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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유 오운선생 묘갈명 병서(竹牖吳澐先生墓碣銘幷序)

야촌(1) 2015. 6. 15. 00:30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 ~ 1617년(광해군 9)』

 

■죽유(竹牖) 오운[吳澐] 선생의 묘갈명(墓碣銘)

 

김응조 찬(金應祖 撰)

 

경주부윤 죽유 오공 묘갈명 병서(慶州府尹竹牖吳公墓碣銘 幷序)

 

공(公)의 성(姓)은 오(吳)이고, 휘(諱)는 운(澐)이며, 자(字)는 태원(太源)이고, 호(號)는 죽유(竹牖)이며, 고창(高敞) 사람이다. 원조(遠祖) 휘 학린(學麟)은 고려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대대로 벼슬아치들이 배출되었다.

 

고조(高祖) 휘 영(榮)은 나주판관(羅州判官)을 지냈고, 증조(曾祖) 휘 석복(碩福)은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휘 언의(彦毅)는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수정(守貞)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문정공(文貞公) 휘 축(軸)의 후손이며 부호군(副護軍) 휘 관(瓘)의 딸인데, 가정(嘉靖) 경자년(庚子年, 1540 중종 35)에 함안(咸安) 모곡리(茅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출하고 비범한 아이였다. 힘써 배워 글에 능했는데 신유년(辛酉年, 1561 명종 1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병인년(丙寅年, 1566 명종 21)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학록(學錄)ㆍ학정(學正)에 전임(轉任)되었으며, 왜사 호송관(倭使護送官)에 차임(差任)되기도 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74 선조 7)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치고 난 뒤 박사(博士)ㆍ전적(典籍)을 역임하고 직강(直講)으로 승진되었으며, 명(命)을 받아 황해도(黃海道)에 점마(點馬)하러 나갔다. 

 

신사 년(辛巳年, 1581 선조 14)에 정선군수(善郡守)에 임명되었고, 계미년(癸未年, 1583 선조 16)에 풍저창 수(豐儲倉守)로 있다가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는데, 편수관(編修官)을 겸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588 선조 21)에 사성(司成)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서로(西路)를 순행하였으며 돌아와서 사재감 정(司宰監正)이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589 선조 22)에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편수관(編修官)을 겸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90 선조 23)에 벼슬에서 물러나 의령(宜寧)으로 돌아왔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의병(義兵)을 앞장서 일으켜 곽재우(郭再祐)공의 휘하에 속하였는데, 적을 토벌하는 데 공(功)이 있어, 당시 초유사(招諭使)로 있던 학봉(鶴峯) 김 선생(金先生, 金誠一)이 사실대로 치계(馳啓)하여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 26)에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고,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에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임명되었으며, 편수관을 겸하였다. 군수로 있으면서 피폐한 고장을 온전한 고을로 변화시켰는데, 순찰사(巡察使) 서성(徐渻)이 여러 차례 기리는 장계를 올려 다시명하여 질서(秩序)를 올려주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에 왜구(倭寇)가 다시 준동하자, 공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떠나가지 않는 의리를 지켜 군(郡)의 경계를 떠나지 않고서 적이 이르자 번번이 토벌하여 물리쳤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이일을 아뢰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고, 진 제독(陳提督, 명나라도독 진린(陳璘)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 선조 32)에 조정으로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고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옮겼는데, 병장(病狀)을 올려 남쪽으로 돌아갔다. 경자년(庚子年, 1600 선조 33)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喪)에 나아갔다가,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쉴 것을 청원하여 영천(榮川)으로 돌아와서는 한가로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것이 무릇 7년이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 광해군원년)에 조정으로 들어가 선조(宣祖)의 상(喪)에 임하였고, 7월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며,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군 8)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리면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에 관해 진달하였는바, 큰 요체는 기강(紀綱)을 진작시키고 군정(軍政)을 엄숙하게 하며 백성의 힘을 덜어주고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는 한편, 편파적인 일을 제거하고 간쟁을 용납할 것을 청한 것이었고, 그 말이 수백 언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8월에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고, 정사 년(丁巳年, 1617 광해군 9)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가 3월 3일에 졸(卒)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명하여 특별히 부의를 전하고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였는데, 그 사제 문(賜祭文)에 ‘도덕(道德)은 퇴도(退陶) 이황(李滉)을 존모(尊慕)하고 학문은 산해(山海), 조식(曺植)을 으뜸으로 삼았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6월에 집에서 동쪽 몇 리쯤 떨어진 첩석리(疊石里) 곤향(坤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다. 젊어서 퇴도(退陶)와 남명(南冥) 조식(曺植) 두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두 선생에게 기량이 중후함을 인정받았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정도(正道)로써 스스로를 지켰고, 때의 기호(嗜好)에 영합하지 않다가 이로 말미암아 벼슬길이 지체되어 군(郡)이나 주(州)에서 머무는 데 그쳤으나, 나라가 무너지는 큰 난리를 당해서는 또 일에 임하여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잊고 의(義)에 목숨을 바쳐 이룬 공적이 있었으므로 전후 네 차례 총애하는 명을 입었으니, 공이 이에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를 만하다. 한직(閑職)에 머무르면서도 자득(自得)하여 방에 앉아 책을 곁에 두고 읽었는데, 더욱 《주역(周易)》ㆍ《주자대전(朱子大全)》 등의 책을 즐겨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예스러우면서도 호방하였고 조탁(雕琢)하고 분식(粉飾)하는 말을 짓지 않았다. 저술 중에 《동사찬요(東史纂要)》는 세상에 유통되고 있고, 《율계난고(栗溪亂稿)》는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婦人)은 정부인(貞夫人)인 김해허씨(金海許氏)로, 생원(生員) 허사렴(許士廉)의 딸이다. 부인은 현명하여 식견과 사려가 있었는데, 언행은 사군자(士君子)와 같았다. 3남을 낳았다.

