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청주 목사(行淸州牧使) 모촌(茅村) 이공(李公) 행장(行狀)
갈암 이현일 찬(葛庵 李玄逸 撰)
공의 휘는 정(瀞)이고 자는 여함(汝涵)이며, 그 선조(先祖)는 월성인(月城人)으로, 신라 시조의 좌명 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고려 때 휘 우칭(禹偁) 이라는 분이 있어서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본관을 삼아 스스로 구별하였다.
증조는 휘 중현(仲賢)으로 병조 참지를 지냈고, 조는 휘 무(珷)로 영남 서도 수군우후(嶺南西道水軍虞候)를 지냈다. 고(考)는 휘 경성(景成)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그 5세조 증 병조 참의 휘 오(午)로부터 비로소 함안(咸安)의 모곡리(茅谷里)에 거주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명민(明敏)하고 재국(才局)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일찍이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의 문하에 출입하여 군자의 정대(正大)한 의론을 듣고서 받들어 행하면서 뜻을 세우고 몸을 닦는 규범으로 삼았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는 영남이 제일 먼저 적병에 점령되었는데, 여러 고을의 유민(遺民)들이 모두 꿩이나 토끼처럼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감히 숨을 내쉬지 못하였다.
공이 이에 창의(倡義)하여 군대를 모집하니, 유민(流民)들이 도로 모여들었다.
쇠뇌 같은 무기들을 설치하여 포참(捕斬)하는 등 여러 번 기이한 공을 세웠는데,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특별히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에 제수되었다가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옮겨졌다.
그 후 공적으로 인해 통정대부까지 특별히 승품(陞品)되었다. 차례로 창원(昌原), 청주(淸州) 두 부(府)의 부사(府事)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너그럽고 공정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만년에 진양(晉陽)의 원당리(元塘里)에 우거(寓居)하면서 실(室)을 하나 지어 거처하였다.
그리고 고향에서 홍매(紅梅)와 백매(白梅), 두 종의 매화를 옮겨다 심고 향매와(鄕梅窩)라고 이름하였다.
한가한 아침과 저녁 때마다 두건을 젖혀 쓰고 집 주위를 거닐며 읊조리면서 자적(自適)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모촌(茅村)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만력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춘추 73세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임진년 변란에 일본으로 끌려 들어가 생사를 알지 못하니, 공이 평생토록 크게 애통하게 여겼다.
둘째는 이장(而樟)이다. 욱(燠)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욱이 자식이 없어 족인(族人)의 아들인 지한(之翰)을 후사로 삼았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덕성이 순수하고 기상이 온화하면서도 굳세었다. 효우(孝友)로써 종족(宗族)들 사이에서 칭해졌고, 공정함으로써 향당(鄕黨)에 드러났다.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할 때는 지친 백성들이 다투어 분발하였으며,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다스릴 적에는 온 경내가 칭송하였다.
공과 같은 이는 아마도 이른바 순수함이 깊고 행실이 독실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또한 도(道)를 배우고 백성을 사랑하며 군대를 거느리고 사직(社稷)을 지키는 의리에 대해 강구함이 있지 아니한가.
공이 초년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역사서를 매우 좋아하여 문장을 지음에 그 웅심(雄深)하고 아건(雅健)한 문체를 따르고자 하였으며, 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존숭(尊崇)하여 연구하고 사색하여 얻는 바가 있었다.
일찍이 시(詩)를 짓기를, “성(性)을 논할 때는 마땅히 이(理)만을 이야기해야 하니, 공허한 이론에서 이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성(誠)이 아니라네. 애당초 성 밖에 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니, 다만 이(理) 안에 허령이 있다네.
허령의 묘용이 여기에서 나오기에, 내 몸의 주인되어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지.[論性固當惟說理 談空求理諒非誠 性外初非更有心 只於理內別虛靈 虛靈妙用由斯出 故主吾身統性情]” 하였으니, 그 학식의 정밀함을 알 수 있다.
김 문충공(金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이 어명을 받아 초유(招諭)할 적에 공이 의병장으로서 신청(申請)한 일이 있었는데, 문충공이 답하기를, “궤멸된 고을에 단신으로 들어가 수천의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으니, 평소에 신의가 드러난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하였으니, 그 허여함이 이와 같았다.
