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82호)
(소재지 : 경기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산4-20외)
■ 파평윤씨정정공파(坡平尹氏貞靖公派)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 있는 파평윤씨정정공파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신달(莘達)이며, 현손 관「瓘,미상∼1111(예종 6)」은 고려중엽의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벌족(伐族)을 이루며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그리고 파평윤문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承禮)와 소정공파(昭靖公派>坤)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 인구의 약 80%를 점유한다.
판도공파는 승례(承禮)의 아들 대에서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 규(珪)」·부윤공파「府尹公派>보로(普老)」·정정공파「貞靖公派>번(磻)」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정쟁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승례의 아들 번(磻)은 세조의 국구(國舅,왕비의 친정아버지) 로서 그의 맏아들 사분(士昐)은 우의정, 둘째 사윤(士昀)은 예조판서, 셋째 사흔(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다. 그
러나 훗날 사윤(士昀)과 사흔(士昕)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나와,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일가상잔(一家相殘)의 비극이 일어났다. 사윤(士昀)의 증손 윤임(尹任)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며, 장경왕후는 윤여필(尹汝弼)의 딸로서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사흔(士昕)의 증손인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을 낳은 뒤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 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둘째아들 윤사 윤은 윤임, 장경왕후(아들 인종) 남매의 증조부이고, 셋째아들 윤사흔은 윤원로, 문정왕후(아들 명종), 윤원형 남매의 고조부이다.
윤임과 윤원로 원형 형제가 서로 자신의 누이가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 대립하니 둘째아들 윤사윤 집안을 대윤이라 하고 셋째아들 윤사흔 집안을 소윤이라 했다.
↑세조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 부모인 파평윤씨 중시조 윤번과 배위 인천이씨 묘.
●윤번/세조의 장인
윤번尹璠[1384(우왕 10)~1448(세종 30))은 조선의 문신. 자는 온지(溫之), 승례(承禮)의 아들. 이름을 번(磻)으로 쓰기도 한다.
세조의 장인이며, 고려 말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이다. 뒤늦은 나이에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긴 후에 신천현감을 거쳐 1428년(세종 10) 군기시판관을 역임하였다.
↑윤번 묘소를 둘러보는 답사팀
같은 해 7녀가 후일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가례를 올리자 군기시부정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 공조와 이조의 참의에 이르렀고, 2년 뒤에는 공조와 호조의 참판을 지냈다. 1436년(세종 18)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1438년 경창부윤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경기도도관찰사로 나가 민심을 돌보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40년 우참찬을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에 이어 지중추원사가 되는 등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윤번 묘소 앞에서 바라 본 윤번의 부인 인천이씨 묘역 후경
1442년(세종 24) 풍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왕은 시의를 보내 병을 돌보게 하였다. 1447년 병중임에도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임관하고 판중추부사를 더하였다. 이듬해 7월 65세를 일기로 죽었다. 부음을 들은 왕은 부의를 보내고 2일간 철조를 명하기도 하였다. 법도있는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관직에 나가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이조에서 사헌부로 자리를 옮긴 후,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면서도 엄격하게 처리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455년 6월 세조가 즉위하고 딸이 정희왕후(貞熹王后)에 책봉됨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인천이씨 묘역 전경
파주시청 이윤희 문화재전문위원은 “윤번은 딸이 왕비(정희왕후)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떴지만 인천이씨는 그 뒤에 사망해서 국장(國葬)을 치렀기 때문”이라며 “국내의 장명등 가운데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윗 쪽의 묘가 윤번의 묘이고, 하단의 묘가 부인 인천이씨 묘이다.
가장 오래된 조선청화백자 발견
한겨레 | 기사입력 2003.10. 26 09 : 01
1456년 제작된 세조의 장모 인천이씨 묘지석, 전문가들 「도자사 다시 써야할 국보급 유물」
1456년에 제작된 세조 장모 인천이씨 묘지석
현재 연대가 확인된 조선시대 백자 가운데 가장 시기가 이른 15세기초의 청화백자 묘지석이 600여 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고려대 박물관은 지난해 10월부터 올 5월까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유물을 조사・정리하다.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장모인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1383~1456) 의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 묘지석을 찾아냈으며 이 묘지석이 세조 2년(1456년) 만들어진, 국내 최고의 청화백자로 확인되었다고 26일 밝혔다.