 

장남 오여은(吳汝檼)은 전한(典翰)을 지냈고, 아들 둘을 두었으니, 오익환(吳益煥)은 수찬(修撰), 오익엽(吳益熀)은 진사(進士)이며, 딸 둘을 두었는데 현감(縣監) 정능(鄭稜)과 허종무(許宗茂)에게 시집갔다.

 

다음 오여벌(吳汝橃)은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아들이 없어 오익엽을 후사로 삼았다. 다음 오여영(吳汝楧)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오익전(吳益烇)ㆍ오익성(吳益煋)ㆍ오익선(吳益煊)ㆍ오익순(吳益焞)이고, 딸 하나는 권이충(權以忠)에게 시집갔다.

 

공의 딸은 군수(郡守) 조형도(趙亨道)에게 시집갔는데, 5남을 낳았으니 진사 조함영(趙咸瑛)ㆍ조함희(趙咸熙)ㆍ생원 조함장(趙咸章)ㆍ조함철(趙咸哲)ㆍ생원 조함세(趙咸世)이다. 내외 자손은 2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많다.

 

아! 덕을 쌓은 집안에 넉넉한 경사가 있다 함은 당연한 이치로구나.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해교(海嶠)와 부여(扶輿)가 독실하게 위인(偉人)을 낳아 주어, 소단(騷壇)에선 맹주(盟主)가 되었고 정신(廷紳)으론 이름을 떨쳤다네. 뜻이 다름을 용납지 않아 당시에 어려움을 겪어, 내직(內職)에 있어서는 자리가 안정되지 못했고 외직(外職)에서 오랫동안 지체되었네.

 

왜구의 난을 만나자 오합지졸(烏合之卒)을 규합하여 신속하게 더러운 물건 소탕하였고, 의로운 승리로 조정을 바로세울 것을 도모하였다네. 남쪽 군(郡)을 맡아서는 죽음을 바쳐서라도 떠나가지 않았고, 의로움에 기대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는 무리를 막아 세웠네.

 

은혜로운 기림 줄줄이 더해졌고 총애가 높아져 관질이 더해 갔다네. 대윤(大尹, 경주 부윤을 맡은 것을 두고 말한 것)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공부(工部, 공조 참의를 맡은 것을 두고 말한 것)가 어찌 즐거우리?

 

병을 칭탁하여 궁벽 진 고을로 돌아감에 옷자락 휘날리었다네.

높은 덕(德)은 세대가 멀어졌지만 남은 향기 집안에 전해 온다네.

