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공자(孔子)

야촌(1) 2012. 6. 20. 21:31

공자(孔子,BC 551~BC 479) - 노(魯) 나라의 유가 및 사상가

 

 

제자백가 중 유가(儒家)의 시조(始祖).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리잡고 정치를 담당하였지만, 실권자와 충돌한 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자기의 사상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뜻을 얻지 못하자 만년에는 노나라에서 제자 교육과 고전 편찬에 종사하였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공헌은 최초의 민간사상가로서 주대(周代)의 관학(官學)으로부터 학문을 해방하고, 처음으로 사학(私學)을 창시하여 중국사상사의 기초를 이룬 점과 동시에 그후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사상이 된 유교의 골격을 쌓은 점에 있다.


 공자(孔子)가 태어난 춘추 말기는 정권이 밑으로 옮겨가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의 신흥계급이 출현하여 힘을 내세우고 씨족 적 혈연사회와 그 예제(禮制)가 붕괴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씨족귀족이 그 지위를 지키기가 곤란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예(禮)의 질서, 씨족귀족 중심의 질서의 붕괴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 해답은 '덕'에 기초한 정치, '인'에 바탕을 둔 위정자의 자기개조였다. 


 이러한 변동기에 종래의 지배자인 군주가 법률과 형벌만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백성은 그것을 빠져나가 부끄러움(恥)을 모르게 되고 점점 종래의 질서를 혼란시키기 때문에 군주는 '덕'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덕이란 '인'으로서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이겨 예(禮)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 '인'의 수양법으로 주목되는 것은 예(禮)가 '극기'의 규범이 되고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점이다.

 

'예(禮)'는 주대의 씨족귀족 지배하의 혈연적 신분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제도였지만, 그것이 형식화되고 붕괴된 춘추 말기에 공자는 '예'(禮)를 '인'(仁)과 관련시켜 규범화하고 군주에게 내재화시켜 예를 국가사회 질서의 계속적인 기본원리로 존속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인'은 '예'에 의해 깊이 규정되어 그 밑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의 성격은 '군자소인(君子小人)론'에서 보다 명확히 밝혀졌다. 즉 공자는 '인'을 체득하여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군자'뿐이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소인'은 '인'과 무관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인'이 '예'의 질서를 규범으로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논리였다.

 

그렇다고 공자가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소인'계급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 대부분은 바로 이 계급 출신자로서, 공자는 이들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그는 생산기술의 습득은 '소인'의 일이라 하여 거부하고 과거의 지식 및 주대의 '시서예악'(詩書禮樂)에 대한 학습만을 강조하였다.

 

공자의 입장은 결국 씨족귀족 계급과 농ㆍ공ㆍ상 신흥계급의 대립이 격화되는 시대에 있어서, 전자에게는 인에 의한 자기개조를 요구하고 후자에게서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면서 씨족귀족의 입장에서 모순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개량주의였다.

 

'애'(愛)라는 보편적인 덕목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면서 '예'(禮)에 규정되어 '군자'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인'의 사상적 모순은 이러한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논어』 20편은 제자들이 편찬한 공자의 언행록이다.

 

 

■공자 연보(孔子年譜)

