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서얼금고법 폐지상소(庶孼禁錮法廢止上疏)

야촌(1) 2014. 2. 22. 21:31

국역승정원일기>영조 즉위년 갑진(1724, 옹정2)> 12월 17일(병술).

 

■서얼을 금고(禁錮)하는 법을 폐지하여 재능에 따라 호조 낭청 등의 요직에 조용(調用)해 줄 것을 청하는 진

    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의 상소(263명)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생원(生員) 정최령(鄭最寧), 유학(幼學) 이정화(李正華)ㆍ어유호(魚有浩), 진사 이정언(李廷彦), 생원 이집일(李集一), 진사 송수옹(宋秀雍)ㆍ정린(鄭璘), 유학 이만년(李萬年), 진사 정진규(鄭震奎)ㆍ송필위(宋必煒), 업유(業儒) 윤치(尹治)ㆍ이항녕(李恒寧), 유학 심복래(沈復來)ㆍ민효백(閔孝百)ㆍ이헌신(李獻身)ㆍ이만(李墁)ㆍ유하상(柳夏相), 업유 이도흥(李道興), 유학 신소(申紹)ㆍ이서채(李瑞彩)ㆍ이서표(李瑞彪)ㆍ이의인(李宜人), 업유 윤침(尹沈), 유학 이의민(李宜民)ㆍ정집녕(鄭輯寧)ㆍ정도항(鄭道恒)ㆍ윤환(尹寏)ㆍ이세환(李世煥), 진사 유현(柳絢), 유학 유주상(柳周相)ㆍ민효증(閔孝曾)ㆍ심사고(沈師古)ㆍ김기석(金箕錫)ㆍ정제엄(鄭齊嚴)ㆍ홍덕린(洪德麟)ㆍ김구석(金九錫)ㆍ정택녕(鄭宅寧)ㆍ이양신(李養身), 진사 이회일(李會一), 업유 이기흥(李基興), 유학 정광조(鄭光祚)ㆍ김일휘(金一徽), 업유 신영하(申寧夏)ㆍ정린(鄭遴), 유학 유경(柳綗)ㆍ조의수(趙宜壽)ㆍ신전(申琠), 업유 신형하(申亨夏)ㆍ경변(慶昪), 유학 이만종(李萬宗)ㆍ조간(趙侃)ㆍ김신원(金信源), 진사 이세서(李世瑞), 유학 윤대수(尹大壽)ㆍ이진부(李震溥)ㆍ최도정(崔道貞)ㆍ이요민(李堯民), 생원 박규상(朴奎祥), 유학 이해함(李海涵)ㆍ신중윤(辛重尹)ㆍ윤덕수(尹德壽)ㆍ이용진(李龍鎭)ㆍ신중리(辛重履)ㆍ조세구(趙世球)ㆍ이춘화(李春華)ㆍ유명상(柳明相)ㆍ이성화(李盛華)ㆍ김하신(金夏臣)ㆍ이세욱(李世煜)ㆍ심수증(沈壽增)ㆍ윤필수(尹必壽)ㆍ이해춘(李海春)ㆍ조계(趙啓), 진사 이세문(李世璊), 유학 윤기수(尹其壽)ㆍ정치주(鄭寘柱)ㆍ김광익(金光益), 업유 이렴(李廉), 유학 권유(權瑜)ㆍ이언규(李彦圭)ㆍ이익증(李益增)ㆍ이교(李灚)ㆍ이언방(李彦邦)ㆍ이준(李雋)ㆍ안환(安紈)ㆍ이익명(李益明)ㆍ조옥(趙沃)ㆍ이우춘(李遇春)ㆍ안구(安緱), 업유 손진(孫縉), 유학 신황(辛榥)ㆍ이성일(李聖一)ㆍ채경만(蔡慶萬)ㆍ신천록(申天祿)ㆍ김구서(金九敍)ㆍ이세성(李世珹)ㆍ정도경(丁道烱)ㆍ이세해(李世瑎), 업유 권상질(權相耋), 유학 이세호(李世琥)ㆍ이정채(李挺采)ㆍ심복원(沈復元)ㆍ이의길(李宜吉)ㆍ이수간(李秀幹), 업유 원희서(元羲瑞), 진사 신치장(申致璋), 유학 신두하(申斗夏)ㆍ정귀령(鄭龜寧)ㆍ안윤경(安允慶)ㆍ이정부(李鼎溥), 업유 정희민(鄭熙民), 유학 신겸하(申謙夏)ㆍ홍치윤(洪致潤)ㆍ이수만(李秀蔓)ㆍ홍치하(洪致河)ㆍ이수춘(李秀春)ㆍ이익룡(李翊龍)ㆍ이언집(李彦緝)ㆍ송술손(宋述孫)ㆍ김최연(金最衍), 업유 한희조(韓喜朝), 유학 서종추(徐宗樞)ㆍ이명천(李命天)ㆍ이반(李槃)ㆍ이명대(李命大)ㆍ민지(閔祉)ㆍ유흡(柳洽)ㆍ민팽(閔祊), 업유 허완(許浣), 유학 신혜동(辛惠東)ㆍ이기화(李企華)ㆍ조만겸(趙萬謙)ㆍ정유인(鄭有人)ㆍ홍집(洪潗), 업유 경만(慶曼), 유학 허옥(許沃)ㆍ권형중(權衡重)ㆍ남태한(南泰翰), 진사 정수강(鄭壽崗), 유학 이종태(李宗泰), 업유 이망흠(李望欽), 유학 이징오(李徵五)ㆍ변성신(邊聖臣)ㆍ홍계진(洪啓震)ㆍ변성민(邊聖民)ㆍ홍계현(洪啓顯)ㆍ구엽(具燁)ㆍ이세휴(李世休), 업유 경승(慶昇)ㆍ원명서(元命瑞), 유학 최치경(崔致敬)ㆍ원몽성(元夢聖)ㆍ민직(閔稷)ㆍ이만중(李萬重)ㆍ신달동(辛達東)ㆍ성지귀(成之龜)ㆍ정성언(鄭聖言)ㆍ신보하(申輔夏), 진사 이태진(李泰鎭), 유학 신원동(辛元東), 업유 권익신(權益愼), 유학 이현(李灦)ㆍ신우박(辛宇泊), 업유 송형(宋珩), 유학 최주흥(崔胄興)ㆍ이온(李溫)ㆍ최수필(崔粹弼)ㆍ최계흥(崔啓興)ㆍ이광(李洸)ㆍ최태흥(崔台興)ㆍ이최(李最)ㆍ최기흥(崔箕興)ㆍ신우중(辛宇仲)ㆍ이일원(李一元)ㆍ신우계(辛宇季)ㆍ한창경(韓昌慶), 진사 이장(李樟), 유학 한석경(韓碩慶)ㆍ조급(趙伋)ㆍ이붕운(李鵬運)ㆍ이익배(李益培), 업유 신영하(申英夏), 유학 이익태(李益泰)ㆍ이수송(李秀松)ㆍ이익재(李益梓)ㆍ황수인(黃壽仁)ㆍ이서갑(李瑞甲), 업유 한원조(韓元朝), 유학 정덕명(鄭德明), 업유 한점조(韓漸朝), 유학 안격(安格), 업유 유영(柳泳), 유학 김우하(金遇河), 업유 한사조(韓師朝), 유학 남태완(南泰完), 업유 이사근(李思謹), 유학 송임손(宋任孫), 업유 조륜(趙倫), 유학 권만종(權萬宗), 업유 권만추(權萬秋), 유학 유춘부(柳春溥), 업유 이기필(李箕弼), 유학 김기서(金箕敍)ㆍ최창수(崔昌壽)ㆍ이사량(李思良)ㆍ이진명(李晉明)ㆍ이사원(李思源)ㆍ이시번(李時番)ㆍ이도명(李道明)ㆍ남태반(南泰磐)ㆍ심동욱(沈東郁)ㆍ남태장(南泰章)ㆍ신준(申)ㆍ한헌(韓櫶)ㆍ이중엽(李重燁)ㆍ신억(申嶷)ㆍ신집(申㠍)ㆍ유급(柳汲)ㆍ조참(趙傪)ㆍ정덕장(鄭德章)ㆍ한응귀(韓應龜)ㆍ한태상(韓台相)ㆍ성오장(成五章)ㆍ여필운(呂必運)ㆍ심준량(沈儁良)ㆍ박종연(朴宗衍)ㆍ조명운(曺命運)ㆍ여광정(呂光廷)ㆍ이윤조(李胤祚)ㆍ박단(朴)ㆍ정만(鄭㻴)ㆍ구성휴(具聖休)ㆍ이덕인(李德寅)ㆍ박상위(朴尙渭), 업유 김용(金溶), 유학 정무언(鄭無言), 업유 이기록(李基祿), 유학 김의감(金義鑑)ㆍ신진(申璡)ㆍ한무흠(韓武欽), 업유 조집(趙䌖), 유학 조후세(趙垕世)ㆍ최세태(崔世泰), 업유 이억수(李檍秀), 유학 최우형(崔宇亨), 업유 한약흠(韓若欽), 진사 이증(李繒), 업유 김보신(金輔臣), 유학 신학(辛㶅)ㆍ강우익(姜宇益)ㆍ권세희(權世熙), 생원 윤형보(尹衡輔), 유학 한담(韓墰), 업유 이동철(李東澈)ㆍ이시창(李時昌)ㆍ이동옥(李東沃), 유학 성호열(成虎烈)ㆍ한명기(韓命夔), 업유 허환(許寏), 유학 변시철(邊是徹)ㆍ유연(柳演)ㆍ김철기(金喆基)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하늘이 커다란 해(害)를 내려 선왕께서 승하하시니, 부모상을 당한 것 같은 애통함은 팔방이 똑같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상성(上聖)의 자질로 백성에 대한 한없는 근심을 계승하셨는데, 어질다는 명성은 일찍부터 드러났고 효성은 모범이 될 만하며, 보위(寶位)에 임어하심에 안일(安逸)치 않으시고 정신을 가다듬어 치세를 도모하고 계십니다.

