 의기(義氣)가 드러나 반드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웃 고을의 어린 학생들도 공의 덕성에 감화되어 선량하게 된 자가 많았다고 한다.

 

공은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고 또 백씨(伯氏)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형이 살아있을 때에는 우애와 공경을 다하였고 죽은 후에는 슬픔을 다하였으며 그 자녀들을 자신의 소생처럼 사랑하였다. 외삼촌이 얼마간의 재물을 공에게 남겨 주었는데 공은 그 문권을 불태우면서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아, 공에게는 이처럼 드러난 여러 행적이 있다. 가령 다른 사람들이 그 열 가지 가운데 두셋만 가졌더라도 이것만으로도 당세에 이름을 드러내어 높은 관직에 오르고 평소의 포부를 펼쳤을 것이니, 이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처음엔 참봉으로 불려나가는 데 그치고, 나중엔 조금 군정(軍政)을 다스리다가 갓 쓴 호랑이 같은 자를 장수로 만나 거의 그 이빨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단 말인가. 명(命)에 그 탓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 돌리랴. 그러나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는 데엔 후박(厚薄)과 다소(多少)가 있게 마련이다.

 

공의 천작(天爵)은 인작(人爵)에 필적할 수 있고, 공의 장수는 부유함을 능가할 수 있다. 더구나 난새와 고니 같은 뛰어난 자손이 공의 공업을 잇고, 석기린(石麒麟)과 봉황의 깃털 같은 훌륭한 자손이 대대로 태어났으니, 이씨(李氏)의 선행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 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공의 시조 이알평(李謁平)은 신라시조를 도운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그 가문을 열었는데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말엽에 이르러 휘 달충(達衷)은 호가 제정(霽亭)인데,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북변(北邊)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환조(桓祖 태조(太祖)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의 전송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태조(太祖)가 모시고 서 있었다.

 

공이 둘러보고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술잔을 받들어 서서 마셨다. 태조가 등극하여 그 자손들의 이름에 ‘입(立)’ 자를 넣도록 하였으니, 공의 훌륭한 견식을 가상하게 여겨서이다.

 

제정(霽亭)으로부터 5대를 내려와서 휘 선동(善童)은 부호군을 지낸 분으로 한양(漢陽)에서 용궁(龍宮)으로 와서 살았으니, 공의 조부이다. 이 분이 휘 해()를 낳았는데, 해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으며 예천(醴泉) 권례(權禮)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의 부인 영천 민씨(榮川閔氏)는 헌납 인(寅)의 후손으로 부친은 진사 운서(雲瑞)이다.

부인은 공보다 16년 앞서 생을 마쳤는데, 공과 한 언덕에 장사 지냈지만 무덤을 달리 하였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휘음(徽音)은 품행이 있고 글을 잘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에 보임되고, 예문관에 천거되려다가 일찍 죽었다. 차남 희음(希音)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름이 알려졌다. 딸은 진사 순천(順天) 김소(金韶)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 아들 이음(爾音)은 충찬위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금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있는 숭언(崇彦)과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정랑을 지낸 상언(尙彦)은 학유의 소생이다. 승언(承彦)ㆍ종언(從彦)ㆍ계언(繼彦)은 진사의 소생이다. 만창(萬昌)은 김 진사의 소생이다.

 

기언(起彦)과 우언(又彦)은 충찬위의 소생이다. 내외로 증손과 현손이 백여 명이나 되어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종손 달의(達意)는 지금 승문원 박사로 있는데, 회양부사의 소생이다.

 

회양부사가 그의 조부와 나의조부가 같은 해에 사마시에 합격했다고 하여 학사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행장을 가져와서 내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조부께서 돌아가시어 장사지낸 지 이제 30년이 더 되었는데, 묘목이 두 손으로 감쌀 만큼 자라도록 아직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부디 어른께서 불초손(不肖孫)의 잘못을 조금 덜어주시어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 글을 아끼지 말아 지하에 은혜가 미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펴지 못한 조부의 뜻이 거의 펴질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께서 동년(同年) 현사(賢士)를 헤아리면서 반드시 역봉(櫟峰)을 으뜸으로 삼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 행장을 살펴보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내가 감히 의리상 글 솜씨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여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태사공이 이르기를 / 太史公有言曰

효는 처음에는 부모를 섬기고 / 孝始於事親

 

중간에는 임금을 섬기고 / 中於事君

마지막에는 몸을 세우는 것이라 하였네 / 終於立身

 

