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과· 사대부 눈엔 송시열만 보였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3호 | 20090718 입력]
사회를 선도할 명분과 동력을 상실한 정치세력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이런 지배집단은 본질적 현안에는 눈을 감은 채 비(非)본질적 현상을 두고 사변적 논쟁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역사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호명한다. 비극은 이런 책무를 수행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조선 후기가 이런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지 반문할 때다.
↑창경궁 명정전의 어좌.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전각으로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병이 있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
①14세 소년 국왕
서인 정권을 갈아치우던 현종이 재위 15년(1674) 8월 18일 급서했을 때 외아들인 세자는 14세였다. 어린 세자가 효종과 현종에게도 맞섰던 사대부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과연 현종이 세상 떠난 3일 후 원상(院相:어린 국왕을 보좌하는 재상)들은 예송논쟁의 당사자인 송시열도 원상으로 삼자고 제의했다. 왕세자는 이를 수락하고 사관(史官)까지 보냈으나 송시열은 단번에 거절했다.
송시열은 자신이 대죄하고 있다면서 “선침(仙寢:선왕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로 자처(自處)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즉위년 8월 21일)”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죄인을 자처한 것이지만 실제는 항의의 표시였다.
세자가 왕위에 오른 8월 23일,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은 송시열이 ‘덕을 쌓은 유학의 종주(宿德儒宗)’라면서 “현자(賢者)의 진퇴는 구차스럽게 할 수 없지만 군주의 정성스러운 예절이 어떠한가에도 달려 있다”며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상소했다.
같은 날 전 영의정 김수흥과 그를 구원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던 간관(諫官)들에 대한 처벌도 모두 무효화되었다. 24일에는 숙종이 가주서(假注書) 이윤(李綸)을 보냈으나 송시열은 이미 서울을 떠나 버린 뒤였다.
이윤이 뒤따라가 국왕의 말을 전했음에도 광주(廣州)를 거쳐 수원으로 가 버렸다.
숙종은 송시열을 거듭 타이르면서 현종의 능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송시열은 모두 거부했다.
“얼마 전 여러 신하들이 득죄(得罪)한 것은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을 벌할 때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지만 특별히 그 성명을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숙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
벼슬이 아니라 벌을 달라는 주청이었다. 어린 국왕 길들이기였다.
그의 말대로 현종도 영의정 김수흥은 처벌했지만 송시열은 이름도 적지 못한 상대였다.
누가 보더라도 현종의 급서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할 인물은 예순여덟 살의 송시열이지 열네 살의 숙종이 아니었다.
▲송시열이 우거하던 충북 괴산 화양계곡의 바위글씨들. 忠孝節義(충효절의)는 명 태조 주원장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蒼梧雲斷(창오운단) 武夷山空(무이산공)은 ‘임금 묻힌 창오산엔 구름이 끊어지고, 주자 계신 무이산도 비어 있구나’란뜻이다.
그러나 9월 17일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정치화(鄭致和)를 정1품 영중추(領中樞)로 승진시키면서 영중추 송시열을 종1품 판중추(判中樞)로 강등한 것이다. 정치화는 제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에게 왕가의 일에 체이부정(體而不正)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영의정 정태화의 동생이었다.
18일에는 장인 김만기(金萬基)를 호위대장으로 삼고, 19일에는 인선왕후 국상 때 기년복(1년복)을 대공복(9개월복)으로 고쳐 올린 예조판서 조형(趙珩)을 비롯한 예조의 주요 관료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남인들은 숙종이 현종의 유지를 이어 남인으로 정권을 교체하려는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9월 25일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송시열을 겨냥한 상소를 올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곽세건은 ‘선왕이 급서하는 바람에 왕법(王法)을 다 밝히지 못했으니 그 뜻을 따르는 달효(達孝)를 해야 한다’면서 송시열에게 지문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론(邪論)에 붙은 김수흥도 오히려 편배(編配:유배안에 기재됨)되었는데, 사론을 창도한 송시열이 어찌 헌장(憲章:법)에서 빠질 수 있습니까?...
송시열은 효묘(孝廟:효종)의 죄인이고, 선왕(현종)의 죄인이니 왕법을 시행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전하의 책무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25일)”라고 말했다.
