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石谷 李圭晙 先生 墓碣銘幷序。

야촌(1) 2015. 12. 22. 21:18

석곡 이규준선생 묘갈명 병서(石谷 李圭晙先生墓碣銘幷序)

생졸년 : 1855년(철종 6)~1923년

 

先生의 姓은 李氏요, 諱는 규준(圭晙), 字는 숙현(叔賢)으로, 선비들은 그를 석곡선생(石谷先生)이라 불렀고, 貫鄕은 慶州로, 신라 楊山村長 瓢岩公, 이알평(李謁平)이 그의 始祖이시다,

 

고려 文忠公 益齋 李齊賢선생이 그의 中祖이고, 高祖는 이름이 규손(圭遜)이고 수직(壽職) 으로 가선(嘉善)의 품계를 받았고, 曾祖의 諱는 福元이니 또한 嘉善의 품계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이름이 진욱(進旭)이시고, 아버지는 억영(億榮), 어머니는 金海金氏이다.

 

哲宗 乙卯년(1855) 十一月 十日에 영일군 부산면(夫山面 : 현 동해면) 임곡동에서 태어나 총명하고 지혜로와 보통사람보다 뛰어나 經書와 역사(歷史)로부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침내 국내의 연로하신 스승, 이름난 선비, 여러 어진 분들을 찾아뵙고 일찍이 품고 있던 의심스럽고 어려운 점들을 여쭈었으나 결국 해답을 얻지 못하여 詩로써 탄식하시기를 '스승 찾아 천리를 다녔으나 꾀한 바가 어그러졌더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책을 쓰셨으니, 역(易)은 圖書解, 禮는 정의(訂疑), 詩書는 演義, 春秋는 讀法 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앞사람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바를 밝히신 것이다. 또 포성기문(浦上奇聞)과 石谷心書 등을 지었는데 이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東學은 오로지 永樂大全을 위주로 하여 조금이라도 程朱學說에 등지는 것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다스렸는데, 선생은 고주소(古註疏)를 위주로 하고 永樂大全은 참고로 사용하였으므로 程朱의 취지와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세속 유가들과 사이비 선비들의 겉치레 형식이나 外樣을 중시하는 것을 심히 질책하셨고, 왕왕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에 강직하여 듣는 이들이 놀라서 화내고 욕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더욱 돈독히 당신의 견해를 믿었으므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내가 醫學 또한 옛사람들의 설을 많이 고쳤으나 시험해 봐서 어긋남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믿었는데, 心性學은 징험할 자취가 없는 까닭에 모두들 의심을 품으니 이것이 한탄스럽다" 하셨다.

 

일찍이 癸亥년(1923) 춘하 무렵에 규철이 선생을 좇아 禮와 易을 배웠는데, 그 때는 선생께서 이미 몸이 고달프셨다. 그러나 가르치시는 틈틈이 글 쓰는 손을 멈추지 않았으니 아마 돌아가실 때가 임박함을 아신 듯하다.

마침내 이 해 겨울 시월십일일 침상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육십 구세이셨고, 이듬해 사월 장기면 죽정리 화주산 酉坐의 언덕에 모셨다. 부인 김해김씨 凡女께서는 선생가시고 십 팔년 되던 庚辰년(1940)에 돌아가셨으니 左便에 합장하였다.

 

설하에 三男一女를 길렀으니, 장남은 박종(泊鍾), 그 아래 돈종(惇鐘), 순종(淳鍾)이고, 딸은 영천 황보(皇甫) 희(熺)에게 시집갔다. 박종(泊鍾)의 아들은 우윤(雨潤), 우을(雨乙)이고, 돈종(惇鐘)의 아들은 우줄(雨茁), 우민(雨民)이고, 순종(淳鍾)의 아들은 우택(雨澤), 우진(雨珍), 우영(雨英), 우덕(雨德), 우룡(雨龍), 우복(雨福)이다.

 

황보(皇甫) 희(熺)의 아들은 원(垣), 평(坪), 판(坂), 곤(坤), 규(圭)이고, 우윤(雨潤)의 아들은 민상(敏相)이며, 우을(雨乙)의 아들은 구상(久相), 영상(泳相), 경상(京相)이며 우줄(雨茁)의 아들은 봉상(峰相), 해상(海相), 기상(琪相)이며, 우택(雨澤)의 아들은 주상(朱相), 웅상(雄相)이며, 우진(雨珍)의 아들은 효상(孝相), 준상(駿相), 무상(武相)이며, 우영(雨英)의 아들은 무상(戊相)이며,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선생께서 가신지 어언 오십년이 되었다. 묘에 업적을 새겨 세우려 함에 내가 일찍이 문하에 있었던 연유로 비문을 부탁하니 정분을 생각해서는 거절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나, 선생문하의 끝에서 받들어 모셔서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成人이 되기 전이라 마침내 어질지 못하고 별로 식견이 없는 무리를 면하지 못하므로 선생의 온전하고 크신 체용을 어찌 능히 천명(闡明)할 수 있으리요.!