아, 공의 돈독한 효성은 / 於惟公之篤孝兮

이 말에 맞추어도 부합하지 않음이 없네 / 質斯語而無一不契

 

생사장제를 한결같이 고례대로 행하고 / 生死葬祭之一以古禮兮

임금에게 옮겨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네 / 移於事君者誠節是勵

 

물러나선 자손들을 훌륭하게 가르쳤으니 / 斂而退藏式穀子孫兮

아름다운 명성 대대로 이어진다 하겠네 / 亦可謂媺名之世世

 

인간 세상에 맞지 않고 하늘과 맞았으니 / 畸於人而不畸於天兮

하늘이 준 것이 오랠수록 더욱 부합하리라 / 天之所與者久而彌劑

 

[각주]
[주01]역봉 이공 묘갈명 : 이 글은 이개립(李介立, 1546~1625)에 대한 묘갈명이다.

이개립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성오당(省吾堂)ㆍ역봉(櫟峰)이다.


[주01]그 …… 않았으며 : 어버이의 뜻을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증자(曾子)가 그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
과 고기를 밥상에 올렸으며, 상을 치울 때 증석에게 “누구에게 주시겠습니까?” 라고 여쭈고, 증석이 “ 남은 것이 있느냐?” 라고 물으면 반드시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대해 맹자가 뜻을 봉양한 것이라 하였다.《孟子 離婁上》


[주02]몸을 …… 나이 : 쉰 살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曲禮)〉에 “나이 50이 되면 상을 치르느라 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五十不致毁〕”고 하였다. 이는 50이 되면 늙어 쇠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상례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03]훌륭한 …… 지켜준다 : 한유(韓愈)의 〈상장복야제이서(上張僕射第二書)〉에 나오는 글이다.


[주04]성단형(城旦刑) : 고대에 있던 형벌의 일종으로 4년 동안 죄인에게 아침에 일어나 성을 쌓도록 시키는 노역이었다. 
여기서는 형벌의 범칭으로 쓰였다.


[주05]향산(香山) 백거이(白居易)의 고사 :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말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벼슬을 그만둔 뒤에 향
산으로 들어가 나이 많은 명사들과 향산구로회를 결성하여 풍류를 즐겼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주06]구장(鳩杖) : 노인의 지팡이 머리에는 비둘기를 새긴다. 《풍속통(風俗通)》의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싸우
다가 패하여 숲 속에 숨었는데 비둘기가 그 위에 울었으므로 추격(追擊)하는 군사가 사람 있는 줄 모르고 지나갔다. 뒤에 황제가 되자 비둘기를 잊지 못하여 지팡이 머리에다 새겨서 노인에게 주었다.”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주07]술을 …… 위로하였다 : 한국문집총간 3집에 수록된 《제정집(霽亭集)》 권4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개립이 자
식들에게 각자 술 한 잔을 마시게 하면서 위로하였다고 한다.


[주08]갓 …… 자 : 비록 의관을 갖추고는 있지만 호랑이처럼 잔혹한 심성을 지닌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김경서(金景
瑞)를 가리킨다.
[주09]공의 …… 있고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천작이 있으며 인작이 있으니, 인의와 충신, 선행을 즐겨서 게
을리하지 않는 것은 천작이요, 공경대부는 인작이다.” 하였다.


[주10]석기린(石麒麟) :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문인 서능(徐陵)이 나이 겨우 두어 살 되었을 적에 고승 보지(寶誌)가 그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천상의 석기린이로구나.〔天上石麒麟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남의 문재 있는 자제를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陳書 卷26 徐陵列傳》


[주11]봉황의 깃털 : 자식이 훌륭한 아버지를 잘 닮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나라 때의 명신 왕도(王導)의 아들 왕소(王劭)가 일찍이 시중(侍中)이 되어 대궐문을 출입할 적에 환온(桓溫)이 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대노에게는 본디 스스로 봉황의 터럭이 있었다.〔大奴固自有鳳毛〕”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인데, 대노(大奴)는 왕소를 지칭한다. 《世說新語容止》

 

[주12]태조가 …… 하였으니 : 《제정집(霽亭集)》 권4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달충이 서서 마신 것〔立飮〕을 가상히 여겨 ‘입(立)’ 자를 이름에 넣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13]학사 …… 행장 : 한국문집총간 91집에 수록된 《학사집(鶴沙集)》 권9에 〈선교랑산음현감역봉선생이공행장(宣敎郞
山陰縣監櫟峯先生李公行狀)〉이 실려 있다.

