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부국강병의 길 특권이 막았다.

야촌(1) 2010. 9. 15. 18:56

부국강병의 길 특권이 막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5호| 20090801 입력

 

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보다 다수 백성들이 부유한 나라가 강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수 백성들을 잘살게 하자는 민생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정치가의 단골 메뉴였지만 많은 경우 현안 회피용에 불과했다.

 

어떤 정치세력이 진정으로 민생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생을 위한 법제화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윤휴 초상.

진정한 북벌론자인 윤휴는 사대부의 각종 특권을 폐지해 민생을 강화한 뒤 광활한 요동 지역을 수복하자고 주장했으나 호응하는 사대부는 거의 없었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
③ 민생 개혁의 좌초


갓 즉위한 숙종이 안으로는 각 당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민생을 보존하며, 밖으로는 내전에 휩싸인 청나라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그러나 숙종은 조숙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11월 허적과 허목을 불러 만경창파에 일엽편주가 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배가 닻줄과 노도 없이 물결 가운데 있다가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뒤집힐 염려가 있으니 이는 임금의 도(君道)를 미루어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림 위에 숙종이 쓴 어필이 있는 『어제주수도설(御製舟水圖說)』이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섯이 있으니

첫째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 어진 현량(賢良:어질고 착한 사람)을 쓰는 것이고,
셋째 충간(忠諫)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 과실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 보물을 천하게 여기고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숙종실록』 1년 11월 8일)”숙종이 재위 1년 윤5월 평안도 관찰사 민종도(閔宗道)에게 한 말은 조선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당론이 선조 조부터 성하기 시작해 효종 조에 이르러서는 송준길·송시열이 두소(斗<7B72> : 국량이 작음)의 비루
고 미세한 무리로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산림에 물러나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을 멀리서 잡고 무릇 인물의 퇴나 크고 작은 정사도 반드시 먼저 이 두 사람에게 품의한 후 (임금에게) 상달(上達)했으니 일이 극히 한심했다.(『숙종실록』 1년 윤5월 27일)”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 부근의 강과 평야. 길림성 돈화현에 있는데, 발해 유적지는 동북공정에 따라 한국인 들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영의정부터 송시열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나서 임금에게 진달했던 서인 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숙종은 선왕의 유지를 이어 정권을 갈아치웠지만 남인의 당세는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숙종의 마음을 끈 것은 그의 정책관이 기존 관료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타파해 백성들을 살림으로써 그 역량으로 북벌을 단행하자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하자 북벌 반대론자들은 민생우선론인 양민론(養民論)으로 맞섰다. 윤휴는 양민론이 북벌의 현실화를 막기 위한 사대부들의 허울 좋은 명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동법 이후 민생의 가장 큰 문제는 신역(身役:병역)의 폐단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 의무를 졌는데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했다.

이것이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인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난한 상민들은 군포 부담에 허리가 휘지만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의무조차 없는 모순된 상황을 바꾸는 것이 민생 개혁의 핵심이었다. 현종 때 각종 재이가 발생하자 군역의 폐단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현종 말에도 군역개혁론이 논의되었다. 현종 15년(1674) 영의정 김수흥이 “몇 해 전부터 입이 달린 사람이면 모두 ‘재이가 거듭 닥치고 민생이 곤궁하게 된 것은 다 신역의 폐단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변통(變通:개혁)하려고 하면 그 폐단만 말할 뿐 구제의 도(道)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큰 골칫거리입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3일)”라고 말했다.

 

사실 군역 폐단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 말 모든 양반은커녕 생원·진사를 제외한 유학(幼學)들에게만 포를 받자는 소변통(小變通:온건개혁론)이 나왔을 때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이렇게 반대했다.

 

“국조(國朝) 300년 이래 사자(士子)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혹 이름을 빙자해 역(役)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체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섞어 똑같이 포를 징수하면 어찌 역(役)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유생들도 사대부니 군역을 부담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구상한 것은 전체 사대부들도 똑같은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대변통(大變通:급진개혁)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하게 하려고 했다.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지패는 종이신분증을 뜻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패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법(五家統法)이 전제였다.

 

오가통법 사목(事目)은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 가구(家口)의 다과(多寡)와 재산의 빈부(貧富)를 물론하고 매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만들고, 한 사람을 통수(統首)로 뽑아 통 안의 일을 맡게 한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고 규정하고 있다.

 

통-리(里)-면(面)-읍(邑) 순의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인데 ‘재산의 빈부를 물론한다’는 것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가통법은 또 흉년으로 유망한 백성들을 거주지역의 행정단위로 포섭해 전체 민정(民丁) 숫자를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영의정 허적은 지패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지패법은 구애되는 일이 있으니, 사대부가 상한(常漢:상놈)의 통수 하에 들어가니 일이 매우 불편합니다”고 토로했다. 오가(五家)의 통수가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 지패법과 호포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허적이 이 정도면 다른 양반들은 볼 것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지패법에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호포법(戶布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대면서 반발했다. 심지어 벼슬 없는 가난한 유생들에게만 포를 걷는 유포(儒布)제를 실시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자 영상 허적이 “이른바 유포(儒布)의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신부터 아래까지 무릇 호(戶)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포를 낸다면 어찌 유포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2년 1월 19일)”라고 방어했다.

 

영의정인 자신부터 호포(戶布)를 낼 것이니 어찌 가난한 유생에게만 걷는 것이냐는 반론이었다.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잘 아는 숙종은 “형세를 보아서 시행할 것”이라고 일단 실시를 유보했다.


그러자 조정에 의논시켜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윤휴는 국왕의 결단을 촉구했다.
“마땅히 성상께서 속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먼저 덕음(德音)을 발표하셔서 백성들의 해를 제거하시고, 서서히 호포법이나 구산법(口算法)을 의논하셔서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라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사망자나 도주자, 갓난아이의 군포를 가족이나 이웃에게 씌우는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의 폐단부터 먼저 없앤 후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논의하자는 말이었다. 호포법이 가호(家戶)를 기준으로 군포를 받는 법이라면 구산법은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것이니 호포법보다 근본적인 개혁론이었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의정 허적도 족징이나 인징의 폐단 등만 일단 해결하는 온건개혁으로 물러섰다. 서인에 비해 열세인 집권 기반으로 구산제와 호포제를 함께 밀어붙이다 정권이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런 정책 차이 등으로 집권 남인은 급진개혁파인 윤휴 중심의 청남(淸南)과 온건개혁파인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윤휴의 생각은 확고했다. “물고(物故:죽은 사람), 아약(兒弱:갓난아이)에게서 거두는 포(布)는 먼저 탕감해 주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호포법을 시행한다면, 군병(軍兵)과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제도를 모두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

 

윤휴의 이 말에 대해 『숙종실록』은 허적·김석주·오시수 등이 모두 놀라, “오늘 논의하는 것은 아약과 물고된 자의 폐단을 변통하는데 불과한데 만약 윤휴의 말대로 한다면 국가 제도를 모두 바꾸어야 할 것이니 결단코 행하기 불가합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윤휴의 ‘군병과 공천·사천의 제도를 모두 변통하자’는 말은 군제 개혁을 통해 신분제의 틀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신분제를 완화시켜 국력을 증진시키자는 것이 윤휴의 본뜻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벼슬아치들은 상아로 만든 아각패(牙角牌)를 차고, 일반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차게 했다. 호포제도 사대부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마지 않았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