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呂太后-漢 高祖 劉邦의 아내.

야촌(1) 2006. 4. 15. 09:35

 여 태후(呂太后, BC 241~180) - 한고조 유방(漢 高祖 劉邦)의 아내.

 

▲여태후(呂太后)

 

기원전 241~180 시대의 한고조 유방의 아내이다. 이름은 여치(呂雉). 산둥성(山東省=산동성) 단현(山東省 單縣) 출신으로, 어렸을 때 아버지는 원수를 피하여 장쑤성(江蘇省=강소성) 패현(沛縣)으로 피난와서 살았다.

 

첫 번째 만난 연회때 유방(劉邦)의 비범한 기도에 반하여 기쁘게 반려로 맺어졌다. 일테면 평범한 인간이었던 유방의 부인인 셈이다. 기원전(BC) 205년 유방은 항우(項羽)를 이기기 위하여 여치(呂雉)와 유방의 부모는 이년간이나 인질로 있었다. 

 

203년 여치는 한나라로 귀환하여 관중에 머물렀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후 칭 제후에 여치는 황후로 봉하여졌다. 둘 사이에는 그녀가 낳은 (盈)이라는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여치는 위인 됨이 모략(謀略)을 일삼았다. 한초, 여후(呂后)는 유방을 도와 한신(韓信)을 죽이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제일 잔혹녀로 꼽히는 여태후는 모성이 매우 강한 사람 이었다. 그의 아들 태자가 보위에 올랐을 때, 팽월(彭越)등 이성왕(異姓王)들이 도전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한신(韓信), 팽월(彭越) 등을 미리 제거했다.

 

유방이 죽은후, 혜제[惠帝, BC 210~BC 188, 전한(前漢)의 제2대 황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차남]를 세워 자신은 황태후가 되었다. 혜제는 유약하였기에 실제 정치는 그녀의 장악하에 놓였다. 188년 혜제 붕어후에 소제(少帝)를 세웠는데 소제는 생모를 위하여 여후가 죽기를 바라였기에 원한어린 말을 남기었는데 이에 발끈하여 소제제위 8년에 여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상산와 유의(劉懿-제7대왕)를 옹립 황제를 시켰다. 호령일출태후(號令一出太后)란 말은, 여후가 국정을 마음대로 장악한 16년간을 가르키는 말이다. 여태후의 평가는 후세에 분분하지만 유방을 도와 휴양생식의 황노 정치를 병행시키며 나름으론 애를 썼다.

 

유방 임종전의 여후는 유방이 죽기전에 미리 안배를 하였다. 소하상국후에 누가 그 자리를 이을 것인지 그러자 조참(曹參), 왕릉(王陵), 진평(陳平)순으로 있게 하였다. 단독임을 막게 하였다. 문화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유가천하는 위기가 찾아 왔다. 유씨천하를 위하여 주발(周勃)이 필요하였기에 태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여후가 장악하였다. 단지 그녀는 유방이 임종전에 중요 인사의 안배적 차원에서 신하들을 다루어 나갔다. 상국의 자리는 그렇게 소하(蕭何), 조참(曹參), 왕릉(王陵), 진평(陳平), 주발(周勃)의 개국공신 순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각기 대신들을 쥐락 펴락하는 바람에 나라는 안정되었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유방이 죽자 척부인(戚夫人, ? ~ 기원전 194년=유방의 측실)을 죄인(罪囚)들에게 욕보이게 던져놓았으며, 강제로 독약을 먹이고귀에는 유황을 붓고 두 눈까지 뽑아버렸다. 결국에는 양팔과 다리까지 잘랐으며, 시체는 똥오줌이 넘치는 변소에 던져버렸다. 질투심(嫉妬心)을 붙태우며 20년간 권력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는 태자의 이복형제 및 숙모도 처치한 뒤 아들을 여(呂)씨 집안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황실 혈통을 유 씨에서 여 씨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여태후가 죽은 뒤 여씨 일족의 권력은 유씨 집안으로 넘어갔다. 

 

여태후 만년, 자손이 모두 죽자 부끄럽게도 고조의 자손이라 속여 릉여씨(凌呂氏), 등 모든 여씨 외척(外戚)들이 후가 되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세수 62세로 붕어하자 한고조(漢高祖=유방)의 묘 장릉(長陵)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35리 지점)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