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변양걸 신도비명 병서(邊良傑神道碑銘 幷序)

야촌(1) 2014. 8. 23. 16:37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변공 양걸(邊公良傑)의 신도비명 병서.

 

지은이 청음 김상헌

 

지중추부사 변공(邊公)이 졸하고서 15년이 지난 뒤인 갑자년(1624, 인조 2)에 공의 큰아들인 흡(潝)이 황해 절도사(黃海節度使)로서 두 원수(元帥)를 따라 역적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였다. 얼마 뒤에 상께서 명을 내려 힘써 싸운 여러 장수들을 모두 공신(功臣)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에 진무 공신(振武功臣)이라는 공신호를 하사하고는 절도사를 봉하여 원흥군(原興君)으로 삼은 다음, 은혜를 미루어 공을 영의정에 자급을 뛰어넘어 추증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다.

 

절도사가 임금의 총애하는 명을 공손하게 받고는 영광스럽게 여기고 감격스러워하였으며, 이어 가르침을 받고 복을 받게 된 사유를 드러내기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나 상헌에게 비석에 새길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전에 이미 공의 광(壙)에 묘지(墓誌)를 써서 파묻었으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양걸(良傑)이고, 자는 국화(國華)이다. 변씨는 가계(家系)가 본디 중국에서 나왔는데, 아무 대의 조상인 숙(肅)이 원나라 말기에 고려로 와서 벼슬해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어 원주(原州)를 관적(貫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 뒤에 고려가 망하자 배천(白川)으로 물러나 살다가 집에서 졸하였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휘가 확(確)이라는 분이 있어 충좌위 사직(忠佐衛司直)을 지내고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자정(自靖)을 낳았는데, 토산 현감(兔山縣監)을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위(偉)라는 분을 낳았는데, 예조 좌랑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삼대(三代)가 추증된 것은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부장(部將)을 지낸 민희현(閔希賢)의 따님이고, 부원군(府院君) 민여익(閔汝翼)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 12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양친을 잃었는데, 장사를 지낼 때 어른과 같이 예를 다하였으므로 향당(鄕黨)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장(龍驤衛部將)에 제수되었다. 강계 판관(江界判官)과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하고 벽동 군수(碧潼郡守),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승진하였으며, 천거하는 자가 있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뛰어올라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에 인산진 첨사(麟山鎭僉使)로 옮겨졌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올라갔으며, 다시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이 세 진은 모두 서북 지방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공이 역임한 자리마다 모두 능력이 있다고 칭해졌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장차 크게 쓰고자 하였으므로 빠르게 승진시킨 것이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북쪽 변경에 경보가 있어 공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고, 이어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제수하였다. 공은 위엄과 명망이 점차 높아졌으므로 병사들이 대부분 공의 휘하에 소속되기를 바랐다. 이에 주장(主將)이 속으로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품어 거짓을 날조해 무서워서 적을 피했다고 공을 무함함에 따라 서쪽 변경으로 귀양 갔다.

 

얼마 뒤에 시전(時箭)의 역(役)이 있어 논공(論功)하여 다시 서용함에 따라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호강(豪强)한 자들을 억누르고 빈약한 자들을 진작시키면서 위엄을 중하게 하되 가혹하게 하지는 않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복종하였다. 다시 충청 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다음 해인 임진년(1592)에 왜구가 서울을 침범해 와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행행(幸行)하고 열군(列郡)이 와해되었다. 공은 떨쳐 일어나 휘하 사람들을 거느리고 육로를 통해 연강(燕江)까지 가서 왜적을 맞아 싸워 작은 승리를 거뒀다. 이에 장차 군사들을 합쳐 진격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삼로(三路)의 대군(大軍)이 용인(龍仁)에서 궤멸되었다. 공은 개탄하면서 진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근왕(勤王)을 하기 위해 해로를 통해 가서 해주(海州)에 도착하였다. 감사 조인득(趙仁得)을 만나 황해도의 수군(水軍)을 빌려 장산도(長山島)를 지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인득은 배 한 척에 목숨을 붙이고 있어 그 휘하들을 부릴 수가 없는 처지였으므로 부끄러운 마음에 무어라 할 말이 없자, 나라의 일이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고 크게 소리쳤다. 