푸른 코발트 안료로 무늬, 글씨를 넣은 청화백자는 <세조실록><용재총화> 등의 문헌기록 등으로 미뤄 세조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해왔으나 그동안 동시대 유물들은 발견된 바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묘지석은 문헌기록을 실증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자 조선 청화백자의 뿌리를 찾는 결정적 실마리로 평가된다. 박물관쪽이 최근 펴낸 조사보고서를 보면 묘지석은 2001년 5월 문중 후손들이 교하면 당하리 인천 이씨의 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회청색 빛을 띠는 묘지석은 가로 27~28cm, 세로 36~37cm, 두께 1.5~1.7c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덮개 구실을 하는 순백자 지석1장과 청화글씨가 새겨진 4장의 백자판으로 이뤄져 있다. 발견당시 무덤과 상석사이에 묻힌 돌 상자(합)속에 나란히 포개진 채 들어있었다.
이들 묘지석에는 경태(명나라 황제 연호) 7년 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 이씨가 별세했으며 10월 8일 예를 갖춰 매장했다는 장례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 및 후손들 현황 등의 기록을 청화안료를 입힌 해서체 한자로 반듯하게 써놓았다.
인천이씨는 세종 때, 중신으로 세종과 사돈지간이자 세조의 장인이 되는 정정공 윤번(1384~1448)의 부인이다. 보고서는 이 청화백자가 현존 청화백자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며 양질의 흙과 유약으로 구은 최상급 백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편년이 확실한 조선백자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는 경남 진양군 영인정씨(令人鄭氏) 묘에서 나온 ‘백자상감 묘지석’(1466년・국보 172호・호암미술관 소장)이, 청화백자로는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홍치2년 연대가 쓰인 소나무・대나무 무늬 청화백자 항아리(1489년・국보 176호)가 있으나 인천이씨 무덤의 묘지석은 제작시점이 그보다 10~30여 년 앞서는 것이다.
앞서 묘지석을 살펴본 윤용이 명지대 교수(도자사)는 “국내 청화백자의 첫 제작시기가 최소한 1450년대까지 올라갔음을 확인시켜준 국보급유물”이라며 “발색 등이 뚜렷하고, 구워낸 방식이나 보존상태 등도 좋아 1467년 관요(왕실전용 가마)설립 이전 이미 높은 수준의 청화백자 제작기술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강경숙 충북대 교수도 “도자사를 다시 써야할 획기적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박물관쪽은 2003년 11월 6일~22일 열리는 파평윤씨 묘역 출토유물 특별전에 이 묘지석을 공개하기로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윤사흔[尹士昕, 1422(세종 4)~1485(성종 16)의 묘역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능선상의 윤번 묘역권역
윤번의 셋째아들 윤사흔(尹士昕·1422~1485)의 묘역 입구엔 화려한 문양의 2.5m 크기 신도비가 서 있었다. 이위원은 신도비의 「윗부분을 연꽃잎처럼 말아 올린 화관석(花冠石) 양식으로서 불교의 영향이 남아있던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유행하다 사라졌다」며 “윤사흔 신도비는 현존하는 화관석 양식 중 가장 걸작”이라고 말했다.
<신문기사에서 발췌>
윤사흔[尹士昕, 1422(세종 4)~1485(성종 16)]은 조선초기의 척신이자 문신. 자는 필보(弼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낸 증(贈) 영의정 번의 셋째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풍채와 재질이 범상치 않아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1444년(세종 26) 음보로 세자세마가 되었다가 많은 관직을 지낸 후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從七品)을 역임하였다. 직장으로 있으면서 몸가짐과 법도에 어굿 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1455년 6월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후의 지친이라서가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을 인정받아 군기감정軍器監正-正三品)으로 출사하였고, 이어서 정랑으로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때 의정부의 전리를 마음대로 문책한 탓으로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등용되어 인순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로 승계하면서 중추원사에 등용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가 되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훈척공신으로 총병의 직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하여1473(성종 4)년 대사헌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가 다음해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종진(腫疹)에 걸렸는데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 결국 1485년 죽음에 이르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몹시 애통해하며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했다.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파평윤씨 카페에서 발췌>
↑윤번의 셋째아들 윤사흔의 묘(윗쪽 묘역) ↑윤원로의 묘(아랫쪽 묘역)
윤원로(尹元老, 미상~1547(명종 2])는 조선전기의 문신.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지임(之任)의 아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자, 원형(元衡)의 형이다. 왕실의 외척으로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오빠라는 기반을 등에 업고 동생인 원형과 함께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경쟁자였던 김안로[金安老,(성종 12)∼1537(중종 32)]가 권세를 부리자 대윤·소윤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싸움은 윤임(尹任)이 김안로의 세력을 배경으로 후일 인종이 될 동궁(東宮)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종에게 아뢰어 동생 원형과 함께 자신을 내쫓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번은 김안로와의 대결로 1537년(중종 32) 좌사어로 있을 때 김안로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해에 김안로가 사사된 뒤 풀려나왔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릴 적에 동궁(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윤임이 중종에게 아뢰어 원형과 함께 그를 외직으로 내쫓았을 때부터 소위 대윤·소윤의 싸움이 비롯되었다.
