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天災에서 나라를 건져내다.

야촌(1) 2010. 9. 15. 17:38

■ 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天災에서 나라를 건져내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1호 | 20090705 입력]

 

유례를 찾기 힘든 경신 대기근을 맞아 조선은 기민(饑民) 살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소빙기(小氷期)의 재앙에 맞서 수도(修道)하는 자세로 재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망국 지경까지 갔던 나라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맞이하고도 당리당략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권이 되돌아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께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해동지도’의 경기도 편. 조정은 대동법 등으로 확보한 곡식을 조운을 통해

    근이 든 고장에 옮긴 다음 기민 구제용으로 풀어 많은 백성을 살렸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현종

⑤ 대기근 극복

 

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의 경신 대기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변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현종 11년 8월 전라감사 오시수(吳始壽)는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고, 무리를 지어 겁탈까지 했으며, 조금 익어 가는 곡식이 있으면 전주(田主)를 묶어 놓고 공공연히 베어 가며 들판에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지만 감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현종실록』 11년 8월 10일)라고 보고했다.


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의 오재(五災)에 인간 전염병과 가축 전염병이 가세한 칠재(七災)였다. 여기에 겨울 혹한(酷寒)까지 팔재(八災)가 되었다. 전라감사는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는데 집에 조금의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합니다.

 



가흥창이 있던 충청도 충주 가금면 가흥리의 수운 판관공덕비.

공세창이 있던 충청도 아산 인주면 공세리의 해운판관공덕비. 
해운판관은 곡식의 수송을 책임졌다.

 

심지어 무덤을 파내 관을 쪼개 시신의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11일)라고도 보고했다.현종 12년 2월 보성군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남원부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 등이 무덤을 파 옷을 벗겨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다.

대명률(大明律) ‘발총(發塚:무덤을 파헤침)’조는 “관곽(棺槨)을 열고 시신을 본 자는 교수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추위가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무심하게 자백했다. 경상도도 마찬가지였다. 경상감사 민시중(閔蓍重)은 그해 4월 참혹한 정경을 보고했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10여 세의 어린 아들이 이웃집을 도둑질했다고 물에 빠트려 죽였으며, 또 한 여인은 서너 살짜리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한 백성은 죽소(粥所:죽을 제공하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 아내는 곁에서 죽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곡했습니다


.”(『현종실록』 12년 4월 6일)굶주린 백성들은 관아 창고에도 손을 댔다. 현종 12년 11월 함경도 길주(吉州)의 허홍(許泓) 등 150여 명은 관고(官庫)의 감관(監官)이 진휼곡 대출을 미루자 관고에 난입해 곡식 35석을 3두씩 나누어 가진 후 각자 이름을 써 후에 환납(還納)하자고 약속했다.


함경감사 홍처후(洪處厚)는 주동자 5인을 강도률(强盜律)로 목을 베려 했으나 영의정 허적과 이단하 등이 감관의 잘못도 있다고 옹호해 가볍게 처벌했다. 그러나 반란사건에 대한 처벌은 강력했다.


금산의 향청(鄕廳) 좌수(座首) 이광성(李光星) 등이 50여 명을 모아 덕유산 깊은 계곡에 진을 치고 용담(龍潭)·무주현의 무기와 곡식을 탈취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반역으로 규정되어 39명이 사형당했다. 이런 와중에 병사자와 아사자가 잇따랐다.

 

“이달에 서울에서 굶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460여 명이었고 각 도에서 죽은 수가 1만7490여 명이었다…도적이 살해하고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했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현종실록』 12년 6월 30일)


6월 한 달 동안 1만7000여 명이, 8월에는 서울에서 250여 명, 각 도에서 1만5830여 명이 죽었다.

소빙기가 불러온 대재앙이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종 11년 7월 23일 “관고의 곡식도 이미 바닥났다”면서 “오늘의 계책은 온갖 벌인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 오직 구황 정책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고 건의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굶주린 백성 살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태화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시 가동하고 인상했던 관료들의 녹봉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닷새 후인 7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재난대책회의가 열렸다.

 

병조판서 김좌명은 “어영미(御營米) 5000석을 취해 사용하되 군량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자를 더해 다시 갚아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전시 대비 비축곡까지 임시로 방출하겠다는 뜻이었다. 진휼에 쓸 총 가용 경비를 뽑아 보니 ‘은 7100냥, 포 960동, 쌀 3만 석, 벼 1만 석’이었다.

 

왕실에 바치는 각종 공물과 관리들의 녹봉을 줄이면 쌀 3만6760석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금주했으며 백관은 봉급을 줄여 만든 비용으로 기민(饑民) 살리기에 나섰다.

병자를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와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所)가 중심이었다.


현종 12년 1월 16일 선혜청·한성부·훈련원 세 곳에 진휼소를 설치했는데, 『현종개수실록』은 “첫날 죽을 먹은 자가 6000여 명이었고 다음 날에는 1만 명을 훨씬 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진휼소에 나올 수 없는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에게는 따로 곡식을 제공했다. 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1월 25일에는 1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한성부는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조석으로 진휼소까지 오기 어렵다면서 용산과 홍제원에도 진휼소를 설치했다. 
지방 각 관아도 진휼소를 운영했다. 또 동소문 밖 연희방의 동활인서, 남대문 밖 용산강의 서활인서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했다.

 

현종 12년 5월 비변사는 “두 활인서에 1000여 명의 병자가 있고 사막(私幕)에도 7860여 명이 있다”면서 “막에서 나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만합니다”(『현종실록』 12년 5월 11일)라고 보고했다.

 

진휼소 덕분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살아났지만 곡식이 부족해 무한정 운영할 수도 없었다.

『현종실록』 12년 5월 15일자는 “각 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 진휼소의 3만2040여 명 중 서울 백성 1만957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자활하라는 뜻이었다. 마지막 방안은 청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현종 11년 겨울부터 일부 관료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현종 12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이 공사 간의 모든 저축이 바닥났다면서 “외간에서 곡식을 빌리자는 의논이 많아 감히 아룁니다”라고 공론화했다.

 

그러나 『현종실록』은 “불가하다는 신하가 많아 서필원의 의논은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 앞에서도 이념을 앞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대기근을 정략에 이용하는 당인(黨人)도 있었다.

 

현종 12년 12월 5일 헌납 윤경교(尹敬敎)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토착 농민의 수를 온 나라를 합해 계산하면 거의 100만 명에 이릅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경교의 상소는 남인 영상 허적(許積)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은 영의정 정태화가 재위 12년 칠순이 되었다는 이유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자 그해 5월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윤경교는 남인이 영의정으로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뜻에서 현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심지어 “전하께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시상(時相:허적)의 말은 모두 굽혀서 따르시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유현(儒賢:송시열)의 아룀에 대해서는 어찌 한결같이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십니까”라고도 비판했다.

현종은 크게 분개해 “윤경교는 간관(諫官)으로 오래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당(黨)을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했다”고 비판하면서 체차(遞差:갈아치움)시켰다.

 

이처럼 대기근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앞세운 일부 무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기근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하늘이 왕조를 버린 듯한 천재(天災)가 왕조 타도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동법도 큰 역할을 했다. 경신 대기근을 극복한 현종 14년 11월 전 사간(司諫) 이무(李무)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한 결(結)에 쌀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한 결에 10두씩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승정원일기』 현종 14년 11월 21일)


국가나 정치권이 백성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좋은 정책과 시의에 맞는 법 제정이란 뜻이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天災에서 나라를 건져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