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맹경『姜孟卿, 1410年(太宗 10)∼1461年(世祖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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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강맹경 묘비명 병서( 文景公姜孟卿墓碑銘 幷序)
신숙주(申叔舟) 찬(撰)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대대로 명덕(名德)이 있고 높은 벼슬이 서로 잇닿았는데, 강시(姜蓍)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문하찬성(門下贊成)이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공목(恭穆)이다.
강시가 강회백(姜淮伯)을 낳으니 아조(我朝)에 들어와 벼슬하여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추증되었으며, 강회백이 강우덕(姜友德)을 낳으니 공(公)에게 고(考)가 되는데, 벼슬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에 이르렀고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추증되니, 모두 공으로 해서 증직이 있게 된 것이다.
비(妣)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로서 재령(載寧)의 세가(世家)이며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惠)의 딸이다. 경인년(庚寅年, 1410년 태종 10년) 2월 기미일(己未日)에 공을 낳으니 휘(諱)는 맹경(孟卿)이요 자(字)는 자장(子章)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능히 책을 읽어 글을 지었는데, 나이 17세에 생진시(生進試)에 입격하였고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곧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를 보좌하다가 돌아와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의정부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나아가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실적이 있어 조정 안의 천망(薦望)에 모두 공을 첫째로 꼽았다.
또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므로 논의가 명쾌 유창하고 사려가 정밀 민첩하여 늘 기무(機務)가 구름 모이듯 하였으나, 성색(聲色)이 동요됨 없이 여유 있는 자세로 처리하니, 사람들은 모두 삼공(三公,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도승지(都承旨)를 제수하기에 미쳐 문종(文宗)이 군신(群臣)들을 버리고 승하(昇遐)하였으니, 임금(단종)이 어리어 권간(權姦)들이 명에 따르지 않았는데, 공은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공정하게 처리하고 시세(時勢)에 위축되지 아니하니, 그들이 여러 번 공을 모함하려 하였으나 끝내는 어쩌지 못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 여름에 병으로 나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집에서 병을 치료하였는데, 이해 겨울에 주상(세조를 말함)께서 정난(靖難)을 할 때 늘 밀서(密書)로 왕래하였으므로 아는 자가 없었다.
주상께서 즉위하자 공을 수충 경절 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에 책훈(策勳)하였고 여러 번 승진하여 의정부의 참찬(參贊)ㆍ찬성(贊成)ㆍ우의정(右議政)ㆍ좌의정(左議政)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정부(政府)에 있은 지 40년에 마침 주상께서 새 정사(政事)를 펴는 초기를 맞이하여 모든 조치를 공이 건의한 바가 많았는데, 차분하고 너그럽고 엄격하고 정중하여 대신(大臣)의 체통이 있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데다 의절과 법도에 밝아 빈례(賓禮)나 제례(祭禮) 등 큰 의식이 있을 적마다 주상께서는 반드시 공에게 찬(贊)이나 빈(儐)을 시켰는데 끝까지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 가을에 수중다리병을 앓기 시작하여 병이 악화되자 주상께서 내의(內醫)에게 명해 치료케 하여 나았는데, 주상께서 기뻐서 특별히 의원(醫員) 전순의(全順義)와 공의 아들ㆍ사위에게 벼슬 1급(級)씩을 승진시켰다.
다음 해 봄에 이르러 수중다리병이 재발하자 주상께서 또 내의 두어 사람에게 명하여 시질(侍疾)케 하였고 중사(中使)가 왕래하며 매일 증후를 아뢰게 하였으며, 약의 사용에 주상께서 몸소 약방문을 상고하여 결정하였다.
그러나 천명(天命)이 장차 다하게 되어 병세가 점점 위중해지자, 4월 을유일(乙酉日)에 공은 자제를 불러놓고 말하기를, “나는 인사(人事)에 있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만 늙은 어버이가 계시니 이점이 한이다.”하고, 인하여 상제(喪制)는 일체 ≪가례(家禮)≫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그 이틀 뒤 정해일(丁亥日)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였다.
