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권철 신도비명(權轍 神道碑銘)

야촌(1) 2015. 8. 13. 02:44

영의정시강정권공신도비<전액>

 

유명 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증 시 강정 권공 신도비명 병서

 

오호라! 옛날 명종, 선조 때에 세상은 태평하고 치화는 두루 미쳤는데 그때의 정승 권공은 참다운 종신으로 4번이나 영상을 지내면서 묵운의 공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아 치사할 때가 되었어도 상께서는 굳이 공을 만류하여 궤장까지 내렸으나 공이 더욱 힘써 물러나려하니 어비를 내려 돈유하기를, “경의 덕량은 족히 물론을 진압하고 재주와 지혜는 족히 나라를 경륜할만하니 당금의 현상으로는 경보다 낳은 사람이 없다.”하였고 또 “노성한 사람은 국가의 시구다.”하였으며 또 “고굉과 태보는 임우와 주집과 같은 것이다.”라고도 하였다.

 

인신으로서 사직의 중책을 짊어지고 임금의 지우를 받기란 천백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것인데 하물며 성유의 정성스러움이 하루도 공이 없어서도 아니 될 것같이 하였음이 비록 은나라 고종이 부열에 기대함이 어찌 이에 더하였겠는가?

 

공 또한 상의 지우에 감격하여 3번 들어갔다가 4번 나오기도 하면서 마침내 현직에서 돌아가셨으니 이로 볼 때 족히 군신간의 제우를 알 수 있겠다. 공이 돌아가신지 52년 뒤에야 비로소 태상시에서 의논이 되어 강정이란 시호가 내렸다. 

 

그 뒤 또 21년째에 비로소 묘도의 현각을 불민한 민구에게 부탁하였다. 무릇 해가 가면 공의는 정해지지만 사적은 오래되면 실적이 없어지기 쉬운 법이다. 나는 까마득히 뒤에 태어났지만 평소에 공의 업적을 들어서 이를 사모한지 오래이다. 

 

따라서 공의 사적이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바이다. 공의 실적을 서차함에 있어서 마땅히 공의에 합당할 수 있도록 삼가 가장과 장로들의 장고, 그리고 기전의 대강을 간추려 서하는 바이다. 공의 이름은 철이요 자는 경유이다. 권씨가 성을 얻게 된 것은 태사 행으로부터 비롯하였으니 그 일은 역사에도 실려져 있다.

 

문충공 근에 이르러서는 문학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떨쳤다. 이분이 제를 낳으니 부자가 벼슬이 이공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바로 공의 5대조와 고조이시다. 연천현감 마와 양근군수 교와 강화부사 적은 공의 위로 3대이다. 연천공에게는 판서를 양근공에게는 찬성을 강화공에게는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공이 귀히 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순흥안씨니 홍치 계해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우와 용모가 특이하여 큰 그릇임을 인정받았도다. 무자년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처음에는 성균관에 예속되었다가 한림으로 뽑혔는데 김안로가 공이 직필을 휘두르고 아부하지 않음을 미워하여 공의 고과를 고하로 매기니 중종께서 권모가 좌천을 당함이 무슨 죄로 그리되었느냐고 하문하기까지 하였다.

 

안로가 복주되니 사직에 회복이 되었다가 승정원주서로 옮기니 상께서 매양 글의 뜻에 의심이 나면 바로 공에게 물었다. 하루는 후원에 납시어 근신들을 시제하였는데 공이 늦게 글을 지으니 상께서 중사를 시켜 재촉하기까지 하였는데 권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홍문관저작 박사 겸 시강원설서를 제수받아 기해년에는 수찬에 올랐는데 이로부터 정미년까지 제조로는 병조와 이조의 좌랑, 이조와 병조 그리고 형조의 정랑을 지냈고, 사유로는 성균관직강을 지냈으며, 논사로는 홍문관교리를 지냈고, 언관으로는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을 지냈으며, 제서로는 군기시선공감 사섬시부정과 장악원정, 사복시정을 지냈고, 춘방으로는 문학필선을 지냈으며, 중서에서는 검상사인을 지냈다.

 

이상이 공께서 역임한 9년간의 이력인데 혹 두 번, 세 번 역임한 곳도 있고 또 한관과 산반으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생략한다. 일찍이 병이 들어 한때 위급한 때가 있었는데 이때는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로서 인종께서는 내시를 보내어 진귀한 약재를 내리시었다. 그 뒤 강연에 나가니 문병을 하시고는 술잔을 내리기까지 하시었다.

