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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대통령 부모 묘비

야촌(1) 2014. 1. 4. 19:09

■ 춘산거사완산전공묘표(春山居士完山全公墓表)

 

초계안천(草溪安川)에 사는 전(全)씨에게 오형제가 있어 모두 빼어나고 효도와 우애의 가풍으로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휘(諱)는 상우(相祐). 자(字)는 국언(國彦)이요 스스로 춘산(春山)이라 호(號)를 삼은 사람은 그의 넷째 아들이다.

 

고종(高宗) 무술년(戊戌, 1898)에 태어나 향년 70세(1967)로 정미(丁未 陰2월 21일에 타계하여 합천 북쪽 봉대(烽坮) 아래 도리현 건원(道理峴乾原)에 안장하였고 그 후 12년이 지나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 할 적에 조카 맹환(孟煥)이 그의 사적을 적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全)씨의 선조는 환성군(歡城君) 섭(聶)에게서 나왔고 완산군(完山君) 충정공(忠貞公) 준(準)에 이르러 처음으로 완산(完山)을 본관으로 하였는데, 수찬(修撰) 벼슬을한 하민(夏民)이 처음으로 초계인이 되었다. 

 

조선조 임진왜란에 현감(縣監) 제(霽), 호(號)를 영수(英叟)라 하는 분이 있었는데, 왜적을 토벌하여 순절함으로써 호참(戶參-호조참판) 벼슬에 추증되니 이분이 중세의 저명한 선조이다. 

 

서계 중봉(西溪 中鳳)과 수산당 석주(水山堂 錫注)와 송파 영수(松坡 永洙)와 광주 노학수(光州 盧秀鶴) 이 분들은 삼세조와 외조이며 광산김씨 영욱(榮旭)의 따님은 그의 부인(夫人)이신데 그 생년은 같지만 전군(全君)이 가신 후 12년 무오(戊午, 1978) 3월 3일에 부좌(祔左) 합장을 하였고, 세 아들은 기환(基煥), 두환(斗煥), 경환(敬煥)이며, 네 딸은 김종태(金鍾泰), 허경달(許敬達), 이봉희(李鳳熙), 조석윤(曺錫潤)에게 출가하였고 손자로는 장방에 승규(承奎), 종규(宗奎)이며 둘째 손자로는 재국(宰國), 재용(宰龍), 재만(宰晩)이며 셋째 손자는 창규(昌奎)이며 손녀와 외손자는 모두 생략한다.

 

전군(全君)은 훤칠하고 아름다웠으며 풍모가 사람들과 잘 통하여 일을 주관하는 재능이 있었고, 어려서 학문을 할 적에 그 셋째형을 따라서 책상을 함께하며 공부에 힘을 써 학문이 매우 뛰어났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몸소 바깥일을 하면서 부모를 봉양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는데 힘쓰고, 중년에는 가난 때문에 동서로 옮겨 다니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재물을 조금 모아서는 사사로운 일을 경영하지 않고, 영수공(英叟公)의 묘비를 갖추지 못함을 걱정하여 특별히 힘을 다하여 이를 이루어 일가(一家)들로부터 추앙을 받은바 있다.

 

항시 아들과 조카들을 경계하여“가난이란 선비에게는 떳떳한 일이며 덕과 의를 가진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으니 어찌 가난을 슬퍼할 것이며 그 덕의를 닦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니 이것으로 그의 마음가짐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全君은 학문을 충분히 이루지 못하고 학업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마음가짐이 인(仁)으로 우선을 삼으니 참으로 한 집안의 법(法)을 전할 만하며 후인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며 이는 마땅히 묘소에 비석을 세워 후세에 보여야 할 것이다. 

 

[主記]

[註1]전하민(全夏民) : 재주와 行善이 세상에 으뜸 되고 일찍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弘文館 修撰에 이르렀다.

 

[註2]전제(全霽) : 1558(명종 13)~1597(선조 30), 號 영수(英叟), 전제는 어려서부터 기국이 준수하고 지용이 뛰

         어나며 학문여가로 무예를 습득하였다. 성품이 또한 청렴하고 맑아서 군자의 행실이 있었다.

 

        선조 24년(1591)에 무과(별시(別試乙科)에 올라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었는데, 임진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란과 정유재란 때 무공으로 이름을 드날리다 순절하였다.

 

※春山 全君은 전두환 前 대통령의 先考이신데 전두환대통령의 사촌형 전직환(全直煥) 공이 있어 추연 권용현

    (秋淵 權龍鉉) 문하에서 공부하였었고 당시 추연선생으로 부터 사랑과 촉망을 받았는데, 아깝게도 젊어 요절

     하여 추연선생은 물론 합천의 지역민들 슬픔이 매우 컸었다. 저서로 문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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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春山全君墓表(춘산전군묘표)

 

 

草溪安川之居全氏。近有五棣幷秀。孝友之風。稱鄕里者。而曰諱相祐。字國彦。自署以春山。其第四也。生以。高宗戊戌。享七十壽而卒于丁未二月二十一日。葬郡北烽坮下道理峴乾原。後十二年。將表于阡。其從子孟煥。述事請余文。謹按全氏之先。出歡城君聶而至完山君忠貞公準。始貫完山。至修撰夏民。始爲草溪人。國朝龍蛇之亂。有縣監。霽。號英叟。討賊殉節。贈戶參。是爲中世著祖。西溪 中鳳。水山堂 錫注。松坡 永洙。光州 盧秀鶴。是爲三世若外祖。光山金氏。榮旭女。其齊。而生與年同。卒後十二年戊午三月三日。其齊。葬祔左。三男 基煥。斗煥。敬煥。適金鍾泰。許敬達。李鳳熙。曺錫潤。孫男長房曰 承奎。宗奎。二房曰 宰國。宰庸。宰晩。三房曰 昌奎。女孫及外孫。幷略之。君秀偉美。風儀疏通。有幹局。幼而從學。嘗隨其第三兄。聯案共討。勤於力而頗有進就。旣因家貧。未能卒業。躬耕稼以養親。務盡其職。中歲以貧故。不免棲屑東西。而稍得財貲之拮据。則不以營私。而憂英叟。公大碑之未備。特辦力以成之。爲宗族所推服。常戒子姪曰貧者。士之常而德義人所以爲人也。豈可戚於貧而不憂其德義不修耶。此可以見其所存也。盖君學未充。業未著。而其存心之仁術先之。誠亦足以一家之貽謨而來後範也。是宜揭諸阡而示後也。

   

檀紀四阡三百十一年 戊午 五月

 

花山 權龍鉉 述(화산 권용현 술)

 

星州 李晉洛 書(성주 이진락 서)

 

[자료>秋淵文集]

 

 

↑전두환 대통령 부모 묘.묘역의 규묘가 별로 크지도  않고 호화롭지도 않은 그냥 보통사람들의 무덤 정도입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