 

사졸들이 그 말을 듣고서는 모두 흩어져 떠나가려고 하였는데, 공이 충의(忠義)를 가지고 격려함에 따라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당시에 행궁(行宮)이 멀리 용만(龍灣)에 있어 나라의 명맥이 거의 끊어질 판이었다. 

 

공은 이에 군사들을 이끌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더불어 강도(江都)를 지켰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호령이 비로소 양호(兩湖) 지방에 통할 수가 있었다. 겨울에 조정에서 대신을 파견하여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에 대해서 지난날의 원한을 갚고자 하는 자가 헐뜯는 바람에 백의(白衣)로 군졸에 예속되었다.

 

다음 해인 계사년(1593, 선조26)에 다시 기용되어 경성 수호대장(京城守護大將)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충청 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제수되어 역당(逆黨)들을 붙잡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다시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으며,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에 제수되었다가 어떤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고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기용되어 황해도 절도사(黃海道節度使)에 제수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경기 우방어사(京畿右防禦使)에 제수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훈련도감 대장(訓鍊都監大將)이 되었다. 병졸 가운데 죄를 범하여 장차 형벌에 처해지게 된 자가 있었는데, 후궁(後宮)으로서 지위가 높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그 세력이 다른 사람들의 화복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자가 곡진히 비호하면서 구해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것을 거절하고서 끝내 법대로 처단하였다. 그러자 그 뒤로는 감히 사사로이 청탁하는 자가 없었다.

왜노(倭奴)들이 관시(關市)하기를 요구해 옴에 따라 상이 재추(宰樞)들을 불러 묻자 모두들 기미책(羈縻策)을 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공만이 홀로 대답하지 않았다. 

 

상이 계속해서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신은 군중에서 복무하면서 이 왜적들을 박멸해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화친을 말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이르기를, “나는 경의 말을 옳게 여긴다.” 하였다. 이에 의논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더욱더 공을 중히 여겼다. 공은 활을 쏘는 기예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 잇달아 두 품계가 올라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으며, 전후로 하사받은 상이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았다.

 

중국 군사로서 항오를 이탈하여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자들을 중국 병부(兵部)에서 관원을 파견해 찾아내어 감옥에 수감하였다. 이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몰래 수백 명이 모여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빼내려고 성 바깥에 둔치고 있으면서 장차 난동을 부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경계하지 않고 있던 차에 일이 발생하여 도성 안이 놀라 두려워 떨면서 성문을 대낮에도 닫아걸었으며, 도로에 미리 탐지하는 사람을 앞서 보내고서야 길을 갔다. 묘당에서 군사를 보내어 이들을 섬멸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 가운데 자리에 있는 자가 몹시 많았으나 성상의 뜻에 흡족한 자가 없었다. 

 

당시에 공은 마침 해직되고서 집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소명을 받아 들어가자 상이 부절을 주었다.

공은 그곳에 이르러서 계책을 써서 그들이 꺼리고 있던 것을 적중시켰다. 이에 뭇 잔당들이 군사를 풀고 포박을 받음에 따라 경성의 계엄(戒嚴)이 풀렸다. 

 

그러자 상께서 기뻐하면서 다시 공에게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제수하였다. 이어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도총관(都摠管), 상방(尙方)ㆍ무고(武庫)ㆍ원유(苑囿)ㆍ비변(備邊) 등 사(司)의 제조를 겸임하여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 도성 안의 도적들을 금지시키는 일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도적이 유성군(儒城君) 유희서(柳熙緖)를 살해하였는데, 유희서가 데리고 살던 첩 가운데 외부와 사통하는 자가 있어 일이 장왕자(長王子)인 임해군(臨海君)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사정을 보아 여지를 남겨 두라고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을 모두 체포해 국문해서 실상을 모두 밝혔다.

 

그러자 선조(宣祖)께서 노하여 공을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공이 신문에 답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상이 더욱 노하여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대신 가운데 구원해 주는 말을 하는 자가 있어 단지 동래(東萊)로 유배되는 데 그쳤다. 