동궁이 장성하도록 아들 없이 병약하였는데, 그는 세자를 바꾸어 세운다는 소문을 만들어 길거리에 전파시키기도 하고, 또는 후에 명종이 되는 대군(大君)이 위태롭다는 말을 퍼뜨려 대윤· 소윤의 대립은 격화되어갔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함으로써 대윤의 세력이 확대되어 파직 당하였으나, 이듬해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한 뒤 군기시첨정으로 등용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윤인경 등의 탄핵으로 또다시 파직당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명종 1년에 석방, 귀환되었다.
돈녕부도정에 기용되어 윤원형과 권세를 다투었으며, 공신에 참여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자주 불평을 말하다가 윤원형의 족질이며 심복인 병조좌랑 윤춘년의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어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다. <파평윤씨 카페에서 발췌>
↑소윤 윤원형(小尹 尹元衡)의 묘
↑윤원형尹元衡)과 정난정(鄭蘭貞) 우측의 작은 묘역)의 묘역 전경
대윤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이기[李芑,1476(성종 7)∼1552(명종 7)]. 정순명, 임백령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난정(蘭貞)이라는 자기의 첩을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다.
이기는 병조판서가 되려할 때 유관이 이를 방해하였고, 임백령은 기생첩 때문에 윤임과 다툰 일이 있어 원한을 품었으며, 정순명은 평소부터 사람들을 미워하여 언제든지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과 결탁하여 윤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관, 유인숙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의 내용은 「"임금(仁宗)의 병환이 위중할 때 윤임이 장차 제 몸이 보존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의 아우(명종)을 추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림군(桂林君)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유관과 유인숙도 이에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윤임, 유관, 유인숙을 처치하려는 밀지를 예조참의였던 그에게 내렸는데, 이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아 세인의 의혹을 피할 길이 없고, 또 신하로서의 의리는 자기가 섬기는 분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이제와 그 당시 대행왕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심한 죄를 주는 것이 과연 타당 하느냐 하는 점과, 왕실 외척간의 문제로 왕의 덕에 누가 될 것을 들어 처벌에 반대하는 공론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29일 궁중에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하였다.[을사사화(乙巳士禍)], 권력을 장악한 그는 4, 5명의 악한 무리를 심복으로 삼아 평소 원한이 많았던 이들을 유배 또는 삭직하여 적대세력을 도태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 후 그 공으로 보익공신 3등으로 개봉되어 서원군(瑞原君)에 봉하여졌다.위력과 세력이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하여, 성내에 집이 열여섯 채요, 남의 노예와 전답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정난정(鄭蘭貞)을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하였다. 생살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정난정의 묘역 뒷편에서 바라 본 윤원형의 묘역 모습
1546년 명종 1년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윤원로가 유배됨으로써 더욱 세력을 굳게 하고,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 벽서의 내용인즉 「"여자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라는 것으로 이로 인해, 봉성군(鳳成君)과 참판 송인수 및 이조좌랑 이약해는 사형되고, 이언적, 정자, 이염, 임형수, 노수신, 장황, 유희춘 등 잔존 인물도 숙청하였다.
한편, 동지춘추관사로서 <중종실록> 및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4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551년 영중추부사로써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1557년 영중추부사 이듬해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며, 1560년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63년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리다가 1565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실각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리(田里)로 방귀(放歸)되었으며,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파평윤씨 카페에서 발췌>
↑문정왕후 윤씨의 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묘역 후경 윤지임(尹之任, 미상∼1534[중종 29])은 조선중
기의 외척. 자는 중경(重鄕), 내자판관을 역임한 욱(頊)의 아들로 문정왕후와 소윤의 윤원로(尹元老). 윤원
형(尹元衡)의 아버지이다.
