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南冥曺植先生行狀 - 鄭仁弘 撰

야촌(1) 2014. 3. 9. 23:44

남명 조식 선생 행장(南冥曺先生行狀)

 

선생의 성은 조씨(曺氏),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태조의 딸 덕궁공주(德宮公主)가 하가(下嫁)하여 아들 서(瑞)를 낳았는데,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선생의 시조가 된다.

 

고조 휘 은(殷)은 중랑장을 지냈고, 고조비 곽씨(郭氏)는 현감 곽흥인(郭興仁)의 따님이다. 증

조부 휘 안습(安習)은 성균 생원이고 증조비 문씨(文氏)는 학유 문가용(文可容)의 따님이다.

 

조부 휘 영(永)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비 조씨(趙氏)는 감찰 조찬(趙瓚)의 따님이다.

부친 휘 언형(彦亨)은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를 지냈는데, 충순위 이국(李菊)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신유년(1501, 연산7) 6월 임인에 가수현(嘉樹縣) 토동(兎洞)에서 선생을 낳았다.

 

관례를 올리기 전부터 공명과 문장을 이루리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당시 세상을 압도하고 천고의 옛날 사람들을 능가할 뜻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는 《춘추좌씨전》과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좋아했고 글을 지을 때는 기이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여, 당시 세상에 유행하는 문체로 짓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다.

 

병술년(1526, 중종21)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선생은 집안이 대대로 청빈했다. 김해로 장가들었는데, 처가가 자못 부유했으므로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봉양했다.

 

을사년(1545, 명종원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시신을 담은 관을 모시고 삼가현으로 돌아와 부친의 묘소 동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여묘살이를 부친상 때와 같이 했는데, 몸에서 상복을 벗지 않았고 발걸음은 움막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을 마치자 원래 살던 집으로 되돌아왔다. 옛날 살던 집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어 ‘계부당(鷄伏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는 곳에 띠집을 지어 ‘뇌룡사(雷龍舍)’라고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우레와 용의 모양을 그려 벽에 붙여 두었다.

 

만년에 두류산 아래에 자리 잡았는데, 그 집을 다시 ‘뇌룡사’라고 이름 지었다.

따로 정사를 하나 지어 ‘산천재(山川齋)’라는 편액을 내걸고, 거기서 노년을 보냈다.

 

선생의 호방하고 고상한 성품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으며, 밝고 높은 식견은 천성에서 나왔다.

중종 정유년(1537) 선생의 연세가 37세 때였다. 당시는 나라에 곧 닥칠 환난이 없었지만, 선생 혼자 걱정스럽게 잘못되어가는 기미를 보시고 마침내 어머님께 요청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산림에 숨기로 마음을 먹었다.

 

의령의 명경대를 사랑하여 오가며 깃들어 지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 김해의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강학하면서 덕을 쌓았는데, 이름이나 이익 등 외부적인 것을 원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종 때 비로소 헌릉 참봉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 때 전생서 주부,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고, 또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상소를 했으나 임금의 답이 없었다. 그 뒤 또 조지서 사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유일(遺逸)로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다시 상서원 판관으로 부르자 벼슬에 임명해 준 것에 대해 사은숙배하고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치란의 도리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고금의 치란에 관한 것은 책에 실려 있으니, 신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는 정감과 의리로 서로를 믿어야하고 툭 트여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정치를 하는 방법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신하들을 마치 친구처럼 대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치세의 도리를 강구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정감과 의리로 서로 미더워진 뒤에라야 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흩어진 것이 마치 물이 흘러가버린 것 같으니, 이것을 구제하려면 마땅히 불난 집에 불 끄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의 학문은 정치가 나오는 뿌리인지라,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한갓 다른 사람의 말만 들어서는 아무런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또 삼고초려의 일에 대해서 묻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반드시 영웅을 얻은 뒤에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세 번이나 찾아가도 제갈량이 나오지 않은 것을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사정이 그랬던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열황제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했으면서도 결국 한나라 왕실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원래 살던 산으로 돌아와 버렸다. 정묘년(1567, 선조원년)에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교서를 내려 선생을 불렀으나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매우 늙은 데다 병도 깊고 죄도 깊어 전하의 명령을 좇아 감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재상이 하는 일이란 사람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오늘날은 누가 착한지 악한지도 따지지 않고, 누가 간사한지 정직한지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임금의 측근에 있던 신하가 경연에서 임금께 “조식이 배운 것은 유학자와 다릅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양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으므로, 임금께서 교지를 계속해서 내려 선생을 반드시 벼슬에 불러내려고 했으나, 선생은 다시 사양하면서 “‘구급’이란 두 글자를 바쳐서 몸을 바치는 것을 대신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그 당시의 폐단 십여 가지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온갖 병이 급하니 하늘의 뜻이나 사람의 일을 제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으면서 헛된 이름만 일삼으니, 이는 말만 잘하는 사람을 친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골의 버려진 물건 같은 신을 불러내어, 어진 이를 찾으려 했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하시니, 이름으로는 실제상황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림의 떡으로 굶주림을 구제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청하옵건대 일의 완급과 허실을 더욱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때 임금께서는 유학에 대해 물으셨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조정에 가득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것만 논하여 조정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무너져갔다. 선생은 이 점을 깊이 생각했으므로 이런 데 대해서 언급한 것이다.

