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이달존 묘표(李達尊 墓表) ) - 이곡(李穀) 지음

야촌(1) 2016. 12. 11. 02:08

고려국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이군 묘표

(高麗國 奉常大夫 典理摠郞 寶文閣直提學 知製敎 李君 墓表)

 

[생졸년] 1313년(충선왕 5) ~ 1340년(충혜왕 1) / 향년 27歲

 

이곡(李穀) 撰/1340년(충혜왕 복위1)/목은 이색의 아버지

 

유원(有元) 지원(至元) 6년(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10월 1일에 왕부단사관 첨의평리(王府斷事官僉議評理/왕명을 받들어 刑事에 관한 행정을 맡은 관서의 從二品 벼슬) 이공『李公=이제현(李齊賢)』이 그의 문생인 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元나라가 일본 침략을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했던 관청의 정6품 벼슬) 이곡(李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일찍부터 우리 아이 달존(達尊)과 어울려 놀았으니 그 사람됨을 알 것이다.

 

그러니 그의 묘표를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 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슬픔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차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군은 휘(諱)가 달존(達尊)이요, 자(字)는 천각(天覺)이다. 세계(世系)는 계림이씨(雞林李氏=오늘날의 경주이씨)에서 나왔다. 군은 고(故) 임해군(臨海君) 이공 진(李公 瑱)의 손자요, 영가군(永嘉君) 권공 보(權公 溥)의 외손이요, 상당군(上黨君) 백공 이정(白公 頤正)의 사위이니, 내외 모두 세상에 혁혁한 문벌의 집안이다.

 

무릇 도덕과 문장을 칭할 때에는 반드시 이 세 정승의 가문을 먼저 거론하곤 하는데, 군은 어려서부터 귀족 자제의 티를 전혀 보이지 않고서,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11세가 되었을 때에 가문의 공로를 인정받아 별장(別將/正七品 무관직)에 임명되었다. 18세에 문사에 능해 과거(文科庚午榜/1330년 충혜왕 즉위년)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 사보(思補/도첨의사사의 정치·행정·법제>인사의 정6품 벼슬)를 거쳐 헌납(獻納/정5품 관직으로 돈이나 물품의 출납관리)으로 승진하였고, 뒤이어 감찰장령(監察掌令/종4품 벼슬)과 전의부령(典儀副令/정치·행정·법제. 인사관리의 정4품 관직)으로 영전하였다.

 

기묘년(1339, 충혜왕 복위년) 겨울에 존공(尊公/부친을 높여 이르는 말)이 국란으로 인해 왕을 수행하여 원(元) 나라로 들어가자 당시에 인심이 의구(疑懼) 하였는데, 군은 말하기를 “나는 군부(君父)가 있는 것만을 알 뿐이다.”라고 하고는 필마로 따라갔다.

 

이듬해에 사태가 안정되고 왕이 정사에 복귀할 때에 미쳐서 전리총랑(典理摠郞/典理司의 亞相으로 정4품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사보(思補/도첨의사사의 정치·행정·법제>인사의 정6품 벼슬) 이상의 자리에 있을 때는 모두 관직(館職)을 겸하였다.

 

6월에 동쪽으로 돌아오다가 병에 걸린 나머지 수레에 실려 압록강을 건너와서 29일 신해에 길에서 죽었다.

장림역(長林驛/고려시대 成州지역의 역으로 오늘날 평안남도 성천군 장림리)에 임시로 빈소를 차렸다가 8월 모 갑자에 영구(靈柩)를 맞아 오게 한 뒤에, 10월 모 갑자에 모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자녀는 5남매를 두었다. 장남 덕림(德林)은 나이 11세이고, 다음 수림(壽林)은 9세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이에 앞서 군이 태부인(太夫人/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적에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한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종족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 뒤에 학업에 종사하여 글을 잘하고 일에 종사하여 재간을 보이자, 그가 가업을 제대로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다. 하늘이 만약 이 사람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여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수명을 더 빌려 주지 않고 이렇게 했단 말인가. 아!, 슬픈 일이다.

 

[출처]

『가정집(稼亭集)』권11/이곡(李穀)의 문집

『동문선(東文選)』권124에 실려 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이곡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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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國奉常大夫,典理揔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李君墓表。

 

이곡(李穀) 撰

 

有元至元六年庚辰十月朔。王府斷事官僉議評理李公。命其門生征東行省員外郞李糓曰。子早與吾兒達尊游。知其爲人。宜爲表其墓。又曰。人孰不愛其子。而吾之愛甚。故其亡也哀之過。嗚呼。糓其尙忍爲之辭乎。君諱達尊。字天覺。系出雞林李氏。故臨海君李公瑱之孫。今永嘉君權公溥之外孫。上黨君白公頤正之壻。內外皆奕世門閥。凡稱道德文章。必先三相家。君少無紈綺習。孝友恭儉。生十一。以門功拜別將。十八。工文詞。登乙科第。由思補陞獻納。尋遷監察掌令典儀副令。己卯之冬。尊公以國亂隨王北上。時人心危疑。君曰。吾知有君父而已。匹馬往從之。明年。事定王復政。轉典理捴郞。思補以上。皆兼館職。六月。東還得疾。輿過鴨淥水。二十九日辛亥。歿于道。旅殯長林驛。八月某甲子。使迎柩。十月某甲子。葬某原。年二十八。子男女五。長曰德林。年十一。次曰壽林。九歲。餘皆幼。嗚呼。始君居太夫人憂。哀毀幾滅性。宗族稱其孝。旣學而文。旣事而幹。人知其能業其家。天若篤生斯人而有爲於斯世也。胡不假年而至於斯。嗚呼。

 

[자료출처]

『가정집(稼亭集)』권11/이곡(李穀)의 문집

『동문선(東文選)』권124에 실려 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이곡(목은 이색의 아버지)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