장원서의 별제로 처음 벼슬길에 나섰으나, 딸이 1514년(중종 9) 중종의 둘째 계비로 간택되자 정치적 입지가 넓어졌다.
이후 여러 자급이 뛰어 돈녕부의 도정을 거쳐, 1519년(중종 14) 영돈녕부사에 이어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나갔다.
여기에 1522년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으로 봉군되었다. 국구(國舅,왕후의 친정아버지)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농번기에 매사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처첩을 빼앗기도 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문정왕후 윤씨의 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묘역 전경인데, 아래 사진에서 처럼 도굴되었음.
문정왕후 부모 묘가 도굴범에 의하여 훼손된 모습(아래사진 참조)
한겨레기사등록 : 2008-11-30 오후 08:46:22
조선초 명종(1534~1567)의 어머니와 외삼촌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1501~1565)와 윤원
형(미상~1565). 남매의 부모인 윤지임(미상~1534)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의 합장무덤이 최근 도굴범
에 의해 크게 훼손된 것으로 밝혀졌다.
파평윤씨종친회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선영 안의 윤지임 부부 합장묘가 최근 봉분이 뚫리고 내부 관 주위까지 파헤쳐진 사실을 확인해 관할경찰서에 신고했다고 30일 밝혔다. 현장을 살펴본 김우림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쌍분인 합장묘 봉분 뒷부분에 큰 구멍을 내고 회곽(관을 둘러싼 회다짐 층)바로 윗부분까지 깊숙히 파헤쳐 처참한 몰골 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파헤쳐진 무덤내부에서 관을 싼 회곽 사면을 20cm가량 다시 정성스럽게 싼 숯층이 드러나 윤지임 묘가 조선 초 매우 높은 격식을 갖춘 양반 무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며 “관 주위에 묻은 지석과 명기 등 부장품 상당수가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지임은 중종 때 주로 활동한 중신이다. 딸 문정왕후를 중종의 계비로 출가시켜 왕실 외척이 되면서, 훗날 ‘윤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평소에 한나라 문제(文帝)가 국구 두광(寶廣)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한 고사를 들면서 외척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정작 자신의 아들인 원형은 소윤의 영수가 되어 대윤 윤임 일당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왕실의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다.
자신의 지론을 아들이 어긋나게 했지만, 그 덕에 순충적덕보기공신(純忠積德輔祈功臣)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됐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파평윤씨 카페에서 발췌>
윤원필[尹元弼, 1496(연산군 2)~1547(명종 2)]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다. 자는 인재(隣哉). 추산부원군 지임(之任)의 아들이다. 상의원정을 역임하였으며, 1564년(명종 19)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으로 녹훈되면서 대호군 겸 내승을 제수 받았다. 후에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파평윤씨 카페에서 발췌>
↑묘역 하단에서 바라 본 전경(앞의 묘가 윤원필, 뒤의 묘가 윤지임의 묘)
●430년의 잠에서 께어난 ‘파평윤씨 모자미라 ’출산 중 사망으로 태아를 품고 있었다.
↑미라가 입고있던 수의ⓒ 한성희 |
↑파평윤씨 모자미라ⓒ 한성희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서 발견됐던 430년 전 모자미라가 긴 잠에서 깨어나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7일부터 고려대학교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22일까지 ‘파평윤씨 모자 미라 및 특별유물전’이 열려 미라와 유물들을 전시한다.
발굴된 수의와 얼레빗, 바늘꽂이 등 부장품과 누비장옷, 화려한 금박의 겹 단저고리와 겹 단치마 등 사대부 집안 부인의 복식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1566년 매장된 미라는 수의 홑바지 허리끈에 ‘병인윤시월’이라는 한글묵서가 적혀 있어 정확한 사망연대를 알 수 있고 부장된 화려한 색상의 복식이 쏟아져 나와 언론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2002년 9월 파평윤씨 종중에서 미라를 기증받아 고대의과대학에 정밀조사를 의뢰했다. 조사결과, 고대의과대학은 '출산과정에서 자궁파열로 인한 과다출혈'이 미라의 사망원인이라고 밝혔다. 남아로 밝혀진 태아도 자궁에서 미라상태로 남아있었다. 이에 미라를 ‘파평윤씨 모자(母子) 미라’로 명명했다.
