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에 보존된 “칠지도(七支刀)”

야촌(1) 2008. 4. 8. 02:34

[홍윤기의 역사기행]

<28> 이소노카미신궁에 보존된 칠지도(七支刀)

 

먼 발치 매운 눈 2008.04.05. 10:47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백제 근초고왕이 倭 후왕에 寶刀 하사

 

 

↑한일관계 역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인 “칠지도”를 보관하고

  있는 석상신궁 정전과 전각 내부 모습.

 

현재 일본 나라현 텐리(天理)시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석상신궁)에는 ‘칠지도’(七支刀)가 보존돼 있다.

백제왕의 칼 칠지도는 한일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이다.

 

길이 74.9cm인 칠지도는 중심 칼날까지 합쳐 모두 일곱 갈래로, 날이 좌우 3개씩 대칭으로 엇갈려 펼쳐져 있다.

칠지도는 백제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재위)이 서기 369년 왜 나라에 살고 있던 백제인 후왕(侯王)에게 하사한 보도이다.

 

후왕이란 식민지 왕을 가리키는 왕호. 백제왕이 후왕에게 보내주었다는 사실은 이 칼 앞뒤 양면의 명문에서 잘 드러

다. 칼에는 60여자가 금상감(金象嵌)으로 음각돼 있다. 칼 이름인 ‘칠지도’도 음각된 한자 글씨(七支刀)로 나타나 있다.

 

일본에서 이 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말엽. 칠지도를 석상신궁 구석진 창고 안에서 발견, 세상에 알린 사람은 1873년 석상신궁의 신관(神官) 책임자인 궁사(宮司)로 취임해 1884년까지 머문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다.

 

부임하자마자 칠지도를 찾아낸 그는 “매우 녹슨 칼에 금빛이 약간 보여 녹을 살며시 떼어보니 문자가 나타났다.(중략) 이는 내가 신궁에 근무했을 때의 일이다”(‘大和國石上神宮寶庫所藏七支刀’)라고 기록했다.

 

녹을 떼고 난 뒤 칠지도에 나타난 글자는 어떤 것이었을까.

칠지도의 명문은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 교수를 비롯하여 가야모토 모리토(榧本杜人),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구리하라 도모노부(栗原朋信) 교수 등의 해독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문표(銘文表)’로 정리됐다.

 

[앞면]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以僻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것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앞면]

태화 4년(369년) 음력 5월 16일 병오 날,

대낮에 무수히 거듭 담금질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게 보내주노라. □□□□ 만듦.

 

[뒷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귀수세자는 성스러운 말씀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존토록 하라.

 

이로써 근초고왕과 귀수세자(뒷날의 근구수왕 375∼384 재위)는 왜 나라의 백제 후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하며, 덤벼드는 모든 적군을 무찌르라고 어명 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인 왜 나라를 잘 보전할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승시키면서 번창하라는 백제왕의 어명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백제에는 후왕이 있었는가. ‘삼국사기’ 472년 조에는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455∼475 재위)은 “장사여례(長史余禮)를 불사후(弗斯侯)로 삼았으며”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이외에 중국사서 등에도 백제 후왕이 기록돼 있다.

 

사카모토 요시타네(坂本義種) 교수가 그의 논문(‘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候’)에서 “면중후(面中候), 팔중후(八中候) 등의 지명(地名)을 머리에 붙인 ‘후’(候)가 있었고, 도한왕(都漢王)·아착왕(阿錯王)·매로왕(邁盧王)·피중왕(避中王) 등 역시 지명을 곁들인 왕이 존재했다”고 밝힌 점도 5세기 백제가 후왕인 속왕(屬王)을 거느린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고대 백제가 강대국으로서 해외 경영에 힘썼다는 사실도 명백해진다. 그런데 1892년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1839∼1917) 도쿄대교수가 ‘사학회잡지’(1892년 2월호)에 ‘칠지도고’(七枝刀考)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글 제목에 칠지도(七支刀)가 아닌 칠지도(七枝刀)라고 쓴 게 주목된다.

 

호시노교수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섭정52년 조’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라는 표기를 의식적으로 따라서 썼다. 본래의 칠지도(七支刀)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섭정 52년조’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52년 가을 9월 10일. (백제사신) 구저 등은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서 (왜왕실에) 찾아왔다. 그리고 (신공황후에게)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 칠자경(七子鏡) 한 개 및 여러 가지 중보(重寶)를 바쳤다.”

 

 

▲일본 나라현 텐리(天理)시에 위치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석상신궁)을 알리

     는 표석 (왼쪽)과 신궁 정문

 

근초고왕이 만든 칠지도(七支刀) 자체에 새겨진 명문내용과는 정반대다. 이와 같은 호시노의 논문은 근초고왕 부자가 왜의 후왕에게 보내준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터무니없이 왜곡했다. 여기서 당시 교토대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스가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살펴본다.


