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광개토대왕 비(廣開土大王碑)

야촌(1) 2015. 11. 10. 03:13

 

↑광개토대왕비(높이 6.39m, 무게 37톤) 

 

 

 

 

↑1903년 사진

 

<100여년 전 광개토대왕비와 조선인>
[연합뉴스 2004.08.22 10:08:20]     

조선 문화유적 소개 일본 화보집에 실려(대구=연합뉴스) 이재혁 기자 =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100여년 전 한 조선인이 광개토대왕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 연구가 정성길(60.경기도 화성평화공원 박물관장)씨가 22일 공개한 사진속의 주인공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한복 차림의 조선인으로, 팔짱을 낀 채 눈 내린산야를 배경으로 광개토대왕비 옆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 조선인은 추운 겨울임에도 가벼운 한복차림이어서 당시 비석 주변에 거주하던 화전민이 일본인 사진작가의 요청에 따라 촬영에 응했을 것으로 정 관장은 추정했다.

정 관장은 "오래 전 자료수집차 외국을 다니던 중 1900년대 초 일본에서 발행된것으로 추정되는 한 화보집에 실린 광개토대왕비 등 우리나라 중요 역사유물 부분을발췌해 왔다"고 말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을 소개한 이 화보집에는 광개토대왕비의 사진과 석굴암, 독립문, 영은문 등 30여점에 이르는 문화유적을 담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사진설명에는 `고구려호태왕릉비(高句麗好太王陵碑)''라는 제목 아래 `삼국시대 고구려''라고 돼 있어, 1세기 전 당시 일본인들도 고구려를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로 보고 있었음을 나타냈다.

정 관장은 "중국이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훔쳐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100여년 전 조선인이 설경 속의 광개토대왕비를 배경으로 찍은 이 사진은 중국의억지를 비웃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사진 있음)yij@yna.co.kr  (끝)

 

 ↑가츠라 국장과 탁본을 뜬 사쿠오 중위> 

 

1880년 가을,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포병 중위 사쿠 오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겨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신분을 감추고(소설에는 떠돌이 한의사) 만주일대를 누비다가, 1883년 4~7월 경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통구(通溝)로 들어갔다.

 

우연히 능비를 본 사쿠오는 이를 직접 해독한 뒤, 그 이용가치가 큰 것을 알고는 현지인을 조수로 고용하여 탁본을 만들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유리하도록 이른바 신묘 년 조 기사의 '來渡海'등 25를 변조하였다.

 

1884년, 스파이 사쿠오는 131장이나 되는 능비 탁본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수년간 비밀리에 해독작업이 진행된 뒤 탁본은 천왕에게 현상되었고, 해독작업의 결과는 국수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회여록(제 5집)에 발표되었다(1880).

 

참모본부(가츠라 국장)는 여러 차례 스파이를 파견하여 능비를 조사하였으며, 1889년 이전 어느 해에 사쿠오의 비문 변조 사실을 은폐하려고 석회를 칠하였다는 것이다. 여러 개의 비문 탁본을 자세히 살펴보면,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글자가 다른 부분이 있다.

 

이는 언젠가 칠해놓았던 석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가서 생긴 현상이다. 이는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한 사실이 뒷바침하고 있다.

 

여기서 軍國 日本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조작의혹을 김병기(51)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가 서예학적으로 밝히고 원래의 글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했다. 즉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의 비문 가운데 ‘渡海破(도해파)"는 원래의 入, 貢, 于가 변조된 것으로 渡, 海, 破를 겹치면 변조방식이 드러난다.

 

 

  ↑조작 방법

 

↑비문에 나오는 동일 한자와 조작된 서체의 차이점 

 

渡자의 획이 入자의 획으로 반대 방향으로 휘어져 있는 것을 알수 았다.

한가지 재미난 얘기는 김교수가 비문을 붓으로 써내려 가다 보면 渡海破라는 곳에 오면 붓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入, 貢, 于로 복원한 내용을 해석하면‘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00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帝國주의 일본 군부나 極右주의 학자들에 의해,후나야마 고분의 大刀나 石上神宮의 七枝刀나 광개토대왕 碑文이 변조되었다는 의심은, 이번 탐방에서 일본이 자랑하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보존되고 있는 코류지(廣隆寺)를 방문했을 때,입구에 있는 설명문(아래 사진 참조)이 변질되어 지워져 버려 지금은 보기 흉하게 땜질되어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니 알만 했다.

 

지워진 부분은 사찰을 건설한 사람은 "韓半島 渡來人" 이라는 것이다. 역사란 싫든 좋든 후세에서 변질시키거나 부인한다고 사실이 바뀔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화살표 부분이 변질된 곳임

 

이런 의미에서 YS 시절에 없에버린 중앙청은 옮겨서라도 보존했으야 할 것이 아닌가?

그 곳은 일제 총독부라는 악연도 있지만 우리역사상 최최의 민주공화국인 大韓民國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이 통일되고 국교가 재계된 직후 호치민시(옛 사이공)를 방문했을 때 마침 호치민시의 조례가 공표되었는데 영자신문을 보니 옛 불란스 통치때에 지어진 건물들은 법으로 보존하도록, 단 내부 수리는 가능하다는 내용을 보고서 우리보다 우수한 역사관을 가진 민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1984년 모습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길이 5.7m 크기의  직육면체 화강암 11,00여개를 쌓아올렸다.

   (밑변 길이 32m,높이 12m)

 

↑광개토대왕릉의 내부 묘실 모습.

 

 

 

 

 

↑지안에있는 다른 고분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