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옹 이익 선생 묘갈명(艮翁 李瀷先生墓碣銘) - 최석정(崔錫鼎)
◈이익『李瀷, 1579년(선조 12) ~ 1624년((인조 2)』
◈간옹 이익(李瀷)은 충무公(忠武公) 이수일(李守一) 장군의 조카이고 우의정을 지낸 매죽헌 이완(李浣)의 종
형(從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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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장령 증 홍문관 전한 이공 묘갈명
(司憲府 掌令 贈 弘文館 典翰 李公 墓碣銘)
명곡 최석정 찬(明谷 崔錫鼎 撰)
공의 휘(諱)는 익(瀷)이고 자(字)는 형여(泂汝)로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개국 원공(元功) 알평(謁平)공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뒤 관면(冠冕, 벼슬한 사람)이 대대로 계속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성중(李誠中)이라는 분이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순(靖順)이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이오(李塢)는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를 지냈고 증직은 삼재(三宰, 좌참찬)이다. 증조 이자침(李自琛)은 생원으로서 증직이 이공(貳公, 찬성)이다. 조부 이난(李鸞)은 영의정과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을 추증 받았다.
부친 이유일(李惟一)은 판관(判官)으로 증직이 찬성이다. 모친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니 참봉 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출생하였다. 소년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형제가 남쪽 고을의 수령으로 있던 계부(季父) 계림공(鷄林公) 이수일(李守一)을 따라가서 뜻을 면려하고 학문을 독실히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세 과거장을 통과하여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였다.처음에 국자감(國子監, 성균관)에 배속되었다가 천거받아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갔으며,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에 순서에 따라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사서(司書)ㆍ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그때 광해군이 모후(母后, 인목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로 하여금 교대로 지키도록 하므로, 공이 진계(陳啓)하고 인피(引避)하면서 맨 먼저 ‘언관(言官)이 숙직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고 다음에 시사(時事)에 대해 지적하여 진달하다가 기휘(忌諱)함에 크게 저촉되었다.
광해군이 노하여 공을 불러 묻기를, “태아1)(太阿)를 거꾸로 잡혀 준 자가 어떤 사람이고 안팎으로 결탁한 것이 어떤 일이며 누구의 사주를 받고 하는 짓이냐?”고 명이 떨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그러나 공은 대답하기를, “이것은 항간에서 모두 하는 말입니다.
진언(進言)이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것인데, 어찌 간관[臺官]으로서 남의 사주를 받고 이렇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일곱 번 문초에 일곱 번 대답이 똑같아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또 ‘외척들이 권력을 멋대로 부린다’고 말하자, 광해군이 더욱 노하여 삼성(三省, 의정부ㆍ사헌부ㆍ의금부)에서 함께 추국(推鞫, 국문)하라고 명령하였으므로 화가 장차 측량할 수 없게 되었는데, 재상 기자헌(奇自獻)이 재차 차자(箚子)를 올려 구출하려 해명하였고 병을 빙자하여 국문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형신(刑訊)은 더 안 받고 면하게 되었다.
여러 명사들이 연이어 구금되자 조직(趙溭)ㆍ정온(鄭蘊) 제공과 함께 거처하며 경서를 강론하였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에서 취하여 ‘가의와(可矣窩)’ 석 자를 써서 옥문에 붙여 놓았다.
계류된 지 3년이 바뀌어서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 겨울에 이르러 흉측한 의론이 더욱 격렬하여 같은 때 옥에 있던 사람 중에 혹은 매 맞아 죽기도 하였으나 공은 사형을 감하여 제주도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오로지 성리서(性理書)만을 읽어서 항상 공경을 주로 함을 요지로 삼았다.
그리고 매일《서명(西銘)》ㆍ《경재잠(敬齋箴)》을 외었다. ≪주서절요(朱書節要)≫를 백여 독을 하여 깊이 스스로 깨닫고 반성되는 데가 있었다. 늦게 거문고를 배워서 때때로 몇 곡씩 타기도 했다.매일 아침에 의관을 정제하고 뜰에 내려서 북향 재배하고는 저녁이 저물도록 꿇어앉아 책을 읽었으며, 한 번도 게을리하는 태도를 보지 못하였다.