모자미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는 희귀성과 완벽한 보존성, 출토된 많은 복식 류와 언문편지, 쪽지 등으로 인해 어떤 신분의 누구인지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고대박물관이 이를 조사해 공개한 것이다.
모자미라는 누구일까?
미라의 주인공은 파평윤씨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타 집안으로 출가했다가 친정에서 출산도중 사망한 20대 중반의 젊은 여인이다. 친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친정인 파평윤씨의 종산에 묻혀있는 것이다.
파평윤씨 종중 무연고묘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모자미라는 묘석이나 묘표가 발견되지 않아 '병인윤시월'(병인년 윤시월에 사망)이라는 습의의 기록과 파평윤씨 족보기록, 한글편지 등으로 추정한 것이다.
또 인종의 후궁인 숙빈이 쓴 한글편지도 출토돼 미라의 신분 확인에 한 역할을 했다. 숙빈은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량(1495-1569)의 딸이다. 따라서 윤원량 집안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윤원량의 자식인 윤소(1515-1544)의 첩실 외동딸일 것이라고 정호섭 고대박물관 학예사는 추정한다.
관에서 발견된 4품 단령과 흉배는 미라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미라의 아버지(윤소)나 할아버지(윤원량)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친정에서 출산도중 사망한 손녀딸에 대한 애틋한 애정으로 할아버지가 넣어주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문정왕후 오빠인 윤원량은 미라가 사망할 때까지 살아있었고, 손녀의 장례를 주도했을 것으로 보여 미라의 관속에서 발굴된 부장품은 모두 윤원량과 관계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관속에서 발견된 언간(言簡)과 시신의 머리카락에서 참빗을 싸서 발견된 편지 등은 모두 부장품을 싸는데 사용된 것이다. 망자가 애지중지하는 편지를 염을 하는 과정에서 정식으로 넣은 게 아니라 단순히 부장품을 싸는데 이용했다. 그래서 보낸 사람과 받은 사람이 분명하지 않고 훼손이 심해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인종의 후궁 숙빈 윤양제의 언문편지는 윤원량의 부인인 친정 어머니에게 보낸 것으로 아들인 윤소의 첩녀(妾女)인 미라의 염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미라의 피부는 이집트 미라와는 달리 탄력성과 촉감이 부드러운 것으로 밝혀졌다.
이집트 미라는 만지면 부서지는 딱딱한 형태지만 모자미라는 사지를 벌리면 벌어질 정도로 탄력과 살아있는 피부 같은 부드러운 촉감을 유지했다.
키는 153.5cm이고 몸은 비교적 영양상태가 좋은 비만체형이다. 처음에는 암으로 사망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고대의과대학의 복부해부 결과 난산으로 인한 사망으로 밝혀진 것이다. 음모가 그대로 있고 미라의 외음부는 쉽게 벌어져 태지에 둘러싸인 태아의 머리와 머리카락도 관찰됐다.
4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미라의 장(臟)속에서 선충류로 추정되는 기생충이 발견돼 신분이 상류층에 속하는 미라가 음식을 설익혀 먹거나 날로 먹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로 식물성 섬유소와 꽃가루가 장에서 발견됐고, 위샘세포 역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존되어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왜 미라가 됐을까?
우리나라는 산성토양이고 기온 특성상 온대 습윤지역이라 미라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모자 미라가 발견된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와 와동리 파평윤씨 분묘주변에서는 1980년대 농수로 공사 때 예상하지 못한 무연고 묘지가 상당수 발견됐고, 이때 미라가 5-6기 발굴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1999년 국지도 공사 때도 처녀미라가 발굴돼 이 지역은 미라의 발굴이 빈번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20만평에 이르는 파평윤씨 정정공파 종중묘역은 오랜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누구의 묘인지 모를 무연고 묘역이 많은 편이다. 모자미라도 문인석과 상석과 향로까지 갖춘 묘역이었다고 한다. 파평윤씨 묘역은 비석의 역사적 가치로 현재 도(道)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미라가 되려면 시신이 들어 있는 목관을 에워싸고 있는 회곽에 공기 유입이 차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미라가 되는데 토양보다 주요한 원인일 것이라는 게 고대 생태공학부의 판단이다. 우리나라는 미라발견도 드물지만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미라가 발견돼도 화장하는 관례 때문에 단국대에서 처음으로 남아미라를 발굴 보존하여 최초로 전시회를 가진 이후로 이번 고대박물관 '특별전시회'가 두 번째 사례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파평윤씨 종중의 모자미라 기부로 학술종합연구를 하고 전시회를 하게 된 것은 매우 큰 성과로 평가 받는다. 역사학, 국어학, 복식학 등 인문학과 의학, 자연과학, 법의학 등 여러 학문을 총동원하여 연구를 진행했고, 전 과정을 영상화하여 자료를 남겨놓았다.