공은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대부인(大夫人)이 진주(晉州)의 옛 집에 계시므로 서울로 모셔다가 봉양하려고 하였으나 연세가 높아 고향에 편히 여기는 뜻에 어긋날까 걱정하여 여러 번 고향으로 돌아가 봉양할 것을 아뢰었는데, 주상께서는 들어주지 아니하고 특별히 한 해에 한 번 돌아가 근친(覲親)하도록 윤허하였다.
그리고 돌아갈 때마다 임금이 몸소 전송하며 신물(贐物)을 후히 내려 대부인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또 소재지(所在地)에 명을 내려 사연(賜宴)토록 하여 향리(鄕里)에서 돋보이게 하니, 온 세상이 영예롭게 여겼다.
수중다리병이 처음 나았을 때에 자제에게 경계(警戒)하여 이르기를, “나는 아마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께 나의 병을 말씀드리지 말라. 내가 죽은 뒤에나 말씀드려라. 내 병을 걱정하시고 또 나의 죽음을 슬퍼하시게 하여 나의 노모(老母)로 하여금 거듭 괴롭게 해드릴 수 있겠느냐? 아, 애달프다.”하였다.
공은 고(故) 상호군(上護軍) 윤수미(尹須彌)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영천 군부인(榮川郡夫人)에 봉(封)해졌으며 파평(坡平)의 명망 있는 종족이다. 부인이 1남 2녀를 낳으니, 아들 강윤범(姜允範)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고 진사(進士) 정계우(鄭繼禹)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장녀는 옹진 현령(瓮津縣令) 남희(南暿)에게 출가하여 공보다 앞서 죽었고, 차녀는 호군(護軍) 박수장(朴壽長)에게 출가하였다. 강윤범이 장사를 치르고 나서 신도(神道)에 기록하려고 하면서, 내가 소속된 적(籍)이 같고 교유(交遊) 또한 오래이며 묘당(廟堂)에서 같이 일을 하였으므로 공을 가장 많이 안다 하여 찾아와 명(銘)을 청하는데, 아! 슬프다.
내가 차마 공의 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공이 졸하였을 때 나는 분황1)(焚黃)을 위해 나주(羅州)에 있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감사와 수령(守令), 남주(南州)의 여러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즐기는데, 부음(訃音)이 이르러 만좌(滿座)가 눈물을 흘리며 술자리를 파하였고 고을의 노유(老幼)들까지도 슬퍼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니 주상께서 대내(大內)로 인견(引見)하고 먼저 공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지없이 애통해 하였으니, 돌봄이 융숭하고 아낌이 이와 같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아! 차마 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시 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진산(晉山)은 우뚝하니 높다랗고 진수(晉水)는 깊고도 넓다랗네. 상(祥)과 길(吉)을 싹틔우고 길러 강문(姜門)에 아름다움을 발하였네. 이에 현철(賢哲)이 태어나 이 동방(東方)을 돌보았네. 손으로 태양(太陽)을 내리쳐 우리 백성을 제도(濟度)하였네.
임금과 도(道)가 합했으나 늙은 어머니 살아 계신데, 하늘이 주석(柱石) 같은 신하 끼고 있어 슬픈 눈물 방울방울 떨어지네. 명(銘)을 짓고 사실을 기록하여 길이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여 영원토록 의탁함이 있어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원키를.