그때 송상인(宋象仁)과 정온(鄭蘊)이 같이 안치되어 있어서 서로 시를 수창(酬唱)하며 왕래하여 스스로 소일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 반정이 되자 제일 먼저 용서를 받고 사예(司藝)로 조정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요직에 있는 자에게 나아가 붙좇기를 권하기라도 하면 공이 웃으며 응하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달포 남짓하다가 그만두고 선영 아래 돌아가서 좌우에 도서를 쌓아놓고 태연히 자적하였다.누차 사헌부의 벼슬로 불렀으나 번번이 병이라고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장령(掌令)을 제수받고 서쪽의 변경(邊警)을 위하여 부름에 달려갔는데, 10일도 못 되어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키자 대가(大駕, 왕의 수레)가 남쪽으로 파천하였다.
밤은 깊고 창졸간의 일이어서 미처 알지 못하여 드디어 도보로 행재(行在, 행궁)에 갔더니, 바로 호종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면직되어 있었다. 공이 고향에 돌아가서 독실하게 공부에 전념하면서 후생을 면려하고 지도하였으며, 혹은 지팡이를 짚고 수석(水石)의 사이를 거닐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에 취하여 돌아와서 갑자기 하세하니, 향년이 겨우 46세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반정 뒤에 헌납(獻納)ㆍ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그 사이에 예조와 병조의 낭관(郎官) 및 직강(直講)을 지냈으며, 이조 정랑의 망에 오른 적도 서너 번 있었다.
공의 처음 호는 옥포(玉浦)였는데 뒤에 간옹(艮翁)으로 고쳤다. 하세한 뒤에 혼탁한 조정에서 곧은 절조를 지켰다고 하여 곧 품계를 돌려주었으며, 특히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추증하였다. 묘소는 충주 오갑산(烏岬山) 오향(午向)의 묏자리에 있다. 계실(繼室, 재취 부인)을 합장하였다. 초취는 영월 엄씨(寧越嚴氏)니 자제를 두지 못하였다.
후취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장절공(莊節公)의 후손이고 문경 현감(聞慶縣監) 신길원(申吉元)의 딸인데, 단아하고 장중하여 법도가 있어서 집안이 화목하였다.문경 현감공은 효행으로 천거받았고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난에 절사하였는데, 부인이 현철하고 행실이 있는 것은 연유하는 바가 있다고들 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인실(李仁實)은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이고, 딸은 생원 권구(權坵)에게 시집갔다. 사어(司禦)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지평 김원량(金元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5남을 두었으니, 이정(李炡)ㆍ이성(李煋)ㆍ이병(李炳)ㆍ이형(李炯)ㆍ이정(李烶)인데, 그중 2남과 4남은 진사(進士)이며 막내는 침랑(寢郞, 참봉)이다.
두 딸은 서윤(庶尹) 이지웅(李志雄)과 조일기(曺一蘷)에게 시집갔다. 권구의 2남은 권이칭(權以偁)ㆍ권이임(權以任)이며, 사위는 이주흥(李胄興)이다. 공의 측실이 낳은 이윤(李)ㆍ이찬(李燦)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딸은 고원(高瑗)에게 시집갔다.
이병과 이정은 노서(魯西) 윤공(尹公, 윤선거)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고, 이병의 아들 이중협(李重協)과 이정의 아들 이중술(李重述)은 연달아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 공이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으며, 남보다 뛰어난 밝은 재주를 타고나 조년(早年)에 대과 급제하였고 또 전심하여 도(道)를 탐색하였으므로 거의 우뚝하게 성취함이 있을 듯 하였는데, 혼탁한 세상을 만나 10년 동안을 귀양살이하였고 창명한 시기를 만나기에 미쳐 중도에 요사(夭死)하여 그 뜻과 사업을 다해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오랜 폐단의 그 임금이며 헐뜯었던 그 사람들이여 누가 이리 하게 하였던가?
오직 공만은 강직하여 가마솥 형벌도 피하지 않고 직무에 죽기를 다짐하였네.
두세 겹으로 꼰 동아줄에 묶여와서 가시 울타리로 에워싸였네.
험한 땅 밟으며 평온한 것 같았네.
우둔함을 정정하고 한 곳에 집중하여 잠언(箴言)을 옥문 가득 써서 붙이고 몸단속과 반성함을 더욱 치밀히 하였도다.
혼암한 시대를 만났다가 밝아졌고 이미 고생하다가 형통해졌는데, 어찌하여 그 생명 잃었단 말인가?
의롭지 못하게 귀하고 부함은 마멸됨이 무수하나 오직 명성만은 영원히 전해진다네.