 

[출처]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l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공역] l 2015
◇용주유고(龍洲遺稿) 제16권

 


[원문]

 

櫟峯李公墓碣銘 幷序 - 조경(趙絅)

 

皇明隆,萬間。吾東有篤行君子者。曰姓李。名介立。字大中。慶州人。學者稱爲櫟峯先生云。幼而頭角嶄然。及少長。吐辭脫塵臼。先輩如朴嘯皐承任獨視韙之。吹奬無虛口。聲藉藉士林間。公內行實有加於人數等者。親在。以志爲養。不以貧無爲解。親癠。嘗糞露禱。無所不盡其極。親歿。口絶水漿者三日。廬于墓下。不釋衰絰。深墨之容。見者慘焉。及居後喪。年過不致毀。而一如前喪之爲。猶免滅性之譏。愷悌君子。神明所扶持者是耶。丙戌。選曹用孝廉薦拜齋郞。以親老辭。辛卯。偕旅軒張先生擧遺逸。又拜齋郞。始出肅謝。明年。島夷亂作。公投袂而起。以主辱臣死之義。爲一道士友倡。糾合義旅。會哀痛敎自龍灣下。公西向下拜。且讀且乙。淚隨言下。雖甿隷賤革。莫不聳聽感動者。時兵饑相乘。財粟殫亡。天兵逐寇屯南。飛蒭輓粟。急不容息。臬臣方策渭上畊。而難於主事者。公不辭。經營勤剋。相原隰分肥磽。擇人任時。且嫁於湖南。謁糶以爲種。至秋有熟。不唯軍餉足。傍邑菜色。賴而回生者亦多。甲午。除自如察訪。乙未。擢拜狼川縣監。皆不赴。丙申。拜山陰縣監。又有後命無朝肅。公乃幡然曰。偃蹇非臣道之任。蘇枯沃渴。流逋四歸。丁酉。倭黃石山城也。體府從事黃汝一推轂公爲鄕兵大將。兵使景瑞惡義兵不受制於己。惎公以躛言。以聞將陷城朝。韓西平柳川公適居出納。表白公誣枉。得減律歸鄕里。公自是杜門却掃者餘數十年。雖親舊亦罕見其面。唯舊時門徒請業硏講。戶外之屨恒滿。至年至。與同鄕耆老倣白香山故事。佳辰令節。勝集觴詠。蒼顏白髮。鳩杖後先。人望之若神仙云。遇昏朝政亂。居恒咄咄。或終日仰屋而已。雖家人子弟。莫窺其際。乙丑九月。公感霜露有日。神思了了。無異平昔。口占一絶與親舊。卽永訣語也。又命侍兒正席東向。又命取酒飮子弟辯。自操筆書數行文字。蓋臨沒善言也。蓋君子之正終異夫人也。距其生嘉靖丙午。至天啓六年九月二十日乙丑。享年八十。葬于榮川郡西石宗山坎坐原。孝宗癸巳秋。以公宣廟朝原從。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公妙年成進士。一蹴上第不是難事。而雅意不屑博士業。業從金鶴峯先生游。聞爲學大方最蚤。於聖賢書。不翅若蒭豢之悅口。伊吾窮歲年。得忠臣孝子蹈烈殫誠處。擊節俯仰。如親見其人。訓子弟若孫。必以是爲標準。慷慨義形。必泣下乃已。由是旁邑蛾子薰其德性而善良者亦多云。公事親之道旣盡。又事伯子如嚴。生盡友敬。歿盡其哀。撫其男女。一視己出。外舅以廢着遺公。公焚其債券。無一分顧藉心。噫嘻。公之群行。灼灼如此。使他人有其十二三。之以焜燿當世。致高官展素蘊。豈足道哉。何故始之徵辟。齋郞而止。終也小試治賦。而値虎而冠者爲帥。幾落其牙。不歸於命而奚。然天之報施善人。自有厚薄多少。公之天爵。足以敵人爵。大年足以軼富厚。況峙鵠停鸞。昭琴接緖。石麟鳳毛。連世有人。則天於李氏。爲善之報。不可謂不厚矣。公鼻祖有李謁平。佐羅祖爲開國元勳。紹開厥家。冠冕不絶。至麗季。有諱達衷。號霽亭。嘗奉使北邊。將還。桓祖餞之。太祖侍立。公環顧不敢當。奉酌立飮。及太祖登極。乃命以立字名其子孫。蓋嘉公有大見識也。自霽亭五傳有諱善童。副護軍。自漢陽來龍宮居焉。公王父也。是生諱。禦侮將軍。聘醴泉權禮之女生公。公配榮川閔氏。獻納寅之后。父進士雲瑞。先公十六年卒。與公藏同壟異墓。生二男一女。長徽音。行而甚文。登文科補成均學諭。將翰薦。早卒。次希音。晉士。有名稱。女適順天金韶。進士。側出子爾音。忠贊衛。曰崇彥。文科。今淮陽府使。曰尙彥。文科前工曹正郞。學諭出也。曰承彥。曰從彥。曰繼彥。進士出。曰萬昌。金進士出。曰起彥。曰又彥。忠贊衛出。內外曾玄孫男女幷百餘人。不可盡紀。而宗孫達意時任承文院博士。淮陽出也。淮陽以其大父與不佞大父同年司馬也。手金學士應祖氏狀授不佞曰。吾祖父之歿而葬。今三十年有奇。不翅墓木拱矣。尙闕樹顯刻。願執事少寬不肖孫責。而毋靳不華者筆徼惠泉壤。則祖父之不該其須者。庶幾伸矣。不佞作而稱曰。不佞童子時。聞大父數同年中賢士。必以櫟峯爲首。今按狀良然。不佞義不敢以不文辭。許爲之銘。銘曰。太史公有言曰。孝始於事親。中於事君。終於立身。於。惟公之篤孝兮。質斯語而無一不契。生死葬祭之一以古禮兮。移於事君者誠節是勵。斂而退藏。式穀子孫兮。亦可謂媺名之世世。畸於人而不畸於天兮。天之所與者久而彌劑。<끝>

