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김반이 문묘의 동· 서무와 제례와 반궁 등에 관해 상언하다

야촌(1) 2007. 8. 2. 10:30

세종 59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2월 9일(계사) 4번째기사

 

☞본 글은 성균사예 김반(金泮)이 익재 이제현. 목은 이색. 양촌 권근 선생 세분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당시 세종에

    께 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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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사예 김반이 문묘의 동.서무와 제례와 반궁 등에 관해 상언하다.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반(金泮)이 상언하기를,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음으로써 오랫동안 관직(館職)을 더럽힌 것이 지금 5년이오나, 털끝만한 도움이 없었습니

  다.  삼가좁은 소견으로써 뒤에 그 조목을 열거(列擧)하오니, 엎드려 성상의 재결을 바라옵니다."

 

☞ 문묘(文廟)의 동·서무(東西廡)는 선유(先儒)를 제사하는 곳이니 넓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무신년 겨울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요동에 이르러 문묘를 배알(拜謁)하니, 동·서무가 각각 11간

     (間)이였습니다.

 

     지금 우리 문묘는 동·서무 간각(間閣)의 수(數)가 도리어 요동만 못하여, 다만 각각 7간뿐이므로 제사때를 당하

     면 비좁음이 더욱 심하여 진설(陳設)할 땅이 부족하옵니다. 원컨대 요동의 동·서무 간각의 수에 의하여 각각 4

     간을 지어 보충할 것입니다.

 

☞ 우리 조정은 예(禮)가 갖추어 졌고 악(樂)이 화하여 이미 종묘악과 조회악을 새로 만들어 모두 창고에 두고 간직

      하였으나, 단지 문묘에는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중사(註1. 中祀)이오나 실로 만세의 종사(宗祀)

      이오니, 원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새 악기(樂器)를 만들고 창고를 지어 간직하게 하며, 또 문묘의 삭망제(朔

      望祭)에 기둥밖[楹外]에서 두 번 절하는 예(禮)는 다른 제사와 같지 아니하오니, 원컨대 자세히 참고하여 제례

      (祭禮)를 새롭게 하옵소서.

 

☞ 예전에 반궁(泮宮)은 삼면(三面)에 물이 있어 구경하는 자를 제어하였는데, 지금은 반궁의 삼면에 물이 없어

     구경하는 사람을 제어할 수 없으므로, 나무꾼들이나 혹은 말을 타고 문묘의 길 남쪽으로 지나가고, 혹은 비를

     나 신문(神門) 섬돌 위에 걸터 앉기도 하니 그 불경(不敬)함이 막심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원묘(原廟)가 이룩된 뒤에는 반수(泮水)를 파고 돌을 쌓아 다리를 만들어서 구경하는 사람

    을 제어하게 하옵소서.

 

☞ 석전제(釋奠祭)의 성생(省牲/註6)· 할생(割牲/註7)하는 곳은 깨끗하게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곳이 여리(閭里)와 가까우며, 원장(垣檣)도 없고 옥우(屋宇)도 없어서, 항상 닭·개 말·소 등이 더렵혀서

     그 부정(不凈)함이 심하옵니다. 원컨대 집을 지어 주소(廚所)를 만들고 담을 둘러서 그곳을 정(凈)하게 할 것입

     니다.

 

☞ 신의 스승인 선신(先臣)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과 《입학도설(入學圖

      說)》은 모두 경(聖經)의 우익(羽翼)이며, 학자의 지침(指針)이옵니다.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신이 김종리(金從理)와 더불어 같이 태종 대왕의 명을 받잡고 쓴 것이온데,

    스승이 말하기를, ‘내가 《진씨집설(陳氏集說)》을 먼저 쓴 뒤에 내가 지은 《천견록(淺見錄)》을 쓰고자 하였

    으나, 다만 나의 병이 위독하여 해가 서산(西山)에 닿은 것 같으니, 만약 《진씨집설》의 수만여 말[言]을 다 쓴

    뒤에 천견록을 쓰려고 한다면, 책을 미처 이룩하지 못하고 밝은 세상을 하직할까 두렵다.

