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한무재(漢武帝) -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야촌(1) 2006. 4. 4. 15:25

한무재(漢武帝,BC141 ~ BC87) -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한무재 유철(漢武帝劉徹)

 

한무재(漢武帝)는 이름이 유철(劉徹)이고 시호는 세종(世宗)이다. 

 

한무제는 문제[文帝, BC 202~BC 157]와 경제(景帝, 경제[景帝, BC 188 ~ BC 141, 전한(前漢)의 제6대 황제]가 이루어놓은 안정된 나라에서 황제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았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한무제는 즉위(卽位) 후 신분, 지역(地域)을 가리지 않았고 널리 인재를 선발(選拔)하여 그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收斂)하여 국정을 처리했다. 

 

견식(見識)이 있고 감히 황제에게 간언(諫言)할 용기(勇氣)를 가진 유지인사들을 황궁에 불러들여 직접 면담을 진행했는데, 이런 면담을 그 당시 대책[對策]이라고 했다. 이런 대책을 통해 많은 인재들이 등용(登用)되였는데 등용된 인재들은 한무제의 위업(爲業)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 무제와 동중서의 천인대[千人對)] 문답은 이미 널리 알려진 정치문헌으로 되였다. 즉위 시 배출된 인재들 중에는 경제학가 이며 정치가인 동중서(童中舒), 교육가이며 정치가인 공손홍(公孫弘) 사학가인 사마천(司馬遷), 문학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군사가인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외교가인 장건(張騫), 음악가인 이연년(李延年) 등이 있다.

 

기원전 136년 한무제는 동중서(童中舒)의 제의에 따라 유교를 정치 지도 이념을 삼았는데 이 유교는 중국 역사(歷史)에서 2천년 간의 정치 이념(理念)으로 되였다. 동중서는 유교를 봉건 최고정치 원칙으로 삼고 이를 문화사상을 통일하는 유일한 척도로 삼았다. 하여 유학은 일반 학설로부터 경(經)으로 되였습니다. 

 

즉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춘추(春秋) 등 5경은 그 후로 역대 통치자들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科擧試驗)의 주요한 내용으로 되였다. 한무제 시기 유가학설은 큰 발전을 가져왔다. 원삭(元朔) 2년, 한무제는 주부언(主父堰)의 제의에 따라 추은령[推恩令]을 추진했다. 

 

중국의 제후국들은 전통적으로 오직 장자만이 부친의 작위와 영토를 물려받게 되어있었다. 

한 무제가 추진해온 [추은령]은 다른 아들도 부친의 제후국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규정(規程)했다. 

 

이 정책으로 하여 제후국의 토지는 갈수록 작아지고 또 세 결이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집권제는 자연스럽게 더욱 강화 되였다.

 

한나라의 경제 수입원 중 가장 큰 것은 야철(冶鐵), 제염, 주전(鑄錢)이다. 

유방(劉邦)이 진(秦)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창건할 때 지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 세가지를 민간인 경영하도록 허락했었다. 

 

기원전 119년 한 무제는 민간인의 야철, 제염, 주전을 금지시키고 국가 전매를 시행하여 조정은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되였다. 하여 역대 어느 왕조보다 풍부한 재정으로 사회가 안정되자 한무제는 서남 변방 개척 사업을 시작했다.

 

유목(遊牧) 민족인 흉노(匈奴)가 막강한 세력으로 비단길을 장악하면서 서한(西漢)에 큰 위협(威脅)을 조성(造成)하게 되었다. 흉노는 북방의 유목 민족으로 한나라 초기에 그냥 낙후한 노예제 단계에 처해 있었다. 

 

흉노는 기병의 우세를 이용해 한나라를 여러 차례 침입했다. 이에 반격해 한 무제는 15차례나 흉노와의 전쟁을 진행했다. 기원전 119년, 한 무제는 장군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 BC 140~BC 117]에게 명하여 흉노를 징벌(懲罰)하게 했다.

 

또한 한 무제는 당시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서역으로 장건(張騫)을 파견해 군사동맹 체결을 통해 흉노를 협공할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 무제는 장건의 보고을 통해 서역의 수많은 나라를 알게 되였다. 

 

한 무제는 해마다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는데 이로써 마침내 실크로드가 중국의 역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에 서역을 연결시킨 실크로드는 동서 문화 교류의 통로로 되였다.

 

한 무제는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秦始皇)이 세운 봉건중앙집권제를 공고, 발전시켰으며, 중화민족의 유구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추진함에 있어서 큰 기여를 했다. 한 무제는 중국 봉건사회 첫 전성기의 대표적인 황제로 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