 

간략히 좁은 소견으로 본즉 대개 선생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음이 아니요. 스스로 聖賢의 傳에서 얻은 것이 많았으니 여러 제자들에게 주신 글 가운데, "나는 마음이 黃老에 노닐고 行은 孔子를 지키고자 하니 취사(取捨)는 여기에 있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선생의 本末을 알 수 있게 한다.

 

銘에 가로되,

학문이 天과 人과 性命의 근본을 꿰뚫었으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리라.

덕행을 적고 싶어도 풀어서 잘 말할 줄 몰라서

간략히 정성스런 마음을 기록하여 묘 앞에 새긴다.

 

甲寅년(1974) 칠월 이십이일

급문(及門 : 문인.문하생) 창산 조규철 근찬(昌山 曺圭喆)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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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石谷 李圭晙先生墓碣銘幷序

 

先生姓李氏. 諱圭晙. 字叔賢. 學者稱石谷先生. 貫慶州. 新羅楊州村長瓢岩公. 諱謁平. 其始祖也. 高麗文忠公益齋先生. 諱齊賢. 其中祖也. 高祖諱圭遜. 壽階嘉善. 曾祖諱福元. 亦階嘉善. 祖諱進旭. 考諱億榮. 妣金海金氏.以哲宗乙卯十一月十日. 生迎日郡東海面林谷洞. 聰睿絶倫. 自經史以至諸子百家. 靡不貫穿. 遂歷訪國中老師宿儒諸賢. 問其所嘗疑難于中者而終無得焉. 則以詩爲歎有‘千里求師計又差’之句. 於是潛心硏鑽. 筆之於書. 易則有圖書解. 禮則有訂疑. 詩書則有演義. 春秋則有讀法. 皆發明前人之所未發. 又有浦上奇聞石谷心書等作. 已行于世.盖我東學者. 專主永樂大全. 少有背於程朱之說則至律以斯文亂賊. 先生則治古註疏而參用大全. 故不能無違於程朱之旨. 且深疾俗儒曲士色莊者之爲. 往往有矯枉過直之論. 聞者莫不驚駭. 至有加以怒罵者. 然先生益篤信己見而無所恤. 嘗曰“吾於醫學亦多革古人之說而試之無差. 故人皆信之. 至於心性之學則無跡可徵. 故咸懷然疑. 是可歎也.”昔癸亥春夏之月. 圭喆從先生受禮易. 時則先生已憊矣. 然誨人之暇. 手不停寫. 蓋知其年壽之迫也. 竟以是年冬十月十日. 考終于寢. 享年六十九. 以翌年四月. 葬于長鬐面竹井里華柱山酉坐之原. 配金海金氏凡女. 後先生十八年庚辰歿. 合祔于左.育三男一女. 長泊鍾次惇鐘淳鍾女適永川皇甫熺. 泊鍾男雨潤雨乙. 惇鍾男雨茁雨民. 淳鍾男雨澤雨珍雨英雨德雨龍雨福. 皇甫男垣坪坂坤圭. 雨潤男敏相. 雨乙男久相泳相京相. 雨茁男峰相海相琪相. 雨澤男朱相雄相. 雨珍男孝相駿相武相. 雨英男戊相. 以下不盡錄.今距先生之歿已五十年矣. 將竪碣于墓. 以余嘗及門之故. 屬以顯刻之文. 誼無容辭. 然樞衣於門墻之末. 爲日無多. 且年未弱冠. 終不免不賢識小之列則其於全體大用安能有所闡明也. 略以管窺則蓋其學絶無師承. 自得於聖賢傳中者爲多. 而贈諸生之言有曰 “我欲心游黃老. 行守孔子. 取舍在爾.” 此可以知先生之本末也已. 銘曰學貫天人性命之原. 然無知者. 必俟後子雲. 欲述德行. 不解善言. 略記衷感. 銘于墓門

 

甲寅七月二十二日.

及門昌山 曺圭喆 謹撰.

 

 

 

 

↑석곡 이규준선생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