 

공은 주역에 조예가 깊어 항상 강관을 겸하여 동궁으로부터 깊은 은우를 받았었다. 중종과 인종이 연이어 돌아가시니 공은 두 번 다 봉릉을 감독하였다. 경술년에 승문원 판교에서 승정원 동부승지로 올랐고 3년 동안에 도승지에까지 올랐다. 병조참지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는데 그때에 영남에 거듭 흉년이 드니 공을 가선에 올려 관찰사로 제수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도승지의 소명을 받아 편전에 입대하니 상께서 공 때문에 남쪽 백성 백만명이 전활을 얻었다 하시고는 난모를 특사하시었다. 병진년에 어필로 형조판서에 특제하였다. 때에 호남지방이 새로 왜구를 만나 변사가 크게 위태로우니 공을 관찰사 겸 도순찰사로 기용하였다. 공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들을 방어하는데 조금도 실수함이 없었다.

 

적선이 근접만 하면 바로 사로잡아 이들을 죽이니 그 공적은 조정에까지도 크게 떨치게 되었다. 무오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세자를 책봉하기 위하여 나왔는데 이때 공이 원접사로 나아가 이들을 접응하였는데 그들에 대한 영송의 절차에 있어 조금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후 병조판서로 옮겼는데 상께서 광릉을 참알할 때 공이 포영사로 부오를 엄히 다스리니 병사들이 감히 떠들거나 제자리를 뜨는 일이 없었다. 얼마 후에 의정부우찬성을 배수하였는데 이량이 이조판서로 있다가 숙청이 되니 상께서는 인망에 따라 공을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윽고 공은 다시 찬성을 거쳐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가 되었으며 윤원형이 죄를 얻어 쫓겨나니 어필로 공을 의정부우의정에 배수하였다. 이때가 병인년이었다.

 

공은 황각에 있으면서 과격하지도 추수하지도 않고 오직 재보에만 힘쓰니 여론이 매우 좋았으며 명종께서는 공에게 의지하였고 사류들도 공을 믿고 따랐다. 이듬해 정묘년에는 융경이 등극하여 공이 진하사로 연경에 갔는데 길을 떠날 즈음에 상께서 사행에 따른 어려움을 염려하고 또 위로하시면서 새로이 황제가 즉위하여 처음 정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인물을 진퇴시키는 일을 알아보고 가정 때의 구신들의 기폐 수소한 자들을 빠짐없이 찾아보라 말씀하시었도다.

 

이에 공이 물러나 요상에게 말하기를, “성유가 이와 같으시니 개회하는 싹이 트는 것이오. 을사년에 무고히 몰린 사람들을 현송하여 설원할 수 있는 가망성이 비친 듯 하오.”하였다. 사행에서 돌아올 때 도중에서 명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는 크게 통곡하고는 하마 운절할 뻔 하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복명 차 입대하시여서는 맨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하고 궁금을 엄히 할 것을 진언하니 선조께서 경청하고 이를 가납하시었다. 그해 겨울에는 좌의정에 올라 6년을 있다가 드디어 상상에 올랐다.

 

임신년 봄에 글을 올려 고로하여 1년 뒤에야 비로소 짐을 벗었는데 한 달 후에 다시 대정을 맡기니 공은 물러날 뜻을 더욱 간절하게 아뢰었고 왕께서는 그 예우하심이 더욱 융숭하여 그사이 비록 몇 차례 체직은 되었으나 몇 달이 못가서 다시 불러 대정을 맡기시었고 또 많은 것을 하사하시면서 위로하였으니 그 예우가 남달랐다고 하겠다.

 

공이 걸음걸이가 불편하니 매양 진현할 때에는 내관을 시켜 부축하게 하고 견여를 탄 채 입조하도록 하려고까지 하였다. 공의 나이 76세 때에 의정부의 큰 홰나무가 폭풍에 부러지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내가 죽을 징조인가보다.”하였다.

 

병이 더하니 자리를 마련토록 재촉하고 억지로 일어나 유소를 초하려다가 기운이 다하니 실성하여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성상을 뵙지 못하겠구나.”하였다. 상께서 공의 병이 더함을 듣고는 경연을 중단하고 승지를 보내어 문병을 하였으나 이미 말을 못하였다.

 

부음이 들리니 상께서 슬퍼함이 특심하였고 조위와 제봉이 유달랐으며 예관을 보내 장례를 돕도록 하여 양주 흉복산 건좌원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중후하고 체기가 엄정하였으며 마음가짐은 정성스러웠고 사람을 대할 때는 충직으로 대하였다.

