〇퇴계 이황의 조카임
■통훈대부 행 지례현감 이공 묘갈명
(通訓大夫 行 知禮縣監 李公 墓碣銘)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이씨(李氏)는 진보(眞寶)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처음에 현리(縣吏)인 석(碩)이 아들 수(脩)를 낳았는데,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에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그 후 이대(二代)를 전하여 휘 계양(繼陽)에 이르러서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아서 고사전(高士傳)에 우뚝이 드러나 있는데, 이분이 예안현(禮安縣)으로 옮겨가 살았고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식(埴)을 낳았는데, 식은 진사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식(埴)이 휘 해(瀣)를 낳았는데, 해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졸관하였다.
해(瀣)는 일찍이 이기(李芑)의 간악한 정상을 탄핵했다가 그의 원한을 샀던 관계로, 이기가 기유 년의 화(禍)를 인하여 다른 사항을 끌어 붙여서 중상하였는데, 일이 끝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갑산(甲山)으로 유배되던 도중에 작고하였다.
그의 아우 황(滉)은 세상에서 이른바 퇴계 선생(退溪先生)이란 분이다. 대사헌이 인의(引儀) 김복흥(金復興)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정해년 10월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영(寗)이고 자는 노경(魯卿)이다. 성품이 진실하고 순박하고 너그러워서 스스로 드러내기를 일삼지 않았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였고, 재리(財利)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소년 시절에 계부(季父)에게서 자라면서 문견(聞見)이 많았으므로, 문정(門庭)을 나가 배우지는 않았으나, 당시에 장덕(長德)으로 일컬어졌다. 신유년에는 상상(上庠)에 올랐다.
선묘(宣廟)의 초정(初政)에 미쳐서는 도학(道學)을 존숭하고 원죄(冤罪)를 씻어 주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덕행과 훈계를 전해 받아서 가정(家庭)의 교훈이 있고, 또 선친(先親)의 원죄도 있다.”하고, 이에 공을 천거하여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삼았는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였다.
신미년에는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가 되었고, 경진 년에는 군위 현감(軍威縣監)에 승진되어 고을을 다스린 지 4년 만에 일로 인하여 파면되었다가, 갑신년에 다시 기용되어 지례 현감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무자년 3월에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고, 예안(禮安)의 북쪽 연곡(燕谷)에 장사지냈다.
공의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그로부터 6년 뒤인 계사년에 작고하여 그 다음해인 갑오년에 부장(祔葬) 하였는데, 부인 이씨 또한 경주(慶州)의 대성(大姓)이고, 부친인 첨정(僉正) 정(侹)은 바로 나의 종조(從祖)이다.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군수 이언직(李彦直)이다.
공은 두 고을 장관을 역임하면서 청렴과 신중으로 처신하였기에, 파면되어 돌아온 날에는 양식을 꾸어서 밥을 지었다. 끝내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교(㝯)의 아들 유도(有道)를 후사로 삼았다. 유도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봉(崶), 암(巖), 단(耑)이고, 딸 두 사람은 권극잠(權克湛), 황진형(黃震亨)에게 시집갔다.
아, 공 같은 이는 덕이 있고 행실도 있으나 이름이 없어, 벼슬은 고작 영리(令吏)에 불과하였고, 수(壽)는 70세도 채우지 못했으며, 작고한 뒤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덕을 많이 쌓았으니, 하늘이 장차 이로써 복을 기다리게 하려는가. 이것을 명으로 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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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訓大夫 行 知禮縣監 李公 墓碣銘
李出眞寶爲望族。其始縣吏碩。生子脩。登第。平紅巾有功。封松安君。再傳而至諱繼陽。隱德不仕。優於高士傳。移居禮安縣。後贈吏曹判書。生諱埴。進士贈議政府左贊成。生諱瀣。卒官司憲府大司憲。甞劾李芑姦狀。爲所㘅恨。因己酉之禍。中以他比。事竟無驗。猶流甲山道卒。其弟曰滉。世所謂退溪先生者也。大憲娶引儀金復興女。以嘉靖丁亥十月生公。諱寗。字魯卿。眞淳闊略。不事表襮。口不言人過。工草隷。踈財利。少長於季父。目濡耳染。學不出門庭。而時稱長德。辛酉。登上庠。及 宣廟初政。尊崇道學。洗滌寃枉。識者咸言李某傳德襲訓。有家庭之敎。又有此先寃。乃薦爲省峴察訪。未幾。丁內艱。辛未。爲造紙署別坐。庚辰。陞軍威縣監莅官四年因事坐罷。甲申。起廢。爲知禮縣監。越五年戊子三月。卒。壽六十二。葬在禮安北燕谷。其媲李氏。後六年癸巳卒。明年甲午。祔。李亦慶州大姓也。父僉正侹。吾從祖也。生一女。郡守李彦直。公歷典兩邑。淸愼爲行。罷歸之日。稱貸而擧火。卒無男子子。以弟㝯之子有道後。有道四男二女。曰崶曰巖曰耑。女二人。權克湛,黃震享。噫。如公者。有德有行而無名。官不過令吏。壽不滿耆艾。身歿之後。囊篋蕭然。而種玉繁植。天將以是有待耶。是爲銘。<끝>
백사집 > 白沙先生集卷之三 / 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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