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순조대왕행장(純祖大王行狀)

야촌(1) 2013. 12. 28. 20:39

순조대왕행장(純祖大王行狀)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1834).

 

우의정 박종훈 찬(右議政朴宗薰 撰)

 

“순종 연덕 현도 경인 순희 문안무정현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의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공(玜)이며, 자(字)는 공보(公寶)인데,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아드님이다.

 

 

모 비(母妃)는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인데, 증 영의정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默)의 따님이다.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실지로 왕을 낳았는데 수빈은 증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따님이다.

 

왕은 정종(正宗) 14년 경술년(1790/001) 6월 18일 정묘(丁卯)에 창경궁(昌慶宮)의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 바야흐로 임신 중에 있을 적에 궁중의 사람들이 용꿈을 꾼 상서가 있었고 수빈의 몸에서 신채(神彩)가 밝게 발산되고 시선이 환히 빛나 보통 때와는 너무도 달랐으므로 이미 큰 경사가 있을 조짐임을 알았다.

 

탄생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오랜 장맛비가 갑자기 개면서 그림 같은 햇살이 환히 내리 비쳤고, 묘정(廟井)에는 무지개가 둘렸으며 상서로운 찬란한 오색빛깔이 궁중의 나무숲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서울의 남녀들이 달려가 축하하였다.

 

그날로 정종께서 효의왕후에게 명령하여 데려다 아들로 삼도록 하고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무럭무럭 자라고 용모가 준수(俊秀)하여 우뚝한 콧마루에 용의 얼굴을 하였고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이 정종(正宗)과 똑같았다. 정종께서 나와서 살펴보고 나서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이 아이의 복록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살 되던 해 동지(冬至)에 정종이 나이를 더 먹게 된 것을 기뻐하여 새 역서(曆書)를 하사하니, 왕이 품에 안겨있으면서 펴보다가 병풍의 큰 글자와 같은 글자가 있으면 번번이 지적하여 가리켰다. 어릴 때부터 총명이 특이한 것이 이와 같았다. 바야흐로 어린 나이 때부터 정종(正宗)께서 몽양(蒙養)을 엄격히 하여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상세히 가르쳤으며, 화려한 옷과 기름진 음식은 입과 몸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빈료(賓僚)는 반드시 단정한 선비를 엄선하여 훈도(薰陶)에 도움이 되게 하였는데, 항상 이르기를, ‘반드시 소원한 재야의 인사로서 연숙(軟熟)되지 않은 사람을 얻어야만 그제야 엄탄(嚴憚)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런 때문에 하늘이 낸 자질로 일취월장의 공효가 더욱 빨리 이루어졌다. 8세 때 사부(師傅)·유선(諭善)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강독(講讀)에 과정(課程)을 두게 되었는데, 여가에는 반드시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정종께서 독서의 과정을 더 부과하여 몸소 가르친 것이다.

 

경신년(1800, 정조 24/002) 봄 정월삭조(朔朝)에 왕세자에 책봉하였다. 정종께서 하교하기를, ‘원자(元子)가 이제 11세가 되었는데 책봉하는 예(禮)를 지금껏 미루어 온 것은 기다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경(易經)에는 간이(簡易)를 귀히 여기고 예기(禮記)에는 세 가지 선한 점이 있으며 또한 우리 현종(顯宗) 때의 고사(故事)도 있다.

 

그때 관례(冠禮)·책봉례(冊封禮)·가례(嘉禮)를 한해에 아울러 거행함으로써 천년만년토록 모유(謨猷)를 전해주어 후손을 편안하게 하여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에 우러러 준행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이어 관례 책봉 례와 함께 가례도 이해 안에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2월 을유일(乙酉日)에 집복헌(集福軒)에서 관례를 행하고 이어 이날 책봉 례도 행하였는데, 주선(周旋)하는 행동이 법규에 맞아 예의(禮儀)가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예(禮)를 끝내고 나서는 어가(御駕)를 모시고 묘궁(廟宮)에 알현하였는데 발을 걷도록 명하여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우러러 볼 수 있게 하였다. 왕은 마치 거인(巨人)처럼 우뚝이 앉아 있었으며 좌우를 돌아보는 것이 법도가 있어 여러 사람들이 서로 경하하여 마지않았다.

 

6월 기묘일(己卯日)에 정종이 승하(昇遐)하였으므로 왕이 7월 갑신일(甲申日)에 창덕궁(昌德宮)의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높여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삼고 왕비를 왕대비로 삼았으며 대왕대비가 수렴(垂簾)하고 같이 청정(廳政)하였으니, 국조(國朝)의 구전(舊典)을 적용한 것이다.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왕이 모두 대왕대비에게 여쭈어서 결단하였다.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문성무열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로, 묘호(廟號)를 정(正)이라 올렸다. 왕은 어린나이에 상례(喪禮)를 치렀지만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슬퍼하는 것이 중도(中道)에 지나쳤다.

 

군신(群臣)들이 진현(進見)할 적에 말이 선왕(先王)에게 언급되면 번번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슬픔을 억제하느라 실성(失聲)하게 되니 나라사람들이 이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였다. 11월 갑신일(甲申日)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을 건릉(健陵)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수원(水原)의 구치(舊治)에 있는 화산(花山)으로 곧 현릉원(顯陵園) 동쪽 제이강(第二岡)이다.

 

도감(都監)에서 쓰이는 모든 재용(財用)은 내탕(內帑)의 저축에서 지출하였으며, 신릉(新陵)의 향탄 위전(香炭位田)은 장용영(壯勇營)의 둔토(屯土)를 옮겨 획급(劃給)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모두 민력(民力)을 펴게 하 기위한 것이었다. 약원(藥院)에서 으레 분정(分定)하는 해물(海物)·진과(珍果) 등 상공(常貢)이 아닌 것은 영구히 제거하라고 명하였다. 이해에 정종(正宗)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았다.

 

신유년(1801, 순조 원년/004) 에 궁시(宮寺) 노비들의 세공 법(世貢法)을 파기시키고, 그 적안(籍案)을 가져다가 큰 거리에서 불에 태워버림으로써 소민(小民)들의 누적된 고질적인 억울함이 이제야 제거되었다.

 

여름에 화성부(華城府)에 화녕전(華寧殿)을 건립하고 선조(先祖)의 어진(御眞)을 유여택(維與宅)에서 이봉(移奉)하였는데 이는 우러러 의지하고 싶다는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다. 묘전(廟殿)의 의제(儀制)를 꾸밈에 있어서는 견고하고 박실(樸實)하게 하는 것을 법도로 삼으라고 하교했는데, 이는 선왕의 검소한 덕을 본받은 것이다.

 

이때에 서양교(西洋敎)라는 것이 북쪽에서 들어왔는데 일종의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몰래 서로 전습(傳習)하여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무시하고 임금을 버리고 부모를 등짐으로써 윤상(倫常)을 파괴시켰으며 백성들까지 유혹하였으므로, 드디어 속히 제거하게 하여 그 가운데 더욱 깊이 빠져든 자는 목을 베고 그 당여(黨與)들은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뉘우쳐 고친사람들은 용서하였다.

 

천토(天討)가 행하여지자 곧바로 깨끗이 쓸어 없애게 되었으며, 제도(諸道)에 명하여 항상 규찰하여 금단할 것은 물론 매달 그 상황을 등문(登聞)하는 것을 기록하여 법식으로 만들었다.

 

임술년(1802 순조 2년/005)에 장용영(壯勇營)을 혁파시키고 영의재용(財用)은 정순대비(貞純大妃)의 명에 의하여 모두 내탕(內帑)에 예속시키게 하자, 왕이 아뢰기를, ‘장용영을 이미 혁파하였으니 그 창고의 저축은 절로 출급(出給)할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내부(內府)에 유치시킬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제야 대비(大妃)께서 속히 처음에 내린 명을 정지시키게 하였고, 모든 치서(庤胥)는 일체대농(大農)으로 귀속시켰으며, 교리(校吏) 가운데 포부(逋負)를 낸 것은 모두 탕감시켰는데, 이는 모두 왕의 뜻이었다.

 

효원전(孝元殿)의 대상(大祥)·담제(禫祭)가 지나고 나자, 예(禮)로 제부(隮祔)하고 길체(吉禘)를 지냈다. 겨울 10월 갑인일(甲寅日)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증 영의정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며, 지금의 대왕대비이다.

 

간택(揀擇)하는 예(禮)는 이미 경신년(庚申年,1800, 정조 24) 봄에 행하였는데 선왕이 이미 명하였다. 대상(大喪)을 당하게 되자 임금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게 되었는데 적신(賊臣) 김귀주(金龜柱)의 여얼(餘孼)들이 때를 타고 사납게 날뛰면서 협박하고 옹폐(壅蔽)하였으며 적신권유(權裕)의 상소에 이르러 그 계획이 더욱 급박하여졌다.

 

그리하여 노신(老臣)의 충애(忠愛)라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발론하였고 삼간(三揀)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온 세상에 유행시켜 화(禍)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으므로 이런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가슴이 떨렸다. 다만 정순왕후께서 기미를 살펴 간사한 싹을 자르고 대강(大綱)을 극력부지하고서 혼례(婚禮)를 크게 거행하였으므로 종사(宗社)가 이를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다.

 

계해년(1803, 순조 3/006) 봄에 하교하기를, ‘아직도 부자(父子)(007) 의 묘궁(廟宮)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나의마음에 척연(惕然) 스러움을 금하지 못 하겠다’라고 하고, 알성례(謁聖禮)를 거행할 것을 명하니, 이것이 처음시학(視學)한 빛나는 전례(典禮)였다.

 

궁방(宮房)· 아문(衙門)에서 장토(庄土)에 대해 진고(陳告)하는 습관을 금하라고 명하였고, 수령으로서 암행어사의 서계(書啓)에 든 자와 전최(殿最)에서 하등(下等)을 받은 자는 이를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서 성열(省閱)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탐관오리를 폐고(廢錮)시키는 법을 거듭 엄중히 행하였다.

 

함흥(咸興)에 불이 나서 소실(燒失)된 민가(民家)가 1천호(戶)에 이르자 교리 홍석주(洪奭周)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교제창(交濟倉)의 곡식을 내어 진구(賑救)하였으며 호환(戶還: 환곡을 꾸어주는 일/008) 과 신역을 견감시키고 녹용(鹿茸)의 공납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단목(丹木)과 호초(胡椒)를 내려 주어 집을 지어 전접(奠接)시키는 자금으로 쓰게 하니, 백성들이 재해를 입은 것을 잊게 되었다.

 

가을에는 건원릉(健元陵/009) ·원릉(元陵)(010) 을 알현하였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봄·가을에 여러 능을 두루 알현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고(故) 상신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에 부조지전(不祧之典)(011)을 시행하게 하고 판 원을 보내어 도봉서원(道峰書院)·석실서원(石室書院)에 사제(賜祭)하였는데, 이는 연로(輦路)에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특별히 고려충신 정몽주(鄭夢周)에게 제사를 내렸다. 그해 겨울에 강화(江華)에 기근이 들자 또 내탕(內帑)의 저축을 내어 구제하여 주었다. 12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불이나자, 왕이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변변찮은 나 소자(小子)가 외람되어 서업(緖業)을 이어갈 책임을 이어받으므로 평상시 늘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진 짐을 견뎌내지 못하는 듯이 애써 왔는데, 이번에 회록(回菉=火神)(012) 이 경계를 고한 것이 즉위례(卽位禮)를 행한 곳에서 있었다.

 

이는 첫째도 나의 덕이 없는 것에 연유된 것이고, 둘째도 나의 덕이 없는 것에 연유된 것이니,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여 폄책(貶責)하는 뜻을 보이겠다.’라고 하였다. 이어 논사(論思)하고 간쟁(諫爭)하는 신하로 하여금 자신의 허물을 모두 진달하게 하였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철회하니 왕이 이에 직접 서정(庶政)을 총괄하였다.

 

갑자년(1804, 순조 4/013) 봄에 정순왕후에게 광헌(光獻) 이라는 존호(尊號)를 더 올리고 나서 군신(群臣)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평양(平壤) 성(城)안에 불이 나서 5천여 가호가 연소(延燒)되자 부호군 이상황(李相璜)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견휼(蠲恤)하는 것을 북관(北關)에서 한 것과 같이 하였다.

 

이어 숭령전(崇靈殿)·숭인전(崇仁殿)에 제사를 지냈는데 정아(正衙)의 중건(重建)을 늦출 수 없다는 것으로 재목을 베어다 쌓아 놓았었으나 재이(災異)를 만나 공역(工役)을 일으키는 것은 안 된다는 것으로 간하는 사람이 있자, 당장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겨울에 가서야 비로소 준공(竣工)이 되었고 그곳에 임어하여 하례를 받았다.

 

간신(諫臣) 박윤수(朴崙壽)가 역적 권유(權裕)의 죄를 바룰 것을 청하였는데, 권유의 신유년(1801, 순조 원년/014) 상소내용은 감히 화심(禍心)을 멋대로 부리어 지의(旨意)가 흉악하고 음험하였으며, 도인(都人) 윤(尹)·길(姞)의 곡돌사신(曲突徙薪/015) 이란 말은 곧바로 부도(不道)를 범한 것이어서 나라 사람들이 오래도록 통분스럽게 여겨 왔었다. 이때에 이르러 선왕(先王)의 뜻에 배치되게 대혼(大婚)을 저지시켰다는 것으로 극률(極律)을 적용하였다.

 

홍재민(洪在敏)이란 자는 주서(注書)로서 상소하여 정신(廷臣)이 자성(慈聖)의 뜻을 잘 대양(對揚)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의도가 이간시키기 위한 것임이 현저히 드러났으므로 왕이 깊이 통촉하여 엄중히 내쳤다. 대신(大臣) 이하가 목소리를 함께하여 베어 죽일 것을 청하니, 이에 하교하기를, ‘그의 죄를 논하자면 진실로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또한 그를 책망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는 곧 나의 정성이 남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하고 덕이 사람들을 감화시키지 못하여 일세(一世)의 사람들로 하여금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각각 지당한 의리가 있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홍재민 같은 자는 사리에 깜깜하여 스스로 빠진 것이니,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샘으로 기어들어간 것과 같으므로 딱하게 여길 수 있을지언정 노여워할 것은 아니다. 가르치지 않고 형벌을 쓰는 것은 성인(聖人)이 하지 않던 것이니,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마는 차마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경(卿) 등은 홍재민 한 사람을 토죄(討罪) 하기에 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들어와서 고하고 나아가서 말하는 즈음에 이를 천명(闡明)하고 발휘(發揮)하여 모르는 사람은 알게 하고 아는 사람은 따져 생각하게 하여 민지(民志)가 귀일되고 세도(世道)가 안정되게 한다면 군신 상하가 모두 화평스런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홍재민도 또한 장차 앞서의 견해가 사리에 어긋난 것임을 스스로 뉘우쳐 날마다 선한 데로 옮겨가기에 겨를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의리가 홍재민(洪在敏)을 토죄하는 것보다 만 배나 나을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고, 해도(海島)로 찬배하라고 명하였다.

 

고 유신(儒臣) 박재원(朴在源)이 무술년(1778, 정조 2/016)에 소장(疏章)을 올린 충절을 생각하여 벼슬과 시호를 추증(追贈)하고 정표(旌表)하였다. 을축년(1805,순조 5/017) 정월 정유일(丁酉日)에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훙서(薨逝)하였는데 이해가 바로 대비의 주갑(周甲)이었다.

 

이미 지난겨울에서부터 이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므로 존호(尊號)를 융인(隆仁) 이라고 올리고 나서 책보(冊寶)가 완성되자 예의(禮儀)를 갖추어 빈전(殯殿)에 올렸으니, 이는 생시를 본뜬 것이다. 휘호(徽號)는 소숙정헌(昭肅靖憲) 이라고 올리고, 시호(諡號)는 정순(貞純)이라고 하였다. 왕은 추모(追慕)하기를 그치지 않아 크고 작은 사향(祀饗)을 반드시 몸소 지냈는데 3년이 끝나도록 혹여 섭행(攝行)을 명한 적이 없었으며, 제수(祭需)는 재해를 입은 각 고을에는 분정(分定)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병인년(1806, 순조 6/018)에 김달순(金達淳)을 처음 상직(相職)에 임명하였는데,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을 포장(褒裝)하도록 청하니, 하교하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세초(洗草) 대상에 넣게 한 것은 선조(先祖)께서 앙청(仰請)하여 영조(英祖)께서 특별히 허락한 것으로, 이는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거론할 수 없는 일에 관한 문적(文蹟)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아버지·손자는 본래 한 몸인 것인데, 영조와 선조(先祖)께서 차마 볼 수도 거론할 수도 없었던 일에 대해 오늘날에 와서 포증(褒贈)을 시행한다면 죄를 얻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양조(兩朝)의 성의(聖意)를 저버리는 것이 될까 염려스럽다.’라고 하였다.

 

김달순이 또 소장을 진달하니, 왕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전편(全篇)의 내용이 음참(陰慘) 스러운데다 간언을 꺼린다고 한 말은 그것이 의당 어디에 속해야 하는 말인가?’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지킨 것에 미치지 못한 자도 이른바 용서 없이 죽인다는 것에 해당이 되고, 선왕이 지킨 것보다 지나치게 하는 자도 또한 이른바 용서 없이 죽인다는 것에 해당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국론(國論)이 들끓었으므로 드디어 법에 의하여 처리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심환지(沈煥之)의 죄악을 논하면서 그가 두 번에 걸쳐 진달한 내용 가운데 가장 패려스러운 것은 ‘강재(降在)’라는 구어(句語)인데, 이는 김달순의 ‘충애(忠愛)’라는 등등의 말에 부리를 두고, 역적 권유를 와굴(窩窟)로 삼아 흉역들을 비호하면서 군주(君主)와 모후(母后)는 안중에도 없이 날뛰었다는 것으로 그의 벼슬을 추삭(追削)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 김관주(金觀柱)가 권유의 옥사(獄事)를 분변하지 못하게 만들고 선왕을 무함한 죄를 바룰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처음 정종(正宗)께서 춘저(春邸)에 있을 적에 김귀주의 종숙(從叔)인 김한록(金漢錄)이란 자가 김귀주를 위하여 은밀히 사당(死黨)을 모집하여 장차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기 위해서 호인(胡寅)이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을 가지고 논한 일을 인용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패려스러웠다. 정종(正宗)께서 그 역절(逆節)을 통촉하였으나 일이 성궁(聖躬)에 관계된 것이므로 용서하고 묻지 않았다.

 

경신년(018) 이후의 여러 역적들은 모두 그 지류(支流)인데, 김관주(金觀柱)는 곧 김한록(金漢祿)의 아들이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김한록·김귀주에게 추율(追律)을 바루었으며, 역가(逆家)의 부녀(婦女)로서 연좌된 경우에는 그 집을 보수(保授)하게 한 다음 발배(發配)할 것이요 다시는 해부(該部)나 해청(該廳)에서 구수(拘囚)하는 예(例)를 쓰지 말 것을 영원히 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9월에는 천둥이 쳤다. 왕이 말하기를, ‘일음(一陰)과 일양(一暘)이 순서를 잃은 것도 오히려 당연히 공구 수성(恐懼修省)해야 하는 것인데 감히 9월과 10월은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3일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신서(臣庶)들로 하여금 임금의 잘못과 시정(時政)에 대해 숨김없이 모두 말하게 하였다.

 

정묘년(019) 에는 홍낙임(洪樂任)을 복관(復官)시키라고 명하였으니, 홍낙임은 곧 혜경궁(惠慶宮)의 아우이다. 일찍이 신유년(020) 에 있었던 사옥(邪獄)에 임사자(任事者)가 이를 빙자하여 죄에 얽어 넣어 죽였고, 아울러 폐종(廢宗)된 인(姻)과 인의 처 및 아들의 처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는데, 이는 왕의 뜻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자전(慈殿)의 춘추가 80을 바라보고 환후(患候)도 위중하였으므로 이에 특별히 사유하여 자심(慈心)을 위열(慰悅)시켰다.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이 졸(卒)하자 궐정(闕庭)에서 거애(擧哀)하고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묘도(墓道)를 빛나게 하였다.

 

강릉(江陵)에서 삼(蔘)을 공상(貢上)하기 위해 백성들을 다 몰아쳐 캐기를 권장하는 것이 폐단이 되고 있다는 이유로써 공상의 삼분의 일을 감하라고 명하고, 이어 엄중히 신칙시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였다. 이때 이경신(李敬臣)의 옥사가 있었는데 뿌리와 소굴이 드러나자 김종수(金鍾秀)가 거기에 귀결되었다. 

 

이제야 성토(聲討)가 일제히 발론되어 그 죄를 바룰 것을 청하니, 상신(相臣)의 차자(箚子)에 비답하기를, ‘오늘날 여러 역적들의 죄에 대해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지처(地處)는 척완(戚畹-임금의 내척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고 그들이 품고 있는 마음은 흉심(凶心)이므로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려는 계교를 도모하였으니 생각하면 뼛속이 저릴 정도이다. 막중한 지위를 향하여 무함한 정상은 말만 해도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다.