 

또 여러 사무를 결재함에는 깊은 사려로서 하였으며 평탄하고 순리를 좇아 처리하여 차질이 없었다. 입조 45년동안 후회스럽거나 잘못됨이 없어 좋은 자리를 두루 거치었고 오랫동안 의정을 맡았지만 사람들이 감히 하자를 말하지 못하였고 모두 장덕 거공으로 추중하였다.

 

매양 국사를 염려하여 새벽까지 불을 밝혔으며 중히 여긴 것은 오직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것이었으니 사방의 손님을 만나면 반드시 생면의 이병과 관방의 완급에서부터 토지의 옥척과 산천의 험이까지 자세히 물어 두루 알고 있었기에 수응하여 조처함이 눈으로 보고 친히 밟아본 듯 정확하였다.

 

평생에 화사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물품의 왕래가 없었고 대정에 임하여도 대사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자기의 의견을 내세움이 없이 고전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였다.

 

역대의 성스러운 법들을 준수하여 분경함이 없었으며 형법을 특히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선인께서 늘 입에 살(殺)자는 올리지도 말라고 가르치셨기에 내가 여러 차례 얼사를 맡아서도 인명을 가벼이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살릴 수 있는 길을 강구하였도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김안로에게 미움을 샀었는데 진부창이 안로를 믿고 날뛰니 공이 그의 면전에서 그를 일러 소인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량과 윤원형이 서로 이어 찬축을 당하니 공이 바로 그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음양과 주야가 바뀜과 같으니 사람들은 이리하여 이것으로 세도를 점치고 있는 것이다.

 

공은 내행이 순칙하고 조선에는 효도를 다하였으니 종손이 가난하여 사당을 세울 수가 없자 자기 가산을 털어서 이를 지어주었고 문춘공의 사우가 오래되어 퇴락하니 그것도 중수하였으며 종족을 무양하여 혼취까지 시켜주면서 자기의 돈으로 혼수를 마련하여 주면서도 조금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아니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양친께서 생존하셨을 때에는 씀씀이도 잇지 못 했었는데 내가 요행이 후록을 받게 되니 부미지탄이 가슴속에 간절하다.”하였다. 병이 더하니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국은이 융중하여 죽어도 이를 다 갚을 수다 없도다. 

 

나는 아무런 기록할만한 공적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를 세우려 하지 말고 모관 성명만 적어 묘도에 세워서 후세에 선악만 알게 하면 족하다.”고 하고 가사에는 일체 언급이 없었으며 다만 나라 일을 걱정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오호라! 사조를 주선하면서 울연히 종신이 되어 벼슬에 있기도 하고 집에도 있으면서 복록을 누리었고 또 장수도 누리었고 녹도 많았으며 살아서는 영화를 다하고 죽어서는 명성을 실추시킴이 없었도다. 또 오복을 고루 받고 은혜는 자손에게까지 끼쳤으니 공과 같은 분은 아마도 옛사람들이 말한 영덕 전창 종시 완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우리 국가에서 여러 성왕들의 교화가 돈독하고 그 베풂이 훌륭하였기에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어 황극을 좌우에서 도와 태평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원대한 포부와 장래를 생산하는 깊은 심려가 음으로 배양되고 또 말없는 가운데서 북돋아져 원기는 부식되고 이로서 국맥은 길이 누리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취만 보고 겉만 아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누구를 지적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지금까지 국조의 현상을 말하는 이는 반드시 공을 갑이나 을로 치기는 하지만 사업이나 헌체로는 범최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부인 창령조씨는 의로운 행의와 높은 식견이 있었는데 5년 후에 생을 마치셔서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4남을 두었는데 항은 광흥장수요 개는 호조좌랑이요 순은 동지중추부사로 증 좌찬성이고, 율은 문과에 합격하여 왜구를 정벌하는데 대공을 세워 도원수로 개부하였고 선무원훈에 책록되어 증 영의정 영가부원군에 봉해지고 장렬이란 시후를 받았다.

 

손자로서 도총부도사 인경과 상생인 신경 그리고 여서인 이조참판 이유중 참봉 박원호 공주목사 한종주 완양부원군 이충원은 항의 소생이오, 여서 참봉 정구응 우의정 김상용 상생 유대이는 개의 소생이오, 황해병마사 진경 금성현령 이경 평서서령과 여서 길주목사 이수준은 순의 소생이오, 

 

여서 영의정 오성부원군 문충공 이항복은 율의 소생이다. 4방의 내외손이 극히 번창하여 문호가 정성하니 사람들은 이것으로도 공이 몸에 복을 쌓았다가 자손들에게 남겨줌이 이토록 풍성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하기를,

 

권씨는 신라에서 분파되어 여초에 씨를 받았도다.

면면히 이어오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면서

종족이 널리 퍼져 백복이 전창하였도다.