 

무진년(1568, 선조1)에 또 교지를 내려 재촉해서 부르자, 선생은 사양하면서 봉사를 올려 말했다.

임금께서 “이 바른 말을 보니, 재주와 덕이 높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겠노라.”라는 비답을 내렸다.

 

제수한 관직을 바꾸어 종친부 전첨을 제수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린 것이 1년이 넘었다. 신미년(1571, 선조4)에 크게 흉년이 들자 임금께서 곡식을 내렸다.

그래서 선생께서 감사하는 글을 올리고 다시 상소했던 내용을 거듭 아뢰었는데, 더욱 간절하였다.

 

이해 12월에 병이 났는데, 침과 약을 썼으나 오래도록 효험이 없었다. 임금께서 환관을 보내어 문병을 하셨는데, 그 환관이 도착하기 전에 선생께서 일생을 마치셨다. 임신년(1572, 선조5) 2월 8일이었고, 향년 72세였다.

 

선비들이 조문하면서 우리 유학을 위해 크게 슬퍼하였는데, 문하생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이미 보통 사람과 다른 데다, 자신을 극복하고 다스려 오랫동안 힘쓴 결과 의리가 바탕이 되었고 믿음이 그로 인해 성취되었다.

 

역량은 만 길 산악처럼 우뚝 솟아나기에 충분했고, 고상한 풍채는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툴만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찮은 풀이나 티끌처럼 보았으나, 그렇게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바라지도 않았다. 인과 의를 가지고 살아가며 ‘내 어찌 부족해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고, 자신을 가벼이 하여 쓰이기를 구하지 않았다.

 

반듯하고 엄격하고 맑고 고상한 성품을 지녔으나, 온화하고 수월하며 간절하게 동정하는 마음으로 보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속세와 멀리 떨어져 고상하게 살면서도, 사물을 사랑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생각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를 모실 때는 새벽마다 반드시 문안드리고 저녁마다 반드시 잠자리를 깔아 드렸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혹시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어버이는 늙고 집은 가난하였지만, 콩 같은 간단한 음식과 맹물로도 오히려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렸을 뿐, 녹을 받기 위해 벼슬하러 나가지 않았다.

 

어버이의 상례를 치를 때는 예법을 따라 어기지 않았다. 형제간에 우애 있고 화목하게 지냈는데, 집에서 간직하고 있던 것은 모두 형제들에게 주어 살아가도록 하고, 자신은 터럭만큼도 차지하지 않았다.

아우 환(桓)과는 같은 담장 안에서 함께 살면서 출입할 때 같은 대문을 썼다.

 

늙어서도 자신에게 대를 이을 적자가 없자,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중요한 책임을 환에게 맡겼다.

다른 사람을 접할 때에는, 비록 비루한 사람이나 시골 사람이라도 반드시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말씨로 대하여, 그 사람이 그 심정을 다 할 수 있도록 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여 칭찬하였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 선도해 주었다.

서로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문제점을 감추지 않았고, 문제점을 계기로 침과 약 같은 충고를 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고치게 하였다. 비록 관계가 먼 사람이라도 그 장점을 매몰시키지 않았고, 비록 친하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단점을 감싸지 않았다.

 

사람을 볼 때,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력과 사람의 비중을 파악하는 쌓인 공력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쉽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세상을 잊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곤궁함을 생각하여 마치 아픔이 자신에게 있는 듯이 했다.

 

가슴에 많은 사실을 간직하고서, 말을 하게 되면 간혹 목이 메었다가 이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벼슬을 맡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힘을 다해서 일러주어 혹시라도 시행되기를 바랐다.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옳게 여겨지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았기에 사람들 가운데는 선생을 ‘고상한 체 뻣뻣하여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자기 한 몸만 깨끗이 하여 세상을 떠나 멀리 가서 사는 선비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일찍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달려 나가서 아뢰는 말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였고, 두 번 상소를 하여 순수한 정성을 열어 밝혔으니, 군신간의 의리를 애초에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대한 역전(易傳)에서 “선비가 고상하게 지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시대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사람도 있고, 만족함에 그치는 도를 알아 물러나 자신을 보전하는 사람도 있고, 능력과 분수를 알아서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데서 편안히 지내는 사람도 있고, 맑은 지조를 스스로 지켜 천하의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한 몸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거짓을 행하는 폐단이 있어,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이 앞서서 의리를 잃고, 겉으로는 도덕을 가장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고, 시세에 따라 이름을 취하는 자들이 온 세상과 함께 휩쓸리고 있다. 마음을 파괴시키고 세상의 도리를 잘못 인도하는 것이 어찌 홍수와 이단뿐이겠는가?