 

   이 때문에 《진씨집설》을 간략하게 들어 쓰고 다음에 천견록을 써서 올린다. ’고 하였는데, 곧 주자소(鑄字所)

   내려 인쇄하였습니다. 그 뒤에 근(近)의 아들 권도(權蹈)가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서 《진씨집설》을 다 쓰

《천견록》을 붙여 간직한 지가 오래 되었사오니, 원컨대 인쇄하여 널리 전하기를 명하옵소서.

 

  또 《역(易)》·《시(詩)》·《서(書)》·《춘추천견록(春秋淺見錄)》과 《입학도설》, 그리고 《예기천견

  록》에 의해서 문신(文臣)게 명하여, 각각 여러 경전(經典)의 주각(註脚) 뒤에 붙여서 후학(後學)들이 보기

  에 편하게 하옵소서.

 

☞ 《춘추부록(春秋附錄)》은 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바이며, 동방에는 드물게 있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서 구하여도 많이 얻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간행(刊行)하기를 명하옵소

       서.

 

☞ 무릇 성도(聖道)에 공로가 있는 이는 제사하는데, 종사(從祀) 하는 법은 한(漢)나라 영평(永平) 15년에 시

      여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72제자를 종사하였고, 당(唐)나라 정관(貞觀) 20년에 이르러 조서(詔書)로써 역대

      의 명유(名儒)들을 아울러 배향(配享)하게 하였으며, 송(宋)나라 이종조(理宗朝)에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을 더하여 종사(從祀)에 들게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도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 안향(安珦) 등을 종사(從祀)에 추가한 뒤에 우리 동방의 교

     가 숭상되 었습니다. 최치원· 설총· 안향의 뒤에, 오직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도학(道學)을 창명(唱鳴)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실로 그 정통(正統)을 전하였는데, 신의 스승 양촌 권근(權近)이 홀로 그 종지

     (宗旨)를 얻었습니다.

 

    근(近)의 학문의 연원(淵源)은 색(穡)에게서 나왔고, 색의 학문의 정통은 제현(齊賢)에게서 나왔으니, 세 분의 학

    문은 다른 예사 선유(先儒)들에 비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元)나라 탕병룡(湯炳龍)이 이제현을 찬(讚)하기를,

    ‘산악(山嶽)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유종(儒宗)이 되었도다.’ 하였고, 구양(歐陽) 규재공(圭齋公)이 색(穡)에게

    준 시(詩)에는, ‘의발(衣鉢/註8)은 마땅히 해외로 좇아 전하리로다.’ 였으며, 명나라 고황제(高皇帝)는 권근에

    게 대제문연각시(待製文淵閣詩)에 글을 짓기를 명하였으니, 세 분이 중국 사람에게 아름답게 여김을 받은 것은

    어찌 예전보다 만만 배나 더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는 비록 모두 종사(從祀) 하는 반열(班列)에 참예할지라도 반드시 불가하다고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의

    지극한 소원이오며, 성조(盛朝)의 아름다운 법이온데, 아직 거행하지 아니하니 식자들이 한탄하옵니다.

 

    논의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색은 부처에게 아첨한 비난이 있다. ’고 하오나, 신이 일찍이 색의 언지(言志)라는 시

    (詩)를 보니, 이르기를, ‘평생에 석가의 글을 알지 못하였도다.’ 하였고, 또 ‘양도(兩道/註9)에는 스스로 무심히

    지 나갔건만, 수(洙/註6)· 사(泗)에서 오르락 내리락 백발이 되었네.’ 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부처에게 아첨하였

    겠니까.

 

    예전 한창려(韓昌黎/註7)는 중 대전(大顚)과 벗하였고, 주문공(朱文公/註8)은 운곡사(雲谷寺)에서 놀았고,

    치원(崔致遠)은 단속사(斷俗寺)에서 놀았으니, 이곳도 과연 모두 부처에게 아첨한 것입니까. 지금 색이 암자(庵

    子)를 둔 뜻도 이와 같습니다.

 

    논의하는 자의 말을 신은 믿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대의 종사(從祀)를 증가(增加)하는 법을 상고하

    여 유사에게 내려 논의하게 하여, 세 분을 묘정(廟庭)에 들이어서 후진(後進)의 선비에게 성도(聖道)를 가히 높

    일 줄을 알게 하여, 그 학업을 일으키는 마음을 떨치게 하옵소서.

