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西人에 분노한 임금「정권 바꾸려다 의문의 죽음」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22호 | 20090712 입력]
국가 통치이념이 현실에서 벗어나 사변(思辨)으로 흐르면 이미 사회 통합과 선도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예송논쟁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논쟁은 아니었으나 경신 대기근을 겪은 나라가 걸어야 할 길은 아니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집권 서인은 겉과 속이 다른 예론에 집착했다.
예론은 자신들의 당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외피에 불과했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효종 부부의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죽음은 1, 2차 예송논쟁을
각각 촉발했다. 1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은 2차 예송논쟁으로 몰락했다.
三宗의 혈맥 현종
⑥ 34세의 효종(孝宗)이 요절하다.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화상.
현종 15년 판중추부사 김수항은 형인 영의정 김수흥과 함께 송시열의 대공복설을 지지하다 실각했다.
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과 왕권 약화에 시달렸다. 조선의 약한 왕권은 청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현종 12년(1671:신해년) 2월 북경에 갔던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67DF>)은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이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하기 때문(臣强)이라고 한다.
돌아가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현종실록』 12년 2월 20일)”고 산해관(山海關)에서 보고했다. 현종의 사촌인 복선군이 “어찌 신하가 강해 백성이 이렇게 굶주릴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하자 강희제(康熙帝)는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청에서 보기에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이니 1년복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상 현상이었다. 그런데 기해년(현종 즉위년:1659)의 1차 예송논쟁 15년 후인 갑인년(현종 15년: 1674) 2월 23일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면서 이상현상이 재발할 조짐이 보였다.
기해 예송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아 기년복(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장자·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제(國制:경국대전)를 쓴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현종은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으로 믿었다.
『경국대전』 ‘오복(五服)’조는 아들이 먼저 죽었을 때 장·차자의구별 없이 부모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맏며느리인 장자처(長子妻)의 경우는 1년, 기타 며느리인 중자처(衆子妻)는 대공복(大功服 개월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당초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은 기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그러나 2월 27일에는 기년복이 잘못이라며 대공복으로 바꾸겠다고 수정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에 대해 “송시열의 당(黨) 사람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다른 것을 미워해 옥당(玉堂:홍문관)에 편지를 보내니 예조판서 조형 등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대공복은 왕비를 기타 며느리로 대접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으나 1차 예송 때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 간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칠순의 노구를 끌고 서울로 올라와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봉입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승정원은 “예송은 금지되어 있다”면서 반 달 이상 상소문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현종 15년(1674) 7월 6일 현종의 손에 들어가는데 조부 김육(金堉)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싸운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가 전달했을 것이다.
▲전통 상복.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효종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으나 성격상 사변적인 논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사진가 권태균
“대왕대비의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어떤 전례를 따른 것입니까?...기해년 국상 때 대왕대비는 ‘국전(國典: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거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대공복은 국제 밖에서 나온 것이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6일)”
기해년 국상 때 근거로 썼던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비의 복제는 기년복이어야 하는데 왜 대공복이냐는 항의였다. 도신징은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아직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도신징의 상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현종은 일주일 후인 7월 13일 대신들을 불렀다. 그 사이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던 것이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15년 전의 일을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고례(古禮: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국제를 써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면서 “오늘의 대공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송시열의 제자 김수흥은 고례와 국제를 뒤섞어 설명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물었고 김수흥은 ‘대공복’이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기해년에는 시왕의 제도(時王之制:조선의 제도)를 사용하고 지금은 고례를 사용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라고 재차 물었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급서에 허둥대던 18세 청년이 아니었다.
현종은 다시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기년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종은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는 국제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해괴한 일이다”라고 되물었다.
김수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해년에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참최 3년복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건네주면서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둘째)로 의정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때 좌부승지 김석주가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송시열이 효종을 둘째로 봤다고 보고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하자 현종은 ‘반드시 오늘 안에 의논해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주면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집단적으로 대처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등의 대신들이 긴급히 회동한 후 계사를 올렸는데 기해년에 기년복으로 정한 근거만 장황하게 써 올렸다.
현종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하는 내시)을 시켜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지적하여 결말지은 곳이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의정하라고 명했다. 이때 대신들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고 답했으면 예조의 몇몇 신하가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을 문제였다.
현종이 여러 차례 ‘국제에 따르면 대왕대비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은 이유는 ‘기년복’이란 대답을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고수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대해 매우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何地)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현종실록』 15년 7월 15일)”
‘어느 곳’은 바로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이것이 왕실과 서인 사대부의 싸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인 사대부는 왕실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급으로 보는 것이었다.
현종은 “당초 국전에 따라 정해진 자의대비 복제를 기년복으로 실행하라”고 단안을 내리고 예조판서 조형을 비롯한 예조 관료들을 투옥했다. 현종은 7월 16일에는 영의정 김수흥에 대해 “선왕의 은혜를 잊고 다른 의논에 빌붙은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춘천에 부처(付處)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설을 뜻한다. 그러자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김수흥 구하기에 나섰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는 전혀 생각도 안 한다는 말이냐?(『현종실록』 15년 7월 16일)”
승정원과 홍문관의 김수흥 구하기가 불발로 끝나자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현종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살펴 탄핵하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의 직책인데 오히려 남을 두둔하며 구하기에 급급했다’며 삭탈관작하고 도성에서 내쫓았다. 현종은 끝까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하는 서인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
남인 장선징(張善<7013>)을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고 7월 26일에는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갑자기 현종은 뚜렷한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현종실록』 8월 17일자는 ‘의관을 갖추어 입고 허적을 인견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34세, 재위 15년, 정권을 갈아치우던 와중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각종 재해와 강한 당파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임금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휘두르는 도중에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의 유일한 후사는 14세 숙종이었으므로 약체 왕실의 지속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현종 끝, 다음 호부터는 숙종이 시작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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