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 09. 26(금)
옛 사람들이 조상의 분묘를 좋은 곳에 쓰고자 했던 것은 효심(孝心)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상의 혼령이 골육(骨肉)을 계승한 후손과 소통한다는 생각에서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여러 조상들을 함께 모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42세 때인 정조 2년(1778) 세도가 홍국영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했다가 양호맹(梁浩孟)의 개성 금학동(琴鶴洞) 별장으로 이주했다.
이때 박지원은 개경의 남원(南原) 양씨들이 가까운 산에 조상의 분묘를 모시고 이를 지키는 분암(墳菴)의 이름을 '영원히 생각한다'는 뜻의 영사암(永思菴)이라고 지은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영사암기(永思菴記)'를 지었다.
'영사암기'에서 연암은 친족들은 살아 있을 때도 같이 사는 것이 좋고 죽은 후에도 한 묘지에 모시는 족장(族葬)이 좋은데도 세상 풍속이 무너지면서, "장지가 화복을 준다는 풍수지리설〔堪輿禍福之說이 효도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고 서로 믿는 마음[孝悌睦任之心]을 능가하게 되어 각각 따로 산소를 두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박지원은 남원 양씨들이 분묘들을 한 곳에 모신 것을 조상에 대한 효심이라며, "장차 그 씨족과 세대가 더욱 번창함을 볼 것이며, 그런 뒤라야 세속의 이른바 풍수지리설이 장차 우리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다산 정약용도 '풍수론(風水論)'에서 지사(地師)를 초빙해 길지(吉地)를 가려 묏자리를 정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는 예(禮)가 아니다. 어버이를 매장하면서 복(福)을 바라는 것은 효자의 마음이 아니다"라고 묏자리를 기화로 발복(發福)하려는 세태를 비판했다.왕릉도 마찬가지였다.
효종의 장지를 정할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이나 백헌 이경석(李景奭)이 주장한 것처럼 '오환(五患)'이 없는 자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오환은 앞으로 ①도로 ②성곽 ③연못이 되거나, ④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⑤농지가 될 곳을 뜻한다.
왕릉일지라도 이런 장소만 피해 효를 다하면 된다고 본 것이다.
산 자를 위한 발복(發福)이 아니라 산 혼령에 대한 효심(孝心)이 담긴 곳이 묘소라는 것이다.
가져온곳 : 블로그 >매한불매향 |글쓴이 : 외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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