 

그해 겨울에 사면령이 내려져 배천(白川)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는 하루 치의 식량조차 없어 조석의 끼니를 다른 사람이 꿔 주기를 기다려서야 지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공은 태연한 기색으로 지내면서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급한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다음 해인 무신년(1608, 선조41)에 산릉(山陵)에 나아가 임하였고, 다시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제수되어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였다가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고쳐졌다. 

 

제주에 도착하여서는 지난날의 정사 가운데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공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는 함부로 취하거나 주지 않았다. 돌아옴에 미쳐서는 옷과 말 및 복식(服飾)이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공은 바닷가에 있으면서 풍질(風疾)에 걸렸는데, 서울에 돌아와서는 더욱 심해졌다.

 

경술년(1610, 광해군2) 7월 18일에 졸하니, 춘추가 65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조회를 폐하고 조문하고 부의하였으며, 제사를 하사하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공이 죽고 난 뒤에는 말을 팔아서 염습을 하였으며, 그러고서도 모자라 집을 팔아서야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장지는 강음현(江陰縣)에 있는데, 신화리(新化里)에 있는 곤향(坤向)의 산등성이에 새로 묘자리를 정해 장사 지냈다.

 

부인 조씨(趙氏)는 공보다 먼저 죽어 공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천장(遷葬)하여 공의 묘에 합부(合祔)하였다. 조씨는 가계가 배천에서 나왔는데, 복흥군(福興君) 조반(趙胖)의 후손이며 충의위(忠義衛) 조광종(趙光琮)의 딸이다.

 

공은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절도사(節度使) 흡(潝)이고, 차남은 익(瀷)인데 일찍 죽었다. 딸은 판관(判官) 노유명(盧有命)과 사인(士人) 최대익(崔大益)과 현감(縣監) 최대윤(崔大允)에게 각각 시집갔다.

 

절도사 흡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복일(復一)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있다. 

익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일(希一)은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있다.

 

공은 또 측실로 정씨(鄭氏)와 이씨(李氏)가 있다. 

측실에게서 난 아들인 옥(沃)은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로 있고, 일(溢)은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로 있으며, 딸은 첨정(僉正) 방선경(方善慶)과 판관(判官) 이원(李源)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이들은 정씨의 소출이다.

 

또 약(瀹)과 무과에 급제한 술(㳚)과 결(潔)과 혁O과 즙(濈)이 있으며, 나 상헌(尙憲)의 첩으로 있는 딸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씨의 소출이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손녀는 모두 36명이다.

 

공은 자태가 특출하여 현달하기 이전부터 보는 자들이 모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성품은 강인하고 꿋꿋하여 어려서부터 뜻을 세웠으며, 늙어서도 나태하지 않았다. 

 

여러 자식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아주 법도가 있어 끝내 성취되게 하였다. 

관직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안팎이 모두 숙연하여 아래로 종들에게 이르기까지 감히 방종하거나 안일하게 굴지 못하였다.

 

공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가지고 기세로 억누르려고 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마치 단단한 돌을 무딘 칼로 찔렀을 때 한 치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막아 내었다. 훈련도감 대장으로 있을 적에는 이조의 낭관과 하나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는데, 조금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 뒤에 공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갔을 적에는 반자(半刺)로 있는 자가 바로 이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좌천되어 온 자였다. 이에 그 사람이 속으로 공이 반드시 몸을 굽혀서 자신을 대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공은 예전과 똑같이 처신하였다. 이에 큰 유감을 품었으며, 끝내는 공이 이로 인해 중상(中傷)을 당하게 되었다.

 

공은 평생토록 이런 성격으로 인해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으면서도 끝내 고치지 않았다. 정승으로 있던 이덕형(李德馨)이 일찍이 상에게 아뢰기를, “변양걸은 본디 강경하고 곧아서 의(義)에 맞지 않는 것이면 비록 병사(名士) 10명이 있다 하더라도 움직이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선조가 하교를 내려 특별히 표창하는 뜻을 보이라고 하였다.

 

공은 큰 고을을 두루 역임하고 여러 차례 부절을 잡았으나,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축낸 바는 있어도 더한 바는 없었다. 동기간에는 우애롭기가 시종 한결같았으며, 외롭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어 옷가지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항상 말하기를, “내가 아무런 재능이나 공적이 없는데도 훔쳐 먹은 것이 지나치게 많다. 