 

무릇 학문에 매진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방도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염려하는 정성에 있어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씻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평하고 밝은 치화(治化)가 시작되는 때이니, 세도(世道)를 바로잡아 회복하고 지치(至治)를 완성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번에 우레와 번개가 굉음을 내고 번쩍이는 이변이 동월(冬月)의 초기와 중기가 교차하는 때에 나타났으니, 인애(仁愛)한 하늘의 견고(譴告)가 예사롭지 않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돌이켜 찾고 마음속으로 크게 놀라, 윤음(綸音)을 대대적으로 선포하여 널리 직언을 구하셨습니다. 

 

자신을 책망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뜻이 왕언(王言) 사이에 넘쳐흘렀으며, 곤궁한 이를 애달피 여기고 원통함을 묻는 교시가 포고문에 밝게 게시되었습니다. 반복하여 하신 말씀이 자상하고 글의 뜻이 간절하고 지성스러웠으니, 오늘날 신하 된 자 치고 누군들 한결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덕을 받들어 우리 전하께서 일소하려는 정책을 우러러 도우려 하지 않겠습니까.

 

저 군국(軍國)의 기무는 묘당(廟堂)에서 말하고, 백관의 득실은 대각(臺閣)에서 진달하고, 생민(生民)의 질고는 수령과 도백(道伯)이 아뢰고, 사문(斯文)의 시비는 사림(士林)이 변론합니다. 각기 그 직분을 수행하여 크고 작은 일에 빠뜨림이 없는데, 신들이 수백년 동안 폐고(廢錮) 당하여 억울한 사정이 있는데도, 신원되지 못하고 있는 일은 바로 곤궁한 사람이 원통함을 품고 있는 첫 번째 일입니다.

 

그러나 한쪽에 제쳐 놓고 한 번도 성상께 진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원통함을 품고 한(恨)을 가슴속에 두고 있어도 성상께 알릴 길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뜻을 억누른 채 그 심정을 글로 썼다가 지우기만 하였을 뿐이니, 천지 사이의 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아!, 천지가 덮어 주고 실어 주는 데에는 교초(翹肖) 같은 작은 새도 그 조화에 포함되고, 우로(雨露)가 적셔 주는 데에는 씀바귀 같은 하찮은 나물도 그 은택을 입습니다. 미물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성명(聖明)한 시대에는 진실로 필부 필부가 원통함을 품고 있어도 모두 정치의 누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천지가 감응하여 재앙을 부르게 됩니다. 더구나 이 서얼을 폐고하는 법은 천하 만고에 없던 바인데, 낡은 인습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허다한 인재들로 하여금 죄수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문 옆의 작은 출입구나 사립문 안에서 늙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혹 생전에 그 심정을 다 아뢰지 못한다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이 어찌 다만 필부 필부가 원통함을 품는데 그치겠습니까. 신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만약 다시 번독스럽게 해 드림을 이유로 사양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아뢰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눈치나 보며 두려워하기만 하다가 끝내 진심을 한 번도 아뢰지 못한다면, 비록 성명하신 전하라 할지라도 고질적인 폐단을 통촉하여 전대(前代)에서 인재를 취하던 공법(公法)을 필시 회복시킬 수 없을 것이며, 신들 또한 끝내 지하에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이에 감히 합사(合辭)하여 한목소리로 당초 폐고된 경위 및 우리 열성(列聖)께서 변통하신 명(命)을 두루 갖추어 고개 들어 부르짖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소서.

 

신들은 삼가 듣건대, 하늘이 인재를 내릴 때에는 본래 문지(門地)에 따라 차이를 두지 않으며, 제왕이 인재를 등용할 때도 그 문지를 따지지 않고 오직 재능의 여부만 살펴보고 진퇴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자면, 혹 전야에서 농사짓는 자나 도축이나 낚시하는 자 가운데서 뽑기도 하고 혹은 항오의 군졸이나 노예 중에서 발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경(公卿) 집안의 서얼의 경우는 처지가 비록 정적(正嫡)과는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씨족과 문호에 있어 본시 하천(下賤)과는 매우 다르므로 임용할 때 일찍이 구별한 적이 없습니다.

 

