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1935년 중국을 돌며 선전비행을 하던 당시 조종복을 입은 권기옥. | 국가보훈처 자료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의 비행학교 졸업장이 복원됐습니다.
권 선생의 공훈을 입증하는 기록물입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지난 2일 “권기옥 애국지사가 항공학교에서 받은 필업증서(졸업장)와 국민정부 군정부본부에서 받은 상위 관찰사 위임장 등 기록물 5건을 복원했다”고 밝혔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난 권 지사는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해 어린 나이에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어 독립운동가 문일민, 장덕진 등과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1925년 2월 중국 남서부의 운남육군항공학교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됐는데요.
이번에 복원된 필업증서는 다가와치비행학교를 1927년 졸업, 한때 최초 여류비행사로 잘못 알려졌던 박경원보다 2년 앞선 것입니다.
↑ 권기옥(權基玉) 선생의 비행학교 필업증서(왼쪽)와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 |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제공
권 지사는 1926년부터 10여년간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다 1928년 일본 경찰에 다시 체포돼 옥에 갇혔습니다. 석방 후 1929년 국민정부 군정부본부 항공서 항공 제1대 상위 관찰사에 임명됐는데, 이때 받은 위임장도 이번에 복원됐습니다.
권 지사는 1943년 중경 임시정부 직할로 재조직된 한국애국부인회 사교부 주임 등으로 활동했는데요.
그는 1948년 귀국 후에는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지냈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1988년 4월 19일 88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윤선자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권 지사는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당시 여성의 삶을 옥죈 편협한 인식을 극복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비행한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한국인”이라고 했습니다. 복원된 기록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확인하세요.
▶일제강점기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선생의 기록물 복원
지난해 8월에는 권기옥 선생의 평전 <날개옷을 찾아서>도 나왔습니다.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나 권기옥의 생애를 조명한 2015년 8월14일 경향신문 기사 ▶“식민지 소녀 권기옥 ‘조선총독부 폭격’ 투지로 비행사 됐죠”(한윤정 선임기자)를 전해드립니다.
↑권기옥(權基玉) 선생의 동로항공 사령부 비행사 위임장(왼쪽)과 표창장. |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제공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1901~1988). 그의 생애가 작가 정혜주씨(52)의 평전소설 <날개옷을 찾아서>(하늘자연)로 거듭났다.
평양에서 태어나 17살 때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품었던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시절 3·1운동에 가담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중국으로 망명한다.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안기겠다는 투지로 상해임시정부의 추천장을 받아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하고, 1925년 2월 중국과 한국의 최초 여성비행사가 된다.
임시정부가 독립군 항공대를 창설할 여력이 없어 중국공군에 투신, 항일전선에서 싸우고 무공훈장까지 받는다. 해방 이후 공군 창설에 기여해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그는 이상화 시인의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부인이기도 하다.
이런 권기옥의 생애가 온전히 재구성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작가 정씨는 권기옥을 일컬어 “모국 해방을 위해 날아오른 독립운동의 강철날개”라고 하면서도 “해방 이후 그녀의 삶은 양 날개 중 왼쪽 날개를 꺾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한다.
“권기옥은 조국 독립에 헌신하기 위해 의열단,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렇다고 좌파는 아니었죠. 철저한 중도였는데, 그마저도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조심스러운 문제였어요.”
정씨의 소설 작업은 권기옥의 완전한 복권이자 제국과 식민지, 전쟁과 여성의 문제를 숙고하는 여정이었다.
10여년 전 ‘딸과 함께 읽는 여성 이야기’를 기획하면서 권기옥을 찾아낸 그는 무척 기뻤다.
‘소녀의 몸으로 일제에 고문당해 죽은’ 유관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밥을 지었던’ 정정화 등 독립운동사 역시 비켜가지 못한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4세에 비행사가 돼 하늘로 날아오른 권기옥은 조국 독립과 여성의 자아 실현이란 이중과제를 실현했다.
↑권기옥 선생의 국민정부군 항공 제1대 상위 관찰사 위임장(왼쪽 위)과 편역원 위촉 공군상위
임명장(왼쪽 아래). 오른쪽은 권 선생의 국군수첩. |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제공
그런데 2005년 장진영 주연의 영화 <청연>이 개봉하면서 박경원(1901~1933)이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잘못 알려졌다. 박경원은 일본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해 1927년 1월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는 3등 비행사 면허증을 받았다. 그 후 1933년 일제의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영화는 1994년 출간된 일본 여성작가 가노 미키요의 평전 <건널 수 없는 해협>에 근거해 제작됐다.
정씨는 영화 개봉 열흘 전 박경원이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아니란 사실과 그의 친일 행적을 인터넷에 올렸다.
영화는 박경원을 민족주의자로 미화한 터라 관객들의 거센 비난에 부딪혔고, 개봉 열흘 만에 내렸다.
“권기옥과 박경원의 최초 논란은 복잡한 한·일관계의 단면입니다. 일제는 1932년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이듬해 내선일체를 내세워 박경원을 ‘일만연락비행’에 참가시키고, 국내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합니다.
그런 박경원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한국여성항공협회와 일본부인항공협회의 교류과정에서 재등장하죠.” 지금도 권기옥은 최초의 전투기 여성비행사, 박경원은 최초의 민간기 여성비행사라는 식으로 이원화돼 회자되는 실정이다.
오래전 기획했던 집필이 늦어진 건 자료수집의 어려움 때문이다. “생전에 일간지에 연재된 회고록이 남아 있지만 중국 국공합작시기인 1925~1926년, 의열단과 접촉한 1934~1935년 등의 시기는 빠졌어요.
여운형, 김원봉 등 사회주의자들과의 접촉 사실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씨는 중국 현지 취재와 중·일 자료 등을 통해 이 부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권기옥 선생의 친척을 통해 입수한 앨범에는 윈난항공학교 졸업장, 시동생인 이상화와 함께 찍은 사진 등이 들어 있었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권기옥을 알리기 위해 평전이 아니라 평전소설로 썼다”면서 “그러나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역사가 소설을 쓰는 동안 상상력을 제한하고 중압감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소설은 식민지 소녀가 비행사가 되기까지 과정을 누에가 나비로 성장하는 데 비유했다.
↑1937년 3월 난징을 방문한 시동생 이상화 시인(왼쪽)과 남편 이상정(오른쪽)의 어깨에 팔을 걸친 권기옥.
남편 산은 이상정(汕隱 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독립운동가
시동생 무량 이상화(無量 李相和,1901년 4월 5일 ~ 1943년 4월 25일)/민족시인
<정리 |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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