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1934년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출생인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1551년(명종 6)~1628년(인조 6)』 묘갈명이다.
묘는 경남 합천군 청덕면 대부리 소부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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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정랑 이공 묘갈명 병서
(刑曹正郞 李公 墓碣銘 幷序)
동계 정온(鄭蘊,1569~1641) 찬(撰)
내가 공의 얼굴을 안지는 오래되었지만 일찍이 자리를 함께하여 절차탁마(切磋啄磨)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사람 됨됨이를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에 나라 안의 풍물을 보려고 함께 서울에 갔다가 마침 환난(患難)을 당하여 장차 일망타진되려고 할 때에 많은 선비들이 두려워하면서 체신을 잃지 않은 자가 적었는데, 공만은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공에게 진중(珍重)한 도량이 있는 것에 감복하였다. 그 뒤 7년이 지난 갑인년(1614)에 내가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죄를 얻어서 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나를 죽이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만은 유독 나를 보호하고 주선하여 불에서 구해 주고 물에서 건져 주듯이 하였다. 나는 그때 공에게 다급할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다행히 죽지 않고 제주(濟州)의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 되어 있었는데, 그 뒤 7년이 지난 경신년(1620)에 공이 문경호(文景虎)의 원통함을 바로잡고자 하여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내었다가 소인배들의 모함을 받아 해서(海西)의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매번 같은 때에 환난을 만났는가!.
공이 백령도에 있으면서 백령지(白翎誌) 한 편을 나에게 보내왔는데 그 글은 본도의 풍토(風土)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을 뿐이고 조금도 걱정하거나 곤액을 억울해하는 뜻이 문자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공이 지키는 바가 과연 남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금상(今上)의 반정(反正)으로 나는 공과 함께 사면되었다. 나는 사간(司諫)이 되어 올라왔고, 공은 간성군수(杆城郡守)에 제수되어 숙배하러 왔다가 여관에서 서로 만나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에 나는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공도 남의 모함을 받아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7년이 지난 뒤에 공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7년이 지난 뒤에 공의 외손인 성창계(成昌季)가 공의 묘소에 비를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명을 받아다가 오랫동안 전하려 하였다. 아, 내가 차마 명을 쓸 수 있겠는가. 공의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대기(大期)요,
자는 임중(任重)인데, 그의 선대(先代)는 전의인(全義人)이다. 고려 태사 도(棹)의 후손으로 13세(世)가 지난 뒤에 휘 순전(純全)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공의 5대조이다.
증조(曾祖)인 휘 창윤(昌胤)은 장령을 지냈으며, 조(祖)인 휘 공보(公輔)는 현감을 지냈고, 고(考)인 휘 득분(得蕡)은 벼슬하지 않았으나 정(正)에 추증되었다.
정은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해년(1551, 명종6) 2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16, 7세에 문리를 크게 통하여 수우(守愚) 최공(崔公)에게 가서 글을 배웠고, 이어서 남명(南冥) 조 선생(曺 先生)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남명 선생이 황강과 도의(道義)로 사귀었기에 자신의 손자처럼 여기고 특별히 끌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학자의 성리설(性理說)을 배우게 되었으니, 단지 과거 공부나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경오년(1570)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그때 약관(弱冠)의 나이였으나 초상(初喪)을 치르면서 예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신묘년(1591)에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 아래에서 여묘 살이 하였는데,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연달아 삼경(三京)을 함락시키니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하여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람은 세 가지 즉 임금, 스승, 부모에 의하여 태어나는데 섬기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따라서 지금 종묘사직이 위태롭고 임금이 다급한 상황에서 평상시의 예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라고 여기고서, 연례(練禮)를 마치자마자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서로 호응하여 낙동강(洛東江)의 위와 아래에서 파수를 하면서 왕래하는 적선으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갖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낙동강 오른쪽에 위치한 약간의 군현들이 그 덕분에 무사할 수가 있어서 훗날 중흥(中興)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는데 공 또한 큰 기여를 하였다.
선조(宣祖)가 의주(義州)에 머물고 있다가 본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포상하고 이어서 차등을 두어 관직까지 제수하였는데, 이에 공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계사년(1593)에 감사(監司)가 공에게 백성을 다스릴 만한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임시로 지례현(知禮縣)을 맡겼더니 비록 난리에 떠도는 중이었지만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정식으로 수령이 되기를 바랐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다.
갑오년(1594)에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고 을미년(1595)에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승직되어 치성(治聲)이 있었다. 기해년(1599)에는 조정에 들어와서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가 얼마 후 정랑(正郞)이 되었다.