용주유고 > 龍洲先生遺稿卷之十六 / 墓碣

-------------------------------------------------------------------------------------------------------------------------------------

贈左承旨櫟峯先生李公墓誌銘 幷序 - 김응조(金應祖)

 

先生姓李。諱介立。字大仲。號櫟峯。又號省吾堂。慶州人。新羅佐命大臣謁平之後。高祖諱肅靖。南部令。曾祖諱昱。大護軍。祖諱善童。副護軍。考諱?。禦侮將軍。娶醴泉大姓權公禮之女。以嘉靖丙午八月十二日生先生。少受學嘯皐朴先生承任。先生亟稱之。中隆慶丁卯進士。戊辰。丁內艱。丙戌。薦操行卓異爲齋郞。以親老辭。丁亥。丁外艱。辛卯。與旅軒張先生顯光。同薦遺逸爲齋郞。始赴朝。甲午。除自如道察訪。乙未。超拜狼川縣監。皆不赴。丙申。除山陰縣監。仍命除朝辭。遂僶勉赴任。時金景瑞爲兵使。先生惡其行。不禮之。及景瑞兵潰。先生以體府令。糾合官義兵禦賊。凡有擒斬。不以報景瑞而報義陣。景瑞怒。遂捃摭誣啓。賴韓柳川浚謙宣力。初被拿旋釋。家居數十年。日與其門徒。講學不怠。有時觴酒。超然自得。乙丑。感微恙。口占一絶。與親舊訣。翌日。處置家事。令子弟各飮酒一杯。仍命侍兒正席。東首而逝。實九月二十日。同年月日。葬于榮川郡西石宗山坎坐之原。追贈左承旨。先生天分絶人。自少刻意飭行。及從鶴峯金先生誠一遊。益自奮勵。篤學而力行之。姑擧其見於言行者。先生愉色事親。處窮約豐甘旨。親癠晝夜衣不解者六朔。禱天嘗糞。備盡誠孝。喪三日。水漿不入口。廬于墓。晨夕哀臨。衰絰不脫。鹽菜不御。日再啜稀粥。見棘容者隕淚。服闋。猶獨居山寺。終禫月。縣官以孝報于監司。先生瞿然遣子弟。追奪其狀以還。壬辰亂。倡義討賊。及得龍灣罪己敎書。展讀流涕。爲文諭衆以臣死之義。遠近感奮。訓誨後進。隨才成就。嘗移寓甘文縣。考德問業之士坌集。空谷爲之成村。撫孤姪。嫁娶裝送如己出。賙窮族。自出家財嫁其女。以至舅氏與莊則焚債券。婦黨分產而少自與。其在山陰。氷蘗藉藉。此特其疏節也。夫以先生之德之盛。韜晦益深。休譽益隆。除命頻煩。待以不次。所謂修天爵人爵自至者。奈何一出而扼於兇帥。繼以値昏朝。卷懷林泉以終老。嗚呼。不我者天也。配榮川閔氏。進士雲瑞之女。先先生十六年卒。葬在先生墓左。男長徽音。文科學諭。有文學。不幸夭。二男曰崇彥。文科前司藝。曰尙彥。文科前典籍。俱有文譽。三女。適生員張龍遇,士人權浚,秦必亨。次希音進士。尙氣節有操行。男承彥,從彥,繼彥。女壻金城,權垤。女適進士金韶。男萬昌。女壻權國樑,黃櫶,黃梴。側室子曰爾音。子又彥。內外曾玄孫男女百餘人。銘曰。
行修于家。名著于時。天畀其德。胡嗇其施。孔不尤人。臧豈沮君。婆娑物表。脫略世紛。求道盈門。隨才面命。功在斯文。不用何病。公門必大。子孫多賢。槐陰鬱鬱。餘慶緜緜。<끝>

