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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묘비(六臣墓碑)

야촌(1) 2013. 11. 9. 01:06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비(六臣墓碑)

무자년(1708, 숙종 34)

 

藥泉 南九萬  撰

 

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충신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육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 각각 짧은 비갈에 박 씨 지 묘(朴氏之墓), 유 씨 지 묘(兪氏之墓), 이 씨 지 묘(李氏之墓), 성 씨 지 묘(成氏之墓), 성 씨 지 묘(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여섯 성씨 중에 네 개만 있고 두 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육신의 묘라고 전해온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성씨(成氏)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씨(河氏)의 묘는 영남(嶺南)의 선산(善山)에 있고 유씨(柳氏)의 묘만 유독 소재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육신이 죽을 적에 그 종족(宗族)이 망하여 없어져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서 묻었으나,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주선하였으니 형편상 어렵고 쉬움이 혹 차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혹은 고향에 시신을 모셔다 장례하기도 하고, 혹은 끝내 시신을 땅에 묻지 못했는가 보다.

 

또 듣자하니 총관의 묘소가 또 홍주(洪州)의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형벌을 받은 뒤에 지체(肢體)를 각각 하나씩 묻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한다. 만일 이 말이 과연 맞는다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 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비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에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육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은 자손들이 없고 오직 박씨만이 유복의 손자가 있어 이름이 노예에 뒤섞여서 수사(收司)를 면하였다.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충성을 가엾게 여겨 녹용하였다.

 

6세손 익찬(翊贊) 숭고(崇古)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노량진의 묘소는 비록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어 의심하고 있으나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있으니, 이것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찌 성씨만 있고 이름이 없다 하여 믿지 않고 돌보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옛 봉분을 더 쌓고 새 비갈을 세웠으며, 또 상공(相公) 허목(許穆)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이름하기를 ‘육신의총비문(六臣疑塚碑文)’이라 하였으나 미처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5년 기미에 성상이 노량진에서 열무하실 적에 여러 공경(公卿)들의 아룀을 따라 강 건너에서 묘를 바라보시고는 한탄하고 감회를 일으키시어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이에 분발되어서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향 하였다.

 

17년 신미에 상이 장릉(章陵)에 전알(展謁)하러 가실 적에 연(輦)이 묘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성상은 또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아, 이보다 전에는 이른바 육신의 묘라는 것이 다만 구릉의 한 줌 흙더미이고 부식된 한 조각의 빗돌이어서 강가의 늙은이와 나루터의 아전들이 오갈 적에 은밀히 이곳을 가리키며 말로 서로 전했었는데, 이제는 이 사실이 공경의 아룀에 올랐으며 성상이 두 번이나 보시고 융숭한 예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이미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으라는 은혜로운 명령이 있었고, 또 사우를 세워 제향하고 관직과 품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제사를 특별히 내려주고 화려한 편액을 밝게 게시하였다. 

 

조정에서 표창함이 이와 같이 빛나고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유허(遺墟)에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두어서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으로 하여금 황폐한 풀과 차가운 연기와 도깨비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가운데 길이 매몰되게 한다면, 당시 의사들이 봉분을 쌓고 비갈을 세운 고달픈 마음을 저버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성조(聖朝)에서 충신을 표창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기 드문 은전을 헛되게 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박공(朴公)의 영혼 또한 어찌 ‘내 다행히 남은 혈손(血孫)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숭고의 손자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경여(慶餘)가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여 이 일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도(神道)에 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늙고 혼몽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 노량의 묘소가 육신의 무덤이 됨은 믿을 만하고 의심할 수 없음이 참으로 그대 조고의 유의(遺意)와 같다. 

 

저 옛날 장릉의 지위와 칭호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히려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끝까지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육신에 대하여 흔쾌히 권장해 주어서 풍성(風聲)을 길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장릉을 복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노량의 묘소에 있어서만 유독 의심스러워 신빙할 수 없다 해서 단단한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옛날에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새로 드러냄을 이루어 지금에 밝혀서 장구한 후세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차례로 쓰고 명한다.