고고학자들은 고려대학박물관이 이번 모자미라 연구로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발돋움했다는 극찬을 하고 있다. 고려대학박물관은 그동안의 연구 결과로 '파평윤씨 모자미라 종합논문집(고려대학교박물관 발행)'을 출간했다.
모자미라 발굴부터 전시회까지 관계했던 김우림박사(고대박물관 학예과장)는 "이번에 전시된 미라의 보존을 위해 특수 제작한 전시관이 마련됐고, 미라신체부위마다 습도와 온도가 다르게 조절되었다"며 "미라를 기증해주신 파평윤씨 종중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2003-11-0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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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
⑨파평윤씨 문중 묘와 보학 예절 '용맥이 끊긴 중시조 윤번 묘 후손들 분란 예고했나.
↑정정공 윤번 묘 뒤의 입수룡(入首龍). 두툼하게 내려오다 혈처 5m 지점에서
멈춰선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매우 드물고 희귀한 현장이다.
윤번은 세조대왕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다. 풍수공부를 한답시고 남의 묘를 살피고 다니다 보면 가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수천 년 된 고인돌을 탐사하며, 장사지낸 지 천년이 넘는 옛무덤 앞에서, 명당 중 명당이라는 재벌이나 정치인 산소를 눈치껏 살피며, 갑자기 떼돈 벌어 왕릉같이 꾸며 놓은 졸부의 호화분묘 앞에서, 때로는 살아서의 행적에 비해 너무 초라한 폐묘를 지나치며 말이다.
수없이 오르내리는 답산 길에서 한결 같이 얻어지는 결론이 하나 있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의 한 생을 살 테면 제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잘 살아 봐야 100년 남짓인데 함부로 살았다간 무서운 역사의 멍에가 씌워진다. 그 악업의 굴레는 모조리 후손들의 몫으로 연좌제보다 더 가혹한 역사의 심판이 영영세세토록 이어지고 만다.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묘를 취재하러 가는 차안에서 누가 그런다. 사람끼리 척지거나 원수지고는 살 일이 아니라고.... 더더욱 가까운 친구나 친· 인척간에는 척지고 살게 아니란다. 물어물어 묘를 찾아가는 데는 두 분의 이름보다는 ‘대윤묘’ ‘소윤묘’ 해야 더 잘 통한다. 이들의 묘는 전혀 다른 곳에 따로 있었다.
↑경기도 파주의 소윤 윤원형 묘. 대윤과는 9촌간이었고 문중 간 불화가 국정농단으로
이어졌다. 삭탈관직당해 비석은 나중에 세운 것이다. 뒤쪽에 정난정의 묘가 보인다.
파평윤씨(坡平尹氏) 문중묘역하면 우선 경기도 파주시를 떠올린다. 이곳 교하읍 당하리 산4-20번지의 방대한 땅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된 22만여평의 산록에 96기의 산소가 모셔져 있으며 여기에 윤원형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내로라하는 역사적 인물들이다.
소윤 묘는 해좌(북에서 서로 30도) 사향(남에서 동으로 30도). 남한의 청주를 나경 중심으로 가정하면 인천에서 부산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삭탈관직을 당했을 뿐 멸문지화는 면했으므로 돼지띠와 뱀띠의 후손들이 돼지해와 뱀해가 돌아올 때마다 길흉화복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이번 산행에는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임원 20여명이 함께했다. 윤갑원교수는 이곳에서도 전임 강의를 하고 있다.
명당 판정과 입수 용맥 재는 것을 확인하느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이상돈 청주지회장이 묻는다.
“윤 교수님도 파평윤씨신데 이분들과 촌수는 어찌 되시나요?” 간산 길 떠나면서부터 묻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직조(直祖)는 아니고 방조(傍祖)가 되십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네요. 윗대 조에서 분파되었습니다.”
