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곡 처사 이공 묘갈명 병서
(仁谷 處士 李公 墓碣銘 幷序)
[생졸년] 이융일『李隆逸, 1636년(인조 14) ~ 1698년(숙종 24)』
찬인 : 이상정
판서에 추증된 고(故) 석계(石溪) 이공(李公)은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고 시례(詩禮)의 학문으로 가도(家道)를 전하였으며,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학덕과 문장, 행실, 재주로 세상에서 존중받았다.
공은 그중 여섯째로, 휘가 융일(隆逸)이고 자는 자약(子躍)이다. 숙성하여 풍도가 있었고, 독서하고 문장을 짓는 데 세속의 진부한 말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옛날의 치란과 흥망을 살피기 좋아하여서 인정과 세태의 변화에 미치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요점은 실용에 이루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만년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에 유념하여 말하기를“유가(儒家)는 본래 도통이 있는데 젊었을 때 여기에 종사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하였다.공이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에도 공을 아는 자가 없었다.
경적(經籍)을 공부하는 여가에 농사일에 힘쓰는 것에 재미 붙이고, 자제들에게 독서하여 선을 행하고 진취에 급급하지 않도록 가르치니, 자제들이 끝내 문학으로 현달하였다. 명릉 무인년(1698, 숙종24) 7월 28일에 병으로 졸하였으며 수는 63세였다.
처음에는 영해(寧海) 독재동(篤材洞)에 장사하였다가 19년 뒤인 병신년(1716) 3월 모일에 안동부(安東府) 치소 동쪽 마동(馬洞)의 언덕 자향(子向)에 천장(遷葬)하였다.이씨는 본래 신라 시대의 알평(謁平)을 시조로 삼았는데, 중세에 보조(補祚)의 공으로 재령(載寧)에 식읍(食邑)을 받았으므로 마침내 지금의 재령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증조 이은보(李殷輔)는 부사직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조부 이함(李涵)은 현감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선고 이시명(李時明)은 능서랑(陵署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선비 김씨는 검열 김해(金垓)의 따님이고, 생모인 장씨(張氏)는 지평에 증직된 장흥효(張興孝)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부인 김씨는 바로 검열 김해의 손녀이자 김초(金礎)의 따님이다.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장남 은(檼)은 백부인 참봉공(參奉公)의 후사로 출계하였고, 둘째는 경(桱)이고, 셋째 만(槾)은 참봉이며, 영(栐), 삼(槮), 림(霖)이다. 세 딸은 권동무(權東茂), 김경렴(金景濂), 금후열(琴后烈)에게 시집갔다.서자 하나는 저(樗)이고, 서녀는 배성경(裵星景)에게 시집갔다.
손자로는 지약(之爚), 문환(文煥), 천환(天煥), 경환(絅煥), 유환(猷煥), 태환(台煥), 봉환(鳳煥), 주환(宙煥)이 있다. 경(桱)이 문환을 후사로 삼아 공의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문환의 장자가 치원(致遠)이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약간 명이다.공을 장사할 때에 형인 갈암(葛庵) 선생이 그 묘지를 짓고 조카인 주부공(主簿公)이 또 그 행장을 지었으니, 그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 밝히는 데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
대개 공이 경전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여 계속 전진하는 보탬이 있었던 것은 여대우(呂大愚)와 같았고, 뛰어난 재주를 자부하여 경세제민으로써 스스로 기약한 것은 진동보(陳同甫)와 비슷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자식들에게 자기 힘으로 먹고살게 하며 경학을 남겨 준 것은 서유자(徐孺子), 위장유(韋長孺)와 비슷하다.
명문이 이와 같은즉 공의 시종을 알 수 있을 것이기에 그 자세한 행적과 고고한 절의는 기재하지 않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동해의 빈 터에서 / 東海之堧。
유학 목탁 울렸도다 / 大振儒鐸。
일곱 형제 어진 덕에 / 七棣聯輝。
도학이 활짝 피었네 / 韡韡其萼。
공은 자질이 빼어나고 / 公資有異。
풍도와 의표 걸출하였지 / 風標偉卓。
젊어서 사모함은 가륙이요 / 夙慕賈陸。
만년에 구한 것은 관락이라 / 晩求關洛。
시대가 나와 맞지 아니하니 / 時不我諧。
농사일 속에 즐거움 찾았네 / 樂在耕鑿。
자제들이 학문에 진보하여 / 庭趨有兟。
자질과 학문이 빈빈하였네 / 質文交錯。
그 뿌리를 물 주고 돋우어 / 有漑其根。
만년에 수확을 하였네 / 歲晏是穫。
봉긋한 언덕 위에 / 宰如之原。
묘소가 자리하였네 / 冠履攸託。
명문이 아첨 아니니 / 我銘匪諛。
후세에 길이 고하리 / 用詔遐邈。
[각주]
01)석계(石溪) 이공(李公) :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회숙(晦叔), 호가 석계이
고, 영해(寧海) 출신이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으로 그 딸을 아내로 맞아 이현일(李玄逸)을 낳
았다. 따라서 대산에게는 외고조가 된다.