 

학사집 > 鶴沙先生文集卷之八 / 墓誌

------------------------------------------------------------------------------------------------------------------------------------

宣敎郞山陰縣監櫟峯先生李公行狀 - 김응조(金應祖)

 

李氏籍慶州。新羅初。有諱謁平。識大卵異人。爲佐命大臣。自是以降。上下數千年。冠冕承承。高麗末。有諱達衷。號霽亭。嘗奉使東北。將還。我桓祖餞于野。及行酒。以太祖立其後。公輒立而飮。後世子孫。用太祖命。至今以立字爲名。霽亭之孫曰興商。鷄林君。鷄林之孫曰肅靖。南部令。生諱昱。大護軍。生諱善童。副護軍。自漢陽來居龍宮大竹里。生諱?。禦侮將軍。娶醴泉大姓權公禮之女。以嘉靖丙午八月十二日。生先生。幼有異質。岐嶷不凡。稍長。聰銳善屬文。大爲朴先生承任所奇奬。中隆慶丁卯進士。戊辰。禦侮公病。先生晝夜侍藥。衣不解帶者六朔。禱天嘗糞。誠孝備至。喪三日水漿不入口。旣葬。廬于墓下。衰絰不脫。鹽菜不御。朝夕啜稀粥。棘容欒欒。宗黨交諫。不聽。伯氏進士公慮其腸胃焦枯。先自酌一杯以強之。先生伏而不起。進士公亦泣而止。服闋。猶獨居山寺。終禫月乃歸。鄕人以聞于官。官以聞于監司。先生聞之瞿然。卽令子弟邀路止之。奉大夫人移居醴泉金堂谷。侍奉。極其誠敬。瀡滫侈於富家。庭闈之內。歡慶洋溢。丙戌。薦操行卓異爲齋郞。以親老不忍離側辭。丁亥。丁外艱。先生年已知命。執喪逾制。一如前喪時。而猶不至滅性。人以爲有冥佑。辛卯。朝廷選遺逸。本道惟旅軒張先生顯光及先生與焉。拜齋郞始謝恩。壬辰南亂作。與一境士友倡義。以遏搶掠。及得龍灣敎書。會義陣諸公于鼎山。展讀流涕。爲文諭衆以臣死之義。觀者感動。觀察使憂无兵糧餉。且憫餓殍滿國。無以賑欲。大擧屯田。難其人。先生不辭。極力經理。冒危險往湖南。得穀種而來。列邑賴焉。甲午。除自如道察訪。乙未。擢拜狼川縣監。皆不赴。丙申。除山陰縣監。命除朝辭。遂僶勉赴任。收拾瘡殘。結以恩信。流逋指以爲歸。時兵使金景瑞以賤隷猝起。自知衆心不厭。方立威於列邑。先生素不以常調自處。又惡其醜行。不禮之。景瑞固已貌敬而心銜之。丁酉。景瑞軍潰於黃石。一路土崩。體府從事黃公汝一。請以先生爲鄕兵大將。先生辭不獲。遂團聚精銳以禦賊。凡有擒斬。不以報景瑞而報義將。景瑞大怒。遂誣啓以不用將令。擅殺已降。寇至先去爲言。事將不測。賴韓柳川浚謙在政院。極力周旋。自上遂令罰米。朝紳皆割俸以助。得放還故里。由是而家居者餘數十年。杜門謝絶人事。每逢人自京師來。輒問玉體安否。無一語及時政。日與其門徒。講學不怠。又與同社諸公。倣商山故事。爲四老會。每趁佳辰。觴酒自娛。逮至昏朝。時事大變。有時仰屋長吁。掩抑不能語。傍人莫曉其意也。乙丑。先生年八十。感微恙。一日口占絶句一首。與親舊訣。翌日夕。命侍兒正席東首。自力書數行文字。字畫不亂。俄又命子弟各飮酒一杯曰。侍病日久。得無餒乎。遂翛然而逝。