삼대(三代) 이래로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얼의 신분으로서 장상(將相)이 되어 명성과 공적을 드러낸 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의 경우 위로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였을 때부터 아래로 고려(高麗) 5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취하는 법규 또한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하여 적서(嫡庶)에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처음으로 대업을 창건하여 전장(典章)을 정리할 때에도 벼슬길에 구별을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처음으로 전에 없던 의론을 주창하여 서얼의 자손을 현직(顯職)에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뒤 강희맹(姜希孟) 등이 대전(大典)을 편찬할 때는 입사(入仕)와 부거(赴擧)하는 길까지 아울러 폐고하여 막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하던 해에 가뭄이 혹심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잇따라 생기자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이 문제 때문이라고 탓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묘(成廟)께서 측은히 여기고 경동(警動)하시어 장차 경장(更張)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묘(宣廟) 초기에 신분(申濆) 등 1000여 명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자, 선묘께서는 어람하고 불쌍히 여겨 이에 하교하시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할 적에는 곁가지라고 구분하지 않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충성을 바치기를 원하는 것이 어찌 꼭 정적(正嫡)이어야만 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대성인(大聖人)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마음을 볼 수 있기에 신들은 죽을 때까지 정중히 읽으며 흠탄하고 있습니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에 이르러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비로소 고제(古制)를 회복하여 통용하자는 의론을 건의하였는데, 마침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던 탓에 갑자기 변경할 겨를이 없어 먼저 허통(許通)과 부거의 길을 열었으니, 그 뜻은 대개 차례로 소통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인묘조(仁廟朝)에 이르러서는 부제학(副提學) 최명길(崔鳴吉)이 동료인 심지원(沈之源), 김남중(金南重), 이성신(李省身), 이경용(李景容) 등과 더불어 응지(應旨)하여 글을 올리면서 통용할 것을 힘써 청하였습니다. 그 말에, ‘예제(禮制)를 제정한 것이 삼대(三代) 보다 엄격하였던 때가 없으나, 적서의 명목은 단지 사실(私室)에서만 행해졌고 공조(公朝)에서는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문지를 차별하는 것이 육조(六朝)보다 자세하였던 적이 없으나, 인재를 등용할 때는 오로지 그 아비의 성(姓)만 묻고 그 어미의 성은 묻지 않았습니다. 대개 하늘이 인재를 낼 때 귀천에 따라 차이를 두지 않았고, 왕자(王者)가 인재를 등용할 때 문지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고 백왕(百王)이 바꾸지 않았던 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얼을 현직에 서용하지 말자는 의론은 서선(徐選)에게서 처음 나왔는데, 그 뒤로 갈수록 더더욱 심해져 마침내 자자손손에게 까지 영구히 금고(禁錮)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재주와 덕이 있더라도 모두 억눌리고 막혀 세상에 떨치지 못하고 배척받아 사람들 사이에 끼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숨을 죽이고 마치 큰 죄나 지은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자(父子)의 은혜도, 군신(君臣)의 의리도 없게 되어 버려 인륜의 기강을 해치고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 필부가 원망을 품어도 화기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재주에 따라 거두어 녹용(錄用) 하심으로써 막혀 답답한 기운을 풀고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넓힌다면, 세도(世道)를 비보(裨補)하고 인화(人和)를 이루기에 충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도 글을 올려 계속해서 논하자, 인조대왕께서 해당 조(曹)로 하여금 물어 처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회계(回啓)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낼 적에는 진실로 적서에 차이를 두지 않았는데, 서얼을 금고하는 것은 곧 우리나라의 악법으로 고금 천하에 없던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치우쳐 있고 작아 인재가 매우 적으므로 당대의 인재를 모두 등용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근심스럽습니다. 그런데 만들어 놓은 법이 너무 엄격하고 구분짓는 한계가 너무 협소하여 하늘이 내려 주신 인재를 다 등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전조(前朝)에서는 서얼을 금고한 적이 없는데, 본조 초기에 서선이 현직에 서용하지 말자는 의론을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그 뒤로 가면서 강희맹에 이르러서는 폐고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천인(賤人)의 자손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거늘 사대부의 서얼은 자자손손 한결같이 굳게 막혀 있어 비록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재주와 지식이 있더라도 종신토록 하류(下流)에 남아 있어야 하니, 얼마나 애석하겠습니까. 

 

옥당은 공론(公論)을 논하는 곳인데 묵은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고자 하여 이렇게 진청(陳請)하였으니, 이대로 시행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넓히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하고, 이어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한 다음 결정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그 당시 상신(相臣)인 이원익(李元翼)과 윤방(尹昉) 등이 헌의(獻議)하기를, ‘서얼을 낮고 박하게 대하는 일은 천하 만고에 없던 법으로, 왕자가 어진 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이 하는 도리에 몹시 흠이 됩니다.’라고 하였으니, 유신(儒臣)이 올린 차자에 대단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이 헌의하기를, ‘서얼을 금고하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던 법으로, 실로 지나치게 편향되고 속 좁은 견해입니다. 이는 천지가 낳고 이루어 주는 뜻을 해치기에 충분하고, 선왕(先王)의 공평하고 정대한 정사가 아니니, 통용하는 것이 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세간에서 행하기 어려움을 병통으로 여기는 자는 명분이 문란해질 것을 말합니다만, 적서의 명분은 단지 자기 집안 내부에서의 일이고, 조정에서는 단지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인재를 거둘 뿐입니다. 비록 귀현(貴顯)하게 된 뒤라 할지라도 적서 사이에 만일 명분을 범하는 일이 생긴다면 나라의 법이 진실로 엄하게 적용될 것이니, 문란해질 것에 대해서는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해당 조의 복계(覆啓)와 대신의 헌의는 모두 일체 통용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2품이상 여러 신하의 의논 또한 모두 하나로 귀착되었습니다. 다만 몇 사람이 이견(異見)을 세워 단지 삼조(三曹)에만 허통(許通)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뒤에 고(故) 상신 최명길이 전조(銓曹)의 판서로 있을 때 또 아뢰기를, ‘일찍이 을축 연간(1625, 인조 3)에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이 홍문관의 차자로 인해, 서얼이 등과(登科)한 뒤에는 요직(要職)은 허용하되 청직(淸職)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성지(聖旨)를 여쭈어 재가를 받자, 양사(兩司)가 서경(署經)하고 예조에 간직해 두어 한 시대의 성법(成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9년이 지났건만 하나도 거행하지 않아 성조(聖朝)에서 강정(講定)한 제도를 빈말로 만들고 말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서얼이 등과한 뒤 으레 제수받는 직임은 봉상시와 교서관의 서너 자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록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평소 축적해 둔 바를 펼칠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사목(事目) 안에 이른바 요직에 허용한다는 것은 곧 호조, 형조, 공조의 낭청 및 각 관사의 장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수교(受敎)대로 재능에 따라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인조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그러나 신희계(辛喜季), 심일운(沈日運), 김굉(金宏), 이경선(李慶善) 등 몇 사람이 형조와 공조의 낭청에 제수되는 데 그치고, 그 뒤로 더 이상 세 조(曹)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지 4, 5십년째입니다. 숙묘조(肅廟朝)에 이현(李礥) 한 사람이 겨우 호조 낭청에 제수되었는데, 떼 지어 일어나 배척하는 바람에 결국 체직(遞職)을 청원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잠잠하기만 합니다.

 

아!, 문성공(文成公) 이이는 바로 선조(先朝) 때의 대현이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 이하 여러 대신(大臣) 또한 모두 인묘조(仁廟朝)의 명신으로서 나라의 주석(柱石)과 조정의 시귀(蓍龜)와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계책은 세도(世道)를 보필하기에 충분하고, 논의는 인극(人極)을 떠받치기에 충분하였는데, 서얼을 통용하여 인재를 거두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지극히 공정하게 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저 신하들이 오늘날의 조정에 서게 된다면 방소 없이 어진 이를 세우는 전하의 덕으로 장차 그 의론을 채택하여 시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논의를 그릇된 것으로 여기어 배척하시겠습니까?

 

옛적에 한(漢)나라 신하 위상(魏相)은 명신 가의(賈誼), 조조(晁錯), 동중서(董仲舒) 등이 말한 것을 차례로 뽑아 일체 시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만약 계책과 계획이 나라를 이롭게 하고 치도(治道)에 보탬이 된다면, 어찌 그 사람의 있고 없음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아!, 남자가 천지 사이에 태어나서 충효의 본성을 받는 점은 똑같으니, 누군들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고 이름을 드날려 어버이를 현달하게 함으로써 그 직분을 다하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높은 벼슬아치의 후예로서 어려서부터 열심히 노력하여 가정에서 익히고 배우며 시서(詩書)를 갈고닦았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사적(士籍)에 올라서는 또한 모두 각각 그 직분을 직무로 삼아 부지런히 재능을 펼쳐 티끌만큼의 보답이라도 조금이나마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벼슬의 이름이라는 것이 내직으로는 주부(主簿)나 전적(典籍)에 그치고, 외직으로는 찰방이나 현감에 불과하고, 무직(武職)으로는 단지 첨사나 만호에 그칠 뿐입니다. 이런 두서너 개의 미관말직이 어찌 재능을 펼치기에 충분한 자리이겠습니까. 

 

간혹 화려한 문장이나 치적(治績)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급을 받는 경우에도 옥관자(玉貫子)를 붙이는 것 외에 달리 몸을 담을 곳이 없습니다. 그저 내장(內將)이나 가장(假將)의 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먼 시골구석의 비천한 백도(白徒)로서 가자(加資)된 자와 조금도 차별이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수행(隨行)하게 됩니다. 