 

그 극본은 오로지 국가를 원수처럼 여겨 우리의 의리를 혼란시키려는 데 있었던 것이니 소굴은 김귀주·김한록이고, 근저도 김귀주·김한록이다. 세 가지 큰 죄의 단안(斷案)이 이미 이루어졌다.[三大罪之斷案已成]라는 여덟 글자로 말하면 흉심(凶心)이 더욱 명백히 드러난 것으로 역적 김한록이 아니면 김귀주의 흉모(凶謀)를 도울 수 없고, 역적 김귀주가 아니면 김한록의 역장(逆腸)을 창도할 수 없으니, 이들은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김종수. 이경신에 이르러서는 수미(首尾)가 서로 연결되고 혈맥이 서로 유통되어 있다. 선조(先朝)에게 망극한 은혜를 입은 김종수가 도리어 역적을 영호(營護)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무함을 한 정상이 저와 같으며 먼 지방의 서캐같이 미천한 역적 이경신이 또한 앞장서서 이를 전습(傳習)하여 흉악하고 패려스러운 말을 한 것이 저와 같았으니, 김귀주·김한록은 안이고 김종수는 겉인 것이며, 김종수는 부리이고 이경신은 가지인 것이다.

 

통분스럽기 그지없다. 한번 전환되고 두번 전환된 것이 따지고 보면 모두 전신(前身)이면서 후신(後身)인 것이다.’라고 하고, 이내 김종수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정향(庭享)에서 축출시키도록 명하였다.

 

무진년(021)에 내탕(內帑)의 면포가 부족하여 병조에서 50동(同)을 들여오게 하도록 명하였는데, 해조(該曹)의 판서(判書)가 소장을 올려 고법(古法)이 아니라고 아뢰니 왕은 비답을 내려 은혜롭게 포장(褒奬)하고 즉시 도로 내려 보내도록 명하고는, 한 필의 면포도 유중(留中)시키지 말게 하였다.

 

이에 앞서 사학(邪學)으로 인하여 북경(北京)에서 서책을 구입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유사(儒士)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기자 곧 명하여 경사(經史)와 순유(醇儒)의 문집(文集)은 구입을 허락하였으며, 기문(奇紋)의 필단(疋緞)을 금하는 것에 대해선 거듭 엄중히 신칙하였다.

 

대신(臺臣)의 진규(進規)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입지(立志)는 학문을 하는 핵심이 되는 것이고, 거경(居敬)은 이치를 밝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치를 밝히는 것은 내 마음의 거울인 것이고,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기는 것은 공자(孔子)의 심법(心法)인 것이다. 기강(紀綱)은 한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이고, 절용(節用)은 일신(一身)의 사치와 검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입지가 된 후에야 학문이 진보되고 덕업이 넓어져 거경(居敬)의 효험을 기대할 수가 있게 되고, 거경을 한 후에야 마음을 한군데로 집중시켜 뜻이 동요되지 않아서 극기(克己)의 공부를 기대할 수 있으며, 극기를 한 후에야 이제야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그 인(仁)에 참여하게 되어 중물(衆物)의 사심(私心)이 감히 공심(公心)을 이겨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강이 진작되고 진작되지 않는 것과 용도를 절약하고 절약하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는 다만 한번의 거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중물(衆物)의 표리와 정조(精組)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내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며, 한몸이 불선(不善)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가?’라고 하였다.

 

기사년(022) 정월 임오일(壬午日)에 혜경궁(惠慶宮)에게 치사(致詞)·전문(箋文)·표리(表裏)를 올리고, 이어 진찬(進饌)을 행하였는데, 이는 관례(冠禮)의 회갑(回甲)이 이해 이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종(正宗) 을묘년(023) 에 연희당(延禧堂)에서 진찬한 예(禮)를 계승해서 했는데, 이는 옛날의 효사(孝思)를 본받은 것이다. 함흥(咸興)의 민가(民家)가 또 화재를 당한 것이 수천 호에 이르렀으므로 승지 박종훈(朴鍾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게 하고 녹용(鹿茸)을 견감시키고 단목(丹木)을 반하 하는 것을 계해년(024) 과 같게 하였다.

 

팔도(八道)·사도(四都)의 도신(道臣)과 수신(守臣)들에게 하유하기를, ‘백성은 제왕에게는 하늘처럼 소중한 것이고, 곡식은 백성에게 하늘처럼 소중한 것이다.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곡식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춥고 배고픔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힘들고 괴로움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으며, 걱정과 탄식이 여리(閭吏)에서 많이 들리고 세금의 징수가 가난한 민가에 날로 가중되며, 뼈를 깎는 폐단을 지니고 있는데도 위에서는 이를 들을 길이 없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는데도 위로 통달될 수가 없다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될 수가 있겠는가?

 

과거 영종조(永宗朝)께서 5기(紀) 동안 태평을 누린 것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고 탐오(貪汚)를 징계하여 부지런히 주야로 힘쓴 데 있었던 것으로 그 성덕(聖德)과 대공(大功)은 사서(史書)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선조(先朝)의 인정(仁政)도 모두 백성을 사랑한 데서 나온 것으로 덕화(德化)와 기름진 은택이 팔방에 두루 미쳐서 억조창생의 우부 우부(愚夫愚婦)로 어느 한 사람 그 덕화와 기름진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었던 것은 또한 소자(小子)가 우러러 본 것이다.

 

또 우리 영종(英宗)께서는 수재(守宰)들로 하여금 백성의 고통에 대한 시[民隱詩]를 지어 올리게 하여 민폐(民弊)에 관계된 것을 제거하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선조(先朝)께서도 모든 백성의 곤고(困苦)에 관계된 것이 성총(聖聰)에 진달되면 즉시 제거하거나 줄이라고 명하였으며, 또 도백(道伯)과 수재(守宰)들을 신칙하여 서장(書狀)이나 책문(策文)으로 농무(農務)와 민정(民情)을 낱낱이 진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도 만백성의 고락을 힘들이지 않고 알 수 있었으니, 이는 나 소자(小子)가 매양 우러러 본받을 것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삼양(三陽)이 새로워져 만물이 모두 소생하지만 팔방 백성들의 우환(憂患)과 곤고(困苦)는 바로 이때에 극심한 것이니, 수령들은 민생의 곤고와 여리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상세히 그 이유를 진달토록 하라. 

 

그리고 또한 이를 구제할 수 있는 방도도 갖추어 도신(道臣)에게 올리되, 도신은 모두 거두어 모아서 두루 열람한 다음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을 뽑아서 구별하여 사리를 논한 뒤 이를 상문(上聞)토록 하라. 사도(四都)의 유수(留守)에 있어서는 직접 재정(裁定)하여 아룀으로써 백성들의 고락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직접 열람할 수 있게 하라.’라고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극심 하자 왕이 이에 직접 남단(南壇)에 나아가 비를 빌었는데 보여(步輿)를 타고 산개(繖盖)를 벗기고 몸소 축문(祝文)에 서압(署押)하고 재령(齋令)을 엄중히 하였다. 그리하여 강신주(降神酒)를 올리자마자 신령스런 비가 좍좍 쏟아져 곤룡포가 흠씬 젖었는데 둘러서서 바라보던 도성(都城) 백성들 가운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다.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백성들에게 대파(代播)할 것을 권하게 하고 이어 세금도 면제시키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잡곡(雜穀)이 화도(禾稻)만은 못하지만 하늘의 신령함을 힘입어 잘만 성취된다면 우리 백성들이 식량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식량을 얻게 되면 살 수가 있을 것이니, 백성을 위하여 그지없이 다행스런 일이다. 어떻게 소민(小民)들과 입으로 먹는 식물(食物)을 가지고 따질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조(先朝) 무오년(025) 에도 또한 세금을 견감시키는 명령을 내렸었으니, 이것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또 계술(繼述)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출곡(出穀)을 막고 그 값을 감하게 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흉년이 들었을 적에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긴 것이 비록 성인(聖人)에게 웃음을 사기는 하였으나 맹자(孟子)의 뜻은 대개 근본은 다스리지 않고 말단만 다스린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곡식을 옮기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래도 옳은 것이다.

 

이제 만일 이 지방의 곡식을 다른 지방에서 살 수 없게 한다면 이것은 곡식의 유통을 막는 것이 된다. 한 고을로 말하더라도 경내(境內)의 백성들이 이웃 고을의 백성들보다는 중하다고 해도 조정의 처지에서 본다면 내외 팔방의 백성이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 것이다.

 

옛날 장수가 된 사람은 강물에 술을 부어 삼군(三軍)이 마실 수 있게 하였는데, 이제 고을마다 그 경내의 곡식을 밖으로 내어가지 못하게 한다면 다른 고을의 백성들은 장차 더욱 군색하고 다급해질 것이니, 이것이 어찌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는 뜻이겠는가?

 

그리고 이익이 있는 곳에는 형법으로도 금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 만약 흉년에 강제로 값을 감하여 팔게 한다면 영(令)이 잘 시행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부자(富者)도 반드시 쌓아 놓은 곡식을 내어 놓으려는 마음이 없어지게 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충분히 잘 강구하여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사수(死囚) 가운데 오래도록 판결되지 않은 것 60여 옥안(獄案)을 심리하였는데 목숨을 살려준 것이 삼분의 일이나 되었다.

 

가을 8월 정묘일(丁卯日)에 성사(聖嗣)가 탄생하였는데, 6일 지난 계묘일(癸卯日)에 백관을 거느리고 직접 왕대비(王大妃)·혜경궁(惠慶宮)·가순궁(嘉順宮)에게 치사(致詞)·전문(箋文)·표리(表裏)를 올렸으며 이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하례를 받았다. 가순궁에 전문을 올린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에 명하여 모든 거행(擧行)을 한 결 같이 혜경궁에 행한 예(禮)에 따라서 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경사는 곧 국조(國朝)에서 1백년 안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직접 전궁(殿宮)에 하전(賀箋)을 올리고 이어 대정(大庭)에서 천세(千歲)를 부르는 축하를 받으니, 천일(天日)이 맑고 화창하였으며 신인(神人)이 함께 기뻐하였다. 이런 때에는 견휼(蠲恤)하는 정사가 의당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미쳐야 되는 것이니, 제도(諸道)의 구환(舊還)과 증열미(拯劣米)는 5분의 1분을, 각 공물 가운데 구유재(舊遺在)는 1만석(石)까지를 상한선으로, 시민(市民)의 요역(徭役)은 1개월까지를 기한으로, 현방속(懸房贖)은 30일까지를 기한으로 탕감시켜 줌으로써 기쁨을 기억하고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을 보이라.’라고 하였다.

 

이해에 기근이 들었는데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이 가장 심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년 양호(兩湖)에 참혹한 흉년이 든 상황을 어찌 연분(年分)의 장계(狀啓)를 기다린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은 가을 일이 이미 끝나 척장(滌場)이 곧 있게 될 것이니, 민정(民情)의 황급함이 필시 수확하기 전보다 배나 심할 것이다. 

 

이를 주야로 생각하면서 걱정하노라면 밥을 먹어도 달지가 않고 잠을 자도 편치가 않다. 대저 흉년을 구제하는 정책은 민력(民力)을 펴게 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고, 민력을 펴게 하는 것은 부세를 감면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환향(還餉)·신포(身布)를 정지하기도 하고 견면 시키기도 하며 대전(代錢)·대봉(代捧)하게 하는 등등의 일에 대해 도신(道臣)의 장계에서 감히 준례에 따라 진청(陳請)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는데, 이제 상격(常格)에 구애되어 아래에서는 조목별로 거론하지 못하고 위에서는 신축성 있게 조정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딱한 저 부황이 난 부류들이 더더욱 어떻게 지탱하여 보전할 수 있겠는가?

 

금년 양호(兩湖)의 연분(年分)에 관한 장계는 예투(例套)만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무릇 백성을 편하게 하고 백성을 유익하게 할 일이 있으면 전례의 유무와 대소거세(大小巨細)를 막론하고 짐작(斟酌)하고 참량(參量)하여 주저하지 말고 곧바로 진청(陳請)하라. 그러면 위에서 의당 준례를 뛰어넘는 처분을 내리겠다.

 

더욱 심한 고을에 이르러서는 삼명일(三名日)(026) 에 진상(進上)하는 방물(方物)·물선(物膳)·삭선(朔膳) 이하 갖가지 공헌(貢獻) 물종(物種)을 모두 갑인년(027)의 전례에 의거하여 내년의 맥추(麥秋)까지를 기한으로 봉진(封進)하지 말게 하라.

 

그리고 전궁(殿宮)에 봉진하는 것도 또한 정면(停免)시키라. 이밖에 고을에서 판출하는 민렴(民?)으로 향상(享上)이나 납관(納官)에 관계된 것도 또한 갑인년(甲寅年)의 전례에 의거 사의를 헤아려 견감시켜 일푼이나마 민력이 펴지게 하라.’ 하고, 이어 내탕의 돈과 호초(湖椒)·단목(丹木)을 내어 호서(湖西)·호남(湖南)·경기(京畿)·화성(華城) 등에 나누어 내려 주고 호남에는 진곡(賑穀) 1만 석을 청한 것 이외에 더 떼어주게 하였다.

 

경오년(028) 에는 영선(營繕)하는 공역(工役)과 해마다 으레 하는 연경(燕京)에서의 무역(貿易)을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흉년이 든 때문이었다. 대사헌 김이도(金履度)가 상소하여 액례(掖隷)의 증액(增額)에 대해 논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에 별기군(別技軍)의 무예출신(武藝出身)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를 따라서 행한 것이요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놀라도록 군위(軍威)를 장엄하게 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이것은 구제(舊制)를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나 경이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나로 하여금 허물이 없게 하려고 하니, 이 또한 경의 충성인 것이다. 참으로 조정에 직언(直言)으로 극간(極諫)하는 신하가 있는 것을 기뻐하는 바이니, 일대(一隊)의 군병을 아낄 것이 뭐 있겠는가?

 

더 선발한 무예 별기군(武藝別技軍)은 모두 도로 훈국(訓局)에 소속시키라.’라고 하고, 옥당 김계하(金啓河)가 진면(陳勉)한 상소에 비답하기를, ‘천 마리의 양(羊)가죽보다 한 마리의 여우가죽이 낫다.’라는 포양(褒揚)하는 말이 있었으며, 특별히 내탕의 포백을 내려서 표창하였다.

 

신미년(029) 에 경연(經筵)에서 강의(講義)하는 것을 인하여 위사(衛士)들이 먼 고장에서 가산(家産)을 기울여 발을 싸매고 올라와서 수위(守衛)하느라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고통을 생각하여, 묘당(廟堂)에 명하여 향민(鄕民) 가운데 위사에 편입 예속되어 온 사람들을 큰 거리에 모두 모아 놓고서 일일이 효유(曉諭)하고 무마하면서 그들의 질고(疾苦)가 무엇인가를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이어 제도(諸道)에 신칙시켜 백성의 고통을 채방(採訪)하여 아뢰게 하고, 하교하기를, ‘대저 재이(災異)가 있을 때는 나라에 아무런 일이 없고 백성들이 안락을 누리고 있으니 이일로 미루어 재이는 반드시 성왕(聖王)의 세상에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재이가 자주 있지 않은 것은 하늘의 마음에 노여움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지를 어찌 알겠는가?

 

서운관(書雲觀)에서는 이런 뜻을 본받아서 천상(天像)을 살피는 즈음에 충분히 근신하여 힘써 성실하고 정직함을 따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신칙하여 옥수(獄囚) 가운데 죄가 중한 자는 감단(勘斷)하여 처리하고 죄가 가벼운 자는 소방(疏放)시켜 시일을 끌어 지체시키는 일이 없게 하였으며, 도민(都民)의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에 대하여 신칙하여 가난한 가호를 널리 초출(抄出)하여 직접 나아가서 쌀을 하사하였고 향민(鄕民)들로서 떠돌아 우거(寓居)하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쌀을 하사하였다.

 

겨울 12월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토구(土寇) 홍경래(洪景來)가 반란을 일으킨 정상을 급히 알렸다. 적도(賊徒)들이 가산(嘉山)에서 일어났는데 군수(郡守) 정시(鄭蓍)가 사절(死節)하였다. 이때 백성들이 전쟁을 몰랐었고 거듭 흉년이 들었으므로 적들이 이런 틈을 타고 창궐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덟 고을이 무너져 버렸다.

 

이요헌(李堯憲)을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부서(府署)를 설치하여 절제(節制)하게 하고 중군(中軍)을 보내어 경영병(京營兵)을 이끌고 가서 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은 모두 이미 수복(收復)되었고, 저 정주성(定州城)에 남아서 목숨을 부지하고 독기를 부리는 적들도 또한 며칠 남지 않았으니 참으로 걱정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내가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곧 평민들이 혹 죄없이 재액에 걸리기도 하고 협박에 의해 따랐는데도 혹 주살(誅殺)이 함부로 가해지는 그것이다. 적도들의 괴수가 된 자와 두목(頭目)과 수종(隨從)하면서 함께 악을 저지르는 것을 달갑게 여긴 자들은 반드시 몇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이밖에는 모두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이 춥고 배고픔에 몰리고 위세에 핍박당해서였을 것이다. 이들이 범한 것이 비록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성인(聖人)이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몰린 짐승을 위하여 그물의 한쪽을 터준 마음에 의거하여 미루어 본다면 실로 딱하게 여길 노릇이요 노여워할 수 없는 것이니, 용서하여 주고 위로하여 돌보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장관(長官)을 위하여 사력(死力)을 바치는 양민(良民)들이니 내가 부덕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감히 상천(上天)의 살리기 좋아하는 마음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양 전대의 사서(史書)를 살펴보면 장수가 된 자는 혹 도살(屠殺)로 일을 삼는 것을 면치 못하였는데, 심한 경우 평민을 살해하여 수급(首級)의 수효를 허위로 증가시켰으니, 이는 모두 위로 천화(天和)를 간범하고 아래로는 인리(人理)를 손상시키는 짓인 것이다. 

 

어찌 어진 사람이 위에 있으면서 사람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을 저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왕사(王師)가 역적을 주토(誅討)하는 것은 이것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백성을 데리고 가서 나의 백성을 살해하는 것이 또한 어떻게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오랫동안 오속(汚俗)에 물들었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여 유신(維新)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훈계한 것이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문서 상자를 불태움으로써 반측자(反測者)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었고 당(唐)나라 때 배도(裵度)는 황제(皇帝)의 명에 의해 채주(蔡州) 사람들을 사면(赦免)시켰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관서(關西)의 일에 있어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급선무는 주륙(誅戮)하는 것은 오히려 가벼운 일이고 초래(招徠)하는 것이 중한 일이며, 효유하는 것이 우선이고 전안(奠安)시키는 것이 그 다음이다. 내가 진실로 안타깝게 여기는 지극한 뜻을 본받아 나의 서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풀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방백(方伯)·곤진(閫鎭) 수재(守宰)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양(對揚)하는 데 달려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신년(030) 여름 4월에 관서의 적도가 평정되었다. 처음 관군(官軍)이 송림(松林)에서 적병을 격파시키자, 적병은 도주하여 정주(定州)로 들어가서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스스로 지켰는데 성벽이 견고하여 즉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柳孝源)이 화공(火攻)으로 격파하여 홍경래 등을 베어 그 수급을 바쳤다.

 

왕이 하교하기를,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민읍(民邑)을 복구시키는 정사와 공을 논하여 상을 시행하는 거조에 대해 강구하여 시행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어 진헌(進獻) 가운데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정지하거나 견감시키게 하였고, 환곡(還穀) 가운데 정퇴(停退)하였나 포흠(逋欠)된 것도 또한 탕감시키라고 명하였다.

 

 진곡(賑穀)을 주어 가난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요역(徭役)을 면제시킴으로써 향군(鄕軍)을 위로하였으며, 장사(將士)들 가운데 충성을 다 바쳐 공을 세운 사람은 그 장사(葬事)지내는 것을 도와주고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며, 관서 사람들 가운데 의리에 분발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친 사람은 특별히 포장(褒奬)하여 기용하였으므로 현직(顯職)에 이른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협박에 의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사면하고 불문에 부쳤다. 이렇게 되자 인정이 크게 안정되어 애당초 난리가 있지 않았던 것과 같았다. 적도가 일어난 처음에 웅악(熊岳) 부도통(副都統)이 황제(皇帝)의 명령에 따라 갑군(甲軍)을 거느리고 중강(中江)에 이르러서 성원(聲援)하였으므로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용(趙鍾永)을 보내어 위로하고 그 군병들에게 호궤(?饋)하게 하였다. 이달에 적도를 평정한 하례를 인정전(仁政殿)에서 받았다.

 

가을 7월 병자일(丙子日)에 원자(元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정축년(031) 에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다. 하교하기를, ‘길한 날 좋은 때에 저사(儲詞)를 책봉하는 예(禮)가 이루어졌으니, 이는 바로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방가(邦家)를 돈독히 도와주어 큰 경사가 있게 한 것이다.

 

위로는 전궁(殿宮)에게 가열(嘉悅)의 기쁨을 드리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이 기꺼움을 고하는 마음에 답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번의 모든 의절(儀節)은 모두 기묘년(己卯年)·경신년(庚申年)의 전례를 준용하였으므로 나 소자(小子)가 미치지 못하는 슬픔이 또 경신년의 책봉 때의 성교(聖敎)와 같다. 이런 경사를 만나 기쁨을 기록하는 때를 당하여 또한 우러러 계술(繼述)하는 한 가지의 일이 있어야 한다.

 

제도(諸道)의 기사년(032) 구환(舊還) 10만석(石), 공인(貢人)의 구유재(舊遺在) 1만석, 시민(市民)의 요역(徭役) 2개월, 반인(泮人)의 요역 30일까지를 탕감시키라. 기사년 이후 흉년을 만나 정퇴(停退)시켰던 제도(諸道)의 군포전(軍布錢)은 숫자를 나누어 견감시키고 결전(結錢)·승역세전(僧役稅錢)·공전(貢錢)도 또한 똑같이 양감(量減)토록 하라. 이는 곧 나 소자가 경사를 넓히는 일을 우러러 계술하는 것으로 감히 전보다 지나치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라고 하였다.