實九月二十日。以其年某月某日。葬于榮川郡西石宗山坎坐之原。嗚呼。先生風骨淸剛。精神大耐。自少刻意飭行。及從鶴峯金先生誠一遊。得聞爲學大方。不屑意擧子業。日讀古聖賢書。多識前言往行。隨事精察而力行之。及其道尊德邵。益自韜晦。而令聞日彰。除書屢下。待以不次。所謂修天爵。人爵自至者。奈之何一不幸而牛刀暫試。遽被兇帥之搆誣。二不幸而昏朝政亂。久致碩德之高遯。三不幸而天日重明。旋値大耋之云亡。曾未展布其所蘊。豈非天哉。雖然。先生之道。旣不能行於世。而先生之德。見於言行。在人耳目。姑撮其一二言之。先生性至孝。養生送死。各盡其道。而一出於至誠。鄕人之心悅誠服。亦豈非民彝之所同也。其奉先也。不苟求豐腆。以致敬爲先。致潔爲務。常以二簋用享之義。申飭其子弟。年彌高。不能拜跪。每當祭時。必具衣冠。伏于位次。以盡如在之誠。養於外舅氏。奉養一如所生。及喪。心制終三年。王母夫人權氏沒。終朞不御肉。持伯氏進士公服。終朞廢擧。爲之經紀其家。嫁娶其子女。當其裝送姪女前後一日。伯氏再見于夢。若有申謝意。其誠意通神明如此。居閒處獨。簾几蕭然。終日端坐。左右圖書。每至前脩格言及忠臣孝子立節盡職處。間以開示諸孫。反復曉諭。辭氣慷慨。往往至於流涕。雍容接物。渾是一團和氣。而精華發外。人自敬服。嘗遊泮宮。遇銓相於鶴峯金先生邸舍。人皆屛避。先生獨長揖爲禮。銓相異之。旣去。鶴峯先生謂先生曰。君能爲我生顏色。朴大庵惺。嘗因亂挈家以相就。非見慕之深。豈至此歟。訓誨後進。隨才而篤。多所成就。嘗移寓甘文縣。考德問業之士坌集。空谷爲之成村。臨財利一刀兩段。舅氏嘗以一大莊與之。先生留見在穀物爲養親需。遂取債券焚之曰。儒者之家。不宜有此等文字。其與婦黨分財。一聽其自取。而自占殘瘠。有窮族受老人財賄。將嫁以女。先生自以家財償老人而俾迎年少者。其在山陰。痛自節損。衙門肅然。縣人久猶嘖嘖不容口。嗚呼。夫以先生之德之盛。至孝可以感鬼神。精忠足以貫金石。而卒之罹讒慝。卷懷林泉以終老。自是斯文之不幸。士林之厄會。彼投降賣國之兇帥。焉能使先生不遇哉。於先生又何慊焉。李學士光胤。與一鄕諸人呈書。列先生德行於官。得以轉聞天聽。事下該曹。啓請旌贈。而値西亂。事竟不行。鄕人今又將再申前懇。好德象賢公議之不容泯。又可見矣。配宜人榮川閔氏。獻納寅之後。進士諱雲瑞之女。先先生十六年卒。墓在先生墓左。男長徽音。以文學鳴。登文科。補成均學諭。將薦入藝文館。未果而卒。次希音。進士。有操行。女適進士金韶。學諭有二男。曰崇彥。文科。今沃溝縣監。曰尙彥。文科。前成均典籍。三女。適生員張龍遇,士人權浚,秦必亨。進士有三男。承彥,從彥,繼彥。二女。適金城,權垤。金進士有男萬昌。女適權國樑,黃櫶,黃梴。側室子曰爾音。有子起彥,又彥。內外曾玄孫男女。多至一百餘人。嗚呼。積善餘慶。天理豈可誣耶。先生諱介立。字大仲。號櫟峯。又自號省吾堂。<끝>

 

학사집 > 鶴沙先生文集卷之九 / 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