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윤휴 북벌론 꺾은 사대부들의 이중성

야촌(1) 2010. 9. 15. 17:56

■ 윤휴 북벌론 꺾은 사대부들의 이중성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4호 | 20090725 입력]

 

북벌론은 효종 사망과 동시에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 청나라가 삼번(三藩) 철폐 문제로 내전에 휩싸이자 조선에서 다시 북벌론이 등장했다.

 

이때의 북벌론은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대립했던 백호 윤휴가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지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역사의 붓대를 잡은 자가 미래인의 뇌리를 지배하는 사례다.

 

三宗의 혈맥 숙종

② 淸 내란의 호기

 

현종 말~숙종 초 청나라는 ‘삼번의 난’이라고 불리는 내전에 휩싸였다.

삼번은 청나라 남부에 있는 일종의 자치왕국들로서 오삼계(吳三桂)가 중심이었다.

 

 

▲강희제의 초상화. 9세에 왕위에 올라 69세까지 60년간 통치했다. 중국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 재위했다.
    재위 시절 삼번(三藩)을 철폐
하고 대만을 장악해 청조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사진가 권태균

 

명나라 총병(總兵)이었던 오삼계는 산해관(山海關)에서 청의 남하를 막아냈으나 1644년(인조 22년) 농민군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자살하자 ‘황제의 원수를 갚자’는 명분 아래 청에 항복했다.

청나라 군사와 북경에 입성한 오삼계는 이후 청나라의 장수가 되어 남부의 섬서·사천성 등지를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청이 명의 항장(降將)들에게 분봉(分封)해 다스리게 한 것이 삼번이다.


오삼계를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해 운남(雲南)·귀주(貴州)성을 다스리게 하고, 상가희(尙可喜)를 평남왕(平南王)으로 봉해 광동(廣東)성을, 경중명(耿仲明)을 정남왕(靖南王)으로 봉해 복건(福建)성을 다스리게 했다.


1649년(인조 27년) 경중명이 죽자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정남왕의 지위를 세습한 것처럼 사실상 세습왕국같이 행세했다. 대륙 전체를 지배하기가 버거웠던 만주족이 한족에게 한족을 다스리게 한 ‘이한제한(以漢制漢)’이었다.


즉위(1662) 당시 강희제(康熙帝: 1654~1722)는 아홉 살의 소년이었으므로 청 태종(太宗)의 부인이었던 할머니 태황태후(太皇太后)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와 오배(鰲拜) 등 고명(顧命) 4대신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통치했다.강희제는 열여섯 살 때인 재위 9년(1670)에 친정을 시작했으나 삼번엔 손을 대지 못했다.


재위 12년(1673:현종 14년) 3월 평남왕 상가희가 요동 귀향(歸鄕)을 요청하면서 아들 상지신(尙之信)에게 평남왕의 자리를 세습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강희제는 귀향을 허락했지만 세습은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 번도 형식상 철번을 요청했으나 막상 철번을 받아들이면 내전이 발생할 분위기였다. 청 조정도 ‘철번 반대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청사고(淸史稿)』 근보(<9773>輔)열전에 따르면 강희제는 “친정 이후 삼번, 하무(河務), 조운(漕運)을 (국가) 삼대사(三大事)로 삼아 기둥에 써 놨다”고 전할 정도로 철번 의지가 강했다. 스무 살의 젊은 황제는 전쟁을 각오하고 철번을 명했다.

 

오삼계는 예상대로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를 자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켰고 두 번왕(평남왕과 정남왕)이 가세하면서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돌변했다. 전황은 불투명했으나 강희제가 불리하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중국 운남성, 곤명시 외곽의 금전사(왼쪽). 금전사에 있는 신상들. 한족들 사이에서는 이신상이 청나라에

    맞섰던 오삼계 상이라는 구전이 전해 내려온다(오른쪽).

 

효종이 재위 10년(1659) 송시열과 독대에서 “틈을 봐서 저들이 예측하지 못할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가면 중원의 의사(義士), 호걸들이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희망했던 국제 정세가 조성된 것이다.

 

효종 같으면 비축미를 풀어 당장 압록강을 건넜을 상황이었지만 북벌 대의를 외치던 집권 서인은 조용했다.

청이 전란에 휩싸였다는 소식은 현종 15년(1674) 5월께는 지방 유생들도 알 정도가 되었다.

 

현종 15년 5월 16일 유생 나석좌(羅碩佐)·조현기(趙顯期) 등이 ‘오삼계의 거병으로 천하사세의 급변이 박두했다’며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저축한다면 크게는 치욕을 씻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安國保民)”고 주장했다. 현종은 내용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비답하지 않았다.

 

훗날 제자들에 의해 북벌의 화신으로 추앙된 송시열은 정작 아무 말도 없는 상황에서 그해 7월 1일 비밀상소(密疏)를 올려 북벌을 주창한 인물이 백호 윤휴(윤휴)였다. 윤휴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정4품)과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등을 역임했으나 포의(布衣)로 자칭하며 상소를 올려 ‘효종이 10년 동안 북쪽으로 전진해 보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며 북벌을 주창했다.