02)중세에 …… 받았으므로 : 고려 때 이우칭(李禹偁)이 보조 공신으로 문하시중을 지내고 재령군(載寧君)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월성이씨(月城李氏)에서 분관된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시조로 삼고 있다.
03)백부인 참봉공(參奉公) : 이융일(李隆逸)의 백형인 이상일(李尙逸)을 말한다.
04)형인 …… 짓고 : 이현일이 유배지에서 동생 이융일의 부음을 듣고 묘지를 지었는데 《갈암집(葛庵集)》 권25
에 〈망제통덕랑이군묘지(亡弟通德郞李君墓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05)주부공(主簿公)이 …… 지었으니 : 이현일의 아들이자 대산의 외조부인 이재(李栽)가 72세에 장악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현재 이재의 문집인 《밀암집(密菴集)》에는 이융일(李隆逸)의 제문만 2편 보일 뿐 행장은 실려
있지 않다.
06)여대우(呂大愚) : 여조검(呂祖儉, ?~1196)이다. 송나라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이다. 자는 자약(子約)이
고, 호가 대우이다. 여조겸(呂祖謙)의 아우로, 형에게 수업을 받았다. 한탁주(韓侂胄)를 거슬러 귀양 가서 유
배지에서 학문에 전심하여 독서 궁리로 자득하였다.
07)진동보(陳同甫) : 진량(陳亮, 1143~1194)이다. 송나라 무주(婺州) 영강(永康) 사람이다. 자는 동보, 호는 용천
선생(龍川先生)이다. 재기가 뛰어나고 군사를 잘 알아서 효종(孝宗)과 광종(光宗) 때 여러 차례 상소하여 금
(金)에 대한 설욕을 주장하였다. 주희(朱熹)와도 학문을 논하였으나 경세제민을 위한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여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였다.
08)서유자(徐孺子) : 서치(徐穉, 97~168)이다. 동한(東漢) 예장(豫章) 남창(南昌) 사람이다. 자가 유자이다. 효성
과 근검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항상 스스로 농사지어 생활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진번(陳蕃) 등이 천거하여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09)위장유(韋長孺) : 위현(韋賢)이다. 서한(西漢) 노국(魯國) 사람이다. 자가 장유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학문에
힘써 학자들이 추로대유(鄒魯大儒)라고 불렀다. 그의 네 아들이 모두 현달하였는데, 자식들에게 황금을 물려
주기보다는 경서 한 권을 잘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漢書 卷73 韋賢傳》
10)젊어서 사모함은 가륙(賈陸)이요 : 가륙은 서한의 학자이자 경세가였던 가의(賈誼)와 육가(陸賈)를 병칭한 말
이니, 젊어서는 정치에 참여하여 학식을 이용해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데 뜻을 두었다는 의미이다.
11)만년에 …… 관락(關洛)이라 : 관락은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을 병칭한 말로 송대 성리학의 대학자들이 살던
곳이니, 만년에는 성리학을 연구했다는 말이다. 관중에는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낙양에는 정호(程顥) 와
정이(程頤) 형제가 있었다.
