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고려문하시중 조간행장(高麗門下侍中 趙簡 行狀)

야촌(1) 2012. 8. 25. 15:18

고려 문하시중 좌정승 조공 장록

   (高麗 門下侍中 左政丞 趙公 狀錄)

 

공의 휘는 간(簡), 자(字)는 자삼(子三)이다. 아버지의 휘는 연벽(連璧)으로 고려 고종 때 대호군으로 김제에 귀양 왔다. 신라 걸해왕이 군(郡) 남쪽 15리에 벽골제를 쌓았는데, 수원(水源)이 셋이다. 둘은 금구(金溝) 모악산(母岳山) 남쪽과 북쪽에서, 하나는 태인(泰仁) 상두산(象頭山)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합친다.

 

호군공이 예전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벽골제의 용이오. 내일 흑룡이 나타나 내 집[巢穴]을 빼앗으려 할 것이오. 공이 와서 구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보니 매우 이상했다.

 

다음 날 새벽에 호군공이 활과 화살을 가지고 벽골제 주변에 도착하자 잠시후 남쪽 방향에서 조각 구름이 다가오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갑자기 검은 비늘이 물 위에 떠올랐다.

 

호군공이 활을 한껏 당겨 쏘았더니 검은 비늘 한가운데에 맞아 붉은 피가 저수지에 가득 했다.

그 날 밤 다시 어떤 노인이 찾아와 사례하며 말하기를 “공 덕분에 내 거처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소이다. 공은 틀림없이 자손 중에 흥하는 자가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원종 갑자년(원종 5년, 1264년)에 조간 공이 태어났는데, 풍골(風骨 : 풍채와 골격)이 특이했다.

등에 7개의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북두칠성이 늘어선 것과 같았으며, 양쪽 어깨에는 딱딱한 비늘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틀림없이 이는 벽골제에 사는 용의 정령(精靈)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군(郡)의 소리(小吏 : 衙前)가 되어 회화나무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 고을 사또가 낮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쌍룡이 서려 있었다. 깜짝 놀라 사정을 알아보고는 즉시 학문을 배우도록 명하니 문예(文藝)가 일취월장하였다.

 

어떤 사람이 “硯上黑雲揮筆後(벼루 위 검은 구름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쓴 뒤이고)”라고 한 구절을 먼저 부르자 공이 “庭前紅雨落花時(뜰 앞에 내리는 붉은 비는 꽃이 지는 때라네)”라고 화답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년)에 요사스런 무당이 요사한 귀신을 섬기며 합주(陜州)에서부터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모두 앞다 투어 달려가 제사를 지냈다.

 

공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공도보(孔道輔)가 없으니 요사스런 무당을 죽여 없애고 요사한 귀신을 불태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상주(尙州)에 이르자 판관 안향(安珦) 공이 매를 쳐서 이를 다스렸다. 그 생각의 정대(正大)함이 안 공과 똑같았다.

 

공은 집안이 본래 청빈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하였다. 충렬왕 기묘년(충렬왕 5년, 1279년)에 나이 16세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서적점 녹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에 충렬왕이 시부(詩賦)로 친히 문신(文臣)들을 시험하여 공이 또 1등을 차지하자 특별히 황패(黃牌)를 하사하고 내시(內侍)에 적(籍)을 올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이 거주하는 곳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하고, 또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열헌(悅軒)이라 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보궐(補闕)로 승진하자 후학(後學)을 이끌어 등용토록 하였으며,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할 때에도 반드시 서적을 읽으며 지내니 안향 공이 일찍이 정학(正學)3)으로 공을 추천하였다.

 

동방(同榜)인 김순(金恂) 공, 이진(李瑱) 공, 권보(權溥) 공과 사귄 정이 나날이 더 깊어졌으며,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없애고 학교를 진흥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권 공에게 조정에 건의토록 권하여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하니 동방의 성리학이 이로부터 전해지게 되었다.