 

“우리나라의 정병(精兵)과 강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는 데다가 화포와 비환(飛丸:조총)을 곁들이면 진격하기에 충분합니다. 군졸 1만 대(隊)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燕山:북경)으로 넓은 규모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 한쪽 길을 터 정인(鄭人:대만)과 약속해 힘을 합해 그 중심부를 흔들어야 합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일).” 윤휴는 ‘동시에 중국 북부와 남부, 일본에도 격문을 전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인(노론)이 작성한 『현종수정실록』은 “윤휴가 밀소(密疏)를 올렸으나 (현종이) 답하지 않았다”고만 쓰고 밀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 자도 적지 않는 대신 “윤휴는 얼신(얼신)의 자식으로서 거짓으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집에 있으면서도 불의를 자행하고 또 선유(先儒)의 학설을 공척(攻斥)하였다”는 비난만 잔뜩 써놓았다. 송시열이 아니라 윤휴를 북벌 주창자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당파적 오기였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예송논쟁을 계기로 서인들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윤휴는 숙종 즉위년(1674) 12월 1일 다시 상소를 올려 ‘복수(復<8B8E>)와 설치(雪恥)’를 주장하면서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올렸는데, 사관은 윤휴의 주장이 “책사(策士)의 설(說)과 같은 종류였다”고 적고 있다.

 

다음 날 숙종은 영의정 허적(許積)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그러자 남인 정승 허적은 “그 뜻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마음에만 둘 뿐입니다”고 숙종의 말에 찬동했다.

 

역시 남인이었던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합니다(『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고 가세했다. 서인은 물론 남인들 중에서도 북벌이 가능하다고 믿는 벼슬아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숙종 1년(1675) 1월 2일 경연 시독관(侍讀官) 권유(權愈)가 허목(許穆)과 윤휴를 경연에 출입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벼슬을 사양하던 윤휴는 숙종이 사관을 통해 비망기를 보내 ‘생각을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고 전하자 드디어 경연에 나왔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윤휴는 첫 경연에서 소매 안에서 혁제(赫<8E4F>:종이쪽지)를 꺼내 읽었는데 ‘정도를 확립하고 천하의 대의를 펴자’는 내용이었다. 숙종은 “격언(格言)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마땅히 유심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5년 후에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송시열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으로 여겨졌다. 윤휴의 출사로 현종 때 묵살되었던 비밀상소가 숙종 1년 1월 경연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정오에 시작된 경연은 포시(哺時 : 오후 3~5시)에 끝났는데 사관은 긴 시간 동안 숙종이 “단정히 손을 모으고 듣기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숙종의 나이 열다섯, 강희제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할아버지(효종)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숙고했을까? 윤휴가 병거(兵車)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도 대륙에서 기병을 상대로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간수하기 불편하다는 반대론이 나오자 윤휴는 ‘수레 하나를 10인이 담당해 서로 교대로 간수하게 하고 지방에서는 민간에게 내주어 짐을 싣는 수레로 사용하면 보관에 어려움이 없다’고 반박했다.

 

검토관(檢討官) 이하진(李夏鎭)도 “적의 돌진을 막고 기병을 제어하는 데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고 호응했다. 이하진은 실학자 성호 이익의 부친이기도 하다. 숙종은 “이미 만들게 했으니 그 제도를 보면 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답했다.

 

숙종은 윤휴의 북벌 주장에 군비를 증강하면서 기회를 보자는 쪽이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사관의 말은 윤휴의 북벌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천하의 대의를 무릇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단 지금이 어떤 때인가? 백성의 곤궁은 극에 달했고 재력도 고갈되었다. 어린 임금(幼主)이 새로 섰고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도 천하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윤휴가 한 번 입으로 대의를 빙자했으나 이날 군신들이 경연에서 정한 것은 머뭇거리고 미룬 것에 불과한데 윤휴가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고 여겨 스스로 그 일을 담당했으니 그도 우활(迂闊)하다 하겠다(『숙종실록』 1년 1월 11일).”

 

윤휴는 숙종을 국왕으로 봉하는 강희제의 칙서도 거부하자고 청했는데 이에 대해 숙종이 “자강의 방책은 지금 실행할 수 있지만 국왕으로 봉하는 칙서를 가져오는 사신을 어떻게 거절하고 마중 나가지 않겠는가?(『숙종실록』 1년 1월 28일)”라고 거부했다.

 

숙종 1년 2월 전 우후(虞候:병마절도사, 종3품) 노우(盧瑀)가 상소해서 북벌을 주창했는데 “윤휴의 논의가 있고 나서 이런 상소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숙종실록』 1년 2월 12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인물은 윤휴·이하진 등 남인 중에서도 소수일 뿐 대다수 사대부는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북벌은 말로만 주창해 선명성만 나타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처신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