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왕권을 위해 남인,북벌론 버렸다.
이덕일 | 제126호 | 20090809 입력
숙종은 두 당파를 경쟁시켜 왕권을 극대화하는 길을 택했다. 한 당파를 이용해 다른 당파를 제거할수록 왕권은 강해졌다. 그러나 그는 왕권 강화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을 뿐 강화된 왕권으로 추구할 목표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三宗의 혈맥 숙종
④ 경신환국
▲허적의 초상.
허적은 원만하고 신중한 인품을 갖춰 온건개혁파인 탁남을 이끌면서 강경개혁파인 청남과 야당인 서인 사이를 중재했으나 경신환국 이후 정치보복을 당해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윤휴가 숙종 1년(1675) 9월 체부(體府: 도체찰사부) 설치를 주장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 윤휴의 체부 설치 주장에 대신들은 “저 사람들(彼人: 청나라)이 의심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숙종은 체부 설치를 결정하고 영의정 허적에게 도체찰사를 겸임시켰다.
허적은 부체찰사 후보로 김석주·윤휴·이원정을 천거했고(三望) 숙종은 김석주를 낙점했다. 도체찰사를 남인 허적이 차지했으니 부체찰사는 서인 김석주에게 맡겨 견제하게 한 것인데, 부체찰사로서 체부를 북벌 총지휘부로 꾸리려던 윤휴의 계획은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북벌을 위한 윤휴의 암중모색이 계속되는 가운데 숙종 6년(1680)이 되었다. 남인 정권은 강경개혁파인 청남과 온건개혁파인 탁남으로 나뉜 채 6년째 집권하고 있었다. 숙종 5년(1679) 일흔 살이 된 허적은 거듭 면직을 요청했으나 숙종은 반려했다. 무려 열 번의 사직상소 끝에 허적은 다시 조정에 나왔고 숙종은 재위 6년 3월 안석과 지팡이, 1등의 음악을 내려주었다.
허적은 영의정으로서 행정권을 장악하고 도체찰사로서 군권을 장악했으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런 그에게 세종의 장인이었던 영의정 심온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許潛)이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아 잔치하는 영시일(迎諡日: 시호를 맞이하는 날)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 해 전인 숙종 5년부터 서인들의 공세가 거칠어졌다. 서인들의 공세는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윤휴에게 맞춰졌다. 허견은 서자였지만 외아들이었기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낸 인물이었다.
허견에 대한 서인들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은 당초 의도와는 달리 그의 부인 홍예형과 유철의 간통사건이 발각되는 부산물을 낳았다. 숙종은 두 간부를 유배 보내라는 좌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우의정 민희(閔熙)의 건의에 ‘둘의 행위는 개돼지와 같다’면서 사형시키라고 명했다. 숙종 5년(1679) 2월 20일의 일이었다.
그 내용은 ‘경(敬)으로써 안의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의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숙종의 마음이나 행동은 경이나 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인들은 또 허견이 서억만(徐億萬)의 아내 이차옥(李次玉)을 5∼6일 동안 납치해 능욕했다고 주장했다.
↑숙종의 어필.
이 사건은 “이차옥의 옥사를 의금부로 이송한 후 여러 사람들을 신문하니 모두 포도대장의 꼬임에 따라 거짓 자백을 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숙종실록』 5년 3월 4일)”는 기록처럼 수사기관마다 진상이 달랐다. 남인들은 정권을 잡았지만 포도청 같은 여러 기관들은 여전히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허적은 “신의 자식이 남의 아내를 납치해 집에 두었다 돌려보냈다면 신이 집에 있으면서 어찌 몰랐겠습니까?”라면서 “포도청은 도둑을 살피기 위하여 만든 것인데, 신이 대신의 지위에 있는데도 그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불평한 대로 포도대장 구일(具鎰)은 허적의 집을 집중 감시했다.
숙종은 “포도청에서 거짓 자백을 받은 것이 명약관화하다”면서 허견을 석방하고 포도대장 구일을 문초했다. 한성부 좌윤 남구만은 “대사헌 윤휴가 서도(西道: 황해·평안)의 금송(禁松) 수천 그루를 베어 강가에 새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숙종실록』 5년 2월 10일)”고 공격했다.
윤휴는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인을 했는데 증삼이 살인했다고 모친에게 전하자 처음에는 믿지 않던 어머니가 세 번째에는 베 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는 삼지주모(三至走母) 고사를 인용하며 헛소문이라고 항변했다.