 

문충이 뒤를 이어 부자가 다 같이 이름을 날렸도다.

3세는 벼슬이 낮았으나 마침내 강정이 나왔도다.

강정은 조정에 나아가 이성을 만났도다.

 

손으로 국병을 잡아 나라의 수상이 되었도다.

공은 서정을 조화하여 하자도 번거로움도 없었도다.

다스림에는 상경이 있었고 형벌에는 상헌이 있었도다.

 

내가 그 준척을 지키어 백료를 권면하였도다.

공은 머리 숙여 절하고 몸이 늙어 물러나기를 청하였도다.

 

그러나 왕은 “경은 나의 구신이니 집안 노인과 같다.”고 하시며

“나라도 다스리고 병도 고쳐 이 두 가지를 다 이루기 바라노라.”고 하시었도다.

 

공도 상부에 있으면서 궤도 받고 장도 받았도다.

공이 등청하면 황문이 부축하였도다.

 

살아서는 영화로웠고 죽어서는 슬픔 받으니

종시 깊은 은혜를 입었도다.

 

공신을 두루 살펴보아도 누가 공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가?

장렬한 그 아들은 옹공과 짝할 만 하도다.

 

자손은 승승하여 나라와 성쇠를 같이 하도다.

명을 각하여 명성을 선양하니 영원히 전해지소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 이민구는 짓고,

 

11세손 계공랑권지 승문원부정 응기는 썼으며, 외손 11세손 통훈대부 의정부검상 겸 남학교수 규장각 검교 대교 별제 춘추지제교 이유원은 전을 하다.

 

공이 돌아가신지 269년(헌종 13, 1847년) 정미년 8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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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諡康定權公神道碑 -篆額-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謚康定權公神道裨銘幷序

 