각주
1) 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경우 교지(敎旨)와 황색(黃色)의 부본(副本)을 내어 주어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에 이 사실을 고하고, 부본을 불사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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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문경공 강맹경 묘비명 병서(文景公 姜孟卿 墓碑銘 幷序)
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藝文館,春秋館,集賢殿,書雲館事, 世子師,晉山府院君, 贈諡文景姜公墓碑銘。
公胤知司諫允範。袖公手定歷官始末。求銘其墓。希孟 謹按。公諱孟卿。字某。曾祖恭穆公蓍。仕高麗。官至判門下贊成事。祖淮伯。仕高麗。官至政堂文學。入 國朝。爲東北面都巡問使。後以公勳。 贈右贊成。考友德。知昌寧縣事。後以公勳。 贈右議政。母李氏。知甫州事李蕙之女。以庚寅某月生公。公少有器宇。異於凡兒。李氏性有法度。敎以義方。歲丙午。年十七。中監試。己酉。年二十。許思文榜登第。入翰林。未幾。授承政院注書。甲寅。屢授司憲察監。俄拜忠淸道都事。至今有遺譽。乙卯。累授吏曹佐郞。戊午。累授奉常判官。帶議政府檢詳。己未。丁內艱。執喪盡禮。服闋。辛酉。拜吏曹正郞。復帶檢詳。癸亥。拜議政府舍人。庚午。累授司憲執義。尋以言事。遷禮賓寺尹。自是凡六除。而拜承政院同副承旨。知刑曹事。公 啓獄事。情法得宜。累遷至都承旨。時 文宗賓天。國勢疑危。公摠管機密。周旋鎭定。中外倚以爲重。壬申。以疾辭。遞拜吏曹參判。階加嘉善。甲戌。拜判漢城。階資憲。俄拜參贊議政府事。尋陞左參贊。階正憲。時宗室瑜,瓔。潛搆亂。公與政府大臣。密謀除之。乙亥。 上卽位。命公兼判禮曹事。階崇政。 上一日。語公曰。卿爲世子賓客。宜善導之。勿使驕奢。公對曰。古人云。由奢入儉難。由儉入奢易。苟毋忘此意。則無此憂矣。 上稱善。九月。策公佐翼功臣爲二等。封晉山君。丙子二月。階崇祿。十月拜左贊成。丁丑二月。進 世子貳師。尋拜右議政。以賀登極使赴京。 賚與加等。戊寅二月。 上幸公第。御于楹前榻上。仰視屋宇曰。急改蠹楹。恐傷人也。首相之第如此。玆不美乎。讓寧見堂前瓦罌數事。 啓曰。此間得無有瓜子金乎。 上曰。審知此家素無瓜子金也。後於 大內。引見公。 上與中宮。論公不營產業。夫人儉素。曰。政丞何恬淡至此耶。公對曰。優蒙聖恩。土田臧獲。無不如意。更何所望。 上善其對。己卯二月。公以母老思歸養。 上聞之。卽差公弟叔卿爲密陽府使歸養。一日。公啓曰。臣備位首相。縱無異能。但謹守法度。願無紛更耳。 上深許之。仍寫賜御製一絶以褒之。是月。 上又臨公第。 天語丁寧。恩幸無比。翼日。上表陳謝。六月。公以久兩。上書請免。上批其尾曰。予與卿同體贊化。卿若退步。予何進步。時 上議送倭島符驗便否。公曰。倭人本非我度內。但我以誠撫之耳。彼之詐僞。安能一禁。議遂寢。 上於後苑。開田水種稻。 命工繪圖。 令羣臣製詩。公詩曰。周家基業永流傳。無逸邠風掛眼前。那似當今後苑裏。爲看民事早開田。時稱得體。十一月。拜領議政。 上賜政府大臣宴於便殿南廊。仍 賜樂。公曰。密近 大內。只可飮酒耳。擧樂太康也。 上以敢拒君賜爲不恭。卽命罷相。居十日而復相。庚辰三月。帝使張寧到國。 上特命公爲引禮使。寧觀公秉禮。曁還。語譯者曰。姜宰相眞老實臣也。宜爲首相。主賢臣良。國有何事。公嘗患腫幾危。 上命內醫治療。一鍼一藥。皆稟 睿斷。及愈。 上喜甚。加侍疾醫及子婿爵一級。尋以疾辭。 不允。防納之禁旣開。謀利者嗾守令。民所易備者。抑勒收價。民甚苦之。公極陳其弊。上命公草諭書。聽民自便。三月。前疾復作。 上遣內醫視疾。中使候問者絡繹於道。四月十五日。病革。召子弟若曰。吾於人世事已極。我無所恨。但老母在堂耳。遺命襄事。一從家禮。務從儉約。越二日丁酉。卒。享年五十二。訃聞。 上震悼。輟朝三日。官庀葬事。太常易名曰文景。是年六月。葬于京畿楊根郡之某原。公天資粹美。襟度豁達。