또 일찍이 문충공에게 고하기를, “병란이 일어난 이후로 싸움과 굶주림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습니다. 지금 봄날을 당하여 마땅히 이들을 묻어 주라는 영(令)이 있어야 하겠기에 감히 집사자(執事者)에게 고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밤이 이미 깊어 문충공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때였는데, 마침내 벌떡 일어나 앉아 말하기를, “좋은 말은 미루어서는 안 된다.” 하면서 즉시 삽을 준비하게 하여 새벽녘까지 작업을 하였다. 처음에 난리가 발발하였을 때 공은 지리산(智異山)에 있었는데, 꿈에 백발을 한 노인이 와서 고하기를, “찬 바람이 뼈에 사무쳐 참을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척연(惕然)히 놀라 깨어나 이르기를, “이는 필시 선대의 묘에 변고가 있어서 신령이 내게 고해 주는 것이다.” 하고는 즉시 급히 달려가 살펴보니, 과연 참지공(參知公)의 분묘가 적에 의해 도굴이 되어 부서진 관(棺) 밖으로 해골이 드러나 있었다.
공이 땅에 엎드려 크게 통곡하면서 즉시 관곽과 수의 등을 마련하여 개장(改葬)하니, 사람들이 성효(誠孝)에 감동되어 이런 감응이 있었다고 하였다. 일찍이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최공(崔公)이 남명(南冥) 선생을 위하여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규모가 매우 컸는데, 난리 통에 유지(遺趾)가 모조리 없어져 버렸다.
공이 스승의 제사를 모실 곳이 없음을 애통해하여 한두 동지(同志)들과 함께 중창(重創)할 것을 협의하여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을 한결같이 옛날의 제도에 따라 지었다.
현일(玄逸)의 선대부(先大夫)께서는 공과 삼종형제(三從兄弟) 사이인데, 선대부께서 의춘(宜春)의 수령이 되셨을 때 공이 한번은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기를, “자네가 부임한 초기에는 정사(政事)를 잘 한다는 소문이 제법 들리더니, 요새 들리는 소문은 전과 조금 다른 것 같네. 부디 자성(自省)하기를 바라네.” 하였다.
선대부는 즉시 그 편지를 벽에다 걸어 두고 더욱 노력하였으니, 형제간에 서로 권면하고 명심하여 스스로 경계로 삼는 의리가 대개 이러하였다.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박사중(朴思仲)이 덕을 감추고 조행(操行)이 있는 것과 이여선(李汝宣)이 관후(寬厚)한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는 것, 이여함(李汝涵)이 재주와 행실이 아울러 높은 것은 모두 내가 평소에 경외(敬畏)하던 바이다.” 하였으니, 세 군자를 칭술한 것이 참으로 간략하면서도 극진하다고 할 만하다. 박(朴), 이(李) 두 공의 사적(事蹟)은 모두 따로 행장이 있다.
현일은 본래 어릴 적에 선군자께 공의 지절(志節)과 행의(行誼)의 대체를 들었다. 정축년(1697, 숙종23) 가을에 죄를 얻어 남쪽으로 오니, 공의 진양(晉陽) 구거(舊居)까지는 100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하여 간간이 내방하는 종인(宗人)들을 통해 공의 집안일을 물어보았는데, 그 전후 사정을 알고는 애석하여 눈물을 흘렸었다. 그 뒤 며칠 뒤에 공의 족증손(族曾孫) 태형(台亨)이 그 족손(族孫) 명배(命培)와 함께 공의 유문(遺文)과 친구, 문인(門人)들의 기록 약간 편을 모아 가지고 와서 현일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울먹이면서 절을 하고 청하기를, “족증조의 문장과 행적은 실로 없어져 세상에 전해지지 않아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안에는 이를 주간(主幹)할 자식이 없어서 유고(遺稿)와 가첩(家牒)이 모조리 망실되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니, 참으로 저희 종인(宗人)들이 함께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부디 어르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이를 수습해서 행장을 엮으시어 유덕을 천양하고 후손들에게 은택을 입혀 주소서.” 하였다. 현일은 감히 굳게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제가(諸家)가 기술한 것을 간추리고 그 사이에 또한 내가 옛날에 들었던 것을 보태어 위와 같이 차례로 기록해 본다. 삼가 행장을 쓴다.