그러니 자손들은 마땅히 더욱더 자신을 검칙해서 복이 지나친 데 대한 재앙을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해 공에게 후손다운 후손이 있을 것임을 알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려서도 부모상에 예 다했거니 / 齔也喪親如禮

자식다운 자식 바로 공이었다네 / 子哉公

 

늙어서도 우애의 맘 안 변했거니 / 耆也友愛不替

동생다운 동생 바로 공이었다네 / 弟哉公

 

조정에선 충성의 맘 확고했거니 / 立朝也忠而確

신하다운 신하 바로 공이었다네 / 臣哉公

 

자식 교육 시켜 번창하게 했거니 / 敎子也俾職職

아비다운 아비 바로 공이었다네 / 父哉公

 

하늘에서 내려보고 살펴 주었고 / 天之監之

신령께서 돌봐 주어 복을 주었네 / 神之福之

 

이 뒷날에 공의 행적 찾아보는 자 / 後有躅者

여기에서 모범 삼을 수 있으리라 / 其式刑玆

 

[주-01]시전(時箭)의 역(役) : 미상(未詳)이다. 시전은 혹 오랑캐 지역이나 함경도 지역의 지명(地名)인 듯하다.

 

[주-02]관시(關市) : 국경 지대에서 외족(外族)과 물품을 교역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왜관개시(倭館開市)를 말한다.

 

[주-03]이때……있었다 : 1603년(선조36) 유희서가 포천(抱川)에서 화적(火賊) 박삼석(朴三石) 등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조사 결과 유희서의 첩 애생(愛生)이 임해군(臨海君)의 궁노(宮奴)인 김덕윤(金德允)과 합심하여 지아비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 임해군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宣祖實錄 37年 1月 1日》

 

[주-04]반자(半刺) : 목사(牧使)나 부사(府使)의 보좌관을 가리킨다.

 