雅好儉素。不喜紛華。事母盡孝。與人接物。一以誠款。無所矯僞。居家。不事生產作業。當官。不矯矯而異。不潝潝而同。及其臨大事。决大疑。剖析肯綮。遊刃恢恢。若不經意。論定之後。文理密勿。節目詳明。牢不可破。名位已極。寵榮無前。而常自欿然。不以富貴有所移易。嗚呼。若公者。可謂大臣矣。配貞敬夫人尹氏。司諫須彌之女。生一男二女。男曰允範。知司諫院事。女長適判官南禧。先歿。次適判官朴壽長。知司諫。生一男。朴判官。生一女。皆幼。噫。希孟於丁丑春。謁公於東閣。公語希孟曰。姜氏之起於晉遠矣。世必有名卿。淸名儉德。仰之若不可及。然而勳名知遇。反不如吾。他日誄吾行者必汝也。於吾行。宜審之。希孟對曰。胡耇之年尙遠。何遽有是命耶。公曰。計吾羣弟。知我者莫詳於汝也。希孟退而未嘗不恠於心也。噫。聞命之日幾何。求誄之言。及吾耳耶。揮涕謹銘。以寫一哀。銘曰。
溥彼晉原。有姓曰姜。恭穆承家。文敬發祥。蟬聯六代。釰佩鏘鏘。公興繼緖。能掩前光。遭際風雲。佐我明王。功銘鼎鼐。位冠巖廊。有德有位。順乎將相。我王曰咨。嘉乃忠良。卿無布被。純儉孔彰。益殫乃力。弼余時康。公贊大化。庶見豐穰。孰民不獲。公視如傷。孰賢不達。公則顯揚。秉勻五載。不愆不忘。山立揚休。紫綬金章。淊淊江漢。皓晧秋陽。紹天蓍龜。瑞世鳳凰。民望方深。天奪之忙。當宁興哀。一鑑云亡。里舂不相。悲泣遑遑。惟楊之原。玄室若堂。我銘匪私。靑史煌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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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맹경(姜孟卿)
강맹경『姜孟卿, 1410年(太宗 10)∼1461年(世祖 7)』은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晉州. 字는 子章이다. 高祖는 高麗 때 政堂文學을 지낸 姜君寶이며, 曾祖는 高麗에서 門下贊成事를 지낸 恭穆公 강시(姜蓍)이며, 할아버지는 東北面都巡問使를 지내고 議政府右贊成에 贈職된 姜淮伯이고, 아버지는 朝散大夫 知昌寧縣事를 지내고 議政府左議政에 贈職된 姜友德이며, 어머니 貞敬夫人 李氏는 知甫州事를 지낸 이혜(李蕙)의 딸 載寧李氏이고, 夫人은 榮川郡夫人에 封해진 坡平尹氏로 上護軍을 지낸 윤수미(尹須彌)의 딸이다.
1426年(世宗 8)에 進士試에 合格하고, 1429年(世宗 11) 重試文科에 丙科로 及第, 舍人, 知承文院事, 執義를 지냈다. 1451年(文宗 1) 右副承旨에 任命되고, 이듬해 都承旨가 되었다. 1453年(端宗 1) 吏曹參判으로서 癸酉靖難에 首陽大君을 도왔고, 뒤이어 藝文館提學, 議政府右參贊을 歷任하였다.
1455年 首陽大君이 端宗의 王位를 受禪(禪讓으로 받음)하는 일에 協力한 功으로 佐翼功臣 二等에 책록되고 晉山府院君에 封해졌다. 1456年(世祖 2) 左贊成을 거쳐 1457年(世祖 3) 右議政에 오르고, 賀登極使가 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1458年(世祖 4) 左議政을 거쳐 이듬해 領議政에 올랐다. 諡號는 文景이다. 1994年 12月 24日 京畿道記念物 第154號로 指定된 楊平新福里姜孟卿墓域은 京畿道 楊平郡 玉泉面 新福里 山 301番地 墨枝山 國師峰 아래의 언덕에 位置해 있다.
墓域 右側에는 1462年(世祖 8) 壬午年 5月 아들 姜允範에 의해 세워진 姜孟卿의 神道碑가 팔각지붕 形態로 正面 1칸, 側面 1칸의 碑閣 안에 安置되어 있다. 臺座위에 碑身을 세우고 花冠石을 갖추었으며 모두 하나의 花崗巖으로 만들어졌다.
碑文은 磨耗가 심하여 判讀이 不可能하다. 碑文의 撰者는 文忠公 希賢堂 泛翁 申叔舟이며, 書者는 黃海道監察使와 仁壽府尹을 지낸 仁齎 姜希顔이다. 碑文에는 먼저 姜孟卿의 血統과 祖上의 業績에 대해 簡略히 言及한 뒤 그의 父母의 벼슬과 家族關係를 簡單히 밝혔다.