 

서호의 남쪽 강안에 / 西湖南岸

옹기종기 무덤 있는데 / 有墓纍纍

각각 표시한 글이 있어 / 各有其表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적혀 있네 / 五碣四氏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 傳道自古

육신이 묻힌 곳이라 하는데 / 六臣所閟

성씨는 여섯이나 / 其氏有六

이곳에 네 개만 갖추어졌네 / 此具其四

 

화가 일어나던 때에 / 禍發之際

의를 사모하여 묻은 것이니 / 事出慕義

그 이름을 쓰지 않음은 / 不書其名

까닭 있어서임을 아노라 / 知有所以

 

어이하여 후세 사람들은 / 云何後人

여기에 의심을 하는가 / 有疑于是

비록 문적이 없어서이나 / 雖緣無籍

실은 기휘함을 염려해서라오 / 實慮有忌

 

다행히 성조를 만나 / 幸會聖朝

성상의 마음에 감동함이 있으니 / 有感天意

충절을 표창함이 / 褒忠獎節

지극하지 않음이 없네 / 靡有不至

 

백일의 광채가 / 白日之光

깊은 땅속까지 통하여 / 洞徹九地

넓은 도량과 큰 은덕 / 曠度大德

형용하여 말할 수 없어라 / 不可擬議

 

옛날에 기휘하던 것 / 昔者所諱

이제는 모두 피함이 없다오 / 今悉無避

생각건대 차례로 표시한 글 / 言念列表

저와 같이 없어지지 않았고 / 不泐如彼

 

또 봉분하고 나무를 심어 / 又加封植

이와 같이 훌륭하니 / 其盛若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然疑

이제는 끝낼 수 있으리라 / 汔可已已

 

취금헌(醉琴軒)은 후손이 있어 / 醉琴有後

함께 육신(六臣)의 제사를 주관하네 / 並主六祀

전하여 육세에 이르러서 / 傳至六世

무너진 묘소를 수리하고 / 曾修墓圮

 

또 비문을 기술하였으나 / 且述碑文

아직도 곧바로 쓰지 못하였는데 / 猶靳直致

지난해에 이르러 / 爰及頃年

장릉을 복위하였다오. / 莊陵復位

 

무덤을 높여 새로 만든 듯하고 / 崇岡若新

여러 석물을 다 구비하니 / 象設咸備

군주와 신하는 일체인데 / 一體君臣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 事豈有異

 

이곳에 묻혀 있는 넋을 받듦은 / 奉玆降魄

더욱 의심할 것이 없도다. / 尤宜無貳

분명히 글을 새겨서 / 明言顯刻

천 년에 길이 보이노니 / 用視千禩

 

부디 영령들이여 / 庶幾英靈

끝까지 이곳에 모이소서 / 終焉此萃

이곳을 찾는이들 볼 것 있어 / 來者有觀

장차 흥기하리로다 / 亦將興起

 

[각주]

 

[주01]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 : 총관은 아버지인 성승(成勝), 승지는 그의 아들인 성삼문(成三問)을 가리킨다.

[주02]수사(收司) : 법을 맡은 기관에 체포됨을 이른다.