경자년(1600)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고 무신년(1608)에 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었다가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임기가 만료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에 제수되고 갑인년(1614) 1월에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외임(外任)으로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고, 또 얼마 후에 일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공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용감하였다.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억울해 하는 것을 보고는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여기고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하며 서둘러 구원하다가 마침내 여기에 연좌되어 죄를 입고 백령도(白翎島)로 귀양 갔는데, 이때 나이가 70세였다.
물귀신이 막고 있는 머나먼 바닷길을 다른 사람들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거늘 공은 그러한 기미를 조금도 말과 표정에 나타내지 않았다.
유배 생활을 4년 동안 하고 나니 머리털이 그전보다 훨씬 하얗게 되었다. 방환되어 곧바로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어떤 사람이 또 다시 방해하여 이때부터 강사(江舍)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지냈다.
무진년(1628, 인조 6) 11월 14일에 병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임종(臨終)하니, 향년 78세였다. 이듬해 1월 5일에 초계현(草溪縣)의 동쪽 부곡(釜谷)의 유좌 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이 증 참의 진주(晉州) 강심(姜深)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모두 요절하고 방실(傍室=側室)에서 아들 뇌(磊)를 두었다.
장녀는 정승선(鄭承先)에게 시집가고, 2녀는 참봉 이각(李瑴)에게 시집가고, 3녀는 성이침(成以忱)에게 시집가고, 4녀는 현감 신득자(申得滋)에게 시집가고, 5녀는 생원 이도(李蒤/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서재골)에게 시집갔다.
정승선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욱(彧)이며, 딸은 곽희익(郭希益)에게 시집갔다. 이각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국(壽國)이며, 장녀는 진사 권극중(權克重)에게 시집가고, 2녀는 수찬 강대수(姜大遂)에게 시집가고, 3녀는 박동형(朴東衡)에게 시집가고, 4녀는 어리다.
성이침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하(昌夏)와 창계(昌季)이고 장녀는 노원(盧洹)에게 시집가고, 2녀는 유회근(柳晦根)에게 시집갔다. 신득자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행(涬)이며, 장녀는 이광진(李光鎭)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도는 1남 7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요절하고 장녀는 곽경담(郭慶覃)에게 시집가고, 2녀는 진사 곽홍지(郭弘址)에게 시집가고, 3녀는 정금(鄭嶔)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뇌(磊)는 이윤식(李允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신체가 헌칠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고결하여 남을 허여하는 일이 적었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고 특히 시를 잘하여 향시(鄕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마침내 진사시(進士試)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들은 모두 요절하고 가운(家運)을 단지 한 서자(庶子)에게 전할 뿐이었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백령지(白翎誌)와 허와기(虛窩記) 등 약간의 글과 《설학수문(雪壑搜聞)》 한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명문에 귀의하여 / 早依名門