『현종실록』은 곽세건이 현종 생존 시인 그해 5월에도 송시열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병조에서 기각했다고 전하고 있다. 좌부승지 김석주는 곽세건이 계속 서울에 머물고 있다가 다시 상소를 올린 것이라면서 ‘삼조(三朝:인조·효종·현종)에서 예우하던 재야의 늙은 신하를 불측한 곳에 빠뜨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숙종은 “알았다”라고 심상하게 답했다. 곽세건의 상소에 대해서도 역시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승정원의 계달이 김석주에게서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다 시원하게 여겼으나 이때 임금은 이미 마음에 들어온 것이 있어서 (곽세건의 상소를) 끝내 엄히 배척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김석주의 계달에 시큰둥하게 답한 것은 의외였다.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2차 예송논쟁 때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책략가였다.
서인들에게 곽세건은 묵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음 날 대사헌 민시중(閔蓍重) 등이 곽세건을 엄하게 국문하자고 청하자 숙종은 “금일 유생의 상소는 (그 말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며 거부했다.
남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조정의 서인 벼슬아치들과 관학 유생들은 곽세건 공격에 대거 가담했다. 숙종은 곽세건의 말을 ‘충언(忠言)이자 지론(至論)’이라고 옹호해 서인들을 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송시열이 ‘지문 찬술’을 계속 거부하자 김석주에게 대신 짓게 했다.
이조참판 이단하(李端夏)에게는 현종의 『행장』을 짓게 했는데 그는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단하는 현종의 『행장』에 “(예송논쟁 때) 실대(失對:국왕에게 대답을 잘못함)했다는 이유로 수상(首相:영의정)을 죄주었다”고 썼으나 숙종은 “다른 의논에 붙었기 때문에 수상을 죄주었다”라고 고치라고 명령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예론이었다. 이단하는 스승의 이름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번 독촉을 받고 “공경(公卿)들이 『의례(儀禮)』의 네 가지 설(四種之說: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경우)로써 대답했는데 이는 본래 송시열이 인용한(所引) 말이다”라고 이름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숙종은 “인용한(所引)의 소(所)자를 잘못한 오(誤)자로 바꾸라(『숙종실록』 즉위년 11월 30일)”고 명했다.
이단하는 할 수 없이 이를 고친 후 물러나와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숙종은 “이모(이단하)는 다만 스승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송자대전(宋子大全)』, 『수차(隨箚) 5권』)”라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경기 유생 이필익(李必益) 등이 상소해서 송시열을 옹호하고 곽세건을 먼 변방으로 내치라고 요구하자 숙종은 거꾸로 이필익을 먼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대사간 정석(鄭晳)과 관학 유생 이윤악(李胤岳) 등 90여 인이 항의하자 숙종은 “내가 어린 임금(幼主)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내가 심히 통탄스럽고 해괴해서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고 꾸짖었다.
어린 숙종이 송시열을 꺾어 가면서 정권은 남인에게 넘어갔다. 나아가 숙종은 재위 1년(1675) 1월 13일 드디어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유배 보냈다. 문인 최신(崔愼)이 쓴 『최신록(崔愼錄)』에 따르면 이때 충청도 진천의 길상사(吉祥寺)에 있던 송시열은 유배 소식을 듣고, “김청풍(金淸風:김우명)의 계획이 지금에야 실현되었다.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임금의 참으심이 많으셨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숙종의 외조부인 김우명이 부친 김육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구원(舊怨)이 있었던 것을 빗댄 것이다.
송시열을 처벌하자 그 제자들은 사직하거나 나오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5월 16일 “송시열이 죄를 입은 이래 조정의 신하들이 까닭 없이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
아! 아비가 죄를 입었어도 그 아들은 오히려 벼슬을 하는 것인데 하물며 스승이 득죄(得罪)했다고 그에게 배운 자가 나오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숙종실록』 1년 5월 16일)”라면서 그 제자들을 처벌했다. 일부 남인들은 ‘송시열이 효종의 역적이니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맞섰던 판부사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이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목은 형량을 가중해 송시열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대부들이 송시열 문제로 당파가 갈려 날을 지새우는 동안 백성들은 생존에 허덕였다.
숙종 즉위년 8월 전국 각지에 거듭 우박이 내렸고, 9월에는 평안도에 긴 가뭄 끝에 홍수가 들고 서리와 우박이 겹쳐서 전야(田野)가 쑥밭이 되었다.
경신대기근을 기억하고 있는 안주(安州) 백성은 “내년 봄에 굶어 죽느니 오늘 자진(自盡)하는 것이 낫다”면서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같은 달에는 황해도·평안도·원양도(原襄道:강원도)·함경도에 비둘기 알만 한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국내뿐만 아니었다. 청나라에서는 내란이 한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송시열 문제로 날이 지고 해가 뜨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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