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한유(韓愈,768 鄧州, 824長)

야촌(1) 2006. 4. 18. 00:42

■ 한유(韓愈,768 鄧州, 824長)

     산문(散文)의 대가(大家)이며 탁월(卓越)한 詩人.

 

↑한유(韓愈,768鄧州, 824長)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이다. 어려서 고아(孤兒)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 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時期)에 유학(儒學)을 옹호(擁護)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參拜)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不遇)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흘(疎忽)히 하던 〈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주역(周易)〉을 광범위(廣範圍)하게 인용(引用)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性理學)의 기초(基礎)를 놓은 셈이었다.

 

그가 쓴 〈원도(原道)〉·〈원성(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白眉)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 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한유의 어릴 적 고사(古事.) : 伯兪有過, 其母笞之, 泣. 其母曰 他日笞, 子未嘗泣, 今泣何也?

對曰兪得罪笞常痛今母之力不能使痛是以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