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 BC 145경~BC 85경).
중국의 천문관, 역관(曆官),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歷史家)이다.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기원전(BC) 105년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誹謗嫌疑)로 심문(審問)을 당했다.
무제(武帝)가 그를 죽이지는 않고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사기(史記)》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궁정의 연대기 기록은 이미 이전의 황실에서는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제후국이었던 노(魯)의《춘추(春秋)》가 그러한 종류이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인 《사기(史記)》가 이 위대한 경전 《춘추(春秋)》와는 전혀 비교될 수조차 없으며, 자신은 공자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한(漢)의 역사가로서 그의 뒤를 이은 반고(班固:32경~92)는 사마천이 여러 학파의 주장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도가사상에 몰두한 점을 비난했다. 사기에서 그의 주된 업적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
끝 부분은 열전(列傳)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행위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열전에는 여러 이민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국과 이들 이민족 간의 관계는 무제 때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사기(史記)》는 뒷날 기타 왕정사(王政史)의 모범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정사(政史)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를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章)에서 기록했는가 하면, 동일한인물의 잘못된 행동을 다른 장에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안목이야말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각 장의 끝부분에 예리한 비판적 논평을 첨가했다. 그는 역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생동감있고 유연한 산문의 거장으로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가 살던 시대 이래로 《사기(史記)》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傑作)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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