 

선생께서 자신을 행하고 일을 해 나가는 것을 보면, 전혀 학자가 하는 것 같지 않은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속학들은 그것을 꼬투리 잡아 선생을 헐뜯었다. 이는 실로 명분만 취하고 실질을 말살시키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그 가운데는 만약 진실로 공부하는 자가 있더라도, 가짜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경우가 있다면, 마음 아파할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단지 공부하는 것이 진실하지 못할까를 걱정했을 뿐이었지, 이런 것을 어찌 걱정했겠는가?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고상하게 성명(性命)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꾸짖어 금지시키며 “공부하는 것은 애초에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 공부하는 선비 가운데는, 간혹 그 부모형제에게 잘 하지 못하면서, 갑자기 천도의 오묘함을 탐구하려고 하니 이 무슨 학문이며, 무슨 습관인가?”라고 했다.

 

이기(李芑)가 일찍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기는 《중용》 읽기를 좋아한다 하여 그 당시에 추앙을 받았는데, 선생께 편지를 보내어 의리가 의심스러운 곳을 논의하여 왔다.

 

선생은 “상공(相公)께서는 제가 과거를 보기 위해 산림에 들어와 있으니, 혹 학문이 쌓여 식견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시지만, 남에게 속은 것이 이미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군요. 이 몸은 병이 많아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깃들어 단지 여생을 유지하려 할 뿐입니다.

 

의리에 관한 학문은 저가 강론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공손하게 사양하고 만나지 않고 피하였으니, 실로 깊은 뜻이 있었다. 이기는 결국 을사사화를 일으킨 흉악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선생은 출처를 심각하게 여겨 군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고금의 인물을 널리 논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들의 출처를 본 뒤에 행실의 잘잘못을 논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근세에 군자로 자처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출처가 의리에 맞는 사람은 내가 들은 바가 없도다.

 

요즈음 오직 경호(景浩.이황)만이 옛사람에 가깝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 대해 극진히 논하려고 했으나, 결국 세세히 다 논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임금의 명에 대해 사은하러 갔을 때, 일재(一齋) 이항(李恒)도 사축(司畜)으로 부름을 받아 한양에 와 있었다. 어느 날 만나보니, 선비들이 성대하게 모여 있었고, 일재는 스승으로 자처하며 후배들과 의리를 강론하고 있었다.

 

선생은 술잔을 주고받을 적에 문득 그에게 장난을 걸어 “자네와 나는 모두 도둑놈일세. 이름을 도둑질하고 관작을 훔쳤는데, 감히 다른 사람을 향해서 학문을 논하는가? 어째서 자네는 소뿔을 굽히지 않으며 경건하고 신중하지 못한가?”라고 했다.

 

선비들 가운데 괴이하게 여겨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생은 “일재가 세상의 습속에 함께 휩쓸려 엄연히 자신을 어진이로 생각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라고 했다. 선생은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척 미워했다.

 

숨는 것과 세상에 나아가는 것을 반드시 때를 보고 하려고 했으며, 자신을 지켜 다른 사람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초야의 선비로 문을 단단히 닫고 지내며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을 일러 ‘천 길을 날아오르는 봉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의 군자들이 벼슬에 나가서 시대에 맞게 쓰여 좋은 일을 하려다 일은 실패하고 자신도 죽음을 당하고 사림에 화를 끼치는 것이, 사람들이 기미를 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때를 살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아 원풍(元豐) 시대의 대신들(송나라 신종때의 사마광,여공저등)과 같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나라의 큰일을 맡은 사람들이 기미를 모르고 때를 살피지 않고 마음으로 화합하지 않은 채, 강하고 날카로움을 자임하여 아무렇게나 일을 하여 간혹 서로 당기고 밀며 승부를 겨루는 것이, 처음부터 정성스런 마음으로 나라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사로운 마음을 따른 것일 뿐임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선생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일을 행할 수 있게 한다면, 큰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선생은 “나는 덕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우두머리가 되지 못하니, 어찌 일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옛날 정승을 존경하고 후배들을 장려하고, 크고 작은 어진 인재를 추천하거나 발탁하여 각자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앉아서 그들이 공을 이루는 것을 보는 정도는 내가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지금의 과거제도는 결코 폐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선생은 “옛날에는 선비를 선발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온 선비들은 모두가 어진 인재였다. 비유하자면 수풀을 기르면 마룻대 기둥 대들보 서까래 등의 재목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게 되니, 그루마다 베어서 큰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재목을 기르는 데 법도가 있고 취하는 데 있어서 버리는 재목이 없다면, 재목의 쓰임이 풍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제갈공명이 소열황제(유비)의 삼고초려 때문에 세상에 나와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시대에 어떤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을 두고 이르기를 “그를 작은 데다 썼다는 유감이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끝내 소열황제를 위해서 일어나지 않고 차라리 융중(隆中.제갈량이 은거하던 곳)에서 늙어 죽었다면, 천하 후세에 제갈공명이 한 일이 있은 줄을 알지도 못했겠지만, 안 될 것도 없다.”라고 하셨다. 옛날 사람들을 논하면서 이전 사람의 말에 구애되지 않고 한 가닥 새로운 의미를 다시 캐는 것이 때때로 이러했다.