소윤 묘를 살피던 중 당판 왼쪽 섶에서 정난정의 묘를 찾아냈다. 초계정씨난정지묘(草溪鄭氏蘭貞之墓). 내심 반가웠다.
역시 해좌사향으로 묘는 초라하지만 그래도 남편 곁에 묻혀 있어 마음이 놓이는 심사는 무엇일까. 수년 전 TV 사극에 ‘여인천하’가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여인이다.
역사는 그녀를 노비출신 애첩으로 윤원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에 오른 악녀라고 사정없이 매질한다. 소윤의 친누이였던 문정왕후와 함께 끼친 역사의 누는 왕조실록에 기록된 대로지만 지난 사실(史實)들을 표독스럽게만 보아 버리면 절통함만 더해질 따름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대윤 윤임 묘. 소윤 윤원형에게 사사(賜死)당해 묘석조차 제대로 없다.
초라한 문인석이 굽어보인다(왼쪽), 가까이서 본 정난정 묘. 윤원형의 묘역 안에 있으며 초계 정씨였다.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했다.
소윤파 문중의 윤훈덕(59·종산관리사 겸 묘지제례담당)씨도 생몰연대까지 정확히 제시하며 선조들의 치적을 설명하다가도 이분들의 행장(行狀)이 거론되면 슬며시 웃어넘기고 만다. 일일이 안내하며 촌수관계와 묘역관리 상황을 들려준다.
물론 윤 교수와도 한 문중이나 구태여 촌수는 안 따져 본다. “파평윤씨의 중시조가 되는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王番·1384∼1448)은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낸 분입니다. 세조대왕의 장인으로 정희왕후 윤씨의 친정아버지이며 소윤의 5대 할아버지입니다.
당시 임금이 하사한 사패지였으니 얼마나 기름지고 산세 또한 좋았겠어요.” 한참을 걸어 윤번의 묘에 다다르니 말 그대로다. 윤번의 묘(해좌사향)는 부인 인천이씨(건좌손향)와 합장이나 쌍분으로 용사하지 않고 상하로 모셔져 있다.
산혈(穴)이 모자라거나 좁을 때는 좌우로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떠오른다. 용·혈·사·수의 사신사에서 좌우 당판이 머문 곳까지 온화하고 따뜻하다. 청명한 날에는 삼각산이 먼 조산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혈처다. 윤 교수가 “이 자리에서는 정정공 묘도 건좌손향이어야 하는데” 하면서 내룡 맥을 재본다.
간(艮·북동) 입수에서 해좌(亥坐·북서)로 홱 돌아선 천룡(賤龍)에 가까운 맥이다. 천룡자리는 무관이 나오거나 발복이 빠른 용맥으로 번신(?身)과 기복이 심한 산등성이를 말한다. 누구나 선조의 묘를 살피면서 이런 내룡을 만나면 주목해야 한다.
꼼꼼히 살펴보니 정정공 묘 입수 내룡맥이 용사한 당판 혈처와 끊어져 있다(사진 참조). 윤 교수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른다. 그 옛날 당대 실세의 묘를 쓰면서 왜 이걸 소홀히 했을까. 5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맥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이 5m의 맥이 연결되지 않아 후손들 간 분란이 야기됐다고 해석한다면 너무 앞서가는 풍수에 대한 과신일까.
아무튼 윤번의 고손자(4대손) 윤임과 5대손 윤원형은 패가망신하도록 싸웠다. 윤원형의 생질(제13대·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9촌 아저씨 되는 윤임을 왕명으로 사사(賜死)시켰고 친형인 윤원로마저 유배시켜 죽였다.
↑파평윤씨 문중묘역에서 사신사와 국세를 설명하는 윤갑원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
삼각산이 먼 조산으로 다가오는 혈처다.
이번에는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향동동 봉산자락. 대윤 윤임 묘를 찾기는 정말 힘들었다. 고양시청 문화과는 물론 이 지역 향토사학자까지도 금시초문이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윤파 문중의 윤주일(尹柱一·53)씨 안내로 그의 묘 앞에 섰다.
비석조차 제대로 없어 후손의 동행 없이는 당판에 서서도 지나칠 묘다. 수개월 전 도굴당해 복원시켜 놓았다고 설명한다.