-----------------------------------------------------------------------------------------------------------------------------
[原文}
通政大夫行淸州牧使茅村李公行狀
公諱瀞。字汝涵。其先月城人。新羅始祖佐命功臣諱謁平之後。高麗時。有諱禹偁。封載寧君。子孫因貫以自別。曾祖諱仲賢。兵曹參知。祖諱珷。嶺南西道水軍虞侯。考諱景成。司憲府監察。贈兵曹參判。自其五世祖贈兵曹參議諱午。始居咸安之茅谷里。公生於嘉靖辛丑。自少以明敏有才局稱。嘗出入南冥曹先生之門。得聞君子正大之論。奉持周旋。以爲立心行己之規。萬曆壬辰。嶺南首刳於兵。列邑遺民。皆雉兔逃入山林。莫敢出氣。公於是倡義召募。流民還集。設機捕斬。累立奇功。事聞。特授沙斤道察訪。轉丹城縣監。及後以功超陞通政階。歷知昌原,淸州二府事。所至以寬惠公明有聲。晩歲寓居晉陽之元塘里。築一室以居。移植故園紅白兩種梅。謂之鄕梅窩。每從容晨夕。岸幘巡簷。吟賞以自適。因自號茅村。萬曆癸丑。考終于家。春秋七十有三。有子二人。其長者壬辰之變。沒入于日本。不知存沒。公平生以爲至痛。其次而樟有子曰燠。無子。取族子之翰爲後。有子二人。皆幼。公德性醇粹。氣像和毅。孝友稱於宗族。公正著於鄕黨。倡義討賊。則創殘爭奮。分符字牧。則闔境稱思。若公者豈非所謂深醇篤行君子人耶。其亦有講於學道愛人。執干戈衛社稷之義矣。公初年酷好太史公,班固書。爲文章。欲效其雄深雅健之體。旣又尊尙程,朱義理之學。硏窮探索而有得焉。嘗有詩曰。論性固當惟說理。談空求理諒非誠。性外初非更有心。只於理內別虛靈。虛靈妙用由斯出。故主吾身統性情。可見其學識之精到矣。當金文忠公之受命招諭也。公以義將。有所申請。文忠報曰。隻手入渙散之鄕。得數千兵以討賊。非信義素著於人。何以及此。其見推許如此。又嘗告于文忠曰。兵興以來。戰骨殍骸。暴露原野。時當春月。宜有埋骴掩骼之令。敢以告于執事者。時夜已深。文忠方就寢。遂蹶然起坐曰。善言不可宿。卽令具畚鍤。遲明擧行。日初發難。公在智異山中。夢有白頭老人來告云。風寒逼骨。自不可忍。公惕然驚悟曰。此必先墓有變。神靈告我也。卽匍匐往視之。則參知公丘墓。果爲賊所掘。剖棺露體。公伏地大慟。卽具棺槨衣衾改葬之。人以爲誠孝所感。有此冥應云。初守愚堂崔公爲南冥先生。創德川書院。規模甚大。兵火之餘。蕩無遺址。公痛傷師門尸祝之無所。與一二同志。協謀重創。神棲齊宿之所。一遵舊規。玄 逸之先大父於公爲三從兄弟。先大父之作宰宜春也。公嘗貽書戒之曰。吾弟下車之初。政聲頗善。近日遊談。與前稍異。願吾弟之自省也。先大父卽以其帖揭壁加勉焉。兄弟相勉書紳自警之義蓋如此。寒岡鄭先生嘗有言曰。朴思仲之隱德有操。李汝宣之寬厚長者。李汝涵之才行俱高。皆余之素嘗敬畏者也。其所以稱述三君子者。可謂約而盡矣。朴,李二公事蹟。皆別有狀。玄逸自兒侍先君子。固嘗聞公志節行誼之梗槩。丁丑秋。罪逐南來。距公晉陽舊居百里而近。間因宗人之來訪者。詢及公家事。知其本末。爲之衋然感涕。後數日。公之族曾孫台亨與其族孫命培。掇拾公遺文及知舊門人敍述若干篇。持以示余。泣拜以請曰。族曾祖文章行治。實有不可泯沒者。而家無幹蠱之子。遺稿家牒。蕩然亡失之餘。所存止此。實吾儕宗人之所共羞也。惟吾丈幸哀而收拾狀次之於以揚闡幽潛。覆露其遺胤也。玄逸不敢堅辭。遂節略諸家所記述。間亦參以舊聞。第錄如右。謹狀。
[자료]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八
'■ 보학 > 행장.시장(謚狀)' 카테고리의 다른 글
南冥曺植先生行狀 - 鄭仁弘 撰 (0) | 2014.03.09 |
---|---|
순조대왕행장(純祖大王行狀) (0) | 2013.12.28 |
온계 이해선생 행장(溫溪 李瀣先生 行狀) / 퇴계 이황 넷째형 (0) | 2013.06.06 |
고려문하시중 조간행장(高麗門下侍中 趙簡 行狀) (0) | 2012.08.25 |
청천 신유한선생 행장(靑泉申維翰先生行狀) (0) | 2012.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