 

    또 《서경(書經)》에 상고하니, 이르기를, ‘상(賞)을 대대로 뻗친다. ’[賞延于世]고 하였는데, 이를 해설하는 사

    람은, ‘착한 사람을 존경하기를 장구히 한다. ’[善善長也] 하였으니, 원컨대 무릇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자의 후

    예(後裔)에게는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특별히 용서하는 은혜를 더하고, 더욱 상을 연장(延長)하는 아름다운 뜻

    을 도타이하소서.

 

☞ 우리 조정에서 글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켜서,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종척(宗戚)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國學)이 있어서 일국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교양(敎養)하여 사람을 만드는 도(道)가 지극하고 극진하옵니다.

 

    그러나 일국의 자제들의 배움이 도리어 종척 자제들보다도 부지런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비록 날마다 책을 끼고

    배우기는 하나, 물러가서 재(齋)에 있으면 책은 덮어 두고 읽지 아니하며, 유유히 날을 보내면서, 그들의 마음속

    으로 생각하기를, ‘아무와 아무는 일찍이 부지런히 배우지 아니하여도 과목(科目)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

   는데, 하필 고심(苦心)하고 애써서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한 뒤에라야 과거에 합격할 것인가.’ 하면서 모두 글을

   읽으려 아니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연고를 칭탁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려하여 학교에 붙어 있게 하여도 겨

   우 였다가 다시 흩어지니, 한갖 오고가는 힘만 허비할 뿐, 어느 여가에 글 읽기에 전심 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날마다 매질하면서 제(齊)나라 말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신은 이와 같이 글 읽기

   를 게을리 한다면 수십 년 뒤에는 장차 반드시 무무(貿貿)하여 진유(眞儒)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

   니라, 초집(抄集)을 금하는 명령이 비록 엄하고, 예조의 월강(月講)을 비록 자주 하오나, 《의의초집(疑義抄

   集)》이 아직도 그 마음의 누(累)가 된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성조(盛朝)에서 강경(講經)을 파하고 의의(疑義)로써 시험하며, 초집을 엄금하는 것은 가

   히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라고 이르겠으나, 신은 그윽이 두려워하건대, 이는 곧 《맹자》의 이른바,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가지런하게 한다. ’는 것입니다.

 

   여러 생도들이 성현(聖賢)의 도(道)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실로 글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지극한 덕(德)

   에도 누(累)가 있습니다. 신은 매양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마음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한묵전서(翰墨全書)》에 실린 주자 과거 사의(朱子科擧私議)와 《경제육전(經濟六

   典)》에 실린 태조 과거 성헌(太祖科擧成憲)을 참작하여 시행하되, 성균관 및 사부 학당(四部學堂)의 생원과 생

   도는 예조와 대간(臺諫) 각 한 사람으로 하여금 월강(月講)할 때마다 같이 고강(考講)을 가(加)하여, 《대학》을

   통(通)한 뒤에야 《논어》·《맹자》를 강하고, 《논어》·《맹자》를 통한 뒤에야 《중용》을 강하며, 오경(五

   經)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여, 그 통경(通經)한 것이 많고 적음으로 그 등급의 고하(高下)를 정하여 장부에 기록

   해 두었다가, 시년(試年/註9)에 이르러 통고(通考)하여 초장(初場)을 삼고, 의의(疑義)는 파해 없애며, 무릇 조사

  (朝士) 및 외방의 수령과 교도(敎導)들에게는 시년(試年)에 강(講)을 하되, 또한 통경(通經)의 많고 적음으로 초

   장을 삼을 것입니다.

 

외방 각도의 생도에게는 특별히 행대 감찰(行臺監察)을 보내어, 감사·경력·수령 들과 더불어 매년 춘추(春秋)에 서울 안에서 강경(講經)하는 예에 의하여 함께 고강(考講)을 가(加)하고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예조에 보내어 시년(試年)을 기다려서 통고(通考)하여 초장을 삼으며, 그 나머지 외방의 생원(生員) 및 전 교도들은 함께 성균관 월강(月講)에 와서 시험한 뒤에 과거에 나가기를 허락하면, 흩어져 있는 생원 및 전 교도들이 모이기를 기대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성균관에 모일 것이고, 부지런하기를 기대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글 읽기에 부지런할 것이며, 장차 진유(眞儒)가 배출(輩出)함을 볼 것이오니, 가르치고 길러서 사람을 만드는 도리에 거의 합할 것이옵니다.