嗚呼在昔 明 宣之際時號隆平治化溥洽其相權公實惟宗臣四總首揆有默運之功及年至致仕 上固留公錫以杖而公去益力則輒以御批敦勉有曰卿德量足以鎭物才智足以謀國當今賢相莫踰於卿曰老成大臣國之蓍龜曰股肱 輔霖雨舟楫夫人臣肩社稷之重稱遇於時君千百年乃幸一有聖諭款至若不可一日無公雖殷宗之命傳說曷以過此公亦感 上之知三八四出竟卒于位是足以觀 君臣矣公五十二年始事下太常贈謚曰康定旣又二十一年始以墓道顯刻屬不?敏求夫年遠則公議定事久則實蹟泯顧不?邈然後生懼事泯論次實當公議謹采家狀及長老掌故紀傳之?而?之曰公諱轍字景由權氏得姓由太師華事載國乘傳至文忠公近用文學名世是生仍父子位貳公距公五代漣川縣監諱摩楊根郡守諱僑江華府使諱勣實公三世 贈漣川公判書楊根公成江華公領議政皆以公貴故?順興安氏以弘治癸亥生公貞幼氣吳常偉然遠器戊子成進士甲午擢文科始隷成均館選入翰林金安老惡直筆不阿遽下考 中廟下問權某見貶何罪安老誅復史職移承政院注書 上每於文義可疑輒以咨公一曰 御後苑試製近臣公詩後成上命中使趣進其受眷如此拜弘文館著作博士兼侍講院說書己亥陞修撰自是至丁未諸曹則兵吏佐吏兵刑正師儒則成均館直講論思則弘文館校理言官則司憲府持平司諫院納諸署則軍器寺繕工監司瞻寺副正掌樂院司僕寺正春坊則文學弼善中書則檢詳舍人此其九年間踐履或有再入三入與聞官散班今可略也嘗告病調急 仁廟在東宮遣內侍 賜以珍劑日登 筵 問疾錫爵以公邃於易學常兼講官甚有 恩紀及 中 仁兩廟連歲禮陟公再監封 陵至庚戌由承文院判校陞朝拜承政院同副承旨在院三年進都承旨歷兵曹知戶曹議時嶺南饑授公嘉善階拜觀察使及瓜以都承旨召入對便殿上迎謂公南?百萬賴卿全濟特賜煖帽丙辰 御筆擢除刑曹判書湖南新中倭寇畺事大聳?用公爲觀察使兼都巡察使備禦得機宜賊船近岸以 聞戊午華使御 帝命來 世子公以遠接使迎送無違禮移長夏官 上謁 光陵公充布營使部勒嚴士無敢譁離次俄拜議政府右贊成時李樑以宰敗 上循人望用公爲代旣而公再歷貳公判本兵兼知 經筵而尹元衡得罪黜 御筆特晋公爲議政府右議政?丙寅歲也公黃閣不激不隨維匡財輔甚允輿論 明主所毗士類所恃翼年丁卯隆慶紀元公入朝賀 登極臨行 上軫念行役引接溫慰且曰新 皇初政進退人物及嘉靖舊臣之起廢收召者悉可訪問公退謂僚相 聖諭出此悔端萌矣顯訟乙已無辜雪寃昭慝庶有望乎使還在途承 明廟上賓號欲絶旣復 命入對首以正 君心嚴宮禁爲說 宣廟爲傾聽嘉納其冬陞左揆居六歲遂都上相壬申春上章告老經年始釋負踰月復大政於是求退益切 注倚益隆雖間蒙 恩而不數月輒被延登 錫予便蕃禮遇殊絶以公蹈履有愆每進見 命小黃門扶掖至欲 令肩輿入朝戊寅公年七十六政府大槐樹暴風公曰是徵吾處耳疾甚促令正席强起草遺?因氣乏失聲曰吾不復見 聖主矣 上聞公疾革當 筵輟講遣承旨臨問已不能言矣訃聞 上震?特甚弔慰祭贈視例有加備物具禮官庇襄葬于楊州洪福山負乾之原公資性厚重體氣方嚴特心待持必誠以忠裁庶務志精慮專夷塗順軌鮮有蹉跌立廟四十五年悔吝靡及歷仕久秉勻軸而人不敢議其疵咸以推長德鉅公每念國事或明燈逮曙所重者惟安民固閨其遇四方客必詢生民利病關防緩急以至土地沃山川險易無不審問而周知故應措處悉若目見親履平生不喜華靡不通問遺臨大政決大疑不立意見必循古典遵守 歷朝成憲無所紛更尤重刑法嘗曰先人敎以口不道煞字故吾屢長?司未嘗敢輕用人命必求生道始舍安老而陳復昌?安老張甚公面斥其小人李樑尹元衡相繼竄而公輒得其處猶陰陽晝夜君子以是卜世道焉內行淳飭盡孝祖先宗子貧無以立廟則家貨以營文忠公祠宇歲久頹則又爲之修葺撫眷宗族經紀昏娶費皆出於公初無難色常曰二親在世日給靡繼不肖僥冒專享厚祿負米之嘆實切中懷及寢疾謂諸子曰國恩隆重處難稱報旣無功德可紀處後無所事碑雖書某官姓名以表墓道使後世知吾善惡足矣更不及家事但語國事諄諄不已嗚呼周旋 四朝蔚爲宗臣在公在家旣壽且祿生寵其榮歿無隕名膺受五福澤流子孫若公者豈古所謂令德全昌終始完人者非耶仰惟我 國家 累聖敦化薰蒸融徹以篤生魁碩左右皇極以登熙平其遠猷長慮陰培默植扶元氣而壽國脈者非睹跡膚識可得指數一二故至今譚國朝賢相者必第公甲乙而事業猷爲無能擧其凡最夫人昌寧曺氏有懿行高識後公五年歿而焉擧四男曰恒廣興倉守曰愷戶曹佐?曰恂同知中樞府事 贈左贊曰慄用文科進破倭?立大功以都元帥開府策宣武元勳 贈領議政永嘉府院君諡莊烈孫男曰仁慶都摠府都事信慶庠生女適吏曹判李有中奉朴元虎公州牧使韓宗胄完陽府院君李忠元爲恒出曰女適奉鄭龜應右議政金尙容庠生大爲愷出曰晉慶黃海兵馬使履慶金城縣令益慶平市署令女適吉州牧使李壽俊爲恂出曰女適領議政鰲城府院君文忠公李恒福爲慄出四房內外子姓克蕃克昌門戶鼎盛君子又以知公?積於躬而遣?於後者豊隆如是云銘曰

 

權派于羅受氏麗始代序或或起溥興其宗百福全昌文忠承之與嗣俱?三世位以有康定康定當朝乃遭 二聖 手?魁柄公調元公諧庶政不不煩治有常經刑有常憲我司其準百僚攸勸公拜稽首臣老乞身 王曰家卿余舊臣庶幾兩濟邦釐養公在相府有有杖公登于 筵有掖黃門存榮均哀終始 隆恩歷視功載疇匹其休有烈象賢雍公是逑子孫繩繩?國盛衰刻詩著聲於永厥垂

 

嘉善大夫吏曹?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右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 李敏求

 備十一世孫啓功權知承文院副正字 應 書

 

外十一世孫通訓大夫議政府檢詳兼南學敎授奎章閣檢校待敎別春秋知製敎 李裕元 篆

 

公歿後二百六十九年丁未八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