 

9월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영희전(永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성조(聖祖)(033) 가 즉위(卽位)한 구갑(舊甲)이었고 이때 정섭중(靜攝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국훈(開國勳) 1등의 신하를 집에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 주게 하였다.

 

선조(先朝)의 주갑(周甲) 탄신일이라는 것으로 화성(華城)의 진남루(鎭南樓) 앞에서 사궁민(四窮民)(034) 을 모아 놓고 쌀을 하사하도록 명하였고 경내(境內)의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들을 시험보여 사제(賜第) 하였으며, 61세 된 사람에게는 은혜를 미루어 시요(市徭)를 견면시킴으로써 이해에 우모(寓慕)하는 정성이 치우치게 이곳에 있음을 보였다.

 

계유년(035) 에 왕대비(王大妃)의 주갑(周甲)의 경사가 있어 직접 치사(致詞)·전문(箋文)·표리(表裏)를 올렸고 하례를 받은 다음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내각(內閣)에 명하여 국(局)을 열고 정종(正宗)의 어제 전서(御製全書)를 교인(校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완성되자, 

 

또 시(詩)와 문(文)을 열성 어제(列聖御製)에 합쳐 편찬하였고 계속하여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예제(睿製)를 인간(印刊)하게 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되자, 이를 받들어 봉모당(奉謨堂)·화녕전(華寧殿)과 다섯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갑술년(036)에 기전(畿甸)·영남(嶺南)·호남(湖南)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방물(方物)·삭선(朔膳)·갑주(甲胄)·절선(節扇)의 공상(貢上)을 정지하게 하고 내탕(內帑)의 은화(銀貨)·단목(丹木)·호초(胡椒)를 나누어주어 진수(賑需)를 돕게 하고 관서(關西)의 곡식을 배로 운송하여 경기 백성들을 먹였다.

 

을해년(037) 12월 을축일(乙丑日)에 혜경궁(惠慶宮)이 훙서(薨逝)하니, 왕이 통곡하면서 사모하는 것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모든 전례(典禮)와 의문(儀文)을 반드시 물어 의논하고 짐작(斟酌)해서 행하였다. 제의(制義)는 엄중히 하고 신정(伸情)은 돈독히 하여 한결 같이 성경(誠敬)으로 목표를 삼았다.

 

정신(廷臣)들이 복제(服制) 때문에 의심을 하자 왕이 이에 여러 의견을 널리 채집하여 하교하기를, ‘본생부모(本生父母)에 대해 강등(降等)하는 것은 상하가 공통으로 같은 것이다. 비록 예절(禮節)에 없다고 해도 나 소자(小子)가 오늘날의 망극한 정리와 옛날 추모하던 마음에 의거 의당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복제(服制)를 만들어야 하는데, 더구나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정론(正論)이 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대신(大臣)과 관각(館閣)의 의논이 또 이와 같으니 다시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본생부모(本生父母)는 강등하는 것으로 마련하여 들이라.’라고 하고, 드디어 대공(大功)을 9월로 확정하였다. 조신(朝臣)에게는 복제(服制)가 없으나 임금을 따른다는 의리에 의하여 진현(進見) 때는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면서 9개월의 상기(喪期)를 끝마치기로 하였다. 이는 또한 왕이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재정(裁定)한 것으로 절충한 것이 사의에 맞게 되었다. 시호(諡號)를 헌경(獻敬) 이라고 올리고 예절에 따라 현륭원(顯隆園)에 부장(祔葬)하였다.

 

병자년(038) 에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왔다는 것으로 충렬사(忠烈祠), 현절사(顯節祠)와 문정공(文正公) 윤황(尹惶),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게 치제(致祭)하였으며,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순절(殉節)한 제신(諸臣)들에게도 두루 미쳤는데, 이는 영조(英祖)의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한 것이다.

 

정축년(039) 2월 갑자일(甲子日)에 태묘(太廟)·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세자(世子)의 알묘례(謁廟禮)를 행하였다. 3월 갑인일(甲寅日)에는 세자의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양양(襄陽)의 공삼(貢蔘)을 견감시키라고 명하였고, 폐종(廢宗)된 인(裀)의 자녀(子女)로서 심도(沁島)(040)에 금고(禁錮)되어 있는 자들에 대해 왕이 항상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고 돌보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방수(防守)하는 것으로 옮겨 두게 하니, 대신(大臣)과 대각(臺閣)에서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만일 일호(一毫)라도 자신(自身)이 범한 것이 있어 대의(大義)에 의거 결단한 것이라면 나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 저 흉도(凶徒)들의 일을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내가 경들이 청하는 것을 윤종(允從)하지 않는 것은 은정 때문에 의리를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무인년(041)에는 고려 임금의 여러 능(陵) 가운데 개성(開城)에 있는 것이 세월이 오래 되어 황폐된 탓으로 밭 갈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역(瑩域)에 범장(犯葬)하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 왕이 이런 사실을 듣고는 수신(守臣)을 준절히 질책하여 파직시키고 속히 보수하게 하는 한편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하는 법규를 거듭 밝히도록 하였고 해마다 수신이 이를 아뢰게 하였다. 이어 왕씨(王氏)의 후손을 수록(收錄)함으로써 조정에서 옛 나라를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다.

 

기묘년(042) 3월 임자일(壬子日)에 왕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올렸다. 예(禮)가 이루어지고 나자, 하교하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데도 그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누구와 함께 경사를 나누겠는가?’라고 하고, 공시민(貢市民)과 제도(諸道)의 구환곡(舊還穀)에 대해 차등 있게 견감하는 은혜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여름에 호서(湖西)에 홍수가 나자 승지 정원용(鄭元容)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이어 견휼(蠲恤)을 시행하였다. 8월에 세자빈(世子賓)의 간택례(揀擇禮)를 행하였는데 풍양(豊壤) 조씨(趙氏)가 선발되었다. 부사직(副司直)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으로 지금의 왕대비(王大妃)이다. 10월 임인일(壬寅日)에 왕세자가 친영례(親迎禮)를 행하였으며, 왕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군신(群臣)의 하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경진년(043) 여름 개천군(价川郡)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였는데, 직각(直閣) 정기선(鄭基善)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본도(本道)에서 올리는 녹용(鹿茸)의 상공(常貢)의 절반을 견감시켜 구제하였다. 신사년(044) 원조(元朝)에 하의(賀儀)를 행하고 직접 왕대비에게 표리(表裏)를 올렸는데 왕대비의 주량(舟梁)(045) 60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월 기미일(己未日)에 왕대비가 훙서(薨逝)하니, 왕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을 경신년(庚申年)과 같이 하였다. 의논하여 휘호(徽號)를 예경자수(睿敬慈粹)라고 올리고 시호(諡號)를 효의(孝懿)라고 올렸다.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여 주자(朱子)의 영부릉(永阜陵)에 대한 의장(議狀)을 인용하여 건릉(健陵)의 택조(宅兆)가 우려스럽다는 것을 낱낱이 논하고 나서 천년만년 동안 오래 갈 수 있는 계획이 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이어 본릉(本陵)의 복조(卜兆)는 실로 선왕(先王)이 예정(睿定)한 유지(遺旨)가 아니라는 것을 논변하여 새로 길지(吉地)를 정하여 난수(灤水)(046) 때문에 능(陵)을 옮기는 일을 거론하여 노부(魯祔)(047)의 예(禮)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비답을 내리기를, ‘대행 대비(大行大妃)께서 평일 이 때문에 크게 걱정하여 누차 소자(小子)에게 하교하셨던 것인데 이제 경의 상소를 보니 더욱 가슴이 무너지고 목이 메는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 즉시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들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의논이 올라오자, 하교하기를, ‘조정에 가득한 신하들의 의논이 하나도 다른 것이 없고 연석(筵席)에 나아와 일제히 아뢰는 것도 모두 속히 결단을 내릴 것을 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동(大同)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현릉원(顯陵園) 서쪽 등성이의 자좌(子坐)의 언덕에 자리를 정하였다.

 

9월 경신일(庚申日)에 능(陵)을 옮겨 합부(合祔)하였다. 천장례(遷葬禮)가 이루어지고 나자 즉시 두루 살펴 봉표(封標)하였으며, 하늘이 만든 길조(吉兆)이고 또 현릉원과 인근(隣近)이어서 진실로 정리(情理)와 예의(禮儀)에 흡족히 들어맞았다. 구릉(舊陵)의 수도(隧道)를 열어 보니 과연 수환(水患)이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이번 일은 바로 우리 왕의 성효(誠孝)의 감응입니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괴질(乖疾)이 유행하여 서쪽에서부터 들어왔는데 열흘 사이에 도하(都下)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수효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왕은 크게 여질(癘疾)을 우려하여 널리 구휼을 시행하였고 특별히 아경(亞卿)을 보내어 여러 산천(山川)에 양재제(禳災祭)를 지내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도 모두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설행하였는데, 이는 정종(正宗)의 기미년(048)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고 성주(成周)의 벽고(疈辜)(049) 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보다 먼저 연경(燕京)의 서사(書肆)에서 새로 편찬한 《황청통고(皇淸通考)》를 구입하여 왔는데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본조(本朝) 신축년(050) 사대신(四大臣)의 일이 거짓말로 더럽혀 있어서 사실과 어긋나 있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서는 가져다 열람하여 보고서는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급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정(辨正)하고 거짓으로 주달된 구어(句語)를 간거(刊去) 시키게 하였다. 임오년(051) 에 사신이 돌아왔는데 개정본(改正本)을 가지고 왔으므로 사건 전말을 종묘(宗廟)에 고하였다.

 

봄에 화성(華城)에 거둥하여 능원(陵園)을 전알(展謁)하고 돌아왔다. 하교하기를, ‘근년 이래 매양 한번 통유(洞諭)하려 했었으나 과연 실행하지 못하였었다. 한번 능원을 전알하고서부터 더욱 걱정스런 마음을 견딜 수 없는데 이는 곧 인(姻)의 자녀(子女)들에 관한 일이다.

 

그들이 과연 무슨 간범한 것이 있기에 해도(海島)의 한 모퉁이에 있으면서 천일(天日)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논의할 수 없어 인륜이 폐기하게 되었으며 비바람을 피할 수 없어 남녀가 거의 뒤섞여 거처하고 있는 실정이다. 갇혀 있는 모습이 귀신의 형상이고 춥고 배고파 울부짖으면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으니, 그 정상을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아! 나의 선왕(先王)께서는 돈독하고 우애로운 성덕(聖德)으로 그의 아비가 반드시 죽게 되었을 적에 감싸 보호하여 주었는데, 이는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다함께 흠앙(欽仰)한 것이었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없는 몸으로 어린 나이에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결국은 그가 대벽(大辟)(052) 에 걸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더구나 이는 사옥(邪獄)에 억지로 얽어 넣어 살해한 것이니, 또한 아주 근리(近理)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설사 그가 간범한 것이 있다고 해도 죄는 그의 한 몸에 그치면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속(支屬)들까지 잡아다 구금시켜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하게 만든 것은 또한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총괄하여 말한다면 내가 덕이 없어서 선왕의 뜻을 잘 계술(繼述)하지 못한 데 연유된 것이다.

 

어찌 척연(惕然)한 마음으로 송구스럽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해를 당하여 사모하는 회포가 절로 중첩됨을 깨닫겠으니, 이제 나의 마음을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의금부로 하여금 인(姻)의 자녀들의 거처를 위리(圍籬)하고 방수(防守)하게 한 것을 즉시 철거시킨 다음 그들로 하여금 편의한 대로 거주(居住)하게 하는 것을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하도록 하고 자녀의 혼취(婚娶)에 드는 비용을 대내(大內)에서 비하(備下)하게 하라.

 

또한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주관하여 조속히 거행하게 하라. 이번의 이 거조는 진실로 선대왕(先大王)의 우애가 돈독하였던 성심(聖心)을 근본 하여 미룬 것으로 나의 만세(萬世) 자손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연래(年來) 경용(經用)의 부족함에 대해 이미 듣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황급한 상황인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임을 듣고 난 뒤에는 어떻게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은 선혜청 당상 및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회동(會同)하여 사리에 맞게 조처하여 위로는 어공(御供)에서부터 아래로는 미비(穈費)에 이르기까지 일체 병신년(丙申年)에서 정사년(丁巳年)까지의 것을 통틀어 기준해서 어떤 일이 법제를 무시한 것이고, 어떤 단서가 요행의 문을 여는 것이 되는지 일일이 사정(査整)하라.

 

그리고 면세결(免稅結) 가운데 법에 있어 의당 환수(還收)해야 할 것도 또한 조사하여 아뢰라.’라고 하였다. 탐라(眈羅)에 여기(沴氣)가 치성하여 사망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이어 위제(慰祭)를 지낸 다음 겸하여 백성의 고통에 대하여 방문(訪問)하게 하였다.

 

12월 병신일(丙申日)에 수빈(綏嬪)이 졸서(卒逝)하자 왕이 애통해 하는 것이 예법에 지나칠 정도였다. 은자(銀子) 1만6천 냥을 내려 주면서 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 평일 임종(臨終)의 일을 유념하시어 별도로 조치하여 두었던 것을 호조에 출급(出給)하는 것이니, 사의를 헤아려 보태 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대신(大臣)과 제신(諸臣)들의 의논을 적용하여 시마(緦麻) 3월복을 입었다. 시호를 의논하여 현목(顯穆) 이라고 올리고 궁(宮)은 경우(景祐), 원(園)은 휘경(徽慶) 이라고 하였다. 계미년(053) 에 장례를 치르고 제복(除服)한 다음 시사(視事)할 적에도 오히려 흰 의관(衣冠)을 착용하자, 대신(大臣)들이 법제에 어긋난다고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편의에 따라 입는 것은 법복(法服)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 흰 옷을 입는 그런 뜻이다. 내가 고루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법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라면 상복(喪服)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결국은 3년 동안 그렇게 하였다.

 

혼궁(魂宮)을 창경궁(昌慶宮) 안에다 받들어 모시고 원관(園官)을 참봉(參奉)으로 개칭(改稱)하였는데, 그때마다 수경(守經)에 대한 의논이 있어 예법에 의거 간쟁하니, 왕이 말하기를, ‘친상(親喪)에 대해서 진실로 스스로 극진히 해야 하는 것은 상하가 똑같은 것이다.

 

나도 또한 어떻게 인정과 예법을 똑같이 둘 다 사의에 맞도록 절충하지 않아서 종사(終事)에 유감이 있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이제 내가 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한다면 내가 의당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에 의거 이를 받아들여 허물로 삼고 감히 피하지 않겠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생시를 본받는 뜻을 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요, 감히 법제를 어긴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저 융쇄(隆殺)하고 손익(損益)하는 사이에 널리 묻고 살펴 조처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정리(情理)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과 예의(禮儀)에 있어 할 수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았으나, 혐의를 분별하는 의리를 엄하게 하고 보본(報本)의 정성을 극진하게 하였으므로 이제야 둘 다 유감이 없게 되었다.

 

서류(庶流)의 한품(限品)을 소통(疏通)시키는 것 때문에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들에게 순의(詢議)하고 이어 묘당(廟堂)과 전조(銓曹)로 하여금 강구해서 의정(議定)하게 한 다음 기록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갑신년(054) 3월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고 군탄(涒灘)(055) 의 구갑(舊甲)이라는 것으로 풍천(風泉)(056) 의 느낌을 기록하기 위하여 영조(英祖) 갑신년(057) 의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여 선무사(宣武祠)·충렬사(忠烈祠)·현절사(顯節祠)의 삼사(三祠)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의주(義州)의 여러 의사단(義士壇)과 천장인단(泉漳人壇)에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어 유제(諭祭)하게 하였으며, 이 제독(李提督)(058) 의 사손(祀孫)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가을에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관서(關西)에서 돌아와서 신미년(059)·임신년(060) 의 난리가 있은 이후 유망(流亡)된 가호가 많아 고아와 과부들이 의지할 데가 없고 호소할 데가 없는 것은 물론 해마저 흉년이 들어 구환(舊還)이 빈 장부뿐이어서 지적하여 징수할 길이 없다는 정상을 아뢰니, 왕이 특명으로 포곡(逋穀) 6만9천 3백여 석을 탕감시켜 일도(一道)의 쇠잔한 백성들을 전안(奠安)시키는 방도로 삼게 하였다.

 

을유년(061) 판중추부사 김사목(金思穆)이 86세로 사마방(司馬榜)의 주갑(周甲)이 돌아왔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조정(朝廷)의 길사(吉事)이다.’라고 하고, 선조(先祖) 때의 성사(盛事)를 원용(援用)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법온(法溫)을 내린 다음, 경은 부언군(慶恩府院君)에게 치제(致祭)하였다.

 

9월 을미일(乙未日)에 직접 건원릉(建元陵)에 제사지냈는데 왕세자가 배종(陪從)하였다. 이는 태종(太宗)이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태상전(太上殿)에 상수(上壽)하였던 연월일(年月日)이기 때문이었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신(執事臣)들에게 상을 시행하였다.

 

병술년(062) 봄에 하교하기를, ‘가난한 농부들이 춘궁(春窮)을 겪는 것이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겠는가마는 이제 지난 가을의 큰 흉년을 당한 끝이니, 불쌍한 나의 기전(畿甸)과 호서(湖西)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들어가 보면 집집마다 텅 비어 있고 나가서 보면 마을마다 밥 짓는 연기가 끊겼으니, 울부짖으면서 길바닥에 쓰러지고 서로 끌어안은 채 구렁에 죽어 나뒹구는 것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옛사람은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살 곳을 얻지 못해도 오히려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더구나 나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팔도(八道)의 여서(黎庶)들로 하여금 항상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하고 흉년이 들어 굶주린 해에 수많은 생령(生靈)들에게 유망(流亡)하다가 쓸어져 죽는 환란을 당하게 하고서도 구제할 수가 없으니,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이 편안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겠는가?

 

저들이 가난하여 부황이 든 정상을 생각하노라면 마음이 부끄러워지고 계속하여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곡식을 옮기고 진구(賑救)를 설행하는 일에 대해 막 성명(成命)을 내렸으니, 방백(方伯)·수신(守臣)·읍재(邑宰)가 된 사람들은 진실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의 남은 백성들을 살리도록 하라.

 

돌아보건대, 나의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회포는 실로 감히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으며, 부족함은 느꼈을지언정 만족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이에 내탕(內帑)의 은전(銀錢)·단목(丹木)·백반(白礬)을 하사하여 경기·호서 와 사도(四都)의 진구하는 밑천으로 보태게 하니, 묘당(廟堂)에서는 기민(飢民)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각영(各營)에 획부(劃付)하여 원정(原定)된 것 이외에 별도로 설행함으로써 내가 부끄럽게 여겨 감히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라.

 

이웃 마을에 효유하여 서로 대여(貸與)하고 경종(耕種)을 제때에 하도록 권과(勸課)하고 기민의 초출이 누락되거나 지나치게 하는 것과 지급하는 것을 정밀하게 하고 정밀하게 하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는 읍재(邑宰)의 현불초(賢不肖)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진구가 끝나기를 기다려 특별히 상벌(賞罰)을 행할 것이지만, 또한 별도로 수의 어사(繡衣御史)를 보내어 안렴(按廉)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경기·호서·사도의 방백과 수신에게 알려 각기 척념(惕念)하여 대양(對揚)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정해년(063) 봄 2월에 왕세자에게 청정(聽政)할 것을 명하고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는 스스로 재결(裁決)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신미년(064) 이후 정섭중(靜攝中)에 있는 때가 많았다. 혹 조금 평안할 때에도 수시로 항시 기무(機務)가 지체되는 일이 많았었다.

 

나라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곧 내가 스스로 걱정하는 것이다. 세자(世子)는 총명하고 영리한데다 나이도 점차 장성하여졌는데, 근래 시좌(侍坐)하고 섭향(攝享)하게 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멀리는 당요(唐堯) 때의 일을 상고하고 가까이는 열성(列聖)들이 대리 청정(代理聽政)하게 한 거조를 본받아 나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의지하여 노고를 나눔으로써 조양(調養)에 편리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익혀 치도(治道)에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인 것이다. 모두 조정으로 나아와 대계(大計)를 고하도록 하라. 왕세자의 청정(聽政)은 한결 같이 을미년(065) 의 절목(節目)에 의거 거행하라.’라고 하였다.

 

세자가 소장을 진달하여 간절히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나의 노고에 대해 네가 나눌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우리 왕가(王家)의 예(禮)가 곧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사양을 한단 말인가?

 

아! 효우공검(孝友恭儉)하여 경천애민(敬天愛民)하는 것은 곧 열성(列聖)께서 서로 전한 심법(心法)인 것이니, 공경하고 조심하여 혹여 태만하거나 소홀이 함이 없이 내가 부탁하는 지극한 뜻을 잘 본받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사양하는〉 상소가 세 번에 이르자, 또 비답하기를, ‘나의 노고를 네가 대신하는 것은 이 또한 천도(天道)의 떳떳함인 것이다. 내가 어찌 떳떳하지 않은 것을 행하겠는가? 공경할지어다.

 

사물(四勿)(066) 은 몸을 수양(收養)하는 근본인 것이고 구경(九經)은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인 것이니, 근면하고 검소하여 무익한 일을 하지 말고 먼 앞을 내다보고 덕스런 말을 따름으로써 인심에 미더움을 얻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달 갑자일(甲子日)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청정(聽政)에 대한 하례를 받고 묘·사·궁(廟社宮)에 고한 다음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세자빈(世子嬪)의 산실(産室)을 만들고 5월을 기다려 청(廳)을 설치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신유일(辛酉日)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탄강(誕降)하였으므로 7일 정묘일(丁卯日)에 인정전에 나아가서 원손(元孫)이 탄생한 데 대한 하례를 받았다. 세자가 상소하여 진호(進號)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청한 내용은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임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를 아는 것이 또한 분명한 것이다.