 

☞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효도로써 다스림을 이루오니, 부모를 두고 와서 벼슬하는 자에게는 3년만에 한번씩 귀근(歸        覲)하게 하고, 부모가 없이 와서 벼슬하는 자에게는 5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기를 허락하며, 또 80, 90세의 늙은 어버      이가 있는 자는 모두 보내어서 돌아가 봉양(奉養)하게 하오니, 도덕과 교화가 러 신하들에게 베풀어짐이 지극하고 극      진하옵니다.

 

그러하오나 형제가 있으면서 와서 벼슬하는 자는 5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독자(獨子)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오히려 불만이 있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고, 없어진 이를 섬기기를 있는 것처럼 섬기라. ’고 하였으니, 원컨대 지금부터 독자로서 형제가 없는 자에게도 귀근(歸覲)하는 예에 의하여 3년만에 한 번씩 성묘하기를 허락하여, 독자로 하여금 죽은 부모를 산 부모같이 섬기는 마음으로 보답하게 하여, 더욱 성조(聖朝)의 효(孝)로서 정치하는 뜻을 두텁게 하옵소서.”하니, 예조에서 의논하여 정해서 아뢰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8책 59권 15장 A면

[영인본] 3책 442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왕실-종사(宗社) ◇예술-음악(音樂) ◇사상-유학(儒學) ◇출판-인쇄(印刷) ◇출판-서책(書

    冊)

◇역사-고사(故事)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인사-선발(選拔) ◇인사-관리(管理) ◇윤리-강상(綱常)

 

(註1)중사(中祀) : 큰 제사에 다음가는 중간 제사.

(註2)성생(省牲) : 제사에 쓸 소를 살펴보는 것.

(註3)할생(割牲) : 소를 잡는 것.

(註4)의발(衣鉢) : 전통(傳統).

(註5)양도(兩道) : 노자도(老子道)와 불도(佛道). ☞

(註6)수(洙)·사(泗) : 공자의 도.

(註7)한창려(韓昌黎) : 한유(韓愈).

(註8)주문공(朱文公) : 주자.

(註9)시년(試年) : 과거보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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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金泮)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 강서 김씨(江西金氏)의 시조이다. 장인이 장사언(張思彦)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99년(정종 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05년(태종 5) 성균주부가 되었으며, 이어 성균직강으로 승진하였다. 1423년(세종 5) 예조의 추천으로 효자의 정문이 세워지고 호세(戶稅)를 감면받았으며 우헌납을 제수받았다. 이듬 해에는 좌헌납에 올랐으나 일년 뒤에 뇌물을 받은 혐의로 면직되었다.

 

1428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시가 4편을 지어 선종(宣宗)의 은혜에 사례하자, 선종이 이를 한림원(翰林院)에 내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이로써 그의 글이 중국에도 알려졌으며, 중국인들이 ‘소단미선생(燒斷尾先生)’이라 불렀다고 한다.

 

1429년 사예(司藝), 1436년 사성, 1441년 대사성을 거쳐, 1443년에 첨지중추원사, 1446년에는 행 대사성(行大司成)에 제수되었다. 1448년에 겸사성(兼司成) 윤상(尹祥) 및 사성 김말(金末)과 경서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꾸짖고 욕까지 해 파직되었다. 퇴직 후 가난해서 문하생들이 쌀과 술을 보내주었으나 끝내 끼니를 잇지 못하다가 굶어 죽었다. 자손은 없다.

 

일찍이 『성리대전』·『이학제강(理學提綱)』·『역상도설(易象圖說)』·『사서장도(四書章圖)』와 여러 격언을 채집해 보설(補說)했으나 간행되지 못하였다.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경서에 통달했으며, 성균관에 20여 년 간 재직하였다.

 

김구(金鉤)· 김말과 함께 같은 때에 성균관에서 교수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내, 사람들이 이들을 ‘삼김(三金)’·‘경학삼김(經學三金)’ 혹은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고 일컬었다.

 

1593년(선조 26)에 왕이 강서현(江西縣)에 행차해 그의 무덤을 수리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을 선비들의 청으로 학동서원(鶴洞書院)을 세워 그를 제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