[주03]취금헌(醉琴軒) : 박팽년(朴彭年)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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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惟昔端宗大王之遜國也。忠臣烈士爲之效死前後者多。而南秋江孝溫作丙子六臣傳行世。故有言及遜國時事。人必以六臣稱焉。自京城迤南十里。越露梁津岸上。有五墓。各有短碣。表曰朴氏之墓兪氏之墓李氏之墓成氏之墓成氏之墓。而不書其名。此於六氏。有其四而無其二。然其居民相傳爲六臣墓者。其來已遠云。成墓之有二者。以摠管承旨父子倂命。河墓則在嶺南善山。柳墓則獨不聞所在。意者六臣之死也。其族夷矣。義故收以瘞之。冒禁周旋。勢不無難易之或異。是以或能歸骸於故鄕。亦或終不得掩土耶。且聞摠管墓又在洪州故鄕。或者曰刑禍之後。各藏其一體而然。如果信也。亦足令人釀淚於千秋矣。且此地成墓之有二。近古耆舊耳目相接。傳說可据。而不知何年有權貴人築莊江上。其近丘墓之有碑碣者悉去之。權貴人敗後。有人收拾舊碣於踣碎之餘。復豎之。然其未及復豎也。多有追瘞之塚間於其間。成氏一墓。混不可辨。且失其碣。故今之可認爲成墓者。只存其一。以此推之。當初四氏之葬也。河柳之墓。亦安知不在此中。而歲遠失處。或如成氏之一墓耶。嗚呼悲哉。六臣死時。子姓無遺類。唯朴氏有遺腹孫。混名隷人。得免收司。數世之後。朝廷始愍忠錄用。至六世孫翊贊崇古。以爲露梁之墓。雖以其無籍可攷爲疑。然而五碣四氏。此足爲徵。又豈可以有氏而無名。不信而不省也。遂增其舊封。易以新碣。且乞文於許相公穆。名之曰六臣疑塚碑文。而未及鑱石。今上之五年己未。上閱武露梁。因諸公卿陳白。隔江望墓。喟然有感。命封植其塋域。中外多士。作興於斯。就其墓旁。刱建祠宇。並享六臣。十七年辛未。上展謁章陵。輦過墓前。又命復官致祭。仍賜祠額曰愍節。嗚呼。前乎此則所謂六臣墓者。只是陂陁之抔土。剝蝕之片石。江翁津吏往來指點相傳之私說。至于今則事登於公卿之敷奏。禮隆於天矚之再及。旣有封植之恩命矣。又有祠宇之腏食矣。又有爵秩之復復矣。又有禋祀之特降矣。又有華扁之昭揭矣。朝家所以表章者光顯如此。而乃於其興哀之遺墟。猶置之疑信之間。使忠魂毅魄。長受其黮闇於荒草寒煙群憐衆啾之中。則不幾孤當時義士封土樹碣之苦心。又不幾虛今日聖朝表忠伸鬱之曠典耶。朴公之靈。亦豈肯曰余幸而有遺紹之血屬耶。崇古之孫淸安縣監慶餘。深以此爲懼。謀于諸長者。欲備紀玆事之始末。建碑于神道。來請銘于余。余以耄昏辭不獲。乃曰然。露梁墓之爲六臣藏。可信而不可疑。誠如而祖之遺意。而其在昔莊陵位號之未復也。猶有所忌諱。不敢索言。今則不但朝家於六臣。快賜奬勸。永樹風聲。莊陵之復。亦旣有年。今於露梁墓。獨不可以疑爲信。鑱堅紀實。祛舊晦而成新顯。晢當今而昭久遠乎。於是乎遂序其事而系之銘曰。

西湖南岸。有墓纍纍。各有其表。五碣四氏。傳道自古。六臣所閟。其氏有六。此具其四。禍發之際。事出慕義。不書其名。知有所以。云何後人。有疑于是。雖緣無籍。實慮有忌。幸會聖朝。有感天意。褒忠奬節。靡有不至。白日之光。洞徹九地。曠度大德。不可擬議。昔者所諱。今悉無避。言念列表。不泐如彼。又加封植。其盛若此。人之然疑。汔可己巳。醉琴有後。並主六祀。傳至六世。曾修墓圯。且述碑文。猶靳直致。爰及頃年。莊陵復位。崇岡若新。象設咸備。一體君臣。事豈有異。奉玆降魄。尤宜無貳。明言顯刻。用眎千禩。庶幾英靈。終焉此萃。<끝>

 

약천집 제19권>비(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