연원이 있었으니 / 來有淵源
학문의 정통함이요 / 學之正也
형제간에 우애하여 / 友于兄弟
화락함이 있었으니 / 存以愷悌
실천에 옮긴 게라 / 施諸行也
위험에 닥쳐도 끄떡없고 / 臨危無隕
곤궁함에 처해도 걱정 없음은 / 處窮不憫
성품이 그러했거니와 / 所其性也
벗의 어려움을 다급하게 여겨 / 急友之難
탄식만 하지 않고 일어났으니 / 不但永歎
어쩌면 그리도 굳세단 말가 / 何其勁也
재주가 있었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 有才不試
기량은 있어도 끝내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 有器終閟
애석한 운명을 어찌하랴 / 可惜命也
낭관의 자리와 / 郞署之儀
수령의 자리를 / 郡縣之施
어찌 성대하다고 할까 / 豈足盛也
청계산 동쪽 / 淸溪之東
부곡의 가운데에 / 釜谷之中
영원히 자리를 잡았기로 / 宅之永也
내가 그 사적을 뽑아서 / 我最其蹟
비석에다 새기노니 / 刻之墓石
후세의 경사라 하리로다 / 後之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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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刑曹正郞李公墓碣銘 幷序
鄭蘊 撰
余之識公面久矣。顧未嘗合席切磋。是以不甚得其爲人。萬曆戊申。偕觀國光。抵京邸。適遭患難。將罹一網之打。多士汹懼。鮮不失其所守。公獨終始不動。余於是服其有鎭重之量。後七年甲寅。余以言事護罪。徽纆拘囹圄五朔。時人莫不欲殺之。公獨保護周旋。如捄焚拯溺。余於是知其有急難不撓之操。余幸不死。遂栫于古耽羅大靜之縣。越七年庚申。公欲直文公景虎之冤。通文一道。爲含沙所射。流于海西之白翎島。是何吾二人遭患之每同時耶。公在白翎。以白翎誌一篇投余。其文記本島風土甚詳。而無一毫憂愁閔厄之意形於文字間。余於是益信公之所守果有異於人者。天啓癸亥。今上反正。余與公俱被恩赦。余以司諫赴召。公以扞城郡守入肅。遇於旅舍。相對出肺▣。居無何。余遞職歸寧。公亦爲人所泥。不赴任。與之偕轡而南。越七年而公逝矣。又七年而公之表孫成君昌季將碣其墓。求余銘。圖不朽。嗚呼。吾尙忍銘諸。公姓李氏。諱大期。字任重。其先全義人也。高麗太師棹之後。後十三世。有諱純全。同知中樞府事。於公爲五世祖也。曾祖諱昌胤。掌令。祖諱公輔。縣監。考諱得蕡。不仕。追贈正。正娶黃江李希顏女。以嘉靖辛亥二月三日生公。年十六七。文理大通。就學於守愚崔公。仍出入南冥曺先生之門。蓋先生與黃江。道義交也。視如己孫。特加提撕。由是聞吾儒性理之學。非特爲擧子業而已。庚午。丁內艱。公年始弱冠。執喪無違禮。辛卯。丁外艱。廬墓下。明年壬辰。海寇侵突。連陷三京。鸞輿西巡。命令不通。公自念民生於三。事之如一。今宗祀危矣。君父急矣。不可以常禮處之。旣練。乃募集鄕兵。與郭再祐諸公。互爲聲援。把截洛江上下。使賊船之往來者。有所畏憚而莫敢肆。洛右若干郡縣。賴以乾淨。爲他日中興之基。公亦有力焉。宣祖駐駕龍灣。聞本道倡義之人。降十行褒礪之。仍除官有差。公爲掌苑署別提。癸已。監司知公有牧民才。使假守知禮。雖流離中。能擧其職。邑人咸欲眞之。未果。甲午。爲黃山道察訪。乙未。陞監義興縣。有治聲。己亥。入爲刑曹佐郞。俄陞爲正郞。庚子。拜盈德縣令。戊申。守淸風郡。癸丑。瓜滿還鄕。十月。除濟用監判官。甲寅正月。除司導寺僉正。尋於外爲咸陽郡守。未幾以事棄歸。公勇於爲義。視友人之遭艱抱冤。若己逢之。急急猶恐不捄而拯之。竟坐此被罪。其謫白翎也。年已七十矣。絶海禦魅之行。在他人所難堪者。而無幾微見於言面。在圍四年。髭髮勝昔。及蒙放還。恩除纔下而或者又沮之。自是還臥江舍。無意於世久矣。成辰十一月十四日。以疾終于正寢。得年七十八。明年正月五日。葬于草溪治東釜谷酉坐卯向之原。公娶贈參議晉州姜深女。生二男五女。男俱夭。傍室有子。曰磊。女長適鄭承先。次適李。參奉。次適成以忱。次適申得滋。縣監。次適李蒤。生員。承先有一男一女。男曰彧。女適郭希益。有一男四女。男曰壽國。女長適進士權克重。次適修撰姜大遂。次適朴東衡。次幼。以忱有二男二女。男曰昌夏,昌季。女長適盧洹。次適柳晦根。得滋生一男三女。男涬。女長適李光鎭。餘幼。蒤生一男七女。男夭。女長適郭慶覃。次適進士郭弘址。次適鄭嶔。餘幼。磊娶李允植女。生二男一女。皆幼。公身頎而長。美鬚髥。性孤潔。少許可。自少以文鳴。尤善於詩。高占鄕解。竟屈於南宮。有子俱夭。傳家只一庶。天之報善人。一何嗇耶。有白翎誌,虛窩記等若干篇。雪壑搜聞一卷。莊于家。銘曰。早依名門。來有淵源。學之正也。友于兄弟。存以愷悌。施諸行也。臨危無隕。處窮不憫。所其性也。急友之難。不但永歎。何其勁也。有才不試。有器終閟。可惜命也。郞署之儀。郡縣之施。豈足盛也。淸溪之東。釜谷之中。宅之永也。我最其蹟。刻之墓石。後之慶也。<끝>
동계집 > 桐溪先先文集卷之四 / 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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