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접한 내시공신 묘역을 찾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덕산중학교 뒷산, 유일한 내시공신. 초상화 주인공 '김새신'의 묘.
지난 일요일(4월 29일) 오후 유일한 내시(內侍) 공신(功臣) 초상화의 주인공 묘역을 찾아 길을 떠났다. 내시와 궁녀 관계' 책을 출간한 바,있는 필자로서는 그동안 답사했던 어느 곳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었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 탐방한 것이 2006년 4월이었으니 이번이 3번째 답사인 셈이다.
첫 답사 땐 서울 은평구 신사동 산 31번지 덕산(德山)중학교 뒷산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답사 길에 올랐었다. 100미터 전방에서 학교 뒷담 뒤로 문인석이 있는 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저거다' 하는 예감이 들었다.
↑내시부 상선 김새신묘(은평구 신사동 산31번지). © 박상진
묘표는 원수형(圓首形) 2면비로, 비신 전면에 '忠勤貞亮扈聖功臣正憲大夫樂城君金公位之墓(충근정량호성공신정헌대부낙성군김공위지묘), 후면엔 피장자의 이름이 새신(璽信)이라 쓰여 있었다. 생각대로 그곳은 필자가 찾던 내시 초상화의 주인공 묘였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김새신(金璽信 1555∼1633년)은 누구일까? 비문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내시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왕인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공로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낙성군(樂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가 군보(君寶)이다. 묘는 쌍분(雙墳)인데, 묘표·상석·향로석·문인석 등을 갖췄다. 쌍분을 통해 부인과 함께 묻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호성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84명인데, 이중 내시 출신은 김새신을 비롯해 무려 24명이나 된다. 이들 3등 공신에 봉해진 24명의 내시에겐 다음과 같이 실로 파격적인 포상이 내려진다.
'…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 <선조실록> 37년 갑진(1604, 만력 32) 10월 29일(을해)조 기사에서
<내시 공신의 묘역을 찾아서>
↑호성공신 낙성군(樂城君) 김새신(金璽信) 영정 호성공신 낙성군 김새신의 초상화로 얼굴에 수염이 없다.
화폭 81.3×153cm /파주 헤이리 93번지 박물관 소장©박상진지난 2001년 KBS1 TV의 <진품명품> 프로에서 유
일한 내시공신 초상화로 권위 있는 감정가들로부터 감정가 1억 8000만원을 받았고, 현재는 파주 헤이리 93박물관
에 전시하고 있는데, 현재 판매가는 7억이다.
그럼 내시인 초상화의 주인공 김새신이 이곳에 묻힌 원인이 궁금했다. 현재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에는 '세력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 궁에서 나온 내시가 이곳 '윗세력골'과 '가운데 세력골' 사이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을 조선시대 현종 4년(1663) 서울 북부지역의 호구조사(戶口調査) 자료인 '한성부 북부장호적(漢城府北部帳戶籍)'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중 신사동계(新寺洞契)에 거주한 내시로는 통훈대부 내시부 상설(尙設) 강득호(康得浩), 상제 허춘란(許春蘭), 상경 김의신(金義臣), 상촉 이춘영(李春榮)이 있었다.
이 밖에도 진관내동 백화사 뒤쪽에 기자가 발굴하여 2003년 언론에 소개한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의 문중 묘지 45기가 남아 있고, 진관근린공원에도 여러 기의 내시 묘역이 산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비석은 6·25동란에 총탄세례를 받은 듯 여러 군데가 떨어져 나가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여럿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새신 묘표의 비문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公諱璽信字君寶嘉靖三十四年乙卯十月七日生崇
崇禎六年癸酉八月三十日卒○○○日葬于楊州西
十里新寺洞亥龍山壬坐丙向○○○長禦侮將軍行
龍驤衛副司勇金忠笠養子○○○○內侍府尙茶洪
次海次通訓大夫行內侍府○○○○○○○○○○
崇禎七年甲戌甲戌五月 日立
[비문 국역]
공의 휘(諱)는 새신(璽信)이요, 자는 군보(君寶)이다. 가정(嘉靖) 3년인 을묘년(1555년, 명종10년) 10월 7일에 태어나, 숭정(崇禎) 6년인 계유(癸酉 :1633년, 인조 11) 8월 30일에 죽었다.
○월○일에 양주(楊州) 서쪽으로 십리 지점인 신사동(新寺洞) 해룡산(亥龍山) 임좌 병향(壬坐丙向)에 장사지냈다. (세 글자가 판독불가) 장남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행용양위 부사용行龍驤衛副司勇)으로 있는 김충립(金忠笠)이요,
양자(養子)는 (네자가 판독불가) 내시부 상다(內侍府 尙茶)인 홍차해(洪次海)며, 다음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내시부(行內侍府) (이하 10자 판독 불가) 숭정(崇禎)7년 갑술(인조 12년,1634) 5월 모일에 세우다.
↑상선 김새신 묘표. 총탄 흔적이 보인다.© 박상진
필자는 이 비문에서 2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다른 문헌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김새신의 졸년(卒年 : 사망한 해)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이 산의 이름이 해룡산(亥龍山)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현재 조선왕조실록 중 김새신에 대한 기록은 5건 정도로 너무나 소략하며, 다른 문헌에도 김새신의 개인 신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신사동에 있는 김새신의 묘표는 김새신의 생애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겠다.
또 그의 묘는 내시 출신 공신 묘로는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孝村里)의 연양군(延陽君) 김계한(金繼韓 : 호성공신 3등) 묘와 중랑구 신내동의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 : 세조조 정난공신, 좌익공신 2등)의 묘와 함께 몇 안 되는 공신 내시묘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술 한잔 못 올리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 기회엔 주과포(酒果脯)라도 준비해서 조용히 한번 찾아보리라 다짐해본다. 유일한 내시 공신 초상화 주인공의 묘역이니 만큼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출처 :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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