아! 간옹(艮翁)께서는 자신에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나 오직 자손들이 그것을 만나리라.
[각주]
1)전한(典翰)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의 종삼품(從三品)
2) 태아(太阿) : 옛날의 보검(寶劍)을 이름. 상대방이 받기 편리하도록 칼자루를 상대에게 주었다가 도리어 자신이
해를 당한다는 고사(古事)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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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司憲府掌令贈弘文館典翰李公墓碣銘。
明谷 崔錫鼎 撰。
公諱瀷。字泂如。慶州李氏。肇自新羅開國元功謁平。纓冕奕世。入我朝。有諱誠中。左相諡靖順。是爲七代祖。高祖曰塢。長興主簿。贈三宰。曾祖曰自琛。生員贈貳公。祖曰鸞。贈領相月城府院君。考曰惟一。判官贈贊成。妣驪興閔氏。參奉德龍女。公以萬曆己卯降。少失怙恃。季父鷄林公守一宰南土。兄弟往從。厲志篤學。壬子。貫三場。中大小科。初隷國子。薦入翰苑。己卯。序陞典籍。遷司書,正言。時光海幽閉母后于西宮。使兩司輪直。公陳啓引避。首言言官直宿不可。仍指陳時事。大觸忌諱。主怒招問。倒持太阿者何人。內外締結者何事。聽何人指嗾。命下。人皆震慄。公對曰。此是街巷恒言。進言出於愛君憂國。寧有臺官受人指使而爲此乎。七問而七對。不少撓。且言戚畹擅權。主益怒。命三省推鞫。禍將不測。相臣奇自獻再箚救解。稱疾不赴鞫。以故得免刑訊。諸名士被囚纍纍。趙溭,鄭蘊諸公與同處。講劘經書。取朝聞夕死。題可矣窩三字於圜扉。繫更三載。至戊午冬。兇論益激。同時縲絏者。或至杖死。公則減死。濟州安置。專攻性理書。常以主敬爲要。日誦西銘敬齋箴。讀過朱書節要百餘遍。深有警省。晩學琴。時彈數弄。每朝正衣冠下庭。北向再拜。終夕危坐觀書。未見有惰容。時宋象仁,鄭蘊同栫棘。倡酬往復以自遣。癸亥反正。首蒙宥。以司藝還朝。人勸以進趨當路。笑而不應。居月餘。歸先壟。左右圖書。夷然自適。屢以臺省徵。輒辭以疾。不就。拜掌令。爲西警赴召。未十日。逆适稱兵。大駕南遷。夜深倉卒。不及知。遂徒步追及行在。未卽扈從人。並已削職。還故居。慥慥着工。奬誘後生。或撰杖相羊於水石。一夕醉歸。遽卒。年僅四十六。癸亥後。歷官正言,獻納,持平,掌令。間爲禮兵郞直講。擬銓郞者數四。初號玉浦。後稱艮翁。歿後卽還官秩。以昏朝直節。特贈弘文館典翰。葬在忠州烏岬山向午原。繼室祔焉。初娶寧越嚴氏。未育。後配平山申氏。壯節公後。聞慶縣監吉元女。端莊有度。閨門穆如。聞慶公薦孝行。節死于壬辰。其賢有行有自云。擧一男一女。男仁實。翊衛司司禦。女適生員權坵。司禦娶同郡金氏。持平元亮女。五男炡,煋,炳,炯,烶。二郞四郞俱進士。季寢郞。二女庶尹李志雄及曹一夔。權氏二男以儞,以任。女李胄興。公有側產,燦。武科。女高瑗。炳,烶游魯西尹公門。炳子重協。烶子重述。連擢文科。噫。公有至性純行。受才競爽。早闡科中。又摶心求道。庶幾卓然有造。値世昏椓。十年幽逬。及際昌期。中道夭。不克究其志業。庸非命歟。銘曰。 久弊其天。轢毀其人。其孰使然。惟公抗直。不避潤鑊。擬死於職。嬰以纆徽。栫之棘籬。履險若夷。證頑主一。箴言滿室。檢省愈密。遇昏而明。旣屯而亨。胡隕其生。不義貴富。磨滅無數。惟名不朽。猗艮翁。不祉于躬。惟後其逢。
출전 : 明谷集卷之二十三 >墓碣
↑충북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오갑산(烏岬山) 子坐午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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