연대 나이                                              내       력
BC 551 出生 魯襄公 22년, 周23代 靈王 21년) 魯나라 추읍 창평 곡량전(穀梁傳)에서 태어남(周曆 10월 2일, 양력 9월 28일生)
BC 549 3歲 魯양공 24년, 父親 숙량흘(叔梁紇) 별세, 防山에 장사. 母親이 공자를 업고 취푸[曲阜]로 이거함.
BC 546 6歲 魯양공 27년, 모친의 교육으로 배우기를 좋아하게 되며, 祭器를 갖추고 예의를 연습.
BC 543 9歲 魯양공 30년, 子産이 執政 鄭나라를 크게 다스림. 뒤에 공자가 이를 높이 평가함.
BC 542 10歲 魯양공 31년, 노나라 왕 애공(哀公)이 사망, 소공(昭公)이 계승.
BC 540 12歲 魯소공 2년, 晉나라의 韓宣子가 노나라 文物의 풍부함에 감탄『周禮』가 모두 魯나라에 있다 함.
BC 537 15歲 魯소공 5년, 학문에 뜻을 세움.
BC 535 17歲 魯소공 7년, 어머니 안징재(顔徵在)께서 별세.
BC 533 19歲 魯소공 9년, 宋나라 기관씨(丌官氏)에게 장가를 듬.
BC 532 20歲 魯소공 10년, 아들을 낳으니 왕이 축하 선물로 잉어를 보내어, 아들의 이름을 ‘이(鯉)’라 함(字는 伯魚). 위리(委吏)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감.
BC 531 21歲 魯소공 11년, 벼슬이 ‘승전(乘田)’으로 전임됨.
BC 525 27歲 魯소공 17년, 來朝한 담나라(산동 담성 서쪽)의 侯 담자에게  故事를 배움.
BC 522 30歲 魯소공 20년, 自立(三十而立)해서 弟子를 양성하기 시작.
BC 521 31歲 魯소공 21년, 齊나라 경공(景公)과 안영(晏嬰)이 함께 와서 정치를 물음.
BC 520 32歲 魯소공 22년, 4월 周경왕이 사망, 탁(卓)왕이 계승하였으나 王子 ‘朝’의 반란으로 피살. 晉나라가 王子 ‘朝’를 축출하고 敬王을 세움.
BC 518 34歲 魯소공 24년, 南宮适과 周에 가서 노담[老聃=老子]에게 禮를 물음.
BC 517 35歲 魯소공 25년, 노나라가 혼란하여 齊나라로 가는 도중 泰山 부근에서  ‘가혹한 정사가 범보다 무섭다’고 개탄 함.
BC 516 36歲 魯소공 26년, 齊 경공이 정사를 묻자 ‘君君臣臣 父父子子’라고 답변 함. 소악(韶樂)을 듣고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다 함.
BC 515 37歲 魯소공 27년, 경공이 품구(稟丘)의 邑을 제공하려 하자 魯나라로 돌아옴.
BC 512 40歲 魯소공 30년, 사물의 이치에 흔들리지 아니함[사십능불혹(四十而不惑].
BC 510 42歲 魯소공 32년, 겨울에 노소공(魯昭公, 재위: BC541년 ~ BC510년) 사망, 季孫氏가 소공의 동생인 公子 ‘宋’을 즉위시킴.
BC 509 43歲 魯定公 元年, 여름 소공의 靈柩가 晉나라에서 돌아와 장사, 정공(定公)이 즉위.
BC 507 45歲 魯정공 3년, 주(邾)나라 莊公이 별세하고, 隱公이 즉위하게 됨에 그 戴冠式의  禮를 공자에게 와서 묻다.
BC 506 46歲 魯정공 4년, 노환공(魯桓公=제15대 君主)의 묘를 참관, 제기를 관찰함.
BC 505 47歲 魯정공 5년, 陽虎가 뵙기를 청했으나 보지 않음.
BC 504 48歲 魯정공 6년, 陽虎의 책동으로 노나라가 鄭나라를 침범함.
BC 502 50歲 魯정공 8년, 天命을 앎(五十而知天命). 陽虎가 季孫氏를 살해 하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일으킴. 공산불요(公山不擾)가 孔子를 초청하였으나  제자들의 반대로 가지 않음.
BC 501 51歲 魯정공 9년, 中部의 재상(宰相)으로 임명됨. 6월에 노나라에서 양호를 정벌하자 양호가 齊와 宋을 거쳐 晉에 도피함.
BC 500 52歲 魯정공 10년, 中部에서 승진 宰에서 司空(정1품의 명예관직)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형조판서)가 됨. 여름에 齊나라 會盟 협곡에서 定公을 수행하여 齊가 魯의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저지 시킴.
BC 498 54歲 국가 행정정립을 위하여 三都를 함락시킬 것을 건의, 二城을 함락시켰으나 盟孫氏의 반대로 城邑 함락에 실패함.
BC 497 55歲 魯정공 13년, 송사를 잘 처리 함. 소정 묘를 사형, 정사의 기강을 바로잡음.魯나라가 잘 다스려 지자 齊나라에서 80명의 女樂을 보내어 정공을 유혹하자 정공이 女色과 樂에 빠져 政事에 개으르자 실망, 관직을 버리고 제자들과 함께 魯나라를 떠나 衛나라로 감, 이로써 周遊  天下 生活이 시작됨. 衛를 떠나 陳나라로 가는 도중 ‘匡’ 땅에서 오해 받아 5일 동안 고초를 겪음. 다시 衛나라로 돌아 옴.
BC 495 57歲 魯정공 15년, 정공 사망, 哀公이 승계.
BC 493 59歲 노애공(魯哀公) 2년, 위(衛)나라를 떠나 晉나라로 가는 도중, 黃河 부근에서 조간자(趙簡子)가 賢人 두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衛나라로 돌아옴. 뒤에 다시 衛나라를 떠나 宋나라로 가는 도중, 司馬桓魋의 박해를 받고 다시 鄭나라로 갔다가 陳나라로 감. 衛靈公이 사망 그 뒤를 이어 出公이 즉위 함.
BC 492 60歲 魯애공 3년, 듣는 말을 다 이해함(六十而耳順).
BC 489 63歲 魯애공 6년, 吳나라가 陳나라를 침략하여 크게 혼란하자 陳나라를 떠나 蔡를 경유 부함(負函)으로 가는 도중 길이 막혀 7일간 굶주림. 부함에 당도하여 섭공(葉公)이 禮로써 대우하다.
초(楚)나라의 소공(昭公)이 孔子를 重用하려 하였으나 간신배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음.
BC 488 64歲 노애공(魯哀公) 7년, 부함(負函)을 떠나 衛나라로 돌아 옴.
BC 487 63歲 魯애공 8년, 3월에 吳나라가 魯나라를 침범했으나 크게 패함, 이 전쟁에 弟子 유약(有若)이 큰 공을 세움.
BC 485 67歲 魯애공 10년, 부인 기관씨(丌官氏) 별세함.
BC 484 68歲 魯애공 11년, 봄에 齊나라가 魯나라를 침범하자 弟子 염유(冉有)가  우군을 통솔하여 승리함.
季康子가 폐백(幣帛)을 보내어 초청하니 13년간의 유세(遊說)를 끝내고 魯나라에 돌아 옴.
BC 483 69歲 魯애공 12년, 아들 FL(鯉) 사망.
BC 482 70歲 魯애공 13년, 모든 마음에 하고자 함을 따라 하여도 어긋남이 없음. 종심 소욕불유구(從心 所欲不踰矩).
BC 481 71歲 魯애공 14년, 『春秋』를 지음. 弟子 안회(顔回)가 죽자 몹시 애통함.
BC 480 72歲 魯애공 15년, 衛나라에 정변으로 제자 子路가 죽음.
BC 479 73歲 魯애공 16년, 周曆 4月 11日. 夏曆 2月 11日, 陽曆 4月 18日. 孔子 別世, 魯나라 哀公이 祭文에서 ‘니부(尼父)’라 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