 

충렬왕 무자년(1288년) 여름에 궁궐에 꽃이 만발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향각(香閣)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공이 직강(直講)으로서 새 악곡(樂曲)을 지어 바치니 왕이 악부(樂府)에 수록토록 명하였다.

 

[각주]

주1) 地 : 원문에는 ‘地’로 적혀 있으나, 문맥 상 ‘池’의 오자(誤字)로 판단되어 ‘池’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주2) 戊午 : ‘戊子’의 오자(誤字). 고려사에는 “戊寅宮花盛開宴群臣于香閣酒酣王命典理正郞閔漬國學直講趙簡製新曲左副承旨安珦亦製詩以進”으로 기록돼 있는데, 무인년은 충렬왕 4년(1278년)으로 조간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이다.

 

이에 비해 고려사절요에는 무자년(戊子年) 즉 충렬왕 14년(1288년) 4월조에 “宮花盛開宴群臣于香閣酒酣王命典理正郞閔漬國學直講趙簡製新曲左副承旨安珦亦製詩以進”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조간 선생 행장의 무오년은 무자년의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주3) 정학(正學) : 공자(孔子)의 학문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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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 門下侍中 左政丞 趙公 狀錄

 

公諱簡。字子三。考諱連璧。高麗高宗時。以大護軍謫金堤。新羅訖解玉。築碧骨堤於郡南十五里。水源有三。二出金溝母岳山南北。一出泰仁象頭山會於堤。護軍公嘗夢。有一老來言曰。我碧骨堤龍也。明有黑龍來。欲奪我巢穴。望公來救。旣覺甚異之。翌曉。挾弓矢。到堤邊。須臾片雲從南至。雷雨大作。忽有黑麟露出水上。公彎弓射之。正中黑麟。紅血滿地。其夜又有老人來謝曰。賴公而永奠吾居。公必有子孫之興者。至元宗甲子。公生焉。風骨凡異。背上有七點。列如北斗形。兩肩有甲。人皆謂必是碧骨堤龍精也。爲郡小吏。嘗升槐樹。邑宰晝寐。見樹上雙龍糾結。覺而偵知之。卽令受學。文藝日就。人有唱句曰。硯上黑雲揮筆後。公應聲曰。庭前紅雨落花時。人稱神童。忠烈元年。有妖巫奉妖神。自陜州歷行郡縣。人皆奔走設祭。公聞之曰。世無孔道輔。不能殺妖巫燒妖神。及至尙州。判官安公珦。杖以械之。其所見之正大。與安公相符。家本淸寒而孝於親。悌於長。忠烈己卯。年爲十六。擢第壯元。補書籍店錄事。明年五月。忠烈以詩賦親試文臣。公又居第一。特賜黃牌籍內侍。因名所居地曰龍頭洞。又名所處堂曰悅軒。累遷補闕。引進後學。公退之暇。必閱書籍。安公珦常以正學推之。與同榜金公恂,李公瑱,權公溥。交契日深。以祛民弊。興學校爲己任。勸權公建白于朝。刊行朱子四書集註。東方性理之學。自此始傳。忠烈戊午夏。宮花盛開。王與羣臣。宴于香閣。公以直講。製進新曲。王命入樂府。丁父憂。廬墓三年。忠烈嘉之。