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의 가공할 사적파괴령 비밀문서
↑고달사지 부도
처음엔 석탑 자체에만 눈독을 들여 어떠한 어려운 운반조건도 무릅썼던 일본인 무법자들은 차차 탑 속에 들어 있는 사리장치 유물만 꺼내는 새로운 범행을 병행시키게 되었다.
이 새로운 목표물은 무거운 큰 덩어리의 탑재들을 많은 인원과 시간을 동원하여 불법 반출하는 모험에 비하면 훨씬 손쉽게 성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탑이 깨져 나가거나 말거나 밀어서 무너뜨리고, 혹은 사리장치가 있음직한 부분의 탑재 사이에 지렛대를 넣어 들어 올린 후 유물만 꺼내는 일은 몇이서 하룻밤 사이에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데다가 잘 걸리면 작은 순금 불같은 굉장하고 진귀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악당들의 목표물은 더욱 다양해졌다.
석탑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노리는 범행은 1920년대에 급격히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바람에 반출당하는 화를 면했던 탑들도 성한 것이 없게 되었다. 탑의 생명으로서의 비장품인 사리장치 유물, 곧 삼국시대 이후의 금·은 혹은 금동제의 작은 불상·보탑·합 기타 사리병과 그 외 함들을 약탈당하고 시신처럼 기울거나 파괴되어 균형을 잃은 탑들이 곳곳에서 일제 아래의 비운을 통곡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엽의 일이었다. 개성 시외에 있는 고려시대의 현화사칠층석탑 속의 사리장치를 노린 악당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고 무섭게 천둥이 치는 밤중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 탑신을 폭파했다.
가까운 주민들은 그 소리를 번갯불 천둥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날이 밝은 후에야 석탑의 처참한 수난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탑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상처투성이나마 제자리에 서 있는 기적이었다.
범인들은 얼마 후 경찰에 잡혔으나 그들이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사리장치의 금제유물은 벌써 금은방에 가서 다른 형태로 두드려진 뒤였다
1934년 11월 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당시 보물 제15호의 지정문화재였던 '고달사 터부도'(현재 국보 제4호)의 내부 유물에 손을 댄 자가 있었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피해보고가 기록돼있다
부도 전방 약 10m 거리에 있는 장군석을 들어다 부도의 기단 옆으로 기대놓고, 기계를 사용하여 연대(앙련이 조각된 상대석)를 한쪽에서 들어 올린 다음, 그 짬에 작은 돌들을 끼워 간격을 고정시킨 후, 내부를 뒤진 흔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기단 속에 고물(금속유물)을 넣었을 장치(사리장치)가 없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취당한 것으로 인정됨.
무엇보다도 일제의 발악적인 석조문화재 파괴와 무자비한 유린은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각 도 경찰부장에게 지시·명령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던 일제가 미·영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패색에 휩싸이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애려고 든 것이다.
가령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를 비로해서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남쪽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 땅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을 새긴 비석 같은 것들을 남김없이 말살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의 격파기념비 목록을 다음과 같다
1. 고양 행주전승비
2.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3. 공주 명람방위종덕비
4. 공주 명위관임제비
5. 공주 망일사은비
6. 아산 이순신신도비
7. 운봉 황산대첩비
8. 여수 타루비
9.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10.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현재 보물 제503호)
11.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12.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13.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14.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
15.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16.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17. 연안 연성대첩비
18. 경흥 전보파호비
19. 회령 고충사타 20. 진주 촉석정충단비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시국적인 고적은 소관 도 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실제 내용은 파괴)시켜도 좋다고 결정했을 때의 가공할 비밀문서의 내용이다.
1943년 11월 24일 기초된 이 문서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경부국장에게 넘겨준 후 각 도 경찰부장에게 비밀지령으로 하달되었다
수제 : 철거할 물건 중 '황상대첩비' 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 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 방법을 강구할 것
참조 : '황산대첩비' 는 보존 령(총독부 고적 및 유물 보존 령)에 따라 지정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 존재는 당시 일본인 해외 발전의 사적의 증징이기도 하고, 그 비석의 형식은 미술상·학술상 시대의 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지에서 보존시킴이 이상적이겠으나 그 존재가 치안상 철거해야겠다는 관할 경찰당국의 의견은 현시국에 부득이한 것으로 간주됨.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당국에 일임하는 바임
이 비밀문서 뒤에, 앞에서 소개한 파괴 대상의 비석 목록이 첨가되었는데, 제목은 '황산대첩비' 를 예로 든(현존 유사품 일람표)예였다. 이후 각도에서는 일제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이 땅의 역사적 민족적 항일기념유적들이 모조리 파괴당하는 통분 서른 일을 겪게 되었다
1380년 9월에 당시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이지란 장군관 함께 지리산 근방에 침입한 왜적 아지부대를 크게 무찌른 승리의 사실이 새겨져 있던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 리의 '황산대첩비' 가 맨 먼저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었다.
총독부의 승인을 받은 전북 경찰부장은 1577년에 건립되어 400년 가까이 민족의 한 수호비로 살아 있던 '황산대첩비' 를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무자비한 발악의 상징이었다. 대첩비가 섰던 자리엔 지금 한두 조각의 비편만이 남아 일제 치하의 잊을수 없는 굴욕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고, 사적 제104호로 지정돼 있다.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황산대첩비' 가 세워졌다. 합천 해인사에 세워져 있던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인 승병장이자 고승이었던 사명대사의 '석장 비' 는 경남도 경찰부장의 지시·명령에 따라 1943년 12월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의 건봉사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사명대사의 기적비도 같은 때에 같은 운명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최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 비' 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혹은 왜군 격파기념비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도록 비밀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주민들은 그것들이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드디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했고 이 땅엔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해남과 여수의 지방 유지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일제에게 빼앗겼던 이충무공 대첩비들의 안전 여부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으나, 파괴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 후 지방 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져 갔다. '명량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재수난사 - 이구열 지음
↑황산대첩비가 있던 어휘 각에는 비문이 없다. 왠일일까? 이것이 일본의 만행이다.
1945년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에 파손된 비문이라 비문은 온대 간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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