 

나라에서 인재를 쓰는 방법이 어찌 이다지도 편협하단 말입니까. 군문(軍門)의 경우는 재주와 용맹을 숭상하므로 문지(門地)는 논할 바가 아닌데도, 양반과 서얼에게는 각기 응당 차임되는 자리가 있어 관직은 부류별로 모아지고, 사람은 무리별로 나뉩니다.

 

비록 달리는 수레에 뛰어오르는 진(秦)나라 전사같은 용맹과 100보 밖에서 버들잎을 꿰뚫는 초(楚)나라 양유기(養由基)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거의 다 사장되어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뒤에는 귀속되는 곳이 없어 산지(散地)에 머물다가 한 세월을 허송하게 되니, 어찌 매우 애석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역대의 이름난 신하들과 보필을 훌륭히 한 신하들을 삼가 살펴보니, 서얼 출신이 많았습니다. 중국의 경우로 말하자면, 한(漢)나라 때는 위청(衛靑)ㆍ곽거병(霍去病)이 있었고, 진(晉)나라 때는 배위(裴頠)ㆍ주의(周顗)ㆍ도간(陶侃)ㆍ환석건(桓石虔)ㆍ배수(裴秀)ㆍ완부(阮孚)가 있었고, 당(唐)나라 때는 소정(蘇頲)ㆍ이소(李愬)ㆍ두순학(杜筍鶴)ㆍ영호창(令狐彰)이 있었고, 송(宋)나라 때는 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ㆍ진영중(陳瑩中)ㆍ추지완(鄒志完)이 있었습니다. 

 

주수창(朱壽昌)의 효성, 진관(陳瓘)의 명분과 절개, 호인(胡寅)의 학문에 이르러서는 모두 탁월하여 백대의 인물 가운데 으뜸이며, 이 밖에도 명성과 지위가 두드러지게 빛나는 자를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말하자면, 고려의 정문(鄭文)은 정배걸(鄭培傑)의 서자(庶子)인데 예부 상서(禮部尙書)의 지위에 올랐고, 이세황(李世黃)은 이인로(李仁老)의 서자인데 합문지후(閤門祗候)의 관직에 이르렀고, 권중화(權仲和)는 권한공(權漢功)의 서자인데 고려조에서는 대사헌의 지위에 있다가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평의사(評議使)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 밖에 두드러지게 일컬어지는 자들이 역사서에 기록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 서얼이 서얼이라는 점은 진실로 고금의 차이가 없으나, 나라에서 어찌 오늘날 이러한 출중한 인재가 과연 없을 줄 알고서 금한(禁限)을 세워 막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제왕이 인재를 취하는 방도를 생각해 보니, 널리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좁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취하는 바가 넓을수록 얻는 바가 갈수록 풍성해지므로 어진 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소가 없이 하는 것을 제왕의 대법(大法)으로 여겼습니다. 전하께서는 우리나라의 땅덩어리의 크기와 인물의 수가 중국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중국은 산하(山河)가 만 리인지라 준재가 무리 지어 나오지만 임용할 때는 오히려 문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토지와 인물이 중국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데도 백성을 양반과 상인(常人)으로 나누어 놓고, 또 양반 가문이라도 서얼은 벼슬길을 막아 버립니다. 그런즉 온 나라를 통틀어 제한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그 수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고서도 한 시대의 인재를 전부 얻어 한 시대의 쓰임에 갖추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일찍이 중묘(中廟)께 고하기를, ‘중국은 인물이 본래 많고 발탁해 등용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인물이 본래 적은 데다 서얼을 분별하는 법까지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매우 절실한 말입니다.

 

신들은 삼가 듣건대, 성묘(成廟) 이후로 서얼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지 100여 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종종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박지화(朴枝華), 어숙권(魚叔權), 조신(曺伸), 이달(李達), 정화(鄭和), 임기(林芑), 양대박(梁大樸), 권응인(權應仁), 김근공(金謹恭), 송익필(宋翼弼) 형제 등 수십 인이 문장으로 혹은 학문으로 그 시대에 이름을 드러냈고, 후인(後人)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만약 밝은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그 포부를 펼칠 수 있게 하였다면 나라의 빛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관으로서 일컬을 만한 자로는 임진왜란 때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유극량(劉克良) 등입니다. 

 

이들은 모두 의병을 규합하여 적의 선봉을 깨뜨렸으며, 병자년(1636, 인조14)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위급하던 때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성 아래에 나아가 싸운 자는 오로지 권정길(權井吉)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문무의 인재가 본시 적지 않은데, 나라에서 취하여 등용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어찌 신들의 부모가 아니겠으며, 신들 또한 어찌 전하의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여러 자식을 함께 기를 적에 한 이불 속에서 젖을 먹여 키워, 혈기가 서로 통하고 정의에 차이가 없을 텐데, 장차 좌우로 돌보아 주며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아이와 저 아이를 분별하여 그 괴로움과 즐거움을 차이 나게 하겠습니까? 괴로움을 어버이에게 호소하는 것은 곧 사람의 정리(情理)입니다. 

 

전하의 적자로서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전하 앞에서 앙앙 울면서 호소함으로써 젖을 먹여 키우는 은혜를 균등하게 입기를 바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입니까? 또 평민에게 두 딸이 있는데, 한 명은 평민의 처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사부(士夫)의 첩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평민의 자식은 문직(文職)으로는 화현직(華顯職)에 오르고 무직(武職)으로는 높은 벼슬을 취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 없으나, 사부의 자식은 서얼이라 일컬어져 모든 것이 저지됩니다. 인묘조에 이미 허통하기로 한 세 조(曹)에 이르러서도 더 이상 의망하여 차임되지 않고, 외관(外官)으로도 주(州) 규모의 목민관으로는 승진되지 않습니다. 

 

그 어미는 똑같더라도 그 아비의 존비는 매우 현격한데, 조가(朝家)에서 사부(士夫)의 자식을 대우함이 도리어 평민의 자식보다 못하니, 신들은 굽어보고 올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 전기(傳記)에서 일컬어지는 자들에 대해 단지 그 해당자에게만 서얼이라고 일컫지 그 자손까지 아울러 서얼로 이름 붙인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한번 서파(庶派)에 속하면 비록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서얼의 수가 날로 더욱 늘어 나라의 절반에 이르는데도, 별 이유 없이 한낱 곤궁한 백성이 되어 버릴 따름입니다.

 

나아가서는 조정에서 아주 무시당하고 물러나서는 향당(鄕黨)에서 쪼들려 한쪽 구석에 있게 되니, 발걸음조차 몸을 숙이고 조심스레 걷고 자신의 그림자만 위로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지낼 뿐입니다.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낮은 지위에서 풀이 죽어 지내다가 한 번도 성상을 가까이 하지도 못하며, 곤궁하여 실의(失意)하게 되면 시속(時俗)에 골몰하다가 반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게 됩니다. 그리하여 집은 가난하여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버려져 더불어 그 사이에 끼지도 못하게 되니, 그 곤핍하고 불쌍한 모습은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고(故) 진사 이휘(李翬)는 아들을 낳고 시를 짓기를, ‘아들을 낳았다고 남들은 모두 기뻐하나, 나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네. 세간의 한없는 괴로움이, 앞으로 너에게 또 전해지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 군수 권칙(權侙)은 그의 벗 박안기(朴安期)를 애도하는 만시(挽詩)에서, ‘저승에서는 문지를 논할 필요가 없으리니, 글을 잘 짓기로는 박 사인(朴舍人)이라네.’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 두 편을 살펴보면, 그 애통하고 절박한 뜻이 읊조리는 사이에 이처럼 나타나니, 궁한 자의 글이지만 측은한 마음이 일어 느꺼워 애통해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연(燕)나라 신하가 통곡하자 5월인데도 서리가 흩날리고, 제(齊)나라 여인이 하늘에 울부짖자 벼락과 폭풍이 궁전을 덮쳤습니다. 한 사람이 원통함을 품어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더구나 천만 사람이 수백 년 동안 품어 온 억울한 기운이 천지의 화기를 망가뜨리고 재앙을 불러오는 것은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맹자》에 ‘잘 기르면 만물이 다 잘 자라고, 잘 기르지 않으면 만물이 다 사라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미 나라에서 키워 주는 은택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영특한 재주와 아름다운 자질이 있더라도 비천한 데서 뽑혀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기(志氣)가 꺾여 서리 맞은 초목과 같으니, 그 정황이 서글프다 하겠습니다.