 

나는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였으므로 마음의 두려움이 깊은 연못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았다. 즉위(卽位)한 지 이제 장차 30년에 이르지만 생민들이 곤궁에 허덕이고 온갖 법도가 모두 실추된 데다가 정섭(靜攝)하는 일 때문에 스스로 힘쓸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너에게 노고를 나누어 대신 결재하게 하여 온 나라의 희망을 위임시키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어찌 감히 옛날 선왕(先王)들의 성대한 거조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일은 효도에 관한 예문(禮文)인 것이다. 네가 만일 내가 위임하여 맡기는 것이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근면히 하며 선조(先祖)를 본받아 백성을 사랑함으로써 장차 위태롭게 된 국세(國勢)를 태산 반석처럼 평안한 위치에 올려놓는다면 효도를 하는 실상이 어찌 한때 보기에 아름다운 금(金)가루를 칠한 옥첩(玉牒)에 견줄 정도이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삼생(三牲)(067) 의 봉양이 뜻을 봉양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니, 너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이에 백관들을 거느리고 뜰에서 아뢰면서 청하였으나, 왕은 그래도 겸양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아뢰는 것이 다섯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못하여 따른다는 하교가 있었다. 이에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연덕 현도 경인 순희(淵德顯道景仁純禧)라고 올리고 왕비의 존호는 명경(明敬) 이라고 올렸다. 9월 신해일(辛亥日)에 자경전(慈慶殿)에서 보책(寶冊)을 받았고 명정전(明政殿)에서 하례를 받았다. 다음날 세자가 자경전에서 양전(兩殿)에게 진작례(進爵禮)를 행하였다.

 

무자년(068) 왕비의 춘추가 만40세가 되었으므로 2월 임오일(壬午日)에 세자가 자경전에서 술잔을 올렸는데, 왕이 왕비와 함께 나와서 받았다. 임금의 자애와 세자의 효성이 서로 융통 흡족하여 상서로운 화기가 곤위(坤位)에 넘쳐흘렀다.

 

10월에 천둥치는 재이(災異) 때문에 감선(減膳)하고 정전(正殿)을 피하였다. 때마침 복선(復膳)한 다음날 또 천둥이 치자 왕은 송구스럽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처음보다 배나 더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교서를 내리고 또 감선하고 5일 동안 정전을 피하였다.

 

겨울에 세자가 왕의 성수(聖壽)가 40세이고 즉위한 지 30년이 되는 두 가지 경사가 내년에 겹친다는 일로써 선조(宣祖)·숙종(肅宗)·영조(英祖)의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여 칭경(稱慶)하고 진찬(進饌)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써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가 두 번째 이르고 더욱 간절하니, 이에 허락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저 굶주린 백성들을 생각하면 실로 불안한 마음이 더욱 깊다. 너는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모든 의물(儀物)을 한결같이 간략히 하는 쪽으로 따른 후에야 더욱 뜻을 봉양하는 효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축년(069) 원일(元日)에 인정전에서 하례를 받았다. 2월 정축일(丁丑日)에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찬(進饌)하니 명정전에 나아가서 받았는데, 구작(九爵)의 예(禮)를 행하였다. 3일이 지난 뒤 또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작(小酌)을 올렸고, 이어 내연(內宴)을 행하였다.

 

11월에 명하여 원손(元孫)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삼고, 책례(冊禮)는 길일(吉日)을 가려서 거행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기축년(070) 현종(顯宗)을 세손(世孫)으로 책봉하였던 해와 갑자(甲子)가 같아서 예(禮)가 계술(繼述)에 합치되었으므로 이해에 정호(定號)하고 내년에 행례(行禮)하기로 하였다.

 

경인년(071) 에 어진(御眞)을 모사(摹寫)하고 세자가 표제(標題)를 써서 규장각(奎章閣)의 주합루(宙合樓)에 봉안(奉安)하였는데, 이는 정종(正宗) 때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5월 임술일(壬戌日)에 세자가 훙서(薨逝)하니, 왕은 비통한 가운데 다시 서정(庶政)을 직접 보살폈다. 그러나 슬퍼하는 얼굴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사교(辭敎)의 사이에 왕왕 차마 읽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예관(禮官)이 《상례보편(喪禮補編)》과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참최 3년(斬衰三年)(072) 의 복(服)을 청하니, 왕이 삼대(三代)(073) 이후 역대(歷代)와 국조(國朝)에서 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정종(正宗) 병오년(074)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복제(服制)를 인용하여 구제(舊制)에 의거 결단할 것을 명하였다.

 

예관이 다시 인조조(仁祖朝) 때 제신(諸臣)들의 의논을 인용하여 대신(大臣)과 유현(儒賢)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내 참최 3년의 복제를 행하게 되었다. 시호를 효명(孝明) 이라고 내리고 묘호(廟號)를 문호(文祜), 묘호(墓號)를 연경(延慶) 이라고 하였다. 8월 기축일(己丑日)에 양주(楊州)의 천장산(天藏山)에 장사지냈는데, 곧 지금의 수릉(綏陵)이다.

 

세손(世孫)을 길한 날에 책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해에 이미 정하여 놓은 날짜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조(英祖) 갑신년(075) 과 황조(皇朝) 홍무(洪武)(076) 때의 고사에 의거 둘 다 선조(先祖)의 뜻을 계술하고 주(周)나라의 법의를 따르는 것에 합치된다는 것으로 왕세손을 동궁(東宮)이라고 하고, 강서원(講書院)·위종사(衛從司)를 춘방(春坊)·계방(桂坊)이라고 개칭(改稱) 하였다.

 

수책(受冊)은 원래 정해 놓은 날을 써서 9월 경오일(庚午日)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세손의 책례(冊禮)를 행하였으며, 이어 하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제도(諸道)의 구환(舊還)과 각공(各貢)의 구유재(舊遺在)를 탕감시키고 시전(市廛)의 요역(徭役)과 군전(軍錢)·결전(結錢)·승역세(僧役稅)·공전(貢錢)을 차등있게 견감시키게 하여 경사를 넓히고 화기(和氣)를 인도하는 뜻을 보였다.

 

이때 대각(臺閣)에서 징토(懲討)하는 의논이 많았는데, 상신(相臣)의 연차(聯箚)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5월에 참혹한 변고를 당하였다. 내가 위로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아래로는 생민(生民)을 위하여 다시 국정(國政)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한 무슨 마음이 있겠는가?

 

군신 상하(君臣上下)는 이미 혼란스러운 심신(心神)을 수습하여 나를 조호(調護)하고 어린 세손을 보양(輔養)하여 백성들을 감싸 보호하고 세년(歲年)의 풍흉을 헤아려 조처하기를 미쳐 못할 듯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후 6, 7개월 사이에 조정에서 다른 모유(謨猷)는 없이 날마다 분분하게 미처 못할 듯이 서두는 것은 사람을 탄핵하거나 사람을 죽이자는 의논이 아니고는 다른 것은 하나도 아뢰는 것이 없었다. 지금이 과연 어떠한 때인가?

 

고금에 흉적(兇賊)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순제(舜帝) 때의 사흉(四兇)보다 더한 것이 없었지만, 곤(鯀)은 오행(五行)을 혼란시켰다는 것으로 죽음을 당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유배가고 방축되고 원찬(遠竄)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성인(聖人)의 마음이 유약(柔弱)한 소치이겠는가?

 

천리(天理)를 따져보고 인정을 살펴보면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알맞은 것이기 때문 이었으니, 반드시 후세에서처럼 도륙하여 진멸(殄滅)시킨 연후에야 통쾌하게 여기겠는가?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고 괴이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정신(廷臣)들은 교화(敎化)로 나를 인도하는 것은 볼 수가 없고, 오직 내가 주토(誅討)에 과감하기만을 바란다는 그것이다.

 

나는 본래 덕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인(仁)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너무 유약한 데 빠져 있기 때문에 위엄을 세우기 바라서 그런 것인가? 나로 하여금 위엄을 세우는 데 과감하게 만든다면, 또한 그것이 오늘날 정신들의 복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근일 성토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은 모두가 정해년(077) 이후의 사단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어떤 사람 무슨 일을 막론하고 나의 마음에 있어 과연 듣고 싶은 바의 것이겠는가? 만일 내가 듣고 싶어 한다고 여긴다면 이는 인심과 천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또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 이렇게 상세히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인심을 선하게 만들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선 경 등부터 나의 뜻을 체인(體認)하여 서로 함께 깨우쳐 알려 대양(對揚)하게 한다면 실로 또한 국가의 큰 행복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묘년(078) 5월 8일 경우궁(景祐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작년이 곧 수빈(綏嬪)의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작헌례에 대해서는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나 갑자기 슬프고도 창황한 일을 당한 탓으로 정지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날에 행례(行禮)하였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박 충헌공(朴忠獻公)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임진년(079) 봄에 하교하기를, ‘금년을 당하여 황조(皇朝)에서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를 추념(追念)하니,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꺼워 보답할 방도가 없다. 따라서 풍천(風泉)의 감회를 어디에 의지하여 풀겠는가?

 

선무사(宣武祠)·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게 하고 평양(平壤)의 무열사(武烈祠)에도 똑같이 제사를 지내주되 헌관(獻官)은 도백(道伯)으로 정하라. 본국의 순난(殉難)하고 수훈(樹勳)한 신하들의 충성과 공로에 이르러서도 또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달천(達川)의 전쟁 터에 대해서는 이미 예조 판서의 말로 인하여 제사지내 주도록 명하였거니와 그 가운데 더욱 우뚝하게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는 또한 광감(曠感)의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을 수 없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순절(殉節)한 곳과 함께 순국한 장사(將士)들을 위하여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주되 제관(祭官)은 본도(本道)의 수령들 가운데 품질(品秩)이 높은 사람을 가려서 차임하라.

 

두 충렬공6246) 과 문열공의 집안에서는 지금 녹사(祿仕)하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봉사손(奉祀孫)을 해조(該曺)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서 거두어 기용하게 하라.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 충장공(忠壯公) 권율(權慄)의 가묘(家廟)에도 또한 승지를 보내어 사제(賜祭)하게 하라. 각 고장에 있는 사판(祠版)에 대해서는 도내(道內)의 수령들 가운데 승지를 역임한 사람을 제관으로 차임하라.

 

아! 전후 8년 동안의 국난에 충절(忠節)을 바친 사람들의 수효가 어찌 이루 한정할 수 있겠는가마는 예(禮)가 번거로우면 도리어 설만스러운 것이어서 이제 일일이 모두 거행하지 않고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을 거론하여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은 실로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어찌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는 것으로 차등을 두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또 상주(尙州)의 증연(甑淵)에서 세 종사관(從事官)이 순절한 곳에도 또한 똑같이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4월에 영돈녕부사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 졸(卒)하였다. 

 

왕이 매우 슬퍼하면서 하교하기를, ‘기억하건대, 옛날 경신년6247) 영고(寧考)께서 나 소자의 손을 잡고 지시하시기를, 「이제 내가 너를 이 신하에게 부탁한다. 이 신하는 반드시 바른 길에 어긋난 것으로 너를 보필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기억해 두라」고 한 일이 어제인 것만 같고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사복(嗣服)한 지 30여 년 동안 고굉(股肱)으로 의탁하여 온 것은 폐부(肺腑)의 친척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부지런히 애쓰고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왕실(王室)을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았는데, 안으로는 지극한 정성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올바른 도리로 나를 보필하였고, 밖으로는 진안(鎭安)시키는 정사를 힘써 경륜(經綸)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였으니, 국가가 오늘날 보존되어 있는 것이 누구의 힘이겠는가?

 

참으로 선왕(先王)께서 의탁하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만이구나! 내가 애통해 하고 마음 아파하는 이외에 국사(國事)를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맡길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치 강을 건너다가 돛대를 잃은 것과 같은 심정이다.’라고 하고, 이어 동원 부기(東園副器)를 내리라고 명하였으며 친림(親臨)하여 궐정(闕庭)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성복일(成服日)에는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승지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예조 판서 조만영(趙萬永)의 말을 쫓아 대신(大臣)과 관각(館閣)에 의견을 순문(詢問)하여 정종(正宗)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 하였다.

 

가을에 수재(水災)가 발생하니 왕이 이를 걱정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감선(減膳)한 다음 근신(近臣)을 보내어 영제(?祭)를 지냈으며, 서울과 지방의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소결(疏決)하고 술빚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거듭 엄중히 하였다. 

 

그리고 무너진 가호(家戶)에 대한 휼전(恤典)은 특별히 더 후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사관(史官)을 나누어 보내 두루 방문(訪問)하게 한 다음 드러나 있는 해골은 거두어 묻어주고 물에 빠져 죽거나 사태에 눌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넉넉하게 구휼하게 하였다. 

 

이어 수재를 입은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이를 모방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이해에 기전(畿甸)·호서(湖西)·해서(海西)에 기근이 들었는데 기전이 가장 극심하였다. 능(陵)에 전배하고 돌아와서 하교하기를, ‘기보(畿輔)는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인데 치우치게 수재를 당하여 이렇게 큰 흉년을 초래하였으니, 항상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침식(寢食)이 달지가 않다. 

 

이번의 연로(輦路)에서 더욱 그지없이 참혹한 정상이 소문보다도 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를 보면 셋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니, 온 도내(道內)가 어떻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의당 특별히 진휼(軫恤)하는 정사를 시행하되, 경법(經法)에 벗어나는 것을 혐의하지 말도록 하라. 한전(旱田)의 급재(給災)는 국전(國典)에 없는 것이지만, 이런 때에는 상법(常法)에 구애될 것이 없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연분(年分)을 기다린 뒤 각 고을의 한전(旱田)에 대하여 시내가 되고 모래가 덮인 정상을 십분 정밀하게 초출(抄出)하여 따로 서장(書狀)을 갖추어 아뢰게 하라.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당년에 한하여 급재(給災)함으로써 목전의 다급함을 풀 수 있게 해야 한다.

 

기민(畿民)의 요역(徭役)이 금년에만 치우치게 많은 것이 아니고 기내(畿內)의 농사 상황이 제도(諸道)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아니며 또 내가 그 실상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니, 모두 다 허락해서는 안 된다. 타도(他道)에서 이에 의거 바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될 뿐만이 아니라, 기민(畿民)이라 할지라도 또한 이를 상례(常例)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니, 묘당(廟堂)에서는 알고 있으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아!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즉위한 지가 30여 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 백성을 감싸 보호하고 민지(民志)를 위열(慰悅)시킨 것은 하나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재화(財貨)는 날로 더욱 부족하게 되고 백성들은 날로 더욱 곤궁하게 되어 점점 치달아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년의 연사(年事)는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대단한 가뭄이 파종(播種)의 시기를 어긋나게 하더니, 끝내는 큰 홍수가 여물어가는 곡식을 손상시켰다. 게다가 바람·우박·해충·서리의 재해가 없는 것이 없었으므로 경기·충청·황해 삼도(三道)의 농형(農形)이 드디어 큰 흉년으로 판결이 나고 말았다.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을 당하여 저 농사를 그르쳐 불쌍한 생업을 잃은 백성들이 장차 무엇으로 몸을 감싸고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구렁에 죽어 나뒹구는 걱정을 면할 수 있겠는가?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 있다고 해서 내가 민정(民情)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지 말라.

 

비단옷이 몸을 따뜻하게 할 때를 당해서는 우리 백성들이 입을 옷이 없는 고통을 생각하고, 옥식(玉食)이 입에 맞을 때를 당하여서는 우리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 옷입고 한번 밥먹는 데에도 실로 감히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지를 못하여 두렵고 조심스런 마음에 그 고통이 내 몸에 있는 것 같음을 느낀다.

 

흉년을 구제하는 데 관계된 모든 정사를 묘당(廟堂)에서 이미 강구하여 구획하였으나, 이는 흉년에는 으레 하는 상전(常典)에 불과한 것이니, 나의 마음을 극진히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면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에 또 내탕(內帑)에 저축된 은(銀)·단목(丹木)·백반(白礬)을 특별히 내려주어 진자(賑資)에 보태게 한다. 기민(飢民)의 초출이 누락되거나 지나친 것과 궤급(饋給)을 정밀하게 하고 정밀하지 않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에게 입문(入聞)하는 방도가 있으니, 진구(賑救)가 끝나기를 기다려 상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사람들이 진실로 내가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는 지극한 뜻을 잘 본받는다면, 반드시 진구하고 위휼(慰恤)하는 일에 있는 힘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신(大臣)이 지난번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수령은 즉시 파송(罷送)시킬 것으로 아뢰었는데 제도(諸道)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깜깜하기만 하니, 이것이 어찌 진실한 마음으로 대양(對揚)하는 도리이겠는가? 이것도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더 신칙시켜 기어이 실제의 효과가 있게 하라.

 

나의 삼도(三道)·사도(四都)의 백성들은 나의 심복(心腹)에서 나온 유시(諭示)를 분명히 듣고서 경솔히 고향을 떠나지도 말고 서로 충동하여 원망하지도 말고서 힘써 서로 도와서 각기 편안한 삶을 누리려 노력한다면 하늘은 지극히 인애(仁愛)로운 법이니, 또한 어찌 내년(來年)의 희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명하여 삼도(三道)에서 정조(正朝)에 올리는 방물(方物)·물선(物膳)을 모두 정봉(停封)하게 하여 진구의 수요를 돕게 하였으며, 도하(都下)에 가호(家戶)를 초출하여 쌀을 팔게 하는 정사를 시행하였다. 왕성(王城) 안의 개천(開川)이 하류가 막혀 장마가 지면 번번이 물이 범람하고 가옥이 잠겼으므로 도민(都民)들이 고통스럽게 여기자, 왕이 토사를 쳐내고 물길을 트도록 명하였다.

 

이런 역사(役事)에는 으레 백관(百官)·군민(軍民)·생도(生徒)·원역(員役)·공장(工匠)이 나가서 일을 하게 되어 있는 법규가 있었으나, 왕은 흉년이 들어 민력(民力)을 쓸 수 없다는 것으로 특명을 내려 면제시킨 다음 내탕의 은전(銀錢)을 나누어 주어 역사를 마무리 짓게 하였다. 이어 묘당에 명하여 다시 구획하여 살펴서 신칙하되, 영조(英祖) 경진년(080) 에 지평(地平)이 되게 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하게 하였는데, 공역이 끝나자 그 폐해가 제거되었다.

 

이때 마침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계사년(081) 겨울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하교하기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없는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므로 위에서는 하늘이 노하고 아래에서는 백성이 원망하며 흉년과 기근이 겹쳐 이르러 백성들이 떠돌다 죽어 나뒹굴고 재생(災?)이 연달아 발생하여 국가의 저축이 다 없어졌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번의 이 회록(回祿)의 재변은 또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대내(大內)의 전각(殿閣)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으므로 열성조(列聖朝)께서 임어하시던 곳이 더위잡아 바라볼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는 첫째도 과매(寡昧)한 나의 죄요, 둘째도 과매한 나의 죄이다. 이것이 법전(法殿)과는 다름이 있다고 하지만 태연히 일이 없는 것처럼 할 수는 없다. 3일 동안 감선(減膳)하여 내가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뜻을 보이겠다. 지금은 바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서로 면려할 때이니, 묘당에서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나의 몸을 바로잡아 보필하고 면려하여 돕는 의리를 극진히 함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에 응하는 것을 실제의 도리로써 하도록 하라.’라고 하고, 이어 묘당에 명하여 재력(財力)을 조처 구획해서 경영(經營)하여 다시 건립하게 하였다.

 

영남(嶺南)·관동(關東)의 공삼(貢蔘)과 사도(四都)의 갑주 가미(甲胄價米), 내국(內國)의 연경(燕京)에서의 무역가(貿易價) 절반을 임시로 감면하여 3년을 기한으로 그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갑오년(082) 봄에 하교하기를, ‘이렇게 따뜻한 봄볕이 덕을 펴 만물이 소생하는 때를 당하여 불쌍한 저 호소할 곳이 없는 적자(赤字)들은 불행하게도 거듭 흉년을 당하였고 게다가 여역(癘疫)까지 겹쳐 떠돌다 쓰러져 죽는 사람이 잇달으니, 슬프고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또 제때에 묻어주지 못하여 시해(屍骸)가 도로에 낭자하게 흩어져 있으니, 화기(和氣)를 간범하고 여역을 초래하기에 충분하다. 조용히 그 허물을 따져보면 내가 실로 부끄럽고도 마음 아프다. 삼영문(三營門)의 장신(將臣)들은 오부(五部)의 관원을 데리고 몸소 각기 그 자내(字內)로 가서 곳에 따라 수검(搜檢)하여 일일이 묻어줌으로써 초솔(草率) 하게 빠뜨리는 탄식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다.

 

여름에 경외(京外)의 도류수(徒流囚)를 소방(疏放)시키는 정사가 있었으나, 장관(贓官)과 포리(逋吏)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배안(配案) 가운데 구별하여 부표(付標)해서 들여오게 명하였으니 백성에게 해를 끼친 것을 감안해서였다. 왕이 경인년6251) 이후 지극한 정리를 힘써 억제하고 기무(機務)의 수응을 한결 같이 평소처럼 하여왔으나, 항상 실의(失意)한 모습으로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임진년(083) 에 이르러 명온 공주(明溫公州)와 복온 공주(福溫公州)가 또 선후로 요서(夭逝)하여 비통한 일이 잇따랐으므로 영위(榮衛)가 전만 못하였는데, 이 해 여름과 가을에 누차 편안하지 못한 증상이 나타났었다. 겨울에 우연히 부스럼 증세가 있었는데 순일(旬日) 사이에 의원의 기술이 효험이 없더니, 결국 11월 13일에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아주 군신(郡臣)들을 버리고 떠나갔다. 춘추 45세이고 재위(在位)는 34년이다.