성균관 직강(直講) 김정태(金鼎台)가 “관리들이 윤휴의 집에 달려들어 새것, 헌것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일일이 헤아려 조사하고 있다(숙종 5년 2월 13일)”고 항의한 것처럼 서인은 야당이지만 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성부는 서도에 사는 김세보(金世寶)가 선산(先山)의 선영 봉분을 소나무 뿌리가 파고들었다는 명분으로 벌목 허가를 받아 소나무를 윤휴의 집으로 운반했다고 보고했으나 좌상 권대운이 “윤휴가 지은 집은 10여 칸이 되지 않는다”고 방어한 것처럼 정치공세의 성격이 짙었다.
허적의 조부 영시일은 숙종 6년(1680) 4월 1일이었는데, 일부 야사는 이날 남인들이 서인들을 독살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 병조판서 김석주와 광성부원군 김만기 등을 짐새의 독을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한 숙종의 장인 김만기가 남의 술잔을 먼저 빼앗아 마시고 자신의 잔은 ‘벌써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잔치에 하객으로 참석한 임금의 장인(김만기)을 독살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허적이 김만기와 김석주에게 허견을 다섯 번이나 보내 간곡하게 참석을 요청했다는 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야사에는 허적이 사당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릴 때, 그리고 잔칫상에도 암탉이 날아들어 술병을 깨뜨렸는데 허적이 잡아 죽이라고 말하면서 “닭은 유(酉)이고, 유는 서인을 뜻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고도 전한다.
닭 유(酉)자는 서(西)자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중관(中官: 내시)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유악(油幄: 기름 칠한 천막)을 갖다 주라고 말했는데 내시가 ‘이미 가져갔다’고 답하자 “한명회도 감히 이런 짓은 하지 못했다”고 크게 노했다.
야사『조야회통(朝野會通)』은"숙종이 궁중 하인에게 해진 옷을 입고 가서 정탐하게 하니 서인은 소수이고 남인들의 숫자와 기세가 성하다는 말을 듣고 제거할 결심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은 군권을 갖고 있는 훈련대장 유혁연과 포도대장 신여철, 총융사 김만기를 급하게 패초했다.
잔치에 참여했던 김만기가 패초를 받고 일어서자 허적은 크게 당황하면서 잔치는 일순간에 파장이 되었다.
『조야회통』은 “좌중이 모두 경악(驚愕)하고 실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고, 『당의통략』은 “허적이 크게 놀라 급히 수레를 타고 따라가 대궐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은 남인 유혁연을 서인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 신여철, 수어사에 김익훈 등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서인 김수항을 영의정, 민정중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숙종 6년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사전에 짜인 각본처럼 허적과 윤휴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허견에게는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병조판서 김석주는 경기도 이천의 둔군(屯軍)들이 매일 훈련하고 대흥산성에서도 군사훈련을 했는데, 이것이 “훗날 군사를 동원하는 계제(階梯)로 삼으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천의 둔군 훈련이 복선군 추대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이다. 허견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숱한 고문 끝에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 길에서 능지처사 당했고 복선군 이남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허적 역시 서인으로 강등당했다가 사형당했다.
윤휴에게는 정사에 관여하는 대비(大妃)를 조관(照管: 단속)하라고 말했다는 점과 자신이 부체찰사로 선임되지 않자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윤휴가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는 공지(共知) 사실은 애써 무시되었다.
윤휴는 5월 20일 사사(賜死)당하는데 『당의통략』은 사약을 마시기 전 “조정에서 어찌해서 유학자(儒者)를 죽이는가?”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도체찰사부 설치 주장이 역모의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당의통략』이 도체찰사부는 “실상 김석주도 찬성했던 일”이라고 정치보복의 구실에 지나지 않음을 전해 주고 있다.
허적은 국청에서 허견이 윤휴를 부체찰사로 천거하면서 “이 사람이 대의(大義: 북벌)를 밝히려고 하는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허견 역시 윤휴의 북벌론을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간 경신환국은 서인과 남인 사이 당쟁의 결과물로만 인식되고 있었지만 실상 청의 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 무렵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三藩)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吳世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岳州: 현 호남성 악양)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예송논쟁에서 왕가(王家)를 높이는 3년복설과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유신(儒臣) 윤휴는 이렇게 정치보복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휴가 죽은 지 나흘 후인 5월 24일 숙종은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민정중의 주청을 받아들여 송시열을 방면했다. 윤휴의 빈자리를 다시 송시열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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