 

지금 통용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자들은 꼭 ‘조종조의 옛 제도를 가벼이 바꾼다.’라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데, 신들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지킬 때를 당하여 지키는 것이 바로 계술(繼述)이나, 변통할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 또한 계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되니, 비록 조종조의 옛 제도라 할지라도 진실로 한결같이 융통성 없이 고집만 하여 시대에 맞춰가는 의리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금고의 법은 애초 한두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써 이미 우리 태조대왕의 옛 제도가 아니며, 또한 우리 태종대왕의 본뜻도 아닙니다.

 

그리고 100여 년 뒤에는 선묘(宣廟)께서 벼슬길을 회복하여 주셨고, 인묘(仁廟)께서도 세 조(曹)에 허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오늘날 수용(收用)하시는 것은 옛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로 선묘와 인묘 두 대의 유의(遺意)를 계승하는 것이며, 선묘와 인묘의 유의를 계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태조대왕께서 통용하신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옛 사실에서 찾지 아니하고 도리어 가볍게 바꾼다는 데 의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월의 길고 짧음으로 말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서얼을 통용한 것은 이미 수천 년이 넘고, 중간에 폐고한 것은 겨우 200년일 뿐이니, 과연 어느 것이 짧은 기간이고 어느 것이 오래된 것입니까. 《주역》에 ‘궁(窮)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구분해 차별하여 매우 엄하게 제한을 둔 지 거의 서너 갑자(甲子)가 지났으니, 이제는 정말로 변통할 때입니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없던 신법(新法)이 온 나라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랫동안 행해져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고 있습니다. 

 

만일 대대적으로 경장하고 대대적으로 변통하고자 한다면 잘못된 인습에 물든 나머지 틀림없이 다른 의론이 없지 않겠으나, 신들이 바라는 바가 또한 어찌 화현직이나 높은 지위에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저 궁벽한 시골구석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근본을 따지지 않고 명기(名器)를 아끼지 않는데, 유독 경화(京華) 세족(世族)의 후손인 신들에 대해서만은 일체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니, 이 때문에 원통하여 죽고 싶은 것입니다.

 

아!, 하늘과 사람은 털끝만큼의 착오도 없이 서로 감응합니다. 신들이 근심하고 답답해하며 밤낮으로 해금(解禁)을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는 것 같을 뿐이 아니니, 아마도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도 들어주는 하늘이 반드시 이를 심히 아파하여 우리 전하께 경고한 바일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하늘을 감동시켜 화기(和氣)를 불러들일 계책으로는 이를 벗어나서 달리 구할 데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여 속히 위엄 있는 처분을 내리소서. 우러러 열성의 유의를 준행하고 굽어 선현의 지론을 채납하여 조용(調用)의 길을 크게 열어 주어 재주에 따라 발탁하신다면 덕음(德音)이 한번 내리자마자 원통하고 억울함이 완전히 풀릴 것입니다. 어찌 다만 신들의 한때의 행운일 뿐이겠습니까. 

 

수백 년 이래로 허다하게 원통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자들의 넋 또한 감격하고 고무되어 구천(九泉)에서 성덕(聖德)에 보답하려 할 것이며, 하늘이 절로 흡족해하여 화기가 흘러넘칠 것이니, 인재를 얻어 치화(治化)를 돕는 도리에 필시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이 이런 억울한 심정을 품고 있은 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아비가 자식에게 전하고 자식이 손자에게 전하여 대대로 통한을 품고 있으니, 누군들 한번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마는 기가 꺾이고 억눌린 나머지 사람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게다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위축되어 망설이다가 지금껏 구중궁궐에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밝은 교지가 내려진 마당에 끝내 차마 침묵하고 고개 숙인 채 배회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참람함을 피하지 않고 외람되이 번독스럽게 해 드림이 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그 곤궁함을 애처로이 여기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유념하여 밝게 살펴 주소서.

 

신들이 진심을 피력하여 상소하고 궐 아래 나아와 엎드린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소장(疏章)을 열세 번이나 올렸으나, 한 승지가 힘써 배척하는 바람에 끝내 퇴각당하였습니다. 아, 설령 신들의 말에 참람한 점이 있더라도 승정원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봉입하고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들의 불만을 아뢰는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배척하고 봉입하지 않음으로써 성상께서 구언(求言)하신 성대한 뜻이 막혀 행해지지 않게 되고, 수백 사람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상소가 저지되어 성상께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들을 천하게 여기고 박대하여 사람 축에 끼워 주지 않아 그 몸을 금고해 놓았을 뿐 아니라 입에 재갈까지 물리고서 ‘내가 봉입하지 않은들 저들이 나를 어쩌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상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막아 버렸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되게 한다는 도리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신들이 궐문 밖에서 곧장 통곡하여 이 원통함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분수를 헤아려 보니 황공하고 위축되어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법가(法駕)가 교외로 나올 때를 만나 감히 다시 서로 이끌고 와 거둥하시는 길가에서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우주(虞主)를 맞이하여 애통해하시느라 경황없는 상태에 번독스럽게 해 드리는 것이 죽을죄를 짓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이 한 번의 기회를 놓친다면 천지처럼 한없는 원통함을 끝내 성상께 아뢸 길이 없어 부득불 외람됨을 무릅씀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궁지에 몰린 원숭이는 나무를 가리지 않고, 곤경에 처한 새는 소리를 가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아울러 가엾이 여기시고 살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우리나라는 본래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작은데, 인재를 등용하는 데도 그다지 광범위하지 않기에 내가 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겨 왔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고 해와 달은 정조(精粗)를 가리지 않고 비추는데, 왕자(王者)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어찌 그 가운데 차이를 두겠는가. 

 

지금 그대들의 상소를 살펴보건대, 인용한 것이 근거가 있다. 다만 이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바꿀 수가 없으니, 신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 천천히 강구하여 처리하겠다. 세 조(曹)의 낭청에 관한 일은 해당 조로 하여금 인묘의 수교대로 가려 의망하게 하겠다.”하였다.

 

[注01]어진 …… 도리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탕왕(湯王)은 중도(中道)를 잡으시며, 어진 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소가 없이 하셨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일정한 방소가 없다는 말에 대해 주자(朱子)는 “어진 자이면 그를 지위에 세우고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라고 풀이하였다.

 

[注02]발걸음조차 …… 걷고 : 매우 황공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뜻한다. 《시경》 〈정월(正月)〉에 “하늘이 높다고 하나 감히 몸을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땅이 두텁다고 하나 감히 조심스레 걷지 않을 수 없노라.〔謂天蓋高 不敢不局 謂地蓋厚 不敢不蹐〕”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注03]자신의 …… 뿐입니다 : 쓸쓸하고 참담한 심경을 뜻한다. 남북조 시대 강엄(江淹)의 〈한부(恨賦)〉에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에 항복해서는 명예는 수치스럽고 자신은 원통하게 되었네. 칼을 뽑아 기둥을 쳐본들 자신의 그림자만 위로하며 부끄러운 마음뿐이네.〔至如李君降北 名辱身冤 拔劍擊柱 弔影慚魂〕”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注04]연(燕)나라 …… 덮쳤습니다 :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시 〈고풍(古風)〉 제37수에 “연(燕)나라 신하가 지난날을 통곡하자 5월인데도 가을 서리가 흩날리고, 서녀가 하늘에 울부짖자 벼락과 폭풍이 제나라 궁전을 덮쳤다네.〔燕臣昔慟哭 五月飛秋霜 庶女號蒼天 震風擊齊堂〕”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연나라 신하는 추연(鄒衍)을 말하는데, 그가 충성을 다하였지만 무함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한여름인데도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제(齊)나라 여인은 제나라의 효부(孝婦)를 말하는데, 시누이가 어미의 재산을 탐낸 나머지 어미를 죽이고 과부의 짓이라고 무함하자, 과부가 원한이 맺혀 하늘에 울부짖으니, 제 경공(齊景公)의 궁전에 벼락이 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모두 억울함으로 인해 재변(災變)이 생긴 일을 말한다.