 

여대(輿儓)·부유(婦孺)들도 물결처럼 달려와 빗줄기 같은 눈물을 흘렸으며 멀고 궁벽한 시골의 전부(田夫)·야수(野叟)들도 놀라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지극한 덕을 사모하여 먼 곳에서도 아침저녁으로 달려와 궐하(闕下)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발꿈치가 서로 잇닿았다.

 

신하들이 왕의 공덕(功德)을 의논하여 시호(諡號)를 올렸는데, 시법(諡法)에 충신(忠信)하고 예(禮)로서 접대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많은 백성들이 편안히 의지하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크게 보전하여 공을 세운 것을 무(武)라 하고, 회유하는 덕으로 사람들은 안정시키는 것을 정(靖)이라 하고, 널리 알고 재능이 많은 것을 헌(憲)이라 하고 주야로 경계(儆戒)하는 것을 경(敬) 이라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정치를 확립시킨 것을 성(成)이라 하고,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일을 성공시킨 것을 효(孝)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은 말하기를, ‘왕은 덕업이 융성하였으니 의당 백세(百世)토록 제사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제야 삼공(三公)·구경(九卿)·관각(館閣)·삼사(三司)에서 모여 의논하여 드디어 세실(世室)로 높였다. 다음해 여름 4월 19일에 인릉(仁陵)에 장사지내니, 곧 교하군(交河郡)의 구치(舊治) 뒷산 등성이 을좌(乙坐)의 언덕이다.

 

아! 슬프다. 명경 왕비(明敬王妃)는 2남 3녀를 탄생하였다. 장남은 곧 효명세자(孝明世子)인데 이 세자가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낳았다. 금상 전하가 즉위하여 세자를 익종대왕(翼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차남은 일찍 졸서(卒逝)하였다. 장녀는 명온공주(明溫公主)인데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하였으며, 차녀는 복원공주(福源公主)인데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하였다. 둘 다 일찍 졸서하였다.

 

계녀(季女)는 덕온 공주(德溫公主)인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영온 옹주(永溫翁主)는 숙의 박씨(淑儀朴氏)의 소생인데 하가하기 전에 요서(夭逝)하였다. 어제 시문(御製詩文) 12권은 내각(內閣)에서 교인(校印)하여 열성 어제(列聖御製)에 편입(編入)한 다음, 이를 봉모당(奉謨堂)과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독후(篤厚)하며 침중하고도 깊은 도량을 지니고 있어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두려워하였고 세세히 살피지 않고서도 환히 알았다. 

 

조정에 임어하여서는 과묵(寡默)하였으며 의용(儀容)이 엄숙하고도 화목하였다. 안색이나 말을 일부러 부드럽게 하지 않아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 온수(溫粹)하고 겸화(謙和)하여 자만(自滿)하거나 긍장(矜莊)하는 마음이 없었다.

 

유현(儒賢)을 높여 숭상하고 낭묘(廊廟)에 위임하는 것을 치본(治本)과 정요(政要)로 삼았다. 대저 크고 작은 진언(進言)들은 번번이 흡연(翕然)히 받아들이기를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며, 그 가운데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도 또한 갑자기 꺾어누르지 않았다.

 

일체의 사물(事物)에 대해 전혀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치우침이 없었으며 평상시에도 하루종일 단정히 앉아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다. 환관(宦官)이나 설어(?御)(084) 와 접하는 때는 드물고 오직 서권(書卷)과 한묵(翰墨)을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여가에 마음을 기쁘게 하는 취미로 삼았다. 아름다운 사조(詞藻)가 매우 많았으나 혹 산일(散佚)되어 수집하지 못하기도 하였고, 신한(宸翰) 또한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겸손하여 스스로 내세우지 않았다.

 

서책은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눈을 거치면 문득 기억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性理)의 글은 마음으로 궁구하고 체인(體認)하여 힘써 실용(實用)으로, 귀착시켰으며 전장(典章)·의문(儀文)과 법률(法律)·제도(制度)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알고 널리 총괄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왕은 학문에 대해 근본이 있고 끝도 있었다고 이를 만하여, 왕은 도(道)에 대해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우뚝한 일을 행하려고 힘쓰지 않았어도 은택은 백성들에게 두루 입혀졌으며, 빛나는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어도 공(功)은 인심을 크게 열복시켰다.

 

3기(紀) 동안의 태평한 다스림에 대해서는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으니,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왕이 이를 이룩하게 된 것은 큰 일을 할 수 있는 대본(大本)을 지닌 데서 비롯된 것이다. 듣건대, 인효(仁孝)와 공검(恭儉)은 바로 임금의 대덕(大德)인 것으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인(仁), 무왕(武王)의 달효(達孝), 요제(堯帝)의 윤공(允恭), 우왕(禹王)의 극검(克儉)은 경전(經傳)에서 일컬은 것으로 본받을 만한 것이다.

 

왕은 인(仁)에 대해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그 지극한 인을 미루어 정치를 함에 있어는 공정으로 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였다. 어린 나이 때부터 덕을 배양하였는데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도를 닦은 것이 오래되어 백년이 하루처럼 변함없이 순수하였다.

 

그리하여 벌레같은 하찮은 미물도 차마 그 본성을 어기게 하여 생명을 손상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감싸주어 기르고 사랑하여 돌보는 뜻이 원근(遠近)과 친소(親疏) 때문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정사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백성의 보전을 급선무로 삼았다. 혹여 생민의 이병(利病)이나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언급된 것이 있으면 어떤 시기를 막론하고 반드시 얼굴빛을 고치고 경청(傾聽)하였으며, 한번 비가 오고 한번 뙤약볕이 나는데 대해서도 성념(聖念)의 걱정이 늘상 그치지 않았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한 기근을 당하면 번번이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구하였는가 하면 배로 곡식을 운반하여 먹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매양 적향(?餉)을 정지시켜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으며, 반드시 내탕의 저축을 내어 놓아 식량의 진구를 돕게 하였다. 재성(裁省)이 정세(正稅)에까지 이르렀고 견감(?減)을 특별히 공선(貢膳)부터 먼저 하는 등 걱정하고 보살펴 돌보아 주는 것에 대해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도(諸道)에서 소호(燒戶)와 엄사(?死)에 대해 아뢰면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반드시 항전(恒典) 이외에 더 구휼하여 주게 하였고, 많은 경우에는 반드시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로하고 무마하여 주었다. 해마다 봄 정월에는 윤음(綸音)을 내려 방악신(方岳臣)(085) 을 계칙하여 경작 상황을 살피는 것을 반드시 부지런히 하게 하였으며, 거둥 중에도 연(輦)을 정지시키고 순문(詢問)하였다. 

 

공시민(貢市民)의 폐막(弊?)은 반드시 이정(釐正)하였고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죄가 가벼운 죄수는 내어 보내도록 명하였으며, 위사(衛士)들 가운데 추워서 울부짖는 사람이 있으면 옷을 입혀 주었고 큰 비가 내리면 반드시 퇴호(頹戶)를 방문(訪問)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모든 정령(政令)과 시조(施措), 어묵(語默)과 동정(動靜)에 있어 어느 한 가지 일도 불쌍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감싸 보호하여 주는 데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재부(財賦)는 그것이 백성에게서 나와서 윗사람을 섬기게 된 것이니, 사의(私意)에 의거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부고(府庫)의 저축은 장차 쓸 데가 있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지출해서는 안 되는 데도 지출하거나 지출해야 하는데도 지출하지 않는 것은 똑같이 잘못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여(賜與)를 신중히 하여 여축이 없게 하는 일이 없도록 규도(規度)를 엄중히 제정하였는데, 이는 모두 민력(民力)을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 

 

형벽(刑?)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하고 신중히 하여 경사를 만나면 소탕(疏蕩)을 시행하였다. 재이(災異)를 만나면 심언(審?)을 행하여 불쌍히 여기고 측달(惻?)하는 뜻이 율령(律令)과 조례(條例) 안에 항상 표현되어 있었다. 정리(情理)와 예법(禮法)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널리 순문(詢問)하여 재단(裁斷)하였고, 희로(喜怒)에 따라 경중(輕重)을 마음대로 하지 않았으며, 일이 윤기(倫紀)에 관계되고 죄가 장오(贓汚)를 범한 것인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았다.

 

명의(名義)를 간범하고 천헌(天憲)을 무시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하는 수 없이 생도(生道)(086) 에 의한 주살(誅殺)을 행하였지만, 또한 반드시 신중히 심의하고 깊이 유념하여 국론(國論)이 대동(大同)하게 된 후에야 시행하였다.

 

신유년(087) 이후 사옥(邪獄)을 다스릴 때와 임신년(088) 에 서적(西賊)(089) 을 감죄(勘罪)할 적에 감화시킨 역도(逆徒)가 항상 주륙한 역괴(逆魁)의 수효보다 많았었다. 출치(出治)의 큰 규범과 어세(御世)의 애타는 마음이 오로지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왕의 세대(世代)가 끝날 때까지 몸소 악역(惡逆)을 범하였거나 이름이 단서(丹書)(090) 에 기재된 자가 아니면 형벽(刑辟)에 걸리거나 폐기된 집안이 없었으니, 이는 왕의 인덕(人德)인 것이다. 성인의 말에 체인(體仁)하면 사람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이는 왕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왕은 효성의 지극함을 하늘에서 타고났으므로 이미 어릴 때부터 엄연(儼然)함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놀이를 하면서 즐기는 것 가운데 마음속으로 매우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도 정종(正宗)께서 원치 않으면 감히 하지 않았으며, 한번 훈계 받은 것이 있으면 이를 잘 봉행하여 감히 다시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었다.

 

전궁(殿宮)을 섬김에 있어서는 한결 같이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여 흠잡을 것이 없었으며 정종에 대해서는 항상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극진히 하였고, 효의 왕후(孝懿王后)에 대해서는 더욱 친애(親愛)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정종께서 자주 칭찬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간직되어 있어 정순후(貞純后)·효의후(孝懿后)·혜경궁(惠慶宮)·수빈(綏嬪)을 받들어 섬김에 있어 용색(容色)의 사랑을 극진히 하고 지물(志物)의 봉양을 극진히 하면서 공경하고 유순하기를 미치지 못하는 듯이 애썼으므로 화목하고 공경함이 둘 다 극진하였다.

 

아침저녁 문안은 반드시 제때에 하였고 바람 불고 비 오고 춥고 더운 때일지라도 거른 일이 없었으며, 혹여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내수(內竪)를 시켜 오늘의 안부를 묻게 하였는데 내수가 돌아오고 나서야 왕이 기뻐하였으며 저녁에도 또한 아침과 같이 하였다.

 

중년(中年)에 수빈(綏嬪)이 살아 있을 적에 왕이 섬기기를 더욱 근신히 하여 반드시 먼저 뜻을 받들기를 생각함으로써 그 기쁨을 곡진히 하였기 때문에 궁위(宮闈) 사이에 화기(和氣)가 애연히 넘쳐 흘렀다. 수빈이 왕에게 찬선(饌膳)을 보내올 적마다.

 

왕이 마침 드시기 싫어도 또한 반드시 조금 맛보았으며 수빈이 또 권하면 또 맛보았는데 비록 같은 음식이 자주 와도 맛보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수빈이 항상 양심합(養心閤)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의 처소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임오년(091) 이후에는 왕이 매양 홀로 서서 그곳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는데 얼굴빛이 처연(悽然)하여 마치 뵐 수 있는데도 못뵈는 그런 모습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를 당하여는 수저를 멈추고 진어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밥알을 차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숙선 옹주(淑善翁主)는 왕의 누이동생인데 다독거려 사랑하는 것이 특별히 지극하였다. 옹주가 하가(下嫁)할 적에 3일 동안 외저(外邸)에 나가 있었는데도 창연(?然)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이 멀리 떠나 이별해 있는 것과 같았으며, 돌아올 적에는 영로(迎勞)가 매우 지극하였다. 출합(出閤)할 때 이르러서는 항상 만나볼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문신(問訊)과 증유(贈遺)가 없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혹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곡진히 들어주었다. 옹주가 입궁(入宮)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쁨이 안색에 나타났으며 날을 꼽아 기다렸으니, 이는 우애의 돈독함인 것으로 효(孝)를 미룬 데서 온 것이다. 일찍이 야대(夜對) 때 제신(諸臣)들에게 선찬(宣饌)하고 나서 노친(老親)이 있는 사람은 과일과 건어물을 싸가지고 가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또한 효도를 권장하기 위한 마음에서였다.

 

선조(先祖)를 받드는 생각에는 성의(誠意)가 순일(純一)하여 정모(征謨)와 사공(事功)을 모두 선조의 뜻을 따라서 하는 것을 의리로 삼았으며 계신(戒愼)하는 것은 오로지 전에 해오던 일을 다시 고치는 것에 있었다. 묘궁(廟宮)의 향사(享祀)는 매양 몸소 행하였는데, 반드시 전물(?物)을 살피고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하였는가를 점검하는 등 공손한 자세와 온화한 마음가짐으로 임하였다. 

 

초헌(初獻)을 이루고 나서 예의사(禮儀使)가 위차(位次)로 들어갈 것을 아뢰어도 왕은 우두커니 서서 그 말을 듣지 못하는 듯하니, 여러 제관(祭官)들이 엄숙하고도 유화(柔和)로운 가운데 감히 위의(威儀)를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삭망(朔望)에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봄·가을로는 침원(寢園)에 전알(殿謁)하면서, 혹시라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계추(季秋)에는 직접 명릉(明陵)에 제사를 올렸고 맹동(孟冬)에는 직접 태묘(太廟)의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이때 옥후(玉候)에 정상이 아닌 점이 많았으나 군신(君臣)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선어(仙馭)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상은 왕의 효성을 기술한 것이다.

 

《효경(孝經)》에 이르기를, ‘엄한 것으로 인하여 공경을 가르치고 친한 것으로 인하여 사랑을 가르친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은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그 정사는 엄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지는데 그 원인이 되는 것은 본(本)(092) 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왕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왕의 덕성은 경(敬)을 본체(本體)로 삼아 표리와 동정에 순일하여 간단(間斷)이 없었으며, 선조(先祖)를 높이고 어버이를 섬기는 그런 마음으로 백성을 대하고 아랫사람을 다스렸으니 이는 모두가 경(敬)인 것이다. 장중(莊重)하고 단목(端穆)한 의도(儀度)로 얇은 얼음을 밟고 깊은 연못을 내려다 보는 듯한 조심하는 경계심을 지녔으므로 어릴 적부터 앉으면 반드시 꿇어앉고 누우면 반드시 바르게 누웠으며, 하루 종일 희언(戱言)이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儼然)히 위의(威儀)가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가까이 나아가면 애연히 덕기가 넘쳐 흐르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상제(上帝)를 대하는 일념(一念)은 항상 마음속에 잊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 일월(日月)이나 풍우(風雨)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존경심을 극진히 하고 감히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일광(日光)이 비추는 곳에서는 자세를 올바르지 않게 한 적이 없었으며, 누우려 할 경우에는 아무리 더워도 반드시 문을 닫게 하였다.

 강렬한 천둥이 치면 그때마다 엄숙한 마음으로 안색을 고치고 옷을 단정히 입고 앉아 있었으며, 천둥이 그치지 않으면 밤새도록 편안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였다. 

 

재생(災?)을 만났을 적에는 그것이 적은 것일지라도 두려워하고 슬퍼하여 몸을 용납할 데가 없는 것처럼 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에 계칙함에 있어 감히 숨기는 것이 없었다. 상선(常膳)을 대할 적에도 반드시 외모를 단정히 하였고, 우연히 입에 맞지 않아도 꾸짖는 일이 없었으며 밥알이 떨어진 것을 보면 반드시 주으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 밥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고 백성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우대하여 지체가 한미하여도 특별히 대우하였다. 신료(臣僚)들을 예(禮)로 접대하였으며 질병이 있어 정섭중(靜攝中)에 있거나 좌차(座次)를 옮겨 창황한 때일지라도 승지·사관이 없으면 접견하지 않았으며, 수작(酬酢)이 근엄하여 민국(民國)의 우모(言+牛謨)와 강독(講讀)의 규계(規戒) 이외에는 끝내 연사(燕私)에 언급된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또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데 뜻을 극진히 하여 복상(卜相)할 적마다 반드시 손을 씻고 의관(衣冠)을 단정히 한 다음 꿇어앉아 그 이름에 비점(批點)하였으며, 대신이 진현(進見)할 적에는 사령(辭令)을 반드시 근신하게 하였고 비록 병이 극심하여도 설복(褻服)(093) 으로 접견하지 않았으며 궤석(几席)에 의지하여 있을 적에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이상은 왕의 공손함이다.

 

《예경(禮經)》에 말하기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엄연히 생각하는 것 같이 하고 말을 안정(安定)하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중정(中正)하여 사심(邪心)이 없는 것은 예(禮)의 바탕인 것이고, 장경(莊敬)하고 공순(恭順)한 것은 예의 법제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왕을 두고 한 말이다.

 

왕은 성품이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침어(寢御)하는 방에는 서사(書史)와 연궤(硯几) 뿐이었다. 진기한 완호물(玩好物)을 모두 물리쳐 버리고 남겨 두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런 물건을 어디에 쓰겠는가? 다만, 사람의 심지(心志)만 손상시킬 뿐이다.’라고 하였다.

 

반선(盤膳)에는 진기한 맛을 없앴고 복어(服御)에는 비단으로 꾸민 것이 없었으며, 곤장(袞章)의 법복(法服) 이외에는 저면(苧綿) 등속뿐이었으며, 금주(衾裯)와 유장(唯帳)에 이르러서는 왕왕 세탁하여 기워 쓰게 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비단 반비(半臂)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좋은가?’ 하고, 한 번 입어보고서는 곧바로 벗어버렸으므로 측근의 사람들이 감히 다시 올리지 못하였으며 왕도 굳이 다시 찾지 않았다.

 

거처하는 곳의 도만(塗墁)이 부서져 떨어진 것이나 창소(窓疏)가 이지러진 것에 대해 보개(補改)하라는 명을 내린 적이 없었으며 보연(䩉筵)과 사석(肆席)이 항상 낡아서 떨어진 것이 많았는데, 궁중(宮中)에서는 검덕(儉德)의 지극한 것이 영조(英祖)에 부합(符合)한다고 전송(傳誦)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방이 너무 비좁고 누추하다는 것으로 넓힐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말하기를, ‘무릎만 움직일 수 있으면 된다. 사치하게 크게 만들 필요가 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안으로는 수즙(修葺)하는 공역(工役)이 없었고, 밖으로는 영작(營作)의 비용이 없었다.

 

동서(東西)의 두 대궐이 모두 화재(火災)를 당하였으므로 개건(改建)하는 역사(役事)가 있게 되었는데, 또한 자상하게 계칙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하지 말고 옛모양을 회복시키는 데에서 그치게 하였을 뿐 끝내 서까래 하나도 더 증설하지 않았다. 이는 왕의 검소함인 것이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제도(制度)로 절제하여 재화(財貨)를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왕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왕이 이 네 가지 덕을 지닌 것은 모두 자연스런 본성(本性)에서 나온 것으로 본성대로 따라서 행한 것이 도(道)가 된 것이요, 

 

자신의 인위적인 것은 보태지지 않았다. 따라서 털끝 만큼도 억지로 작위(作爲)한 자취가 없었음은 물론 내외(內外)가 순수하고 현미(顯微)에 차이가 없어 왕·패(王覇)가 뒤섞이지 않고 의·리(義利)가 현혹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서로 전수(傳受)한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이어 받았으며, 아래로는 자손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모유(謨猷)를 남겼다. 

 

후왕(後王)이 친족을 친근히 하고 현인(賢人)을 대우하며, 백성들이 그의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고 그의 이익을 이롭게 여겨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곧 성(誠)뿐인 것이다. 대저 혼연(渾然)한 천리(天理)는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이므로, 생각하고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종용(從容)히 도(道)에 맞게 되는 것이니, 이는 천도(天道)인 것이며 천도는 군도(君道)인 것이다. 

 

하늘이 원형 이정(元亨利貞)에 의거 사시(四時)를 운행하고 만물을 생성시키는데 무엇이 그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는 하늘에 방불(彷彿)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또한 성(誠)뿐인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시인(詩人)이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성대한 덕을 칭송하면서 하늘과 대등하게 높였던 것이다. 

 

그 시(詩)에, ‘하늘의 명(命)이

아! 심원(深遠)하여 그치지 않고 계속되니, 아!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왕의 덕의 순일 불잡(純一不雜)함이여?’라고 했으니, 이는 하늘이 하늘이 된 이유인 것이고 문왕이 문왕이 된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왕의 묘호(廟號)를 순(純)이라고 한 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나라 사람들이 지우(智愚)·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모두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대명(大名)을 받으셨다.’라고 하였다. 왕은 일찍이 순재(純齋)라고 자호(自號)하였는데, 이것이 또 천도(天道)가 처음도 이루어 주고 끝도 이루어주는 자연스런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지극하고도 지극하다. 지금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신(臣) 박종훈(朴宗薰)이 선왕(先王)을 섬긴 지가 오래되고 덕을 우러러 본 것이 자세했다는 이유로써 신에게 덕행을 형용하는 글을 지으라고 하명하였으므로 신은 두렵고 조십스럽기 그지없어 책임을 감당해낼 방법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삼가 대내(大內)에서 내린 행록(行錄)을 상고하고 방책(方策)에 기재되어 있고 사람들의 눈귀에 드러나 있는 덕업(德業)에 관한 사실을 널리 채집하여 위와 같이 찬집(纂輯)하였다. 이를 찬술함에 있어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감히 과장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백세(百世)의 돈사(惇史)에 징험이 되게 하였다.”