청음집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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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知中樞府事邊公神道碑銘 幷序 知中樞府事邊公卒後十五年甲子。長子潝以黃海節度使。從兩元帥平逆适之難。尋有命最諸將力戰者皆爲功臣。錫號振武。封節度原興君。推恩超贈公領議政原城府院君。節度祗承寵命。旣榮而感。乃圖顯其襲訓委祉之由。請銘諸石。尙憲前已誌其壙。辭不獲。按公諱良傑。字國華。邊氏本出中國。某代祖肅。當元末來仕高麗。爲工曹判書。賜籍原州。麗亡退居白川。終於家。入我朝有諱確。忠佐衛司直。贈戶曹參議。生諱自靖。兔山縣監。贈戶曹參判。生諱偉。禮曹佐郞。贈議政府左贊成。寔公之考。三代之贈。由公貴也。妣驪興閔氏。部將希賢之女。府院君汝翼之後。嘉靖丙午十二月生公。未十歲。喪二親。如成人禮。鄕黨咸異之。二十七。登武科。授龍驤衛部將。歷江界軍器二判官。陞碧潼郡守。軍器僉正。用薦者超拜慶源府使。未赴。移麟山鎭僉使。階折衝。又移江界府使。三鎭俱西北重地。以公所歷著能稱。朝廷將大用。故亟遷之。癸未北鄙有警。以公爲助防將。仍授吉州牧使。公威望漸隆。兵士多屬望。主將心害之。捏誣公逗撓。謫西邊。未幾有時箭之役。論功復敍除順天府使。抑豪強振貧弱。威重不苛。吏民畏服。擢拜忠淸水軍節度使。明年壬辰。倭寇犯京。宣祖西幸。列郡瓦解。公奮領所部。陸行至燕江。遌賊戰少利。將合兵進討。會三路大軍潰于龍仁。公慨然還鎭。由海道勤王到海州。見監司趙仁得。借本道水手。護過長山。仁得寄命一舟。不能使其下。愧無以爲辭。宣言國事已無可爲。士卒聞之。皆欲散去。公以忠義激勵。軍情稍定。時行宮逖在龍灣。國脈幾絶。公乃引軍。與倡義使金千鎰扼守江都。由是朝廷號令始通於兩湖。冬遣大臣視師。遇有修郤于公者。白衣隷軍。明年起爲京城守護大將。俄拜忠淸兵馬節度使。捕獲逆黨。進嘉善大夫。還兼都摠府副摠管。拜咸鏡南道節度使。坐事罷歸。又拜黃海節度使。未赴。改京畿右防禦使。入爲訓鍊都監大將。卒有犯罪將刑。後宮貴077_315a幸。其勢立禍福人者曲爲營救。公拒之。卒正法。後無敢以私干焉。倭奴求通關市。上引問宰樞。皆以羈縻爲言。公獨不對。上卒問。公對曰。臣待罪行間。恨不得滅此賊。以雪國恥。敢言和耶。上改容曰。予是卿言。議遂決。朝廷益重公。用射藝絶等。荐加二階爲資憲大夫。前後賞賜無算。天兵脫伍在我國者。兵部遣官搜索。監囚獄中。餘黨潛聚數百人。簒取囚徒。屯結城外將作亂。事出不戒。都內震驚。城門晝閉。道路設瞭望乃行。廟堂欲以兵殱之。諸將在位者甚多。莫有稱上意。時公適解職家居。趣召入授符。公至以計中其忌諱。群黨釋兵就縛。城中解嚴。上喜復拜公大將。授知中樞府事兼知訓鍊院事都摠管提調,尙方,武庫苑囿,備邊等司。與聞軍國重事。又管禁止都內盜賊事。盜殺儒城君柳熙緖。熙緖所畜妾有外私事。連長王子。或勸公爲之地者。公不聽。悉捕鞫。盡得其狀。宣祖怒下公金吾。公置對不少詘。上愈怒。事幾不測。大臣以爲言。僅竄東萊。其年冬。遇赦還白川家。無一日之食。朝夕待人擧火。處之怡然。一不以急告人。明年赴臨山陵。復拜都摠管。俄授水原府使兼防禦使。改濟州牧使。至官盡祛前政爲民弊者。奉公之外。不妄取予。及歸。裘馬服飾。一無所易。公在海。外患風疾。至京寢加。庚戌七月十八日卒。春秋六十五。訃聞。輟朝弔賻。賜祭如儀。公歿。粥馬以殮不給。粥宅以葬。葬在江陰縣新卜新化里坤向之原。夫人趙氏先歿。葬于公先兆。至是遷祔公墓。趙出白川。福興君胖之後。忠義衛光琮女也。生二男三女。長卽節度使。次瀷蚤世。女適判官盧有命,士人崔大益,縣監崔大允。節度一男一女。男復一。文科刑曹正郞。瀷一男一女。男希一。武科都摠都事。側室鄭,李二姓。曰沃。武科司果。曰溢。武科萬戶。女僉正方善慶,判官李源。鄭出也。曰㵸。曰㳚。武科。曰潔曰曰濈。女卽尙憲妾也。皆李出。內外諸孫男女三十六人。公姿表英特。自未達時。見者皆知其必貴。性剛毅。少有立志。至老不懈。敎訓諸子。甚有法度。卒能成就。居官居家。內外肅然。下至奴僕。不敢縱逸。遇有非理氣勢相加者。若猛石受鉛刀。不入膚寸。爲都監大將也。與天曹郞。爭一公事不相下。牧耽羅半刺。由詮郞黜官。意公必降屈相接。公處自如。遂大嗛。卒致中傷。平生屢以此見躓。終不改。李相德馨嘗言於上曰。邊某素勁直。非其義。雖十名士不爲動。宣祖下敎。特示褒予。歷典鉅郡。累擁節旄。先人遺業。有捐靡益。友愛同氣。終始如一。撫恤孤貧。衣食與分。常曰。吾無才能功伐。而竊取太過。子孫當加儆飭。勿致過福之災。是吾望也。人以是知公之有後也。銘曰。齔也喪親如禮。子哉公。耆也友愛不替。弟哉公。立朝也忠而確。臣哉公。敎子也俾職職。父哉公。天之監之。神之福之。後有躅者。其式刑茲。<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