 

[注05]옛사람의 …… 하였습니다 : 옛사람은 송(宋)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를 말하며, 제왕(帝王)의 효를 논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東江遺集 卷13 請行百官三年衰絰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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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영조 즉위년(1724) 12월 17일 (병술) 원본582책/탈 초본31책(33/37

 

庶孽禁錮法을 폐지하고 調用의 길을 열어주기를 청하는 鄭震僑 등의 상소

 

○ 進士鄭震僑, 生員鄭最寧, 幼學李正華·魚有浩, 進士李廷彦, 生員李集一, 進士宋秀雍·鄭璘, 幼學李萬年, 進士鄭震奎·宋必煒, 業儒尹治·李恒寧, 幼學沈復來·閔孝百·李獻身·李墁·柳夏相, 業儒李道興, 幼學申紹·李瑞彩·李瑞彪·李宜人, 業儒尹沈, 幼學李宜民·鄭輯寧·鄭道恒·尹寏·李世煥, 進士柳絢, 幼學柳周相·閔孝曾·沈師古·金箕錫·鄭齊嚴·洪德麟·金九錫·鄭宅寧·李養身, 進士李會一, 業儒李基興, 幼學鄭光祚·金一徽, 業儒申寧夏·鄭遴, 幼學柳綗·趙宜壽·申琠, 業儒申亨夏·慶昪, 幼學李萬宗·趙侃·金信源, 進士李世瑞, 幼學尹大壽·李震溥·崔道貞·李堯民, 生員朴奎祥, 幼學李海涵·辛重尹·尹德壽·李龍鎭·辛重履·趙世球·李春華·柳明相·李盛華·金夏臣·李世煜·沈壽增·尹必壽·李海春·趙啓, 進士李世璊, 幼學尹其壽·鄭寘柱·金光益, 業儒李廉, 幼學權瑜·李彦圭·李益增·李灚·李彦邦·李雋·安紈·李益明·趙沃·李遇春·安緱, 業儒孫縉, 幼學辛榥·李聖一·蔡慶萬·申天祿·金九敍·李世珹·丁道烱·李世瑎, 業儒權相耋, 幼學李世琥·李挺采·沈復元·李宜吉·李秀幹, 業儒元羲瑞, 進士申致璋, 幼學申斗夏·鄭龜寧·安允慶·李鼎溥, 業儒鄭熙民, 幼學申謙夏·洪致潤·李秀蔓·洪致河·李秀春·李翊龍·李彦緝·宋述孫·金最衍, 業儒韓喜朝, 幼學徐宗樞·李命天·李槃·李命大·閔祉·柳洽·閔祊, 業儒許浣, 幼學辛惠東·李企華·趙萬謙·鄭有人·洪潗, 業儒慶曼, 幼學許沃·權衡重·南泰翰, 進士鄭壽崗, 幼學李宗泰, 業儒李望欽, 幼學李徵五·邊聖臣·洪啓震·邊聖民·洪啓顯·具燁·李世休, 業儒慶昇·元命瑞, 幼學崔致敬·元夢聖·閔稷·李萬重·辛達東·成之龜·鄭聖言·申輔夏, 進士李泰鎭, 幼學辛元東, 業儒權益愼, 幼學李灦·辛宇泊, 業儒宋珩, 幼學崔胄興·李溫·崔粹弼·崔啓興·李洸·崔台興·李最·崔箕興·辛宇仲·李一元·辛宇季·韓昌慶, 進士李樟, 幼學韓碩慶·趙伋·李鵬運·李益培, 業儒申英夏, 幼學李益泰·李秀松·李益梓·黃壽仁·李瑞甲, 業儒韓元朝, 幼學鄭德明, 業儒韓漸朝, 幼學安格, 業儒柳泳, 幼學金遇河, 業儒韓師朝, 幼學南泰完, 業儒李思謹, 幼學宋任孫, 業儒趙倫, 幼學權萬宗, 業儒權萬秋, 幼學柳春溥, 業儒李箕弼, 幼學金箕敍·崔昌壽·李思良·李晉明·李思源·李時番·李道明·南泰磐·沈東郁·南泰章·申·韓櫶·李重燁·申嶷·申㠍·柳汲·趙傪·鄭德章·韓應龜·韓台相·成五章·呂必運·沈儁良·朴宗衍·曺命運·呂光廷·李胤祚·朴·鄭㻴·具聖休·李德寅·朴尙渭, 業儒金溶, 幼學鄭無言, 業儒李基祿, 幼學金義鑑·申璡·韓武欽, 業儒趙䌖, 幼學趙垕世·崔世泰, 業儒李檍秀, 幼學崔宇亨, 業儒韓若欽, 進士李繒, 業儒金輔臣, 幼學辛㶅·姜宇益·權世熙, 生員尹衡輔, 幼學韓墰, 業儒李東澈·李時昌·李東沃, 幼學成虎烈·韓命夔, 業儒許寏, 幼學邊是徹·柳演·金喆基等疏曰, 伏以, 天降大割, 仙馭上賓, 如喪之痛, 八域惟均, 而我殿下以上聖之姿, 承無疆之恤, 仁聲夙彰, 孝思維則, 蒞位匪安, 勵精圖治, 凡厥典學修己之方, 敬天憂民之誠, 靡不用極。人皆拭目, 始初平明之化, 可以挽回世道, 陶鑄至治, 而乃者雷電轟燁之異, 見於冬月孟仲之交, 仁愛之天, 譴告非常。殿下惕然反求, 大驚厥心, 渙發綸音, 廣求直言, 責躬矯弊之意, 洋溢於十行之間, 哀窮詢冤之敎, 昭揭於八條之中, 反覆諄諄, 辭旨懇惻, 爲今日臣子者, 孰不欲精白一心, 以承休德, 仰裨我殿下消弭之策哉? 若夫軍國機務, 廟堂言之, 官師得失, 臺閣陳之, 生民疾苦, 牧伯奏之, 斯文是非, 士林辨之。各擧其職, 細大靡遺, 而至於臣等數百年被錮, 抑鬱而不得伸者, 乃是窮人抱冤之第一件事, 而擔閣一邊, 曾無一陳冕旒之下者, 含冤茹恨, 無路上聞, 屈首抑志, 東塗西抹, 便作天地間一罪人。噫, 天地之所覆載翹肖咸囿, 其化雨露之所沾濡, 堇荼竝被其澤, 微物尙然, 矧伊人乎 是以聖明之世, 苟有匹夫匹婦之抱冤者, 皆足爲政治之累, 而感召災沴。況此廢錮庶孽之法, 乃是天下萬古之所未有, 而因循至此, 致令許多人才, 囚首老死於圭竇蓽門之下, 而莫或申暴於生前, 其爲感傷和氣, 豈特匹夫匹婦之抱冤而已哉? 臣等, 於此若復以瀆冒爲辭, 自鳴爲嫌, 而俔俔伈伈, 終不得一暴衷情, 則雖以殿下之明聖, 必不能洞燭痼弊, 以復前代取人之公法, 而臣等亦終爲地下不瞑之鬼矣。玆敢合辭齊聲, 備將當初被錮源委及我列聖變通之成命, 仰首鳴號, 伏乞聖明, 哀愍而垂察焉。臣等竊伏聞, 天之降才, 本不間於門地。帝王用人, 亦不問其門地, 惟視才否而進退焉。歷觀前史, 或擧於畎畝屠釣之間, 或拔於行伍奴隷之中, 而至於公卿家庶孽, 其處地雖與正嫡有別, 而氏族門戶, 自與下賤逈殊。故任用之際, 未嘗有所區別。自三代以降, 迄于漢唐宋大明之世, 庶孽之位, 將相顯名績者, 不可殫記。