이어 姜孟卿의 生涯에 대해 敍述하였다. 그의 生涯에 대한 敍述은 크게 세 部分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學文과 業務의 能力이 뛰어나 政丞이 될 거라는 期待를 받던 벼슬살이의 前半部.
둘째, 癸酉靖難에 協助하여 世祖 卽位 後 功臣이 되어 領議政까지 오르며 世祖 初期 모든 國政을 竪立하고 榮華로웠던 時期.
셋째, 1460年(世祖 6) 가을 以後에 腫患이 發生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過程. 王이 直接 處方을 내렸으며 臨終時의 場面과 關聯하여 그가 平素에 老母에 대한 孝誠이 깊었던 事實을 말하였다.
後半部에는 그의 夫人과 子息들에 대해 簡略히 整理하고 그의 아들이 自身에게 碑銘을 付託한 事實과 自身의 姜孟卿의 訃音 받던 當時를 追憶하였다. 銘은 主로 晉州姜氏의 血統과 姜孟卿이 朝廷에 忠情을, 老母에게 孝道를 다했음을 言及하였다.
舊 神道碑 앞에는 龜趺위에 烏石의 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갖춘 새로 세운 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1995年 5月 二友製冊社 姜?鶴 社長이 先考(諱 興遠)의 遺志를 繼承 全額負擔으로 原碑文 拓本하여 새로 새겨 세웠다.
神道碑에는 『佐翼功臣領議政晋山府院君謚文景姜公諱孟卿墓神道碑』라 記錄되어 있다. 墓所에는 配位 坡平尹氏와 雙墳으로 造成되어 있다. 各各의 封墳 앞에는 烏石의 碑身을 세운 碑座圭首 形態의 墓表가 세워져 있다.
2002年 6月에 建立된 墓表 前面에는 『輸忠勁節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藝文春秋館書雲觀事 世子師晋山府院君贈謚文景姜公孟卿之墓』와 『榮川郡夫人貞敬夫人坡平尹氏之墓』라 記錄되어 있다.
封墳 앞에는 魂遊石, 床石, 長臺石 等이 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文人石이 建立되어 있다. 또 中央에는 火窓이 4個인 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끝>
[참고사항]
문경공 강맹경(文景公 姜孟卿)의 부모 묘는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 배말골에 소재한다. 경기도 기념물 154호 양평신복리강맹경묘역 설명중, 묘지 바로 위쪽에 아버지 강우덕(姜友悳)과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의 합장묘로 추정되는 묘역이 있다. 라는 내용은 고증이 잘못된 내용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오류가 있으니 이것을 그대로 복사하여 옮긴 내용이 여려곳에서 발견되고 심지어 민족문화대백과에도 오류가 있다. 문경공 강맹경은 고향이 진주사람으로 부모의 묘소는 오늘날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 배만골(옛 반야동)에 잘 묘셔져 있다.
특히 어머니의 묘비는 1475년(성종 6)에 세웠다고 하는데 아직도 글자가 또렸하게 남아있어 재질이 아주 좋은 비로 유명하다. 어머니의 묘소아래 아버지묘소에는 직제학 류의손(柳義孫) 이 찬(撰)한 비가 있는데 비문은 강씨세고(姜氏世稿)에 기록되어 있으며, 어머니 비문의 원문은 어느 문헌에도 찾을수가 없다.
그러나 문경공 강맹경(文景公 姜孟卿)의 비 음기에 그의 종제(從弟=4촌동생)인 강희맹(姜希孟)이 기록해 두기를 고증좌의정휘우덕묘재진주반성반야동(考贈左議政諱友德墓在晉州班城班野洞)이라 하여 문경공(文景公)의 부모 묘는 진주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때 문경공(文景公)의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이다. 천순(天順) 6년인 임오년(1462, 세조 8)이다.
문경공(강맹경)의 모친 재령이씨의 묘비 사진이다.
↑영의정 강맹경(領議政 姜孟卿)의 어머니 정경부인 재령이씨 묘(貞敬夫人 載寧李氏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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