 

학문을 하는 것은 이러했다. 선생은 25세 때 친구들과 함께 산 속의 절에서 학업을 익혔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이윤(伊尹)이 뜻 둔 바에 뜻을 두고, 안연(顔淵)이 배운 바를 배워, 벼슬에 나가서는 하는 일이 있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있어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하는 바가 없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없다면, 뜻 둔 바와 배운 바를 가지고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말에 이르자, 옛날에 했던 자신의 학문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등에 땀이 났고 정신이 멍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밤새도록 잠자리에 눕지 않고 있다가 동이 트려 하자 친구들에게 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확실히 두고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 다시는 속된 학문에 뜻이 꺾이지 않았다.

 

얽매이지 않고 날아오르려는 기질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하거나 묵묵히 있을 때 다시는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스스로는 아직 옛날 것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여겼다.

 

글을 읽을 때는 일찍이 단락이나 구절로 해석한 적이 없었고, 때로는 한꺼번에 열 줄씩 읽어 내려가다가 자신에게 절실한 내용에 이르면 그 내용을 대략 파악하고 넘어갔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화(和), 항(恒), 직(直), 방(方)을 네 글자의 부절로 삼았고, 격물치지를 으뜸가는 공부로 삼았다.

 

경(敬)으로써 마음과 호흡을 서로 돌아보며, 기미로써 은미한 움직임을 살피고 알아서, 하나에 집중하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법으로 삼았다. 〈금인명(金人銘.남명이 말을 삼가려는 뜻에서 지은 명이다 쇠로 만든 사람)〉을 짓고 ‘색태(塞兌.욕심을 틀어막음)’자를 써두어 말을 조심하는 경계로 삼았는데, 모두 표제로 삼아서 생각을 거기에 두었다.

 

항상 쇠방울을 차고 다니며 이름을 성성자라 불렀으니, 자신을 일깨우려는 공부였다.

선성 공자와 선현들(주돈이,정호,주희를 말함)의 초상을 그려 때때로 책상 위에 펼쳐 두고 용모를 엄숙하게 하며 마주했다.

 

늘 가죽 띠를 매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명을 썼다.

혀는 새는 것이고 / 舌者泄

가죽은 묶는 것이라네 / 革者結

살아있는 용을 묶어 / 縳生龍

깊은 곳에 감추어 두리라 / 藏漠沖

보검을 차고 다니기를 좋아하였는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고, 밖으로 일을 결단하는 것은 의리라네.”라는 명(銘)을 썼다.

 

일찍이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린 다음 명을 지어 넣었다.

안으로는 마음을 잡아 함양하는 실체를 나타내었고, 밖으로는 살펴서 사욕을 이겨 다스리는 공부를 밝혔다.

 

안팎이 구분이 없는 본체와,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 서로 기르는 이치가 그림을 살펴보면 분명하여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선생이 스스로 터득하여 손수 그린 것이다.

 

선유가 논한 천도, 천명, 심, 성정, 이기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차례와 더불어, 덕에 들어가는 노선을 손수 그림으로 그린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모두가 아주 분명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늘 《논어》, 《맹자》, 《중용》, 《대학》, 《근사록》 등의 책을 연역하여 그 근본을 배양하고 그 뜻을 넓혔으며, 그 가운데서 더욱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에 나아가 다시 그 의미를 맛보았다.

 

그것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는데, 구차하게 널리 풍부하게 아는 것처럼 해서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한 적이 없었고 문득 강설을 행하여 바깥사람의 논의를 야기한 적도 없었다.