“명문의 녹을 떼어낸 스가는 처음에 칠지도(七支刀)를 가리켜 ‘삼한(三韓)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연호(年號) 글자가 흐릿해서 이것은 상세하지 못하다’라고 했는데, 뒷날에는 명문 모두(冒頭)의 연호를 ‘태시’(泰始)라고 내세우면서 ‘이 해는 우리의 신공황후 섭정 68년 무자(戊子)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리고 ‘명문의 말뜻을 해석하기가 힘든다’고 하면서 해석은 보류했다.”(‘倭國の世界’ 講談社 1976)그럼 칠지도(七支刀)의 연호에 대해 검토해 보자. 호시노교수는 연호를 태초(泰初)로 제시하면서 위(魏)나라 연호라고 주장한다.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이 369년 왜나라에 살고 있던 백제인 후왕(侯王)에게 하사한 칠지도(사진 오른쪽이 칼 앞

    면, 왼쪽은 뒷면). 칼에는 60여자가 금상감(金象嵌)으로 음각돼 있다.

 

그는 위나라 명제(明帝) 때의 연호 ‘태화’(太和)가 ‘태초’(泰初)라고 얼버무렸다.

그뿐 아니라 석상신궁의 칠지도(七支刀)는 살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52년 조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와 연관시켰다.

 

호시노교수가 신공황후 섭정 52년 조의 칠지도(七枝刀)에다 칠지도(七支刀)를 대입시키자 스가도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호시노교수의 논문이 나온 이듬해인 1893년에 ‘임나고’(任那考)라는 논문을 통해 호시노교수의 주장그대로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에서 신공황후 섭정 52년에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처음에 주장한 ‘태시 4년’ 즉 ‘신공황후 섭정 68년’보다 16년이나 햇수를 앞당긴 것이다. 이와 같은 억지를 쓰면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을, 역으로 백제왕이 왜나라 신공황후에게 갖다 바친 것으로 날조했다.

 

그렇다면 스가는 어째서 애초에 ‘태시 4년’을 ‘신공황후 섭정 52년’으로 삼지 않았던 것인가. 역사는 끝내 조작될 수 없다. 엄연히 백제왕이 왜의 후왕에게 하사한 것이 칠지도 명문으로 확인된 이상 머리를 짜낸다고 묘안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제왕이 하사한 게 아니라 동진(東晋·중국)이 백제왕을 거쳐서 왜왕에게 보내주었다’는 엉뚱한 주장이 나왔다. 이것은 사학자 구리하라 도모노부(栗原朋信)의 두 논문(‘七支刀銘文の一解釋’ 1966, ‘七支刀銘文よりみた日本と百濟?東晋の關係’ 1970)을 인용한 주장이다.

 

구리하라는 칠지도 명문의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이라고 주장하며 “이 칼은 백제의 어려움(窮狀)을 도와준 왜왕의 공로를 상주기 위해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東晋) 황제(海西公)가 백제를 통해서 왜왕에게 증여했다”고 왜곡했다.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한 시기는 백제의 군세가 충천하던 시대였다. 백제는 태화(泰和) 4년에 남하하는 고구려를 맞아 싸우면서 북진했다. 371년에는 백제군이 평양에 침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은 전사했다.(‘삼국사기’)

 

이같이 강대했던 백제가 왜왕에게 복속해서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칠지도 명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는 하행형식(下行形式) 글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소노카미신궁에 세 번씩이나 직접 가서 칠지도 실물을 검토한 우에다교수가 밝히는 논술(‘七支刀の傳世’ 1972)의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스가는 처음엔 칠지도를 신공황후 섭정 68년의 것이라고 했으나 그 후엔 섭정 52년에 헌상되었다고 이치에 어긋나는 해석을 했다.

 

그것은 스가 자신의 논리적 모순이다. 그 논리에 파탄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신공황후 섭정 68년보다도 16년 전에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해석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칠지도에 대한 해독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섭정 52년 9월조를 중시하면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칼이라는 설이(일본에서) 유력해졌다.

 

60여자의 칠지도 명문에는 또한 판독이 곤란한 개소(個所)가 있어서 전문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해서 해독해 밝혀진 바를 따르자면,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증명할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다.

 

명문에는 백제왕이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존토록 하라)라고 되어 있으며, 칼을 만든 주체를 백제왕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칠지도 처럼 생긴 칼은 중국에서 단 한 자루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동진(東晋)을 주체로 보려는 설의 허점이다.”

 

우에다 교수는 “칠지도 명문 네 글자가 누군가에 의해 □□□□으로 고의로 깎인 데 주목 한다”고 지적했다. 이 네 글자는 무엇이었을까. 일본 학자들이 칠지도를 가지고 역사왜곡을 자행하던 당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침략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더구나 1875년 9월에 일본은 강화도에 침공하여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1876년에는 한·일수호조약을 맺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