오좌(정남) 자향(정북). 참으로 드문 혈처다. 산세에 따라 북향도 용사하지만 혈처 앞이 내리 쏠리며 복토로 돋워 놓은 부토가 역력하다. 입수 용맥이 정미(丁未), 미곤(未坤), 경유(庚酉)의 삼지파(三枝破)로 갈라졌다.
당시 윤원형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때인데 누가 나서서 감히 좋은 자리를 잡으려 했을까 싶다. 기념물이나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다.
중국에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가 왕위에 올랐다. 조비는 동생 조식이 자신보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늘 시기하고 죽이려 했다. 조비가 동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詩를 못 지으면 죽이겠다고 했다. 조식이 울면서 지은 게 칠보시(七步詩)다.
자두연두기(煮頭燃豆) /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재두부중읍(在豆釜中泣) /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본욱동생근(本昱同生根) /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 무슨 원수로 이리도 급히 삶아 대는가.
콩대를 형에, 자신을 콩에 비유하여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렇게 자기를 들볶는 것이냐’는 뜻을 넌지시 읊은 것이었다. 조비는 크게 뉘우치고 그 후부터 동생에게 잘했다고 한다. 대윤파와 소윤파는 현재까지도 왕래가 별로 없다고 한다.
문중 간 행사나 시제가 있을 때도 서로 바라만 본다고 했다.
파주 문중 땅 소유권을 둘러싼 6년 송사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고 있는 실정이다.
↑윤임의 어머니 순천 박씨 묘(위)와 몸종 묘.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을 아래 위로 쓴 예는
조선묘제에서도 찾기 힘들다.
후일 율곡 이이는 대윤 윤임을 두고 ‘죄가 없다’ 했고 퇴계 이황은 ‘죄가 없지 않다’고 평가했다.
나머지는 후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윤임 묘를 내려오다 보니 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어머니 순천박씨 묘가 몸종 묘와 함께 있다. 평생을 수족같이 따랐던 정성이 지극하여 후손들이 위 아래로 용사했다고 한다. 드문 묘제다. 따지고 보면 한 문중에서 당대 왕비를 둘씩이나 배출하다 보니 서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던 권력욕에서 비롯된 싸움이다.
대윤의 동생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았고, 소윤의 누이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셋만 길을 걸어도 스승이 하나 있다고 했다. 기제사나 상가 문상 시 향로에 술잔을 몇 바퀴씩 돌려 올리는 게 제대로 갖춘 예의냐고 누가 묻자, ‘그건 절대 아니다’라고 정색한다.
상·제례는 생존 시와 똑같이 여기고 모시는 예절이라며 “모처럼 고향집을 찾은 아들이 부모님께 잔을 올리면서 서너 바퀴 빙빙 돌려 드시라고 권하면 기뻐하시겠느냐”고 못을 박는다. 이번에는 일가끼리 만났을 적 나이와 항렬(行列) 중 어느 쪽이 먼저냐고 묻는다. 때마침 시제철이어서 적절한 질문일 듯 싶다. 이번에는 보학(譜學)이다.
마땅히
①연고(年高·나이)
②항고(行高·항렬)
③경고(經高·벼슬이나 사회경력)
④학고(學高·학력)순으로 존중했다. 가까운 친척일수록 항렬이 우선이었다고 덧붙인다.
실제로 나이와 항렬 중 어느 쪽이 먼저냐는 논쟁은 어떤 종친회 이사회서 정식 거론된 적이 있음을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옛날에는 한 울타리 안에서 10촌이 난다고 했다. 대윤과 소윤은 9촌간이었다.
윤임(1487∼1545년)과 윤원형(1509∼1565년)이 살던 때는 연산군 학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황해도 구월산에 도적떼가 창궐하여 임꺽정이 백성의 영웅이던 시기다. 이들의 불화가 빚어낸 국정농단과 인명피해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다.
주막집 새벽 등잔 파르르 꺼지려는데,
일어나 별을 보니 헤어질 때로구나.
껴안고 말없이 둘 다 말없이
잘 가라 하려니 기어이 울음 터져.
다산 정약용이 귀양길에서 형과 헤어짐을 탄식한 시다. 문중마다 형제간의 우애가 이렇게 다를까. 아무 사심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예나 지금이나.
<시인·온세종교신문 온곳 : 카페>한국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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