 

이것은 선생께서 착실하게 요점을 따랐기 때문이다. 맨 나중에는 특별히 ‘경’과 ‘의’ 두 글자를 들어 창과 벽 사이에 크게 썼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아서 만고의 오랜 세월을 통해서도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현의 천 마디 만 마디의 말도 그 귀결처를 요약해보면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학문은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그저 책에만 의지하여 의리를 강론해서 밝히기만 하고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없는 사람은 결국 받아들여 쓰일 수가 없다.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라도 입으로 말하기는 진실로 어려우니 배우는 사람은 말 잘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대개 선생은 이미 경서와 그 주석을 널리 탐구하였고 제자백가에 두루 통하였으며, 그런 뒤에 번잡한 것을 수렴하고 간명한 데로 나아가며 자기 몸에 돌이켜 요점을 실천하여, 스스로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일찍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공부할 때는 먼저 지식과 식견을 높고 밝게 해야 한다.

태산에 올라가면 모든 것이 다 낮아지게 되는 것과 같은 뒤에야 내가 행하는 바가 순조롭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대도시의 큰 시장에서 마음껏 노닐다 보면, 금, 은, 보배, 노리개 등 없는 것이 없지만, 하루 종일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값을 이야기해 봤자 결국 자기 물건은 아니다. 오히려 내 베 한 필을 가지고 가서 생선 한 마리 사오는 것만 못하다.

 

지금 배우는 사람들이 성리학에 대해서는 고상하게 이야기하면서 자기에게 얻는 것이 없는 것이 이와 어찌 다르겠는가?”라고 하셨다. 또 “밤중에 공부가 많이 되니, 잠을 많이 자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평소에 거처하면서 처자가 나와 섞여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자질이 아름다워도 차츰차츰 빠져 들어가 결국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이 모두가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그 자품을 보고 거기에 맞추어서 격려하려 했고, 바로 책을 펴서 강론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예부터 전해오는 성인들의 정미한 말과 오묘한 뜻 가운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주염계(周濂溪), 정자(程子), 장횡거(張橫渠), 주자(朱子) 등이 서로 계승하여 남김없이 밝혀 놓았다.

 

배우는 사람들은 알기 어려울까 걱정할 것 없고, 단지 자신을 위한 공부가 되지 않을까를 걱정하면 될 따름이다. 단지 수면상태를 깨게 하기만 하면 된다. 깨달은 뒤에는 하늘과 땅 해와 달을 장차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책을 지은 적은 없고, 단지 글을 읽을 때 중요한 말을 적어 모은 것이 있는데, 이름을 《학기(學記)》라고 했다.

선생은 기상이 맑고 높았으며 두 눈은 밝게 빛나 바라보면 속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씀이 뛰어나 마치 우레가 울고 바람이 일어나듯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이욕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없어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러했다. 편안히 지낼 때는 종일토록 꼿꼿하게 앉아 계셨으며, 게으른 모습을 한 적이 없었다.

 

귀한 손님을 대할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신분이 낮거나 어린애들을 대할 때도 태만하지 않았는데, 연세가 일흔이 넘어서도 늘 한결같았으니 그 자연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삼가현의 선대 살림살이는 아주 궁핍하여 혹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가족들이 거친 음식도 잇지를 못했지만 선생은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산속에서 산 뒤로 화전에서 거둔 것 덕분에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선생은 화락하여 늘 아주 풍부한 듯이 여겼다. 병에 걸렸을 때는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여러 번 했지만, 죽고 사는 것 때문에 생각이 조금도 어지러워진 적이 없었다. 의리상 부녀자 앞에서 죽을 수가 없어 부실(副室)로 하여금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병이 조금 낫게 되었을 적에 ‘경’과 ‘의’자에 대해 문생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를 “이 두 글자는 매우 절실하고 중요하니,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 공부가 푹 익도록 해야 한다. 푹 익으면 한 가지도 가슴 속에 걸리지 않는데, 나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라고 했다.

 

평생 간직한 마음을 여기서 더욱 증명할 수 있다.

아아! 한 쪽에 치우쳐 있고 문명이 없는 나라가 말세가 되어 도학(道學.원래는 송나라 유학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성리학을 일컫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도덕적 실천까지 갖춘 학문을 말함)을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선생은 우뚝하게 떨쳐 일어나, 스승이 전해주는 것에 말미암지 않고 능히 스스로 학문을 이루어 높게 뛰어나고 홀로 나아갔으니, 이런 것에 능한 사람이 드문 지 오래 되었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한다고 아첨하는 말이 아니다.