旌表其門。特受僉議舍人。旋爲慶尙按廉使。題安東暎湖樓曰。此樓風景惱人多。八詠雙溪不敢和。旗盖影交樵牧路。管絃聲落吏民家。跨空簷闊膚生粟。照水軒危眼眩花。玉斧修成廣漢殿。飄風不許上仙槎。連主選法知貢擧。卛入格諸人。詣壽寧宮上謁。王以公爲殿試門生。臨軒賜宴。秋除密直副使。力陳其斥佛崇儒。時內僚李之氐拜兩司官。公不署告身。王召公曰。有一大官。憾卿愼之。及忠烈復位。密請再三。不得已乃署。丁未。忠宣王在元。遣金文衍,金濡等。夜入廵軍府。宣批判。以公爲右常侍。辛酉秋七月。上王至西藩獨知里。寄書于公曰。予以命數之奇。罹玆憂患。孑爾一身。跋涉萬五千里。向于吐藩。辱我社稷極矣。幸諸國老同心協力。敷奏于帝。俾予速還。於是與許公有全如元。請王還國。爲瀋王之黨所沮。竟未達而還。公籲天無階。繼以流涕。十一月。上王又寄書于公及崔公有渰,許公有全等曰。予以十月十六日到吐藩。聞帝許予還國。其言若實。公等無以爲念。不然。與權淸臣,吳潛。議以高王之於聖武。元王之於世皇。卛先歸附。佐運樹功。有微勞之意。表請于帝。奏記于丞相。俾余無久於此。公以請還上王爲己任。而爲權漢功所阻。閱二載而至癸亥正月。公製疏送使如元。請召還上王。二月。命量移于朶思麻之地。六月。元晉王卽帝位。大赦天下。召還上王。甲子春正月。元帝勅王還。皆公之力也。公題平壤浮碧樓曰。太平車駕欲東還。金碧重輝錦繡山。穿月棹聲連榻上。掛空燈影落波間。銀灘釣叟魚同樂。翠障仙僧鶴共閒。對此若論多少景。南濱八詠摠無顔。五月。公與崔公有渰等。卛百官軍民。呈書于中書省曰。本國與日本不遠。請令國王早還本國。安撫百姓。及上王之薨燕邸也。公北望慟哭。幾隕廼甦。公旣老癉疽。有醫僧曰。病根於骨。骨當半朽。不刮去不理。惟恐不能忍。公曰。死等耳。第試之。乃以利刀剝之傅藥。絶而瞑者二日。王使人問疾。上洛君金恂往問。涕泣不已。公使人語。公之悶我。不謂如此。恂曰。四紀同年契。烏得無情耶。歷銀靑光祿大夫密直提學檢校僉議評理贊成事。加門下侍中左政丞。致仕歸別壄。與諸生講論經傳。勉以忠孝。卒于乙丑冬。謚文良。稼亭李公糓。過龍頭洞有詩曰。偶向壯元坊裏行。舊居斜日入前楹。每慚塲屋羣龍鬪。獨步簪纓一鶚橫。厭世公曾歸碧落。卜鄰吾欲斲黃精。地靈人傑言堪信。看取公卿衮衮生。後之章甫。有俎豆之議。我成廟戊申。仍儒論立祠於大堤西禾嶺下親巖。而爲兵燹所蕩。宣廟乙亥重創。後又移建于邑內城山之下墨巖。李文平繼孟,羅建溪安世追享。其還安端由。見於吾先祖文正公所製告由。基所與配位失傳不著。男令晦。寶文閣直學士。孫通元。工曹判書。曾孫希輔。入我朝。戶曹判書。玄孫義定山縣監。以下多不盡錄。而略擧其槩。理智司直。崇智以翊祚功。封平臯君。五世孫也。元佑直長。元倫以靖社功。封馬川君。六世孫也。潤璧部將。潤璞,潤珪皆參奉。潤琛以學行三徵不就。號百千堂。潤珽校尉。七世孫也。英立。丁酉亂以死節㫌褒。贈刑曹參判。成立。甲子亂募義。仁廟朝。以學行徵。除內侍敎官。九世孫也。用昌孝行卓異。特蒙㫌典。十世孫也。以學,以孝給復。必思亦以孝旌閭。贈工曹佐郞。必達武統制使。十一世孫也。相周府使。相殷郡守。十二世孫也。今十七世孫鎭默世默等。與其族孫澈,泯。以公行蹟見示。因託以編次爲狀。余始盖屢謝而不敢也。顧以非直先誼之重。其後孫追遠之誠。誼不可以終辭。據麗史及輿覽所載。第錄如上。以俟知言之君子云。

 

[문헌자료]

◇錦谷先生文集卷之十八(行狀)◇조선 후기의 주자학자 송내희(宋來熙:1791~1867)의 시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