[原文]
故贈判書石溪李公, 隱居求志, 用詩禮傳家。有子七人, 以德學文章行藝重於世, 而其第六曰諱隆逸, 字子躍, 岐嶷有風槩, 讀書爲文, 不屑世俗陳腐語, 好觀前古理亂興壞以及人情世變, 靡不考究, 要之可底於用。晩而留意洛, 建諸書, 曰:“儒家自有路脈, 恨不少年從事也。” 公旣無求於世, 世亦莫之識者, 經籍之暇, 明農灌圃以自娛。敎諸子以讀書爲善, 不汲汲於進取,諸子卒以文學顯。明陵戊寅七月庚子病卒, 壽六十三。始葬于寧之篤材洞, 後十九年丙申三月某日, 遷于安東府治東馬洞之原子向。李氏本新羅謁平之世, 中世有以補祚功, 食采于載寧, 遂爲今貫。曾祖諱殷輔, 副司直, 贈左承旨。祖諱涵, 縣監、贈吏曹參判。考諱時明, 除陵署郞不起, 贈吏曹判書。妣金氏, 檢閱諱垓之女 : 張氏, 贈持平諱興孝之女, 俱贈貞夫人。配金氏, 卽檢閱之孫諱礎之女。六男, 檼出后伯父參奉公, 桱、槾參奉, 栐, 槮, 霖, 三女, 適權東茂, 金景濂, 琴后烈。餘男一樗, 女適裵星景。孫男, 之爚, 文煥, 天煥, 絅煥, 猷煥, 台煥, 鳳煥, 宙煥。桱以文煥後, 以奉公祀。其長子曰致遠。內外孫曾玄, 幷若干人。公將葬, 兄葛庵先生, 誌其幽, 從子主簿公又狀其行, 所以揄揚其德媺, 靡餘憾矣。蓋公服習典訓, 得征邁之益, 似呂大愚 : 懷奇負才, 以經濟自期, 似陳同甫 : 邵農敎子, 食力以遺經, 似徐孺子, 韋長孺。銘如是, 可以得公之始終矣, 其細行疎節不載。銘曰 東海之堧, 大振儒鐸。七棣聯輝, 韡韡其萼。公資有異, 風標偉卓。夙慕賈陸, 晩求關洛。時不我諧, 樂在耕鑿。庭趨有兟, 質文交錯, 有漑其根, 歲晏是穫。宰如之原, 冠履攸託。我銘匪諛, 用詔遐邈。<끝>
대산집 > 大山先生文集卷之四十八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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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弟通德郞李君墓誌銘 - 李玄逸
君諱隆逸。字子躍。本月城人。其上祖謁平。爲新羅太祖佐命功臣。高麗時。有封載寧君者。子孫因別以爲貫。入本朝。有諱孟賢官至副提學。於君間五世。曾祖諱殷輔。忠武衛副司直。贈承政院左承旨。祖諱涵。宜寧縣監。贈吏曹參判。考諱時明。陵署郞。贈吏曹判書。初娶光山金氏。檢閱諱垓之女。生一男。後娶安東張氏。贈司憲府持平諱興孝之女。生六子。凡兄弟七人。君於倫次爲第六。自其兒幼時。形貌魁碩。嶷嶷有風槪。大爲先君子所奇愛。及讀書爲文。欲效馬,韓雄深雅健之體。務去世俗陳腐卑弱氣。尤喜涉書史談世變。究觀古今治亂存亡興壞之理。平居論說。衮衮不已。余每聽之。未嘗不稱善相屬。君亦以余爲知己。晩復好觀洛建諸書。反復尋繹。將有所得。屬余罪廢淪落。恨未得相對訂得失也。又其敎戒諸子。惓惓以飭躬謹行爲言。此其平生日可見之行也。君早嘗應擧。旣不得志於有司。遂輟不爲。卽明農治圃。經籍以自娛。未嘗求知於人。世亦莫有爲之推挽者。甲戌夏。太學士權公愈,侍郞權公瑎責大嶺之南。君時往來相聞。討論經理。間及當世之務。二公甚器重之。恨相知之晩。不幸命與仇謀。旣又疾病沈澌。以戊寅七月庚子。竟不起疾。年六十三。以沒之年某月某日。葬府西篤材洞某向之原。東距高王父衣冠之藏。未滿百步。君娶光山金氏。卽藝文館檢閱贈弘文館修撰諱垓之曾孫。處士諱光實之孫。處士諱礎之女。生丈夫子六人女子子三人。男長曰檼。出爲伯父后。以奉我先祀。次桱,槾,栐,槮,霖。方鑽礪經訓。庶幾有成立者。女長適權東茂。次適金景濂。季在室。餘男女各一人亦幼。內外孫男女幷若干人。余以狂疏。獲罪投荒。方其與家人別。君雨泣立道左。有遠別惘惘之意。後四年。余蒙恩南徙。君亟欲來省我。已病不果矣。每憑尺牘。交相慰勉。尙期有後會。不意呑不復宣。凶音遽至。失聲驚號。悲不自勝。乃知臨岐一別。便作死生之訣也。嗚呼。尙忍言哉。及君將葬。桱,槾輩與其堂兄檼具書來告余湖南瘴海之濱曰。亡父有蘊不發。畢命窮巷。使姓名字行罔顯于世。在今揚闡幽潛。覆露其遺胤者。非吾叔父而誰。且得一言以賁其幽。則亦將少慰土中之悲矣。余執書流涕曰。吾尙忍銘吾弟也與。且吾名在罪籍。畏約自守。奈不敢操筆作文字何。因掩抑不能言者累日。旣又惟之。自吾弟捨我而先。意緖忽忽。有時昏不省事。自量非久於世者。恐遂遷就。終沒吾弟之名。於是銜哀抆淚。直書其姓名族世志行之梗槩。係之以銘曰。
有志有才。宜達而施。曾不少試。惟後之貽。
갈암집 >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五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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