 

이 해(1572, 선조5) 겨울에 두류산에 상고대가 생겨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돌아가실까 근심하였는데, 선생께서 과연 병을 얻어 낫지 않았다. 숨을 거두는 날에는 매서운 바람과 폭우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충순위 조수(曺琇)의 따님 남평 조씨와 결혼했으나,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차산(次山)은 풍골이 범상치 않았으나 9세 때 일찍 죽었다. 딸은 만호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딸 둘을 낳았는데, 장녀는 권지 승문원 부정자 김우옹(金宇顒)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에게 시집갔다.

 

부실이 삼남일녀를 낳았는데, 차석(次石)은 부사 김수생(金水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차마(次磨)는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며 차정(次矴)과 딸은 모두 어리다. 4월 6일에 산천재 뒤쪽 임좌 병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융경 6년(1572, 선조5) 윤2월 문인 생원 정인홍은 삼가 행장을 짓다.

 

번역: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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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曺植先生行狀

 

鄭仁弘 撰

 

先生姓曺氏。諱植。字楗仲。系出昌山。高麗太祖德宮公主下嫁。生子瑞。爲刑部員外郞。於先生始祖。高祖諱殷。中郞將。妣郭氏。縣監興仁之女。曾王父諱安習。成均生員。妣文氏。學諭可容之女。王父諱永。不仕。妣趙氏。監察瓚之女。考諱彦亨。通訓大夫承文院判校。娶忠順衛李菊女。以弘治辛酉六月壬寅。生先生於嘉樹縣之兎洞。未冠。以功各文章自期。有駕一世軼千古之意。讀書喜左柳文字製作好奇高不屑爲世體。屢捷發觧。名震士林。嘉靖丙戌。遭先大夫憂。廬墓終三年。先生家世淸貧。授室金官。婦家頗饒。奉母夫人就養。乙巳。丁憂。奉柩還葬于先大夫墓東岡。廬墓如初。身不脫衰。足不出廬。服闋。因居本業。近舊宅構一室曰雞伏堂。俯前流結茅屋曰雷龍舍。使工畫者摹雷龍狀。棲諸壁。晩卜頭流山下。其室復以雷龍名。別構精舍。扁曰山天齋。老焉。先生豪邁不群。明見高識。出於天性。中廟丁酉。先生年三十七。于時國家無朝夕之虞。獨見有憂違之幾。遂請命先夫人。棄擧子業。筮遯山林。愛宜春之明鏡臺。往來棲息。累歲月。作山海亭于金官之炭洞。講學蓄德。不願乎外者。亦有年矣。中廟始授獻陵參奉。不就。明廟除爲主簿典牲也宗簿也。又除爲縣監丹城也。皆不就。上疏不報。其後。又授司紙。不就。丙寅。以遺逸召。辭。復以尙瑞院判官徵。乃拜命。引對思政殿。上問治亂之道。爲學之方。對曰。古今治亂。載在方策。不須臣言。臣竊以爲君臣之際。情義相孚。洞然無間。此乃爲治之道。古之帝王。遇臣僚若朋友。與之講明治道。今雖不能如此。必須情義相孚。然後可也。又言生民離散。如水之流。救之當如失火之家。人主之學。出治之本。必須自得。徒聽人言。無益也。上又問三顧草廬事。對曰。必得英雄然後。可以有爲。故至於三顧亮。亮一顧不起。或者時勢然也。然與昭烈同事數十年。竟未能興復漢室。此則未可知也。遂去歸故山。隆慶丁卯。今上嗣服。以敎書召之。辭曰。臣老甚。病深罪深。不敢趨命。宰相之職。莫大於用人。今乃不論善惡。不分邪正。蓋時有近臣。於筵中白上曰。曺植所學。異於儒者。故以此辭。有旨繼下。必欲徵起。復辭曰。請獻救急二字。以代獻身。因歷擧時弊十數條曰。百疾方急。天意人事。有未能測。舍此不救。徒事虛名。論篤是與。幷求山野棄物。以助求賢美名。名不足以救實。如畫餠之不足以救飢。請以緩急虛實。更加審處焉。時主上方問儒學。諸賢滿朝。論說性理。而朝綱不振。邦本日壞。先生蓋深念之。故及之。戊辰。又下旨趣召。