 

[참고문헌]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8책 423면

【분류】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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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경술년 : 1790년.

[註 002]경신년 : 1800 정조 24년.

[註 003]세 가지 선 : 세자(世子)에 책봉하는 예(禮)를 거행하면 세 가지 선한 것이 제대로 되는데, 곧 부자(父子)·군신(君臣)·장

              유(長幼)의 도리를 말함. 《예기(禮記)》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

 

[註 004]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005]임술년 : 1802 순조 2년.

[註 006]계해년 : 1803 순조 3년.

[註 007]부자(父子) : 공자(孔子).

[註 008]호환(戶還) : 환곡(還穀)을 꾸어 준 것.

[註 009]원릉(元陵) : 영조(英祖)의 능.

[註 010]부조지전(不?之典)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지내게 하는 특전을 말함.

 

[註 011]회록(回菉) : 화신(火神).

[註 012]갑자년 : 1804 순조 4년.

[註 013]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014]곡돌 사신(曲突徙薪徙薪) :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

              다는 뜻으로, 화단을 미연에 방지한 것을 비유한 말임.

 

[註 015]무술년 : 1778 정조 2년.

[註 016]을축년 : 1805 순조 5년.

[註 017]병인년 : 1806 순조 6년.

[註 018]경신년 : 1800 정조 24년.

[註 019]정묘년 : 1807 순조 7년.

[註 020]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021]무진년 : 1808 순조 8년.

[註 022]기사년 : 1809 순조 9년.

[註 023]을묘년 : 1795 정조 19년.

[註 024]계해년 : 1803 순조 3년.

[註 025]무오년 : 1798 정조 22년.

[註 026]삼명일(三名日) : 정월 초하루와 동지(冬至)와 임금의 탄일(誕日).

[註 027]갑인년 : 1794 정조 18년.

[註 028]경오년 : 1810 순조 10년.

[註 029]신미년 : 1811 순조 11년.

[註 030]임신년 : 1812 순조 12년.

[註 031]정축년 : 1817 순조 17년.

[註 032]기사년 : 1809 순조 9년.

[註 033]성조(聖祖) : 태조(太祖).

[註 034]사궁민(四窮民) : 환·과·고·독(鰥寡孤獨).

[註 035]계유년 : 1813 순조 13년.

[註 036]갑술년 : 1814 순조 14년.

[註 037]을해년 : 1815 순조 15년.

[註 038]병자년 : 1816 순조 16년.

[註 039]정축년 : 1817 순조 17년.

[註 040]심도(沁島) : 강화도.

[註 041]무인년 : 1818 순조 18년.

[註 042]기묘년 : 1819 순조 19년.

[註 043]경진년 : 1820 순조 20년.

[註 044]신사년 : 1821 순조 21년.

[註 045]주량(舟梁) : 혼례.

 

[註 046]난수(灤水) : 이장(移葬)의 뜻. 옛날 문왕(文王)의 아버지인 왕계(王季)의 무덤에 난수의 물이 차서 관(棺)이 드러나게 되

               자, 문왕이 “선군(先君)께서 신하와 백성들이보고 싶으실 것이다.” 하고, 관을 꺼내어 3일 동안 조정에 가져다 놓았다가

              장사지낸 데서 유래된 말임. 난조(藻朝).

 

[註 047]노부(魯?) : 합장(合葬).

[註 048]기미년 : 1799 정조 23년.

[註 049]벽고(疈辜) : 희생(犧牲)을 해체(解體)시킨다는 말인데, 곧 주(周)나라 때 사방(四方)과 백물(百物)에게 지내던 제사 이름임.

 

[註 050]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51]임오년 : 1822 순조 22년.

[註 052]대벽(大辟) : 사형(死刑).

[註 053]계미년 : 1823 순조 23년.

[註 054]갑신년 : 1824 순조 24년.

[註 055]군탄(涒灘) : 갑신년(甲申年).

[註 056]풍천(風泉) : 비풍(匪風)·하천(下泉)으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

              (曹風)의 편명임.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의 왕권(王權)이 점점 쇠약해짐을 개탄하면서 지은 시인데, 여기서는 (明)나

             라를 추모(追慕)하면서 슬퍼한다는 뜻으로 쓰였음.

 

[註 057]갑신년 : 1764 영조 40년.

[註 058]이 제독(李提督) : 이여송(李如松).

[註 059]신미년 : 1811 순조 11년.

[註 060]임신년 : 1812 순조 12년.

[註 061]을유년 : 1825 순조 25년.

[註 062]병술년 : 1826 순조 26년.

[註 063]정해년 : 1827 순조 27년.

[註 064]신미년 : 1811 순조 11년.

[註 065]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066]사물(四勿) : 공자(孔子)가 그 제자 안회(顔回)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 네 가지를 가르친 것으로, 예의(禮儀)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 말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듣지 말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말하지 말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행하지 말라

             고 한 경잠(警箴)임.

 

[註 067]삼생(三牲) : 성찬(盛饌).

[註 068]무자년 : 1828 순조 28년.

[註 069]기축년 : 1829 순조 29년.

[註 070]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071]경인년 : 1830 순조 30년.

[註 072]참최 3년(斬衰三年) : 오복(五服) 중 가장 무거운 복(服)으로, 거친 삼배로 짓고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상복을 3년 동안

                입는 복제(服制)임.

[註 073]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세 왕조.

[註 074]병오년 : 1786 정조 10년.

[註 075]갑신년 : 1764 영조 40년.

[註 076]홍무(洪武) :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연호.

[註 077]정해년 : 1767 영조 43년.

[註 078]신묘년 : 1831 순조 31년.

[註 079]임진년 : 1832 순조 32년.

[註 080]두 충렬공 : 송상현과 고경명.

[註 081]경신년 : 1800 정조 24년.

[註 082]경진년 : 1760 영조 36년.

[註 083]계사년 : 1833 순조 33년.

[註 084]갑오년 : 1834 순조 34년.

[註 085]경인년 : 1830 순조 30년.

[註 086]임진년 : 1832 순조 32년.

[註 087]설어(褻御) : 시신(侍臣).

[註 088]방악신(方岳臣) : 팔도(八道)의 감사.

[註 089]생도(生道) :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 방도에 의거하여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말함. 《맹자(孟子)》 진심장

               (盡心章) 상(上)에 “생도(生道)에 의거하여 백성을 죽이면 죽더라도 죽이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한데서 온말임.

[註 090]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註 091]임신년 : 1812 순조 12년.

[註 092]서적(西賊) : 평안도의 홍경래.

[註 093]단서(丹書) : 죄인의 명부.

[註 094]임오년 : 1822 순조 22년.

[註 095]본(本) : 효(孝).

[註 096]설복(褻服) : 편복(便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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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姓李, 諱, 字公寶, 正宗大王之子, 母妃孝懿王后金氏, 贈領議政淸原府院君靖翼公時默女也。 綏嬪朴氏, 寔生王, 嬪贈領議政忠獻公準源女也。 王, 以正宗十四年庚戌六月十八日丁卯, 誕降于昌慶宮之集福軒, 方在娠也, 宮中有夢龍之瑞, 綏嬪神彩瀅澈, 瞻眄淸炯, 逈異於常, 已知爲大慶之兆。 及誕彌之辰, 積雨忽晴, 景晷如晝, 虹流廟井, 瑞彩煥爛, 盤繞宮林, 都人士女, 奔走?祝。 卽日以正宗命孝懿王后, 取以子之, 定號元子。 覃?岐, 隆準龍顔, 方口重, 同符正廟。 正廟臨視喜甚曰, ‘是兒福祿, 非吾比也。’ 二歲之冬至, 正宗, 嘉其添齡, 賜以新曆。 王, 在抱披覽, 字有與屛上大字同者, 輒拈指之。 自幼聰明特異, 乃如此。 方在?齡, 正廟嚴於蒙養, 遇物必誨, 凡服之華盛, 味之膏, 勿令近口體。 賓僚必選端方之士, 以資薰陶, 常曰 ‘須得野不軟熟者, 方有嚴憚之效。’ 以故, 天縱之姿, 將就益早, 八歲, 與師傅諭善, 行相見禮, 講讀有程, 以其暇, 必命侍坐。 正廟爲之加讀書課程身敎也。 庚申春正月朔朝, 冊王世子。 正廟敎曰, ‘元子今爲十一歲, 冊封之禮, 尙今遲遲, 蓋有待耳, 《易》貴易簡, 《禮》有三善, 亦我顯廟故事。 竝擧冠ㆍ冊ㆍ嘉三禮於一歲之中, 謨燕翼於千於萬, 豈非今日之所可仰遵乎’ 仍命冠冊竝擧嘉禮, 將行於是年, 以二月乙酉, 冠于集福軒, 仍以是日受冊, 周旋中規, 禮儀可象。 禮旣成, 陪駕謁廟宮, 命捲簾, 使士民仰覩。 王坐屹然若巨人, 顧眄有度, 群情胥慶。 六月巳卯, 正宗昇遐, 王, 以七月甲申, 卽位于昌德宮之仁政門。 尊王大妃爲大王大妃, 王妃爲王大妃, 大王大妃垂簾同聽政, 用國朝舊典也。 事大小, 王皆稟決焉。 上大行大王謚曰 ‘文成武烈聖仁莊孝’, 廟號曰 ‘正。’ 王沖年恤宅宗, 動罔違禮, 哀戚過之。 群下進見, 語及先王, 輒泫然流涕, 掩抑失聲, 國人服其至孝。 十一月甲申, 葬正宗大王于健陵, 在水原舊治花山, 卽顯隆園東第二岡也。 凡都監所需財用, 竝出內儲, 新陵香炭位田, 命以壯勇營屯土移, 皆所以?民力也。 藥院例有分定海錯珍果之非常貢者, 命永除之。 是歲, 尊正宗爲世室。 辛酉, 罷宮寺奴婢世貢之法, 命取其籍案, 火于通衢, 小民積痼之, 乃。 夏建華寧殿于華城府, 先朝御眞, 自維與宅移奉, 式遵瞻依之遺意。 庸賁妥虔之儀制, 敎以堅固樸實爲度, 體先王昭儉之德。 時有所謂西洋敎者, 自北而來, 一種邪徒, 潛相傳習, 誣天慢神, 遺君背親, 滅倫常, 誘惑氓庶, 遂?行鋤治, 誅其沈溺之尤者, 黨與屛之四裔, 改悔者宥之。 天討載行, 闢之廓如, 命諸道常加禁, 逐月登聞, 著爲式。 壬戌, 罷壯勇營, 營之財用, 以貞純大妃命, 竝屬內帑, 王曰, ‘營旣罷矣, 庫儲自應出給。 何必留之內府乎於是。 大妃?侵初命, 凡有胥, 一歸之大農, 其有校吏逋負者, 竝蕩之, 皆王旨也。 孝元殿祥?旣過, 以禮正宗大王于太室, 行吉。 冬十月甲寅, 行嘉禮, 王妃安東金氏, 永安府院君贈領議政忠文公祖淳女, 今大王大妃也。 揀擇禮已行於庚申春, 先王已命之矣。 及遭大喪, 主勢孤危, 賊臣金龜柱之餘, 乘時?張, 脅持壅蔽, 至賊臣權裕之疏, 其計益急。 老臣忠愛之語, 發於前席, 三揀不爲之說, 行於一世, 禍將滔天, 聞者心寒。 惟貞純王后, 炳幾折奸, 力扶大綱, 舟梁誕擧, 宗社賴安。 癸亥春敎以 ‘尙未瞻夫子廟宮, 於予心不勝?焉。’ 命擧謁聖禮, 此初元視學之典也。 命禁宮房衙門, 庄土陳告之習, 守令之入於繡啓者, 殿最居下者, 錄成冊子, 以備省閱。 申嚴貪吏廢錮之法。 咸興火, 民家被燒, 至數千戶, 遣校理洪奭周慰諭, 發交濟穀賑之, 其戶還身役, 停鹿茸之貢。 內下丹木胡椒, 以助結構奠接之資, 民忘其災。 秋謁健元陵, 元陵自是以歲春秋, 歷謁諸陵。 特施故相李?命ㆍ李健命ㆍ趙泰采不?之典, 遣官賜祭于道峯ㆍ石室兩書院, 輦路起感也。 又特侑高麗忠臣鄭夢周。

冬, 江華饑, 又頒帑藏以哺之。 十二月, 仁政殿火, 王, 大震, 敎曰, ‘予小子, 承堂構之責, 居常懷, 若不克負荷, 今玆回祿之告警, 在於踐位行禮之所, 一則由予否德, 二則由予否德, 減膳避殿撤樂, 以示貶責。’ 仍令論思諫爭之臣, 悉陳厥咎。 貞純王后撤簾, 王, 乃親總庶政。 甲子春, 加上尊號于貞純王后曰, 光獻, 受群臣賀。 平壤城內火, 延燒五千餘戶, 遣副護軍李相璜, 慰諭?恤, 如北關。 仍侑于崇靈ㆍ崇仁二殿以妥之, 以正衙重建, 不可緩也, 樸?旣集, 有以遇災興役, 諫者, 命停之。 至冬始告竣, 臨御以受賀。 諫臣朴崙壽, 請正賊裕之罪, 裕之辛酉疏, 敢肆禍心, 旨意凶譎, 都人尹曲徙薪之語, 直犯不道, 久爲國人所憤。 至是, 以背馳先王, 沮?大婚, 用極律。 洪在敏者, 以注書, 投疏, 謂廷臣之不能對揚, 慈聖其意顯間, 王深燭而嚴斥之。 大臣以下, 同聲請誅, 乃敎曰, ‘論其罪則固罔赦。 然亦何責乎渠 卽予誠未足以孚人, 德未足以化人, 不能使一世之人, 曉然見事事物物, 各有至當之義。 故如在敏者, ?然自陷, 若赤子之入井, 可哀, 非可怒也。 不敎而刑, 聖人之所不爲, 予雖否德, 不忍爲是也, 卿等不須汲汲於討一在敏, 入告出語之際, 闡而明之, 發而揮之, 不知者知之, 知之者繹之, 民志壹而世道靖, 則君臣上下, 竝享和平之福。 在敏亦將自悔前見之悖繆, 而日遷善之不暇矣。 予則曰, 此個義理, 勝於討在敏萬萬也。’ 命竄之海島。 念故儒臣朴在源戊戌抗疏之忠, 贈爵謚以旌之。 乙丑正月丁酉, 貞純大妃薨, 是歲大妃周甲也。 已自前冬, 議上號曰, 隆仁, 冊寶成, 具禮儀進于殯殿, 象生也。 上徽號曰昭肅靖憲, 謚曰貞純。 王, 追慕不已, 大小祀饗, 必親竟三年, 未或命攝, 祭需, 命勿定於被災諸邑。 丙寅, 金達淳初拜相職, 請褒朴致遠ㆍ尹在謙, 敎曰, ‘《政院日記》入於洗草, 先朝所以仰請, 英廟所以特許, 蓋不欲以不忍見不忍提之事, 留其文蹟於世間也。 祖子孫自是一體, 英廟先朝所不忍者, 若施褒贈於今日, 則非但如有得罪, 恐負兩朝聖意矣。’ 達淳又陳疏, 王, 語筵臣曰, ‘全篇陰慘而諱諫云者, 當屬何地’, 又曰, ‘不及於先王所秉者, 所謂殺無赦過於先王所秉者, 亦所謂殺無赦。’ 於是, 國論沸騰, 遂置之法。 三司論沈煥之罪惡, 最其兩奏絶悖, 降在句語, 根於達淳, 忠愛等說, 窩窟於裕賊, 營護凶逆, 眼無君母, 請追削其官, 仍請正金觀柱漫?裕獄, 矯誣先王之罪, 竝從之。 初正廟之在春邸也, 龜柱之從叔漢祿者, 爲龜柱陰募死黨, 將謀危國本, 引胡寅論唐中宗時事, 其言絶悖。 正廟雖燭其逆節, 以事關聖躬, 貸而不問。 及庚申以後, 諸賊皆其支流, 觀柱, 卽漢祿之子也。 至是, 始正漢祿ㆍ龜柱追律, 命逆家婦女緣坐者, 保授其家, 仍發配, 勿復用該部該廳拘囚之例, 永爲式。 九月, 雷, 王曰, ‘一陰一暘之失序, 猶當恐懼修省, 不敢以九月十月有間也。’ 命減膳三日, 令中外臣庶, 袞闕時政, 悉言無諱。 丁卯, 命復洪樂任官, 樂任, 卽惠慶宮弟也。 曾於辛酉邪獄, 任事者藉而殺之, 竝及廢宗?, ?之妻與子之妻, 非王意也。 至是, 慈齡望八, 患候沈篤, 乃特宥之。 以慰悅慈心焉。 判敦寧府事朴準源卒, 擧哀闕庭, 親撰碑文, 以賁墓道。 以江陵貢蔘, 驅民勸採之爲弊, 命減貢三之一, 仍嚴飭, 以?民力。 時有李敬臣之獄, 根窩?露, 以金鍾秀爲歸於是。 聲討齊發, 請正其罪, 批相臣箚曰, ‘今日諸賊之罪, 尙忍言哉? 其地處則戚?也, 其包藏則凶心也, 圖危國本之計, 思之骨驚。 ?誣莫重之狀, 言之髮竪。 其本專在於?視國家, 亂我義理, 窩窟則龜、祿也, 根?則龜、祿也。 三大罪之斷案, 已成, 八字言之, 凶心益彰, 非祿賊則無以助龜柱之凶圖, 非龜賊則無以倡漢祿之逆腸, 眞所謂一而二, 二而一也。 至於鍾秀、敬臣, 首尾相連, 血脈流通。 以受先朝罔極之恩之鍾秀, 反甘心營護, 而矯誣之狀, 如彼, 以在遐土蝨之賤之敬賊, 亦挺身傳習, 而凶悖之言如此, 龜、祿, 裏也, 鍾秀, 表也, 鍾秀, 根也, 敬賊, 枝也。 痛矣。 一轉而再轉, 皆是前身而後身, 乃命鍾秀, 追奪官爵, 黜庭享。