吾東方, 上自三國鼎峙之日, 下至高麗五百餘年取人之規, 亦一遵中華, 無少間隔。曁我太祖大王肇創大業, 修明典章, 而亦未嘗區別於仕路也。逮至太宗朝, 右代言徐選始唱無前之議, 以庶孽子孫, 勿敍顯職。其後姜希孟等之纂次大典也, 竝與其入仕赴擧之路, 而錮塞之。是以頒降大典之歲, 旱暵肆酷, 餓莩相望, 議者皆歸咎於此, 故成廟惻然警動, 將欲更張, 而未及施行, 弓劍遽遺。宣廟初年, 申濆等千餘人, 上章籲冤, 宣廟覽而憐之。乃下敎曰, 葵藿向日, 不擇旁枝, 人臣願忠, 豈必正嫡 此可見大聖人大公至正之心, 而臣等之沒世莊誦而欽歎者也。至萬曆癸未, 先正臣李珥, 始建復古通用之議, 而適有邊警, 未暇猝變先開其許通赴擧之路, 其意蓋欲次第流通也。及至仁廟朝, 副提學臣崔鳴吉與同僚沈之源·金南重·李省身·李景容等, 應旨陳章, 力請通用其言, 而禮制之定, 莫嚴於三代, 而嫡庶之名, 只行於私室, 不行於公朝。門地之別, 莫詳於六朝, 而用人之際, 惟問其父姓, 不問其母姓。蓋天之生才, 無間於貴賤, 王者用人, 不拘於門地, 此天理之當然, 而百王之所不易也。我國庶孽勿敍顯職之議, 初出於徐選, 而厥後輾轉, 一節深於一節, 終至於子子孫孫, 永被禁錮, 雖有才德, 率皆抑塞而不揚於世, 擯斥而不與於人, 垂頭屛氣, 如負大罪, 無復父子之恩, 君臣之義, 傷人紀逆天理, 莫此爲甚。噫, 匹夫銜冤, 足傷和氣, 況其麗不億者乎? 伏願殿下, 隨才收錄, 以宣湮鬱之氣, 以廣用人之路, 則足以裨世道而致人和云。新豐府院君臣張維, 亦上疏繼論, 仁祖大王令該曹稟處。吏曹判書臣金尙容回啓曰, 天之生才, 固無間於嫡庶, 而禁錮庶孽, 乃是我國之弊法, 古今天下所未有之事。我國壤地偏小, 人材渺然, 盡用一世之才, 猶患不足, 而立法太峻, 區限太隘, 天之所生, 猶未盡用。昔在前朝, 未嘗禁錮庶孽, 而國初徐選, 始發勿敍顯職之議。其後輾轉, 至於姜希孟而廢錮益甚。賤人子枝, 猶通仕路, 而土大夫庶孽, 子子孫孫, 一向牢錮, 雖有過人之才智, 終身沈沒於下流, 可勝惜哉? 玉堂, 公論所在, 而欲爲痛革宿弊, 有此陳請, 似當依此施行, 以廣用人之路云云。仍請議大臣定奪, 其時相臣李元翼·尹昉等獻議曰, 卑薄庶孽, 天下萬古, 所無之法, 殊欠王者立賢無方之道, 儒臣陳箚, 大有所見。相臣吳允謙獻議曰, 禁錮庶孽, 古今天下所未有之法, 實是偏荒隘陋之見, 足以傷天地生遂之意, 非先王公大之政, 通用之擧, 實爲合理。世之病難行者, 名分紊亂爲言, 而嫡庶名分, 只是自家門戶中事, 朝廷只用賢收才而已。雖貴顯之後, 嫡庶之間, 如有犯分干名之事, 則邦憲固嚴, 紊亂非所慮也。該曹之覆啓, 大臣之獻議, 皆出於一體通用之意。二品以上諸臣之議, 亦皆歸一, 而惟以數人之立異, 只許三曹矣。其後故相臣崔鳴吉判銓曹時, 又啓曰, 曾在乙丑年間, 領府事臣李元翼, 因弘文館箚子, 庶孽登科後許要, 而不許請。稟裁聖旨, 兩司署經, 藏之禮曹, 以爲一代之成法, 今過九年, 一不擧行, 使聖朝講定之制, 歸於虛地, 事甚未安。竊惟庶孽, 登科後例授之職, 不過奉常寺·校書館三四窠而已, 雖有可能之人, 無以展布所蓄, 誠爲可惜。事目內所謂許要者, 卽戶刑二郞廳及各司長官之謂也。自今以後, 依受敎隨才擬望, 何如, 上允之。辛喜季·沈日運·金宏·李慶善若干人, 得拜刑工郞廳而止, 其後更不得廁跡於三曹者, 殆至四五十年矣。肅廟朝李礥一人, 僅拜戶部郞, 而群起而斥之, 終至呈遞, 厥後尙至今寂寥矣。嗚呼, 文成公李珥, 卽先朝之大賢也, 而完城府院君崔鳴吉以下諸大臣, 亦皆仁廟朝名臣, 爲國家之柱石, 作朝廷之蓍龜, 謨酞足以裨世程, 論議足以扶人極, 而莫不以通用收才爲急先務, 則其至公至正取人無別之意, 亦可以見矣。若使諸臣, 在今日朝廷之上, 則以殿下立賢無方之德, 而將采其議而施之乎 抑將非其論而斥之乎 昔漢臣魏相, 請撰次名臣賈誼·晁錯·董仲舒等所言, 一切施行之。若使謨猷籌畫, 有可以利國家而輔治道, 豈以其人之存沒, 而有所取舍哉? 嗚呼, 士生天地, 同忠孝之姓, 孰不欲盡忠事君, 揚名顯親, 以盡其職分也哉 臣等俱以簪纓之裔, 自少策勵, 習訓家庭, 從事詩書, 及至拔身登第, 名忝仕籍, 則其心又皆欲各職其職, 奔走輸才, 少效涓埃之報, 而所謂爵名, 內則止於主簿·典籍, 外則不過察訪·縣監, 武弁則只僉使·萬戶而止耳。凡此數三微末之窠, 豈足爲展布才具之地? 間或因文華治績, 得階通政者, 則鬢邊貼玉之外, 更無棲身之所, 只得浮沈於內將假將之中, 與遐鄕卑賤白徒加資者, 比肩隨行, 無少差別, 國家用人之方, 又何可若是偏阨耶 至於軍門, 才勇是尙, 門地非所可論, 而兩班庶孽, 各有應差之窠, 官以類聚, 人以群分, 雖有起乘之勇, 穿楊之才, 率皆沈淪埋沒, 而不得售於世。決科之後, 曾無歸屬之處, 棲遑散地, 虛送一世, 亦豈非可惜之甚者乎 臣等伏覩歷代名臣碩輔, 多出庶孽。以中國言之, 則在漢, 有衛靑·霍去病焉。在晉, 有裵頠·周顗·陶侃·桓石虔·裵秀·院孚焉。在唐, 有蘇頲·李愬·杜筍鶴, 令狐彰焉。在宋, 有韓琦·范仲淹·陳瑩中·鄒志完, 而至於朱壽昌之誠孝, 陳瓘之名節, 胡寅之學問, 皆能卓然爲百代人物之冠冕, 而此外名位之顯耀者, 又不可勝記。以東國言之, 則高麗鄭文則, 培傑之庶子, 而位禮部尙書。李世黃, 仁老之庶子, 而官閤門祗候。權仲和, 漢功之庶子, 而在麗朝位大司憲, 入我朝位評議使, 其他表表見稱者, 史不絶書。噫, 庶孽之爲庶孽, 固無古今之殊。國家安知今日, 果無此等出群之才, 而立禁限以防之耶 臣等竊伏念帝王取人之道, 貴廣而不貴狹, 所取愈廣而所得愈富。故以立賢無方, 爲帝王之大法。殿下以我國土地之廣, 人物之多, 視中國爲何如也 以中國之山河萬里, 俊乂輩出, 而任用之際, 尙不問其門地, 況吾東土地人物, 不能當中國之什一, 而其百, 旣分兩班·常人, 又就兩班之家, 而枳塞其庶孽。