辭上封事云云。批下云。觀此格言。益知才德之高矣。轉授宗親府典籤。以病辭。不就。朝廷虛位以待者逾一年。辛未。大凶歉。上賜之粟。因陳謝。復以疏意申啓。而更剴切焉。是年十二月。疾作。鍼藥久不效。上遣中使問疾。未至而終。壬申二月八日也。享年七十有二。士子相吊。爲斯文慟。不獨門下輩也。先生天資旣異。克治力久。義爲之質。而信以之成。力量足以岳立萬仞。神采可與日月爭光。一切世好。視若草芥。而不以此望於人。以仁。以義。吾何慊乎。而不自輕以求用。方嚴淸峻。而和易懇惻之意。未嘗不相濟。高蹈遠引。而愛物憂世之念。未嘗一日忘。其事親也。晨必省。昏必定。終不或輟。親老家貧。菽水猶歡。不欲爲祿仕。執親之喪。遵禮不愆。其友睦也。家藏盡以業兄弟。一毫不自與。與弟桓居共一垣。出入同門。年老無嫡嗣。以承重付桓。其接物也。雖鄙夫野人。必和顔溫語。使得盡其情。爲善必面稱。有過輒導於相識之人。不諱其病痛。因投鍼劑。使之自治。雖踈遠。不沒其長。雖親愛。不掩其短。至於觀人之際。視察之鑑。斤兩之蘊。有未易窺測者。其不忘世也。念生民困悴。若恫癏在身。懷抱委襞。言之或至嗚噎。繼以涕下。與當官者言。有一分可以利民者。極力告語。覬其或施。屢徵不起。不見是而無憫。人或認爲高抗不仕之人。而不知初非潔身長往之士也。嘗趨朝命。奏對誠切。再上封章。披瀝丹悃。則君臣之義。初不欲廢也。蠱之上九。傳曰。士之高尙。亦非一道。有懷抱道德。不偶於時。而高潔自守者。有知止足之道。退以自保者。有量能度分。安於不求知者。有淸介自守。不屑天下之事。而獨潔其身者矣。或者先生於此數者。居一焉。病今之士習偸弊。利欲勝而義理喪。外假道學。內實懷利。以趨時取名者。擧世同流。壞心術誤世道。豈特洪水異端而已。觀其行己做事。往往專不似學者所爲。俗學輩從而譏誚焉。此固取名蔑實者之罪也。其間倘有眞實爲學者。亦被假僞之名。初可痛也。然特患學不眞實而已。庸何病於此乎。每聞初學高談性命之理。未嘗不呵止之曰。爲學。初不出事親敬兄之間。始學之士。或不能於其父母兄弟。而遽欲探天道之妙。此何等學也。何等習也。李芑嘗出使嶺外。芑曾以喜讀中庸。爲時所推。以書抵先生。論義理疑處。答曰。相公以植棄擧業入山林。意或積學有見。而不知被欺已多矣。此身多病。仍投閑靜。只爲保得餘生。義理之學。非所講也。遜辭靳避。實有深意。芑卒爲乙巳兇魁。深以出處爲君子大節。泛論古今人物。必先觀其出處。然後論其行事得失。嘗曰。近世以君子自處者。亦不爲不多。出處合義。蔑乎無聞。頃者。唯景浩庶幾古人。然論人欲盡。畢竟有未盡分矣。丙寅拜命時。李一齋亦以司畜。召至京師。一日相見。士子坌集。一齋以師道自任。與後輩講論義理。先生因杯勺。遽爲之戱曰。君與我儘是盜。盜名字竊官爵。乃敢向人論學爲。胡不彎君牛角。不甚敬重。士子多怪議。先生謂。一齋滾同世習。儼然以賢者自當。吾所不服也。嘗與李府尹楨友善。久之。所趨頓異。頗與相失。後因事絶之。先生不苟從。不苟默。識者雖好之。不知者。亦頗惡之。隱見必欲相時。自守不欲徇人。牢關巖穴。死而不悔。謂之翔千仞鳳凰。可也。惜世之君子。出爲時用。要做好事。事敗身僇。貽禍士林者。正坐見幾不明。相時不審。又不知與元豊大臣同之義也。當國大事者。不知幾。不相時。不協心。强鋭自任。胡亂作爲。或相前却。因較勝負。初非赤心謀國。只是徇私意而已。有人問使先生得行於世。做得大事業否。曰。吾未嘗有德有才而不長。豈得當了事。但尊舊相奬後輩。推拔多小賢材。使之各效其能。坐觀其成功。吾或庶幾焉。或言今之科擧。決不可廢。曰。古有選士法。士比肩而出者。皆良才。譬如養得林木。棟楹樑桷之材。靡有不具。比株而伐之。以構大廈。養之有道而取不遺。材用自無不足矣。嘗謂。諸葛孔明。爲昭烈三顧而出。欲爲於不可爲之時。顧未免有小用之憾。若終不爲昭烈起。寧老死於隆中。天下後世。不知有武候事業。亦未爲不可矣。尙論古人。不拘前言。更求一段新義。往往如此。其爲學也。先生年二十六歲時。偕友人肄業於山寺。讀性理大全。至許魯齋之言曰。志伊尹之所志。學顔淵之所學。出則有爲。處則有守。丈夫當如此。出無爲。處無守。所志所學。將何爲。於是。始悟舊學不是。心愧背汗。惘若自失。終夜不就席。遲明揖友人而歸。自是。刻意聖賢之學。勇猛直前。不復爲俗學所撓。飛揚不羈之氣一頓點化。動靜語默。非復舊時樣子。猶自以謂或未消了。其讀書也。不曾章解句析。或十行俱下。到切己處。便領略過。其用功也。以和恒直方。爲四字符。以格物致知。爲第一功夫。敬以心息相顧。幾以察識動微。爲主一謹獨法。作金人銘。書塞兌字。爲謹言戒。皆標題而念在焉。常佩金鈴。號曰惺惺子。蓋喚惺之工也。畫先聖賢遺像。時展几案。肅容以對。常束革帶。銘曰。