 

일곱 고을을 교화시켰고 자손은 2백여 인이요,

아름다운 이름은 층층의 저 첩석리(疊石里) 산과 같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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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慶州府尹竹牖吳公墓碣銘 幷序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知製敎。經筵參贊官春秋舘修撰官豐山 金應祖 撰。

 

公姓吳諱澐字大源號竹牖。高敞人。遠祖諱學麟。仕高麗爲翰林學土。自是以後。世襲冠冕。高祖諱滎羅州判官。曾祖諱碩福宜寧縣監贈左通禮。祖諱彦毅全義縣監贈左承旨。考諱守貞贈吏曹參判。妣贈貞夫人順興安氏。文貞公諱軸之後。副護軍諱灌之女。以嘉靖庚子。生公于咸安茅谷里第。幼岐嶷異凡兒。力學能文。中辛酉生員。丙寅文科。由成均學諭。轉學錄學正。差倭使護送官。甲戌丁外艱。服闋歷博士典籍。戶曹佐郞明川縣監。庚辰復拜典籍陞直講。承命點馬于黃海道。辛巳除㫌善。癸未以豐儲倉守。出爲忠州牧使兼編修官。戊子拜司成。秋以灾傷敬差官巡西路還。爲司宰監正。己丑除光州兼編修官。庚寅解職歸宜陽。壬辰倡起義旅。以郭公再祐爲大將。討賊有功。時鶴峯金先生爲招諭使。據實馳啓。授承文院判校。癸巳除尙州。甲午除陜川兼編修官。變凋廢爲完邑。巡察使徐渻累次褒啓。再命陞叙。丁酉海寇再動。公守效死勿去之義。不離郡境。賊至輒討却之。都元帥權慄以聞陞通政。爲陳提督接伴使。己亥還朝。拜僉知。移判决事。呈病南還。庚子赴懿仁王后喪。辛丑乞暇歸榮川。居閒自適者凡七秊。戊申入臨宣廟喪。七月除慶州。丙辰拜工曹參議。仍疾控疏。因陳時政得失。大要請振紀綱肅軍政。紓民力嚴宮禁。祛偏私納諫諍。累數百言。上嘉納之。八月除靑松。丁巳棄官歸。以三月三日卒。訃聞上命別致賻。遣禮官祭之。其文有道慕退陶。學宗山海等語。六月葬于家東數里許疊石坤向之原。嗚呼。公性寬厚。器度弘毅。少遊退陶南冥兩先生之門。甚見器重。其立朝也。以正自守。不肯迎合時好。坐是多蹇滯。棲遲於州郡。及至當蕩殘遇大亂。又不肯臨事辭難。忘身循義。以能有成功。前後四被寵命。公於是可謂不負素學矣。至於投閒置散。囂然自得。坐一室。左右圖書。尤喜讀周易朱子大全等書。手不釋卷。爲文章蒼古雋偉。不爲雕琢粉餙語。所著東史纂要。行于世。栗溪亂稿藏于家。配貞夫人金海許氏。生員諱士廉之女。贒有識慮。言行類士君子。後公三秊卒。祔葬于公之墓。生三男。長汝檼典翰。子二益煥應敎,益熀進士。女許宗茂,李宗培。次汝撥校理。無子以益熀後。次汝楧通德郞。子四益烇,益煋,益煊,益㷓女一權以忠。一女適趙亨道郡守。五男咸英進士,咸煕,咸章生員,咸哲,咸世生員。內外諸孫男女多至二百餘人。噫積善餘慶。理之常也。銘曰。

海嶠扶輿。篤生偉人。立盟騷壇。擅名廷紳。酸醎不入。抹摋于時。內席未煖。外符棲遲。中遭劇寇。倡紏烏合。迅掃腥膻。義勝謀立。逮守南郡。效死勿去。仗義殉國。以遏徂旅。恩褒荐加。寵隆增秩。大尹非榮。工部奚樂。瀝血控疏。引君當道。契悟天衷。少答鴻造。養疾僻邑。歸袂翩然。高風已遠。剩馥家傳七。邑治化。二百雲仍。芳名與齊。疊石山層。<끝>

 

죽유집 > 竹牖先生文集附錄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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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선생세계도(吳澐先生世界圖)

 

 

 

↑죽유 오운선생 종택  / 소재지: 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2길 70(송림리 96-2)

 

↑죽유 오운선생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