戊辰, 以內帑綿布乏用, 命兵曹入五十同, 該曹判堂, 疏言非古法, 王, 賜批優奬, 卽命還下, 勿以一疋留中。 先是, 因邪學, 幷禁燕中購書, 儒士病之, 乃命許經史及醇儒文集, 申嚴奇紋緞疋之禁。 因臺臣進規, 敎曰, ‘立志者, 爲學之肯也, 居敬者, 明理之樞機也。 明理者, 吾心之圓鏡也, 克己者, 孔聖之心法也。 紀綱者, 係一國之安危也, 節用者, 在一身之奢儉也。 立志然後, 學問進而德業廣, 可望居敬之效, 居敬然後, 心主一而志不擾, 可期克己之工, 克己然後, 於是乎天下之人, 皆與其仁, 衆物之私, 不敢勝公。 至於紀綱之振與不振, 用度之節與不節, 特一擧措之如何而已。 此所謂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 何患乎爲國之不治, 何慮乎一身之不善乎己巳正月壬午, 進致詞箋文表裏于惠慶宮, 仍行進饌, 以冠禮回甲之在是歲是月。 述正廟乙卯延禧堂進饌之禮, 以體昔日孝思也。 咸興民家, 又被燒, 至數千戶, 遣承旨朴宗薰慰諭, ?鹿茸頒丹木, 如癸亥。 諭八道四都道守臣, 若曰, ‘民也者王者之天也, 食也者, 民之天也。 國無民, 國不爲國, 人無食, 人不爲人。 若夫飢寒不離於身, 勞苦不休於時, 愁歎多聞於閭里, 徵斂日加於?屋, 抱刻骨之弊, 而莫由得聞, 有不堪之苦, 而莫由得達, 爲人君者, 雖欲愛民保民, 亦何得哉? ?在英廟朝, 五紀治平, 專在於愛百姓懲貪墨, 勤勤孜孜, 聖德大功, 史不勝書。 先朝仁政, 無非出於愛民, 而德化膏澤, 遍施八方, 雖億兆之衆, 愚夫愚婦, 無一不蒙被化澤, 抑亦予小子之仰覩者也。 又我英廟, 令守宰, 製進民隱詩, 其切於民弊者, 除之省之。 亦我先朝凡民之困苦者, 有達于聖聰, 卽命除之省之, 而又嘗飭道伯守宰, 以書以策, 歷陳農務民情。 九重深邃, 而萬民之苦樂, 不勞而得徹, 此予小子所以每思仰法者也。 顧今三陽載新, 萬品咸蘇, 而八方民生之憂患困苦, 正在於此時守令, 以民生之困苦, 閭里之艱難, 備陳其由, 亦具救濟之道, 以上道臣, 道臣收聚, 遍看拔其尤最善者, 區別論理以聞。 至於四都留守, 親加裁定以聞, 使小民之苦樂, 無一遺於予之親覽焉。’ 夏, 旱甚, 王, 乃親禱于南壇, 御步輿屛?, 蓋躬祝押嚴齋。 令灌薦?擧, 靈雨沛然, 袞衣盡濕, 都民環瞻, 至有感激泣下者。 飭諸道勸民代播, 仍令免稅。 敎曰: ‘雜穀雖不如禾稻, 賴天之靈, 善爲成就, 則吾民可以有食, 有食而得生。 爲民大幸也。 豈可與小民, 較其口吻之物? 況先朝戊午, 亦有?稅之命, 在今日, 又爲繼述之一事者乎? 廟堂? 絨딕郵璹증錯?, 減其直, 敎曰, ‘移民移粟, 雖爲聖人之所笑, 然孟子之意, 蓋謂不治本而只治末也, 非謂不可移粟也。 此猶然矣。 今若此土之穀, 使不得賣於彼土, 則是閉?也。 自一邑言之, 境內之民, 雖重於隣邑之民, 自朝家視之, 內外八方之民, 皆吾赤子也。 古之爲將者, 投?而飮三軍, 今邑邑, 皆不出穀於境內, 則他邑之民, 將益窘急, 豈不患貧患不均之義也且利之所在, 刑法不能禁, 今若於凶年, 勒使減價而賣, 則令有所不能行, 而富者必不出積穀之心, 此亦不可不念處。 十分講究, 毋徒擾民也。’ 錄中外死囚之久未決者, 六十餘案, 傅生者居三之一。 秋八月丁酉, 聖嗣誕生, 六日癸卯, 率百官親上致詞箋文表裏于王大妃ㆍ惠慶宮ㆍ嘉順宮, 仍御仁政殿受賀。 嘉順宮上箋始此, 命中外, 凡諸擧行, 一依惠慶宮所行之禮。 敎曰, ‘今日之慶, 卽國朝百年內初有之慶也。 親上殿宮之賀箋, 仍受大庭之祝嵩, 天日淸和, 神人胥悅。 此時恤之政, 宜及中外之民, 諸道舊還及拯劣米五分一, 各貢舊遺在限一萬石, 市民役限一朔, 懸房贖限三十日蕩減, 以示識喜同慶之意。 是歲饑, 湖西南最甚。 敎曰, ‘今年兩湖慘?之狀, 何待年分狀啓而知之今則秋事已訖, 滌場在卽, 民情之遑汲, 必當倍甚於收穫之前。 夙宵憧憧之念, 食不甘而寢不安。 大抵救荒莫先於力, 力莫急於寬賦。 如還餉ㆍ身布之或停或, 代錢代捧等事, 多有道臣狀啓, 所不敢循例陳請者, 今若拘於常格, 下不得條擧, 上不思闊挾, 則?彼之類, 尤何以支保乎今年兩湖年分狀啓, 勿循例套, 凡可以便民益民之事, 母論有例無例, 大小巨細, 斟酌參量, 勿爲, 直爲陳請。 則自上當拔例處分。 至於尤甚邑進上, 三名日方物, 物膳ㆍ朔膳以下諸貢獻物種, 幷依甲寅年例, 限明年麥秋, 勿爲封進。 殿宮所封, 亦爲停免。 外此邑辦民斂之係於享上納官者, 亦依甲寅例, 量宜免, 一分民力。’ 尋發內帑錢及胡椒ㆍ丹木, 分賜湖西ㆍ南ㆍ京畿ㆍ華城, 加劃湖南賑穀數萬石於所請之外。庚午營繕工役及年例燕貿, 幷命停之, 以歲飢也。 大司憲金履度, 疏論掖隷增額, 批曰, ‘昔在先朝, 有別技軍武藝出身, 故予遵此而行之者, 非耀耳目, 壯軍威之意, 是復舊制也。 然卿能盡言無諱, 使予欲無過者, 亦卿之忠也。 誠喜朝廷, 有直言極諫之臣也, 有何惜一隊兵哉加選武藝別技軍, 幷還付訓局’, 批玉堂金啓河陳勉疏, ‘有千羊一狐之褒, 特賜帑帛以表之。 辛未, 因經筵講義, 念遐鄕衛士傾産?足, 守衛寒?之苦, 命廟堂, 大會鄕民之編屬衛士來者於通衢, 一一曉撫, 詢其疾苦以聞。 仍飭諸道, 採訪民隱以啓, 敎曰, ‘大抵有災異之時, 則國家無事, 域民安樂, 由此深知災異, 必出於聖王之世, 安知非今時之不有頻見者, 反爲天心之有怒哉雲觀敬體此意, 察望之際, 十分謹愼, 務從實直。’ 飭中外獄囚, 重者勘處, 輕者疏放, 毋得牽連留帶, 飭都民飢之政, 廣抄貧戶, 親臨賜米, 鄕民之流寓無依者, 招集賜米。 冬十二月, 關西道臣, 以土寇洪景來叛狀馳聞, 賊起于嘉山, 郡守鄭蓍死之。 是時, 民不知兵, 歲且?饑, 賊乘時猖獗, 淸北八郡潰。 以李堯憲爲巡撫使, 開府節制, 遣中軍, 率京營兵往討之。 敎曰, ‘淸北諸邑, 皆已收復, 彼定城餘賊之假息肆狡, 亦將幾日, 誠不足爲憂。 但予所?然然者, 卽平民, 或致無辜而橫罹, 脅從或至誅殺之濫加也。 賊之爲渠爲魁者, 與頭目隨從之甘心同惡者, 必不過幾許箇。 而外此則皆愚蚩無知之氓, 爲飢寒所迫, 爲威虐所逼耳。 此輩之所犯, 雖曰罔赦, 以聖人泣囚祝網之心推之, 其實可矜, 不可怒也, 原恕而勞恤。 皆我親上死長之良民也, 予雖?德, 豈敢不顧?上天好生之心乎? 每觀前史, 爲將者, 或不免以屠戮爲事, 甚則殺害平民, 虛增首級, 此皆上干天和, 下虧人理者也, 焉有仁人在上, 不忍於人如彼哉今王師致討, 雖是不可已之事, 以吾民殺吾民, 亦何安於心況舊染俗, 咸與維新, 聖人攸訓。 而漢光武焚書, 以安反側, 裵度以皇帝命, 赦蔡人。 豈非可法於今日關西之事者乎今日之急務, 誅戮反輕, 而招徠爲重, 曉諭爲先, 而奠安爲次。 體予良苦之至意, 予西顧之憂者, 顧不在於方伯ㆍ鎭ㆍ守宰之一心對揚乎

[○]壬申夏四月, 關西賊平, 初, 官軍破賊兵于松林, 賊遁入定州, 據險自守, 城堅不以時拔。 至是, 巡撫中軍柳孝源, 火攻破之, 斬景來等獻。 王, 敎曰, ‘亂平之後, 安民爲急, 民邑復舊之政, 論功行賞之擧, 講究行之。’ 仍命進獻之出於民者, 幷停, 還穀之停與逋者, 亦蕩減。 饋賑以安貧民, 除庸以慰鄕軍, 將士之盡忠立?者, ?其葬錄其孤, 西人之奮義?力者, 特奬用之, 多至顯職。 其有誘脅誤者, 肆赦不問。 於是, 人情大安, 如未始有?亂也。 賊發之初, 熊岳副都統, 以皇旨領甲軍, 到中江爲聲援, 遣安州牧使趙鐘永, 勞問?其軍。 是月, 受平賊賀于仁政殿。 秋七月丙子, 冊元子爲王世子。 丁丑, 御仁政殿受賀。 敎曰, ‘日吉辰良, 冊儲禮成, 此乃皇天祖宗, 篤佑積慶於邦家者也。 上而供殿宮嘉悅之歡, 下而答臣民欣告之心。 況今番凡百儀節, 皆用己卯庚申之例, 而予小子不?之慟, 又如庚申冊禮時聖敎矣。 當此遇慶識喜之時, 亦爲仰述之一端。 諸道己巳舊還十萬石, 貢人舊遺在一萬石, 市民?役限二朔, 泮人?役限三十日蕩減。 己巳以後, 遇諸道停退軍布錢, 分數減, 結錢ㆍ僧役稅錢ㆍ貢錢, 亦爲一體量減。 此卽予小子仰述廣慶, 而不敢有過之意也。’ 九月, 遣大臣酌獻于永禧殿, 以聖祖龍飛舊甲, 而時在靜攝也。 開國勳一等諸臣家, 幷遣官致侑。 以先朝周甲誕辰日, 命於華城鎭南樓前, 聚四民賜米, 試境內儒武賜第, 推恩于六十一歲人, ?市?, 庸示是歲寓慕之偏在是地也。 癸酉, 以王大妃周甲慶, 親上致詞箋文表裏, 受賀頒赦, 命內閣開局, 校印正宗御製全書, 旣成, 又以詩若文, 合編於列聖御製, 繼印莊獻世子睿製。 至明年夏, 役始竣, 奉藏于奉謨堂、華寧殿及五史庫。 甲戌, 畿甸嶺湖南饑, 命停方物朔膳甲?節扇之貢, 頒內帑銀貨ㆍ丹木ㆍ胡椒, 以濟賑需, 船運關西粟, 哺畿民。 乙亥十二月乙丑, 惠慶宮薨逝, 王, 慟慕甚至, 凡典禮儀文, 必詢議斟酌以行之。 嚴於制義, 篤於伸情, 一以誠敬爲歸, 廷臣以服制爲疑, 王, 乃博採群議, 敎曰, ‘本生降等, 通上下一也。 雖無於禮, 以予小子今日罔極之情, 昔年追慕之心, 當起義而服制, 況有程、朱定論, 大臣館閣之議又如此, 無復可疑? 以本生降等磨鍊以入, 遂定以大功九月。 朝臣雖無服制, 以從上之義, 進見用淺淡服, 以終九月之期, 此亦王義起裁定, 得折衷之宜也。 上謚獻敬, 以禮?于顯隆園。 丙子, 以舊甲重回, 致侑於忠烈ㆍ顯節兩祠及文正公尹煌、忠愍公林慶業, 遍及殉節斥和諸臣, 追述英廟故事也。 丁丑二月甲子, 詣太廟、景慕宮, 行世子謁廟禮。 三月甲寅, 行世子入學禮。 命?襄陽貢蔘, 廢宗?子女之錮于沁島者, 王常使人存訊周恤, 至是命移置防守, 大臣臺閣, 爭之不能得。 王曰, ‘若有一毫身犯, 斷以大義, 則予亦無可奈何。 噫! 彼凶徒之事, 渠何以知之予之不得允從於卿等之請者, 非以恩掩義也。’ 戊寅, 麗王諸陵之在開城者, 歲遠荒廢, 耕樵不禁, 至有犯葬塋域者。 王聞之, 切責守臣, 罷其職, 令修之。 申明禮官奉審之規, 每歲守臣以聞。 仍命收錄王氏遺裔, 以示朝家不忘舊之意。 己卯三月壬子, 王世子冠于景賢堂。 禮旣成, 敎曰, ‘國有大慶, 而惠不及民, 誰與爲慶? 命施?惠于貢市民及諸道舊還有差。 夏, 湖西水, 遣承旨鄭元容慰諭, 仍施?恤。 八月, 行世子嬪揀擇之禮。 壤趙氏膺選, 副司直萬永女, 今王大妃也。 以十月壬寅, 王世子行親迎禮, 王, 御崇政殿, 受群臣賀, 頒赦。 庚辰夏, 价川郡有水災, 遣直閣鄭基善慰諭, 本道鹿茸常貢之半, 以濟之。 辛巳元朝, 行賀儀, 親上表裏于王大妃, 以舟梁六十年也。 三月己未, 王大妃薨, 王, 哀慕如庚申。 議上徽號曰, 睿敬慈粹, 諡曰孝懿。 領敦寧府事金祖淳, 上疏引朱子永阜陵議狀, 歷論健陵宅兆之可憂, 不可以爲千萬年之圖, 仍辨本陵卜兆, 實非先王之睿定遺旨, 請新卜吉地, 擧水之遷, 行魯之禮。 王, 泣而賜批曰, ‘大行大妃平日, 以是大憂, 屢爲下敎於小子者也, 今見卿疏, 尤不勝咽悶悚。’ 卽令大臣卿宰, 詢議以奏, 議旣上, 敎曰, ‘盈庭之議, 無一異同, 登筵齊奏, 皆請?斷, 是謂大同’, 遂卜地于顯隆園西岡子坐之原。 以九月庚申, 遷陵合。 禮成時, 遍審封天作之吉兆, 又與園寢隣近, 情文允。 及舊陵啓隧, 果有水患。 僉曰, ‘此擧乃吾王誠孝之感也。’ 秋有輪行乖疾, 自西而來, 旬日之間, 都下死亡, 以累萬計。王, 大加憂, 廣施隱恤, 特遣亞卿, 行禳災祭于諸山川, 兩西幷設祭慰祭, 寔遵正廟己未故事, 成周?辜之制也。 先是, 有自燕肆, 購來《皇淸通考》新編者, 其載本朝辛丑四大臣事, 誣失實。 王聞, 而取覽, 大驚, 命專价辨正, 刊去誣奏句語, 壬午使還, 以改正本齎來, 乃以事告于廟。 春, 幸華城, 謁陵園駕還, 敎曰, ‘近年以來, 每欲一番洞諭而未果, 一自謁陵園, 益不勝耿耿者, 卽子女事也。 渠輩果何干犯, 一曲海島, 天日不見嫁娶不議, 而人倫廢矣, 風雨不庇, 而男女幾於混處矣。 囚首鬼形, 啼呼凍, 欲生而不得生, 欲死而不得死, 尙忍言哉尙忍言哉嗚呼! 我先王, 以篤友之聖德, 庇保其父於必死之日, 此一國臣庶之所共欽仰者。 顧予否德, 沖歲嗣緖, 竟使不免於罹, 而況其捏合於邪獄而殺之者, 又萬萬不近理者乎設有干涉, 罪止其身足矣。 竝其無干之支屬, 禁拘迫, 使其生不如死。 不亦甚乎摠而言之, 由予否德, 不能善繼而善述也。 寧不然而悚乎當此年, 孺慕之懷, 自覺疊疊, 今不明示予心, 更待何日其令王府, 子女所居圍籬防守, 卽爲撤去, 其任便居住, 自同常人, 其男女婚娶之需, 自內備下。 亦令宗親府主管, 從速擧行。 嗚呼! 今玆之擧, 寔推本於先大王篤友之聖心, 而以示我萬世子孫也。’ 因戶曹判書沈象奎筵奏, 敎曰, ‘年來經用之乏, 雖已聞知, 猶不料若是之遑急也。 旣聞之後, 安可袖手而已卿與惠堂及諸備堂, 會同停當, 上自御供, 以至?費, 一以丙申至丁巳, 摠爲準何事爲踰制, 何端爲啓倖, 一一査整。 免稅結之在法當收還者, 亦爲査櫛以聞。’ 耽羅氣熾行, 死亡甚多, 特遣御史慰諭, 仍行慰祭, 兼訪民隱。 十二月丙寅, 綏嬪卒逝, 王, 哀慟踰節。 內下銀子萬六千兩, 敎曰, ‘慈宮平日爲念終事, 有別置者, 出給戶曹, 量宜補用。’ 用大臣諸臣議, 服?麻三月。 議謚顯穆, 宮曰景祐, 園曰徽慶。 癸未, 旣葬, 服除視事, 猶御素衣冠, 大臣言其違制。 王曰, ‘便着非法服, 故燕居以縞素之意也。 予雖固陋, 若是法服, 喪服, 豈用之乎’, 竟以終三年也。 魂宮之奉於昌慶宮內, 園官之改稱參奉, 輒有守經之論, 據禮以爭, 王曰, ‘親喪之固所自盡, 上下一也。 予亦豈不折衷於情禮之兩得其宜, 而致使有憾, 於終事之際乎’ 又曰, ‘今以予爲過, 則予當以爲親之心, 受以爲過, 不敢辭也’, 又曰, ‘予不過象生之義而已, 非敢越制也。’ 凡隆殺損益之間, 無不博詢審處, 而至於情不可已, 禮所得爲, 則確然不撓, 嚴乎別嫌之義, 而極夫報本之誠, 於是兩無所憾矣。 以庶流限品疏通, 詢議于大臣卿宰, 仍令廟堂銓曹, 講究議定, 著成節目施行。 甲申三月, 詣大報壇, 行禮以灘舊甲, 志風泉之感, 追述英廟甲申故事, 致侑於宣武ㆍ忠烈ㆍ顯節三祠, 義州諸義士壇, 及泉人壇, 下送香祝。 諭祭, 錄用李提督祀孫。 秋領敦寧府事金祖淳, 自關西還奏, 辛壬亂後, 戶多流亡, 孤兒寡婦, 無依無告, 歲且。 舊還空簿, 無處指徵之狀, 王, 特命蕩其逋?六萬九千三百餘石, 爲一路殘氓奠安之方。 乙酉, 判中樞府事金思穆, 以八十六歲, 回司馬榜, 王曰, ‘此朝廷吉祥也。’ 援先朝盛事, 賜杖, 宣法, 仍致侑于慶恩府院君。 九月乙未, 親祭于健元陵, 王世子從焉。 以太宗定鼎漢師, 上壽太上殿之歲月日也, 施賞賚于將事諸臣。 丙戌春, 敎曰, ‘屋春窮, 何歲不然而今當前秋大無之餘, 哀我畿甸湖西之民, 何以爲生入則室室懸磬, 出則村村絶烟, 其得免啼呼顚連, 相抱而委壑者, 幾希。 古人以匹夫匹婦之不獲, 尙爲其恥, 況予爲民父母, 不能使八方黎庶, 常享含哺腹之樂, 而凶年饑歲, 徒致幾萬生靈流亡顚之患, 而莫之救, 尙何心, 玉食錦衣之安且美乎念彼鵠之狀, 不覺于中, 而繼之以涕也。 移粟設賑之擧, 才有成命, 爲方伯ㆍ守臣ㆍ邑宰者, 固當竭其心力, 活我餘遺。 顧予憧憧耿耿之懷, 實未敢一時暫忘, 有不足而無自。 玆下帑銀錢ㆍ丹木ㆍ白礬, 以補畿湖四都賑資, 廟堂量其饑口多少, 劃付各營, 使之原定外別設, 以示予不敢忘之意。 至於隣里之曉諭相貸, 耕種之勸課及時, 抄飢之漏濫, 饋給之精否, 在於邑宰之賢不肖。 當待畢賑, 行賞罰, 而亦當別遣繡衣, 以爲按廉之地, 令廟堂, 措辭知委于京畿湖西四都方伯守臣, 各念對揚。’