 

革者絏。舌者紲。縛生龍。藏漠冲。愛佩寶劍。銘曰。內明者敬。外斷者義。嘗作神明舍圖。繼爲之銘。內以著操存涵養之實。外以明省察克治之工。表裏無間之體。動靜交養之理。按圖了然。有目皆可見。此先生所自得而手摹畫者也。以至先儒所論天道天命心性情理氣等處與爲學次第入德路脈。手自圖畫者。非一二。而皆極分明。亦不以示人。常繹論,孟,庸,學,近思錄等書。以培其本。以廣其趣。就其中尤切己處。更加玩味。仍擧以告人。未嘗苟爲博洽。以徇聽聞之美。未嘗便爲講說。引惹外人論議。此先生着實說約者也。最後。特提敬義字。大書窓壁間。嘗曰。吾家有此兩箇字。如天之有日月。洞萬古而不易。聖賢千言萬語。要其歸。都不出二字外也。學必以自得爲貴曰。徒靠冊字上講明義理。而無實得者。終不見受用。得之於心。口若難言。學者不以能言爲貴。蓋先生旣以博求經傳。旁通百家。然後斂繁就簡。反躬造約。而自成一家之學。嘗謂學者曰。爲學。要先使知識高明。如上東岱。萬品皆低然後。惟吾所行。自無不利。又曰。遨遊於通都大市中。金銀珍玩。靡所不有。盡日上下街衢而談其價。終非自家家裏物。却不如用吾一匹布。買取一尾魚來也。今之學者。高談性理。而無得於己。何以異此。又曰。夜中功夫儘多。切不可多睡。又曰。恒居不宜與妻孥混處。雖資質之美。因循汩溺。終不做人矣。此皆所雅言也。敎人必觀資稟。將順激勵之。不欲便與開卷講論曰。從古聖人微辭奧旨。人不易曉者。周程張朱相繼闡明。靡有餘蘊。學者不患其難知。特患其不爲已耳。只要喚覺其睡。覺後。天地日月。將自覩得矣。未嘗著書。只有讀書時箚記要語。名之曰學記。先生氣宇淸高。兩目炯耀。望之知其非塵世間人物。言論英發。雷厲風起。使人潛消利欲之念而不自覺。其動人如此。燕居。終日危坐。未嘗有惰容。對貴客不爲動。接卑幼不以懈。年踰七旬。常如一日。其自然如此。於嘉樹先業甚。歲或不熟。家人蔬食不繼。先生怡然不以爲意。山居之後。菑畬所收。僅賴以不死。先生熙然常若甚饒。罹疾之日。絶而復穌者數。不以死生毫髮亂義。不絶婦人手。令旁室不得近。少間。輒以敬義字。亹亹爲門生言曰。此二字極切要。學者要在用功熟。熟則無一物在胸中。吾未到這境界以死矣。平生所存。至此益驗矣。嗚呼。偏荒晩世。道學未唱。而先生傑然奮起。不由師傳。能自樹立。逈發獨往。蓋亦民鮮能久矣。此非阿所好之言也。是冬。頭流木稼。識者頗爲哲人憂。先生果得疾不瘳。卒之日。烈風暴雨。人以爲不偶然也。娶南平曺氏忠順衛琇之女。先歿。生男一女一。男曰次山。風骨不常。九歲而夭。女適萬戶金行。生二女。長適權知承文院副正字金宇顒。次適幼學郭再祐。先生於內子。雖不好合。終身不絶恩義。先生與李判官希顔爲知己友。內外與通。李嘗曰。曺某於其夫婦間。尤有人所難能者。而人莫之知也。未知所指。其爲朋友所信服。可見。晩得旁室。生三男一女。曰次石。娶府使金水生女。曰次磨。未娶。曰次矴與女。皆幼。四月初六日。葬于山天齋後壬坐丙向之原。不得歸祔於先壠者。勢或使然也。嗚呼嗚呼。隆慶六年壬申閏二月日。門人生員鄭仁弘。謹狀。

 

남명집(南冥集)

내암집 1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