然則擧一國而不入於防限者, 其數十不一矣。如是而欲盡得一世之才, 以需一世之用, 其可得乎 昔文正公臣趙光祖嘗告于中廟曰, 中國人物本多, 而擢用亦易, 我國則人物本少, 而又有庶孽分別之法, 此誠切至之論也。臣等伏聞, 成廟以後, 庶孽之不得赴擧者, 幾百有餘年。其間往往有傑出之人, 如朴枝華·魚叔權·曺伸·李達·鄭和·林芑·梁大樸·權應仁·金謹恭·宋翼弼兄弟等數十人, 或以文章, 或以學問, 著名於當世, 見推於後人。若使立揚明廷, 展其抱負, 則其爲國家之光, 豈可勝道哉 至於武弁之可稱者, 則壬辰之亂, 李山謙·洪季男·劉克良等, 皆能紏合義旅, 摧破賊鋒。丙子南漢危急之日, 領孤軍進戰於城下者, 獨有權井吉一人。以此觀之, 文武人才, 亦自不少, 而顧國家, 不能取用焉耳。嗚呼, 殿下豈非臣等之父母, 而臣等亦豈非殿下之赤子乎? 父母竝育諸子, 乳養於一衾之內, 血脈相通, 情虔無間, 則其將左右顧復, 一視同仁耶? 抑將分別彼此, 異其苦樂耶 疾痛呼父, 乃人之情, 以殿下赤子呱呱啼號於仁覆之下, 以冀其均被乳養之恩者, 可乎, 不可乎 又況平民之有兩女者, 一爲平民之妻, 一爲士夫之妾, 則平民之子, 文踐華貫, 武取膴仕, 無所罣礙, 而士夫之子, 則稱以庶孽, 一切防塞。以至於仁廟朝, 旣通之三曹, 不復擬差, 而外官亦不得陞州牧。其母一也, 其父之尊卑懸絶, 而朝家待士夫之子, 反不如平民之子。臣等俯仰尋思, 誠莫曉其故也。抑有一說, 中國所謂見稱於史傳者, 只於其身, 稱爲庶孽, 而未嘗聞竝與其子孫而名之也。我國則不然, 一係庶派, 則雖至累十世, 而不能脫其圈套。以此庶孽之數, 日益蕃衍, 殆至半國中, 而作一無故之窮民。進而抹摋於朝廷, 退而偪側於鄕黨。跼天蹐地, 弔影慙魂, 僥倖得科, 則潦倒於下位, 不獲一近淸光。畸窮落魄, 則汨溺於流俗, 未免半世蓬累。家貧而不能自存, 人棄而無與爲伍, 其困頓憐悶之狀, 有不可言。故故進士臣李翬, 生子有詩曰, 生子人皆喜, 吾心獨不然, 世間無限苦, 於汝又將傳。故郡守臣權侙, 挽其友人朴安期詩曰, 冥司不必論門地, 好作修文朴舍人。觀於此二詩, 則其哀痛迫切之意, 發於吟詠之間者如此, 可謂窮者辭, 而足以惻然感慟者也。噫, 燕臣慟哭, 五月飛霜, 齊女呼天, 震風擊堂, 一人抱冤, 尙且如此, 況乎千萬人數百年抑鬱之氣, 其傷天和而召災沴, 固也, 無足怪也。孟子曰, 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臣等旣不蒙國家培養之澤, 故雖有英才美質, 不能自拔於賤汚之中, 而有所成就, 志氣之摧沮, 殆同殞霜之草木, 其情可謂慼矣。今之以通用爲難者, 必以輕變祖宗朝舊制爲言, 而臣等竊以爲不然。古人有言曰, 當遵守而遵守者, 乃繼述也, 當變通而變通者, 亦繼述也。法久而至於弊生, 則雖祖宗朝舊制, 固不可一向膠守, 以失趨時之義。況此禁錮之法, 初出於一二人之私見, 而旣非我太祖大王之舊制, 亦非我太宗大王之本意, 而百餘年之後, 宣廟復其仕路, 仁廟又許三曹, 則殿下之收用於今日, 非徒不爲變舊制, 實繼宣廟·仁廟兩朝之遺意也。非徒繼宣廟·仁廟之遺意, 實復我太祖大王通用之舊制也。烏可不求故實, 而反有疑於輕變也 且以久近言之, 吾東方通用庶孽, 已過數千年, 而中間癈錮, 僅至二百年, 是果孰爲近而孰爲久耶? 易曰, 窮則變, 變則通。均是人也, 而區以別之, 防限甚峻, 甲子幾三四周矣, 此正變通之時也。雖然前代所無之新法, 便作一國之痼弊, 行之已久, 塗人耳目。如欲大更張大變通, 則因循襲謬之餘, 必不無歧貳之議, 而臣等所期望, 亦豈在於華顯崇高之位哉? 惟彼遐裔窮荒, 不知來歷之人, 不問根派, 不惜名器, 而獨於臣等京華世族之後, 則施之以一切之法, 此所以痛恨欲死者也。噫, 天人感應之機, 間不容髮。臣等憂愁鬱悒, 日夜望其解禁者, 不啻若大旱之雲霓, 則竊恐聽卑之天, 必有所衋傷於斯而警告我殿下也。顧今日格天召和之策, 外此而不可他求也。伏乞聖明, 斷自宸衷, 亟恢乾剛, 仰遵列聖之遺意, 俯採先賢之至論, 廓開調用之路, 隨才拂拭, 則德音一降, 冤鬱盡釋。豈但爲臣等一時之幸哉? 數百年來許多抱冤長逝者魂, 亦感激鼓舞, 圖報聖德於九地之下, 天心自享, 和氣旁流, 未必無補於得人贊化之道矣。臣等之抱此冤屈, 非一日也。父而傳子, 子而傳孫, 世世含痛, 孰無一者伸暴之心, 而摧殘抑遏之餘, 人不能自奮, 且未得可言之會, 畏縮趑趄, 尙未達於九重矣。今於明旨之下, 終不忍泯默低徊不避猥僭, 冒瀆至此。伏惟殿下, 哀其窮恕其罪, 而留神察納焉。臣等瀝血封章, 進伏闕下者, 將一月矣, 疏凡十三上, 而乃爲一承宣所力排, 終至退却。噫, 設令臣等之言, 有所僭猥, 在喉司之道, 惟當捧入, 以竢處分之如何, 諉以自鳴, 斥而不捧, 使聖上求言之盛意, 閼而不行, 數百人訟冤之章, 沮而未達。此不過賤薄臣等, 不齒人類, 旣錮其身, 又箝其口, 以爲吾雖不捧, 渠輩其於余何, 而不自覺其爲壅蔽聰明之歸, 出納惟允之道, 果安在哉 臣等直欲痛哭於闕門之外, 以徹此冤, 而揆分惶蹙有所不敢矣。玆値法駕之出郊, 敢又相率叫呼於輦路之左, 迎虞哀遑之中, 非不知瀆擾之爲死罪, 而失此一着, 則窮天極地之冤, 終無登徹之路, 不得不冒昧至此, 眞所謂窮猿不擇林, 困鳥不擇聲者也。伏惟聖明, 竝垂矜察焉, 臣等無任云云。答曰, 省疏具悉。我國本以偏小, 用人亦甚不廣, 予竊慨然矣。天人一也, 日月所照, 旣不擇於精粗, 則王子用人, 豈有間於其中哉 今觀爾等之疏, 所引有據, 而但玆事其來已久, 不可卒變, 其在愼重之道, 唯當徐究而處之矣。至於三曹郞事, 其令該曹依仁廟。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