丁亥春二月, 命王世子聽政軍國大事, 則自決之。 敎曰, ‘予自辛未以後, 多在靜攝之中。 雖或粗安, 有時常致機務多滯。 國人之所憂, 卽予所自憂也。 世子聰穎, 年漸長成, 邇來之侍坐攝享, 意有在耳。 遠稽有唐, 近法列聖代聽之擧, 予心已定。 一藉分勞, 以便調養, 一使明習, 以達治道, 此 社生民之福也。 咸造在廷, 爰告大計。 王世子聽政, 一依乙未節目擧行。’ 世子陳疏懇辭, 批曰, ‘今日之事, 不亦宜乎? 予勞爾不思分, 而予誰望乎? 況國朝故事, 非止一再, 我家禮則然矣。 爾何辭讓之爲噫! 孝友恭儉, 敬天愛民, 卽列聖心法相傳, 敬之戒之, 母怠母忽, 克體予付托之至意。’ 疏至三, 又批曰, ‘予勞爾代, 卽亦天道之經。 予豈非經之是蹈乎敬之哉? 四勿, 修身之本, 九經, 治國之要, 克勤克儉, 不作無益, 視遠聽德, 用孚于人心。 以是月甲子, 御仁政殿, 受聽政賀, 告于廟ㆍ社ㆍ宮頒赦。 命世子嬪産室, 待五月設廳。 秋七月辛酉, 我主上殿下, 誕降, ?七日丁卯, 御仁政殿, 受元孫誕生賀。 世子上疏請進號, 批曰, ‘所請出於人子之至情, 予非不知。 但人之自知亦明。 予以否德, ?承丕基, 惟其心若臨淵。 將及三十年, 生民困窮, 百度咸墜, 重以靜攝之故, 不能自强。 至使汝分勞代決, 以屬擧國之望。 如是而何敢自比於古昔先王之盛擧也且此事, 猶孝之文也。 爾若念予委寄之重, 好學勤政, 法祖愛民, 使將殆之國勢, 之磐泰之安, 其爲孝之實, 豈金泥玉牒之觀美一時而已是所謂三牲之養, 不如養志也。 爾其勉諸。’ 世子率百官, 庭啓以請, 王猶謙讓不許。 啓至五, 始下勉循之敎。 乃議上尊號曰淵德顯道景仁純禧, 王妃尊號曰, ‘明敬。 九月辛亥, 受冊寶於慈慶殿, 受賀於明政殿, 明日, 世子行兩殿進爵禮于慈慶殿。 戊子, 以王妃春秋滿四旬, 二月壬午, 世子進爵于慈慶殿, 王與王妃, 同臨以受, 慈孝融洽, 祥和溢於。 十月, 因雷異減膳避正殿。 適於復膳之明日, 雷又動, 王以悚之心, 有倍於初, 下敎責躬, 又減膳避殿五日。 冬, 世子, 以王聖壽四旬, 御極三十載兩慶, 竝湊於明年, 援宣祖ㆍ肅廟ㆍ英廟故事, 請稱慶進饌, 王以歲儉?之。 疏至再益懇, 乃許。 仍敎曰, ‘念彼飢氓, 實深不安。 爾須體予此意, 凡百儀物, 一從簡省, 然後尤爲養志之孝也。’ 己 丑元日, 受賀于仁政殿。 二月丁丑, 世子率百官進饌, 御明政殿受之, 行九爵之禮。 越三日, 又進小酌于慈慶殿, 仍行內宴。 十一月, 命元孫爲王世孫, 冊禮擇吉擧行。 仁祖己丑, 冊顯廟爲世孫, 歲甲同符, 禮合繼述, 以是年定號, 待來歲行禮也。 庚寅, 摹寫御眞, 世子書標題, 妥奉于奎章閤之宙合樓, 遵正廟故事也。 五月壬戌, 世子薨, 王悲?之中, 復親庶政。 未嘗視以戚容, 而辭敎之間, 往往有不忍讀者。 禮官據《喪禮補編》受敎, 請服斬衰三年, 王, 以三代以來, 歷代及國朝所未嘗行也, 引正宗丙午文孝世子服制, 命斷以舊制。 禮官復援仁祖朝諸臣議, 請詢于大臣儒賢, 遂行斬衰之制, 賜諡孝明, 廟曰文祜, 墓曰延慶。八月己丑、葬于楊州之天藏山, 卽今綏陵也。 世孫冊封吉日, 自前歲, 已有涓定。 至是, 敎以英廟甲申皇朝洪武故事, 兩合於述先從周之義, 王世孫爲東宮講書院衛從司, 改稱春桂坊。 受冊用原定日, 九月庚午, 御仁政殿, 行世孫冊禮, 受賀頒赦。 命蕩減諸道舊還, 各貢舊遺在, 市廛役及軍錢結錢僧役稅ㆍ貢錢有差, 以示廣慶導和之意。 時, 臺閣多懲討之論, 因相臣聯箚, 敎曰, ‘國家不幸, 遭五月之酷變。 予上爲宗社, 下爲生民, 雖不得不復臨國政。 然亦何心焉君臣上下, 收拾已亂之心神, 以調護予躬, 以輔養沖孫, 懷保小民, 度歲年, 尙懼其不及。 而首尾六七朔之間, 朝廷之上, 無他猷爲, 日日紛紛, 若將不及者, 非彈人殺人之論, 則一無聞焉。 此果何許時乎古今之稱兇者, 莫首於四兇, 而以汨陳而, 其餘皆流也, 放也, 竄也, 豈聖人柔弱之致原天理察人情, 適可以止故耳, 必如後世之屠戮殄滅, 然後爲快哉予竊有訝怪者, 今日廷臣, 未見有以敎化導予者, 而惟望予之果於誅討。 予本否德, 故謂不足語仁而然乎, 太失於柔, 故欲其立威而然乎使予果於立威, 則亦豈今日廷臣之福也況近日聲(計)〔討〕諸人之事, 皆是丁亥以來事端, 無論誰人何事, 於予心其果所欲聞者乎若謂予欲聞, 則是無人心天理也。 尙亦何言今此縷縷者, 政所以淑人心靖世道者也。 先自卿等, 體認予意, 相與告曉而對揚, 則實亦國家之大幸也。’ 辛卯五月八日, 酌獻于景祐宮, 昨年卽綏嬪周甲也。 酌獻旣有成命, 遽値悲遑, 寢閣至是, 以是日行禮。 仍遣承宣, 致侑于朴忠獻公。 壬辰春, 敎曰, ‘當今年追念皇朝再造之恩, 天高地厚, 報答無所。 風泉之感, 於何可憑宣武祠ㆍ征東官軍祠, 遣承旨致侑, 平壤武烈祠, 一體致侑, 獻官道伯爲之。 至於本國殉難樹勳諸臣之忠之勞, 又豈可忘川戰墟, 因禮堂言, 已命致侑, 而其尤卓然而著者, 亦不可無示意曠感之擧。 忠烈公宋象賢, 文烈公趙憲, 忠烈公高敬命, 忠武公李舜臣殉節之所, 與同殉將士, 設壇致祭, 祭官, 以本道守令中秩高者擇差。 兩忠烈及文烈家, 今無祿仕之人, 奉祀孫, 令該曹, 問名收用。 文忠公李恒福, 文靖公尹斗壽, 忠翼公鄭崑壽, 文忠公柳成龍, 忠壯公權慄家廟, 亦遣承旨賜侑。 而祠版之在鄕者, 道內守令之曾經承旨人差祭。 嗚呼! 首尾八年之艱, 輸忠節之人, 其麗何限, 禮繁則反屑, 今不可一一盡擧, 擧其最者而行之, 然曠感不忘之意, 實包於其中。 豈以或行或否而有間也旣又命尙州、甑淵三從事立處, 亦一體賜祭。 四月, 領敦寧府事永安府院君金祖淳卒。 王, 震悼, 敎曰, ‘記昔庚申, 寧考執予小子手而詔之曰, 「今予以爾托于此臣。 此臣必不以匪道輔爾, 爾其識之。」 事如昨日, 言猶在耳。 逮嗣服三十餘年之間, 托之心者, 非但以肺腑故也。 惟其勤勞忠貞, 一心王室, 內而至誠竭力, 輔予以正, 外而彌綸鎭安, 弘濟時艱, 國家之保有今日, 伊誰之力眞不負先王寄托之聖意, 而今焉已矣。 予之慟之外, 國事將何賴焉念及於此, 若濟失揖’, 仍命賜東園副器, 親臨擧哀於闕庭, 成服日, 親撰文遣承旨祭之。 旣而, 用宗伯趙萬永言, 詢議于大臣館閣, 追配正宗廟庭。

[○]秋有水災, 王, 憂之, 罪已減膳, 遣近臣祭, 疏決京外獄囚, 申嚴禁釀之令。 頹戶恤典, 特命加厚, 分遣史官, 遍訪則掩?之, 壓則優恤之。 仍飭被災諸道倣行之。 是歲, 畿甸湖西海西饑畿爲最甚。 拜陵還, 敎曰, ‘畿輔, 國家根本之地, 而偏被極備之災, 致此大無之歲, 居常憂憫, 寢食靡甘。 乃於輦路, 益見其孔慘, 浮於所聞。 擧一反三, 全道可知。 宜有別般軫恤之政, 不嫌於經法之外。 旱田給災, 國典所無, 而似此之時, 不可拘常令。 道臣待年分後, 就各邑旱田, 成川覆沙, 十分精抄, 別具狀聞。 特給當年之災, 目前之急。 而若非畿民役, 偏多於今年, 畿內農形, 最於諸道, 又非予目見其實狀, 則俱不可許也。 非但他道之不可以此希望, 雖畿民, 亦不可視爲常例, 廟堂知悉。’ 又敎曰, ‘嗚呼! 肆予否德, 承丕基, 臨御三十有餘年之間, 無一可稱於懷保民生, 慰悅民志者, 而財日益, 民日益窮, 然至於莫可收拾之境。 思之及此, 寧不于中今年年事, 自春秋, 亢旱爲愆於播種之際, 巨浸卒痒於穗穎之時。 加以風ㆍ雹ㆍ蟲ㆍ霜, 無災不備, 畿湖海三道之農形, 遂判大無。 民有何辜咎實在予。 當此隆冬之候, 哀彼失農失業之民, 將何以絲身而穀腹, 得免於轉壑之患乎莫曰九重深邃, 謂予不念於民情。 當錦衣之體, 而思吾民無衣之苦遇, 玉食之適口, 而思吾民無食之艱, 一衣一食, 實不敢自安于心, 然然, 若在已。 凡係荒之政, 廟堂雖已講究區劃 而此不過歲常典, 則其可曰: 盡吾之心乎苟利於民, 尙何所惜玆又以內帑留儲銀丹木白礬, 特爲頒下, 補賑資。 至若抄飢之漏濫, 饋給之精否, 予當有入聞之道, 待畢賑以爲賞罰之地。 然爲今日方伯守宰者, 苟能體予夙宵憧憧之至意, 則必賞竭於救慰恤之節。 而大臣頃以不堪任守令, 卽能送爲奏, 諸道之尙此寥寥, 是豈實心對揚之道乎亦令廟堂, 更加申飭, 期有實效。 而惟我三道四都之民, 明聽予心腹之諭, 無輕離鄕井, 無胥動怨咨, 勉相資, 各安其生, 則上天至仁, 亦豈無嗣歲之望乎’ 又命三道正朝方物ㆍ物膳, 竝停封, 以助賑需, 施都下抄戶賣米之政, 王城內開川, 下流湮閼 遇水輒汎濫沈, 都民病之, 王, 命濬之, 是役也, 例有百官ㆍ軍民ㆍ生徒ㆍ員役ㆍ工匠赴功之規, 王, 以歲, 不可用民力, 特令除之, 頒帑銀以濟之。 仍命廟堂, 更爲區劃察飭, 以英廟庚辰, 地平爲準, 功訖, 其害乃祛。 時, 適移御慶熙宮 癸巳冬, 昌德宮之大造殿ㆍ熙政堂火, 敎曰, ‘顧予否德, 承丕基, 天怒於上, 民怨於下, 荒臻, 民生顚連, 災疊至, 國儲乏。 興言及此, 心。 今此回祿之災, 又何爲而發也大內殿閣, 蕩爲灰燼, 列聖朝臨御之所, 攀瞻無地, 驚悚震, 靡所措躬。 一則寡昧之罪也, 二則寡昧之罪也。 此雖與法殿有異, 不可晏若無事。 減膳三日, 以示予恐懼修省之意, 而此政君臣上下, ?慮交勉之日, 廟堂體予至意, ?盡匡弼勵翼之義, 以副應天以實之道焉。’ 仍命廟堂, 措?財力, 營度改建。 權減嶺南關東貢蔘及四道甲價米, 內局燕貿之半, 限三年以補其用。 甲午春, 敎曰, ‘當此陽和布德, 萬品回蘇之時, 哀彼無告之赤子, 不幸遭値, 加以疫, 流離顚連, 死亡相續, 已極慘矜。 而又不能以時埋, 使屍骸狼藉於道路, 有足以干和而致。 靜究厥咎, 予實慙痛。 三營門將臣, 率五部官, 躬往各其字內, 逐處搜, 一一掩埋, 無草率遺漏之歎。’ 夏, 行京外徒流疏放之政, 惟贓官逋吏, 不與焉。 配案中命區別付標以入, 爲其害於民也。 王, 自庚寅以後, 勉抑至情, 酬應機務, 一如平素, 而常忽忽若無樂。 及壬辰明溫、福溫兩公主, 又先後夭逝, 悲戚相續, 榮衛非昔, 是歲夏秋, 屢示不豫。

 

冬, 偶有癤候, 旬日之間, 醫技罔效, 竟以十一月十三日甲戌, 大棄群臣于慶熙宮之會祥殿, 春秋四十有五, 在位三十有四年。 輿婦孺, 波奔雨泣, 窮鄕遐, 田夫ㆍ野, 莫不震驚號呼。 思慕至德, 從絶奔赴朝, 哀痛于闕下者, 踵相接也。 群臣議王功德, 上謚, 謚法忠信接禮曰文, 兆民寧賴曰安, 保大定功曰武, 柔德安衆曰靖, 博聞多能曰憲, 夙夜儆戒曰敬, 安民立政曰成, 繼志成事曰孝, 領敦寧府事趙萬永, 言 ‘王德業隆盛, 宜百世祀’, 於是, 三公ㆍ九卿ㆍ館閣ㆍ三司會議, 遂尊爲世室。 明年夏四月十九日戊申, 葬于仁陵, 卽交河郡舊治後岡坐乙之原。 嗚呼! 痛矣。 明敬王妃, 誕二男三女, 男長卽孝明世子, 世子誕今上殿下。 殿下卽位, 追尊世子爲翼宗大王, 次男夭逝, 女長明溫公主, 降東寧尉金賢根, 次福溫公主, 降昌寧尉金炳疇, 俱早卒。 季德溫公主未。 永溫翁主, 淑儀朴氏出, 未家而夭。 御製詩文十二卷, 內閣效印編, 入于列聖御製, 藏之奉謨堂及史庫。 王, 聰叡篤厚, 凝重淵深, 不威而嚴, 不察而明。 臨朝寡默, 儀容肅穆, 不以色辭假人, 而應接之際, 溫粹謙和, 無滿假矜莊之意。 以尊尙儒賢, 委任廊廟, 爲治本政要。 凡小大進言, 輒翕受如不及, 其有不中於理者, 亦未嘗遽折之。 於一切事物, 絶無好樂之偏, 燕居常終日危坐。 宦官御, 罕與之接, 唯書卷翰墨, 怡心於政務之暇。 奎藻甚富, 而或散佚不收, 宸翰亦臻其妙, 而退然不以自命。 於書無所不覽, 過目輒記。 經史性理之文, 究心體認, 務歸實用, 以至典章ㆍ儀文ㆍ法律ㆍ制度, 無不默識而該括, 王之於學, 可謂有本而有末, 王之於道, 可謂不偏而不倚。 故不屑矯矯之行, 而澤有以普被, 生民不求赫赫之譽, 而功足以大服人心。 三紀治平, 可以有辭於天下後世, 不其盛歟’ 然王之所以致此, 自有爲之大本者。 蓋聞仁孝恭儉, 乃人君之大德, 文王之止於仁, 武王之達孝, 堯之允恭, 禹之克儉, 經傳所稱可紀也。 王之於仁, 得自天賦, 至仁所推, 公以爲治, 恕以處事。 自沖歲, 養德, 以至晩年, 久道粹然如一日。 雖蟲息之微, 不忍拂其性而傷其生, 含育愛恤之意, 不以遠近爲間, 施之於政, 保民爲先。 或有言及生民利病, 閭里疾苦者, 雖尋常造次之際, 必改容而動聽, 一雨一暘, 聖念憧憧。 遇水旱饑饉, 輒發倉以振之, 或船粟以哺之。 每停餉, 以寬其力, 必捐帑藏, 以濟其食。 裁省至及於正稅, 減特先於貢膳, 憂勤優恤, 靡不用極。 諸道以燒戶ㆍ死聞者, 雖少, 必加恤於恒典之外, 多者則輒遣近臣慰撫之。 每歲春正, 宣綸以飭方岳臣, 省耕必勤, 止輦以詢, 貢市民弊必釐, 祁寒盛暑, 命出輕囚, 衛士之呼寒者衣之, 大雨則訪頹戶而奠之。 凡政令施措語默動靜, 無一事不在於惠鮮懷保。 常曰 ‘財賦出於民, 以事上者, 不可以私意濫費, 府庫之藏, 將以有用也, 不當出而出, 當出而不出, 其失均耳。’ 故愼賜與絶零餘, 嚴立規度, 皆所以愛民力也。 其於刑, 尤所兢愼, 遇慶而施疏蕩。 値災而行審, 哀矜惻之意, 常寓於律令條例之內。 情法有疑, 則必博詢而裁之, 未嘗以喜怒爲輕重, 唯事關倫紀, 罪犯贓汚, 則不之貸。 至於干名義而蔑天憲者, 不得已行生道之殺, 而亦必欽恤服念, 國論大同然後, 施之。 辛酉以後之治邪獄也, 壬申之勘西賊也, 龍蛇之化, 常多於鯨之戮。 若夫出治大範御世苦心, 亶在於全保世臣, 故終王之世, 除非身犯惡逆, 名載丹書者, 蓋無罹枳廢之家, 此王之仁也。 聖人有言, 君子體仁, 足以長人, 王之謂歟王孝性天至, 已自孩提, 儼若長成。 雖嬉娛悅, 意所甚欲者, 正廟不欲則不敢爲, 一有所訓, 奉之終不敢復焉。 事殿宮, 一於誠敬, 無間然, 而於正宗, 常致嚴畏, 於孝懿王后, 益盡親愛, 正廟稱之。’ 王以沖年失, 至痛在心 奉貞純后ㆍ孝懿后ㆍ惠慶宮ㆍ綏嬪, 極容色之愛, 盡志物之養, 洞屬如不及, 和敬兩至。 定省必以其時, 風雨寒暑, 不以爲間, 或有故, 輒以內竪問今日安否, 內竪還, 王乃喜, 及莫亦如之。 中歲惟綏嬪在世, 王事之彌謹, 必先意順志, 曲盡其歡, 宮之間, 和氣?然。 綏嬪每致膳於王, 王適厭進, 亦必少嘗, 嬪又勸又嘗, 雖一飯數至, 未嘗徒還也。 綏嬪常處養心閤, 爲近王所。

 

壬午以後, 王, 每獨立凝望, 玉色凄然, 若有而不得也。 當食輒停箸不進曰, ‘不能下咽’, 聞者無不感泣。 淑善主, 王之妹也, 撫愛特至。 其下嫁也, 在外邸三日, 戀如遠別, 其還也, 迎勞甚備。 及出閤, 以不得源爲恨, 問訊贈遺。 無虛日, 或有所求, 必委曲副之。 聞其將入宮, 則喜見於色, 惟日以幾, 友之篤孝之推也。 嘗於夜對, 宣諸臣饌, 命有老親者, 懷果以遺之, 亦所以錫類也, 奉先之思, 誠意純一, 征謨事功, 率以堂構爲義, 所戒愼, 在琴瑟之更絃。 廟宮享祀, 每躬將必省, 物脩, 漑齊齊如也, 勿勿如也。 初獻旣成, 禮儀使以入次啓, 王, 植立若不聞, 百肅雍, 莫敢失儀。 朔望拜眞殿, 春秋謁寢園, 未嘗或闕焉。 季秋親祭于明陵, 孟冬, 親傳太廟香祝時, 玉候已多不逮節, 而群下未之知, 居無幾, 而仙取遽賓, 嗚呼! 痛矣。 此王之孝也。 經曰, ‘因嚴以敎敬, 因親以敎愛。 聖人之敎, 不肅而成其政, 不嚴而治其所因者, 本也’, 王之謂歟。 王之德性, 以敬爲體, 表裏動靜, 粹然無間, 尊祖事親, 以之臨民御下, 皆是敬也。 以莊重端穆之度, 存戰兢臨履之戒, 自少坐必臥必正, 終日無言。 望之儼然有儀, 而可畏, 卽之然有德。 而可象對越, 一念常所憧憧, 語及日月風雨, 必致尊而不敢忽。 容光所照, 未嘗跛倚將臥, 則雖暑必闔戶。 迅雷輒肅然變色, 整襟而坐, 不霽則竟夕不遑寧。 遇災雖小, 恐懼, 若無所容, 飭中外無敢諱也。 對常膳必以貌, 偶或不適, 亦不以, 見有遺粒, 必令拾取曰, ‘天之所賚, 民所以爲天, 可不敬乎’ 優待高年, 雖微者, 亦異之。 禮接臣僚, 疾病靜攝之中, 移次蒼遽之際, 非承史則止之, 酬酢謹嚴, 民國謨, 講讀規戒之外, 終未聞一言及於燕私。 尤致意於敬大臣, 每卜必手整衣冠端而批其名, 其進見也, 辭令必謹, 雖甚病, 不以褻服, 以至憑之日, 亦然。 此王之恭也。 《禮》云 ‘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又曰, ‘中正無邪, 禮之質也, 莊敬恭順, 禮之制也。’ 王之謂歟。 王, 性不喜奢華, 寢御之室, 惟書史硯?而已。 凡珍異玩好之物, 悉屛去不留曰, ‘焉用此爲, 徒喪人心志耳’ 盤膳絶奇之味, 服御無錦綺之飾, 袞章法服之外, 惟苧綿之屬, 以至衾帳, 往往澣濯而補綴之。 嘗進一半臂紋緞也, 王, 曰, ‘此果好乎’ 一御旋解, 左右不敢以復進, 王, 固不復索也。 所居塗之剝者, 窓疏之透缺者, 未嘗命之補改, 筵肆席, 時多破, 宮中傳誦以爲儉德之至, 符于英廟。 或以房楹迫陋, 請拓之, 王曰, ‘容膝足矣。 何必侈大也’ 是故, 內無修葺之工, 外絶營作之費。 東西兩闕, 俱以回祿, 有改建之役, 亦戒飭諄諄, 母得侈麗, 裁復舊觀而止, 竟不增一椽也。 此王之儉也。 《易》不云乎, ‘節以制度, 不傷財不害民。’ 王之謂歟王之有此四德, 皆出於性之自然, 率性爲道, 已不與焉。 無一勉强作爲之跡, 內外純粹, 顯微無間, 不雜乎王覇, 不眩乎義利。 上以承祖宗精一之傳, 下以子孫燕翼之謨。 親賢樂利, 沒世不忘者, 卽惟曰誠而已。 夫渾然天理, 眞實無妄, 不待思勉而從容中道, 此天道也, 天道者, 君道也。 天以元亨利貞, 行四時生百物, 而孰能彷彿其聲臭也哉亦惟曰誠而已。 故詩人頌文王盛德, 以配于天。 其《詩》曰, ‘維天之命, 於穆不已, 於乎! 不顯文王之德之純’, 蓋曰, 天之所以導文王之所以爲文也。 惟王之廟號曰純, 不亦宜乎國人無智愚賢不肖, 咸曰, ‘大行受大名。’ 王嘗自號純齋, 斯又非天道成始成終, 自然之驗與於乎! 至矣, 於乎! 至矣。 今我 嗣王殿下, 以臣宗薰, 事先王久, 德也詳, 命臣以狀德之文, 臣悸懼隕越, 不知所以稱塞。 謹稽內下行錄, 旁德業之布方策塗耳目者, 輯如右。 惟兢兢焉不敢爲辭, 以徵百世之惇史云爾。【右議政朴宗薰製。】

 

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實錄附錄

 

【태백산사고본】 35책 1권 9장 B면

【영인본】 48책 4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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