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대사헌 강석덕 행장(大司憲 姜碩德 行狀)

야촌(1) 2014. 5. 15. 19:05

私淑齋集卷之七/姜希孟 著

 

先考資憲大夫,知敦寧府事,贈諡戴慜,玩易齋先生姜公行狀。

 

公諱碩德。字子明。號玩易齋。通亭淮伯之子。年八歲。通亭捐館。公請母夫人就學外傅。學成。一擧不中。歎曰。自有道義可樂。何用科目爲。遂不復就試。蔭補啓聖殿直。不數年。遷至內資少尹。公不樂躁進。請於舅安孝公。緩其調授。安孝公。以國舅。寵勢日盛。賓客盈門。公謹避之。及安孝公敗。公坐廢十餘年。放情林壑。蕭然有物外趣。師事李文節公行。百家諸書。靡不通究。世宗知公學行。起爲楊根郡事。政尙淸簡。吏畏民懷。十考爲最。怡爲第一。累遷司憲執義兼知刑曹事。拜承政院同副承旨。時世宗方尙文敎。修五禮。特命公知禮曹事。且令讀禮。凡吉凶大禮。一以委公。歷左承旨。拜戶曹參判,司憲府大司憲。歷吏刑兩曹參判。時開城俗澆漓。更數留守。失於撫御。爲吏民所賣。譏議頗騰。世宗以公淸謹可鎭。除爲留守。公辭以不堪。上曰。卿知其難。所以能副余意也。公聞命卽行。至府則見赴愬者必造門于謁。或投匿名書。以逞私忿。公探得猾吏。尤無良者斥逐之。旬月之間。豪猾知禁。流亡盡復。又復修殿廟官廨之頹圮者。先聖肖像之漫漶者。役不煩民而事用集。公性本好潔。爲穆淸殿享官。湯浴澡雪踰時。因感寒疾。上遣內醫治療。以中樞院使召還。遷知敦寧府事。退居西郊別墅養疾。尋卒。享年六十有五。訃聞。輟朝一日。賻贈加等。易名曰戴慜。典禮不愆曰戴。好古不怠曰慜。公天性豪邁。不混流俗。貞白慷慨。行善樂道。事寡母至孝。處兄弟待朋友。一出於誠信。與異母伯仲。極其和睦。人無間言。常戒二子曰。人之富貴榮達在天。非求之可得。所自盡者。孝悌忠信。禮義廉恥而已。有愧於是。餘不足觀。汝曹愼之。二子登科。請開榮親宴。公辭曰。榮非吾好也。有榮必有辱。竟不受。公以謂人所易失者。忿與慾也。作大字書懲忿窒慾四字。貼諸壁上常目之。又曰。心與物接。惟怒最易發。不可不深省。書古詩於壁曰。怒氣遽炎火。焚和徒自傷。物來莫與竟。事過心淸凉。公於細行。亦不敢放過。人或告之曰。如此小節。有些變通。不亦可乎。公曰。通於小者。未必有害於大。自聖人時可之外。未有通焉而不失其正者也。吾當固守一節耳。居官慮事。綱理甚密。家居則左右圖書。焚香匡坐。泊乎無營。家人小子。不敢干以世累。以此屢空。晏如也。坐臥手不釋卷。尤善馬史。作字。必法鍾王篆隸眞草。墨戲靡不精到。詩以高古雅澹爲宗。不中古人矩度。不敢輕以示人。故所著詩文若筆蹟。世罕傳焉。嘗奉敎書英陵王后墓誌。楷法絶妙。人爭藏置爲寶。公旣病篤。百慮俱耗。獨於書史。暫不遺忘。夜不能寐。令諸子更迭讀書。至聞警語。則泫然流涕。請其故。答曰。吾今病。恨不復究聖賢微旨。公娶領議政安孝公沈溫之女。生三男五女。男長曰希顔。官至仁壽府尹。後公五年卒。次曰希孟。丁卯秋科壯元。次曰希曾。先公歿。女長適護軍南俊。次適判事辛肅。次適判官金元臣。次適僉知黃眘。次適副正朴楣。噫。希孟於公下世之十三年冬。謹裒集遺稿如干首。反復詠歎。如陪杖屨。親聆警咳之音。不覺涕泗交頤也。編次已成。略敍梗槩。冠于篇端。使後人知有德者必有言云。

歲辛卯冬十月下澣。男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晉山君希孟。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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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덕(姜碩德)

 

1395(태조 4)∼1459(세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아버지는 동북면도순문사 회백(淮伯)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아들이 희맹(希孟)이다.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중이던 1416년(태종 16)에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세종 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에 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였고, 일시 면직되었다가 1441년(세종 23) 우부승지로 복직되었다.

 

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년(문종 1)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저서로는『완역재집(玩易齋集)』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