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화엄사상과 체원대사(體元大師).

야촌(1) 2007. 1. 21. 00:29

■ 체원(體元)과 화엄사상

 

2003년7월 도서출판 푸른 역사에서 발간한 지영재 지음 서정록(西征錄)을 찾아서 20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서는 익재 이재현과 충선왕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정확히 전 하는바가 없다.

 

익재의 아버지 이진(李瑱)과 장인 권보(權溥)가 충선왕의 개혁정치에 동참하였으니, 이로인해 일찍부터 신임을 받았으리라 추측할수 있다. 그리고 이씨족보에는 삼형제만 등재되어 있지만 익재에게는 법명을 체원(體元) 이라고 한 중형이 있었다.

 

체원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충선왕의 지우(知遇)를 받아 승직이 오르고 명찰에 제수 받았으나, 부모가 늙어 그 좌우를 떠나지 아니 하였다. 이 체원이 충선왕에게 익재를 추천하였을지도 모른다.

 

●고려후기 화엄사상(華嚴思想)에 관한 사전에 이른 기록이 있다.

 

고려 말 화엄사상의 천명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한 승려로는 충숙왕과 충혜왕 때에 활동한 화엄종의 체원(體元)을 들 수 있다. 체원은 이제현(李齊賢)의 가형(家兄)이다. 그가 20세를 전후하여 출가하였을 당시의 화엄종단은 정치적인 배경을 잃고 사상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한 채 기층사회 속에서 실천신앙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체원은 개경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해인사를 근거지로 하여 인근 법수사(法水寺)· 반룡사(盤龍寺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반룡사길 87(용리 187), 동천사(東泉寺)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경주지방의 지방토호 등과 유대를 맺으며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는《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華道場發願文略解)》·《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 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등과《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이라는 위경(僞經)의 발문을 남겼다.

 

이 저술들은 1330년 전후의 저작이며,《화엄경》·의 관음신앙과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저작된 순서별로 그의 입장은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별행소》는 40권 《화엄경》·중 관음보살의 법문을 통해서 관음신앙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정리하는 한편, 영험과 신이(神異)를 통해서 실천신앙을 강조한 것이었다. 《약해》는 의상이 지은 《백화도량발원문》·에서 신라화엄종의 관음신앙에 대한 예를 구하려 한 것이었다.

 

글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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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원(體元)스님과 고려 말 불교.

 

「무신집권기 화엄종풍 진작 / 의상·균여 계승…개혁 주창」

 

화엄종은 신라 의상스님이 우리나라에 전 한이래 고려전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한 대표적 교종이었으나 무신집권기 이후 뚜렷한 행적을 남긴 화엄종승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화엄종풍을 종풍을 진작시킨 분이 체원(體元)대사 이다.

 

대사(大師)는 경주이씨로, 검교정승 이진(1244~1321)의 둘째아들이며, 스님이 고려 말의 대 문인 익재 이제현(1244~1321)의 바로 손위 형 이다. 대사(大師)는 아버지 때에 이르러 과거로 관직에 진출한 전형적인 신흥 사대부 집안 출신이다.

 

동생 이제현은 아버지를 따라 천태종 묘련사(妙蓮寺/개성 삼현리에 있던 절)의 무외국사 정오스님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조인규가의 승려인 의선스님과 교류하였다. 이제현의 딸은 공민왕비 혜비 인데 공민왕이 죽자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손자 내유는 출가하여 조계종 광도사의 주지가 되었고, 처조부 권탄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처남인 권종정은 양가 도총섭이었다. 이진과 권탄은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이었으나 본래 불교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러한 불교집안에 태어난 스님은 법호가 목암(木庵) 또는 향여(向如)라고 했으며 각해대사(覺海大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20세 무렵에 출가하여 승과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한때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승직이 높아지고 유명사찰의 주지를 지내기도 하였다.

 

40세 전후인 1320년 이후 화엄종의 결사를 폈던 반룡사 주지를 지낸 바 있고 해인사를 중심으로 화엄종풍을 진작시켰다. 대사(大師)는 의상과 균여스님을 계승하여 종풍을 선양하였는데, 이는 의상스님이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에게 발원문을 찬한 <백화도량발원문> 을 약해한 데서 알 수 있다.

 

관음신앙에 깊은 믿음을 갖고 민간신앙을 염불신앙과 결합하여 영험과 공덕신앙을 강조한 현세구원 적 신앙을 전개하였다. 당시 원나라와 밀착된 권문세족의 횡포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을 현세에서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종풍은 공민왕대 신돈에게 영향을 주었고 고려후기이래 화엄종승으로는 유일하게 국사(진각국사)로 책봉되게 하였다. 그리고 향후 여말선초의 화엄종승들이 부각되게 하였다. 예컨대 이성계와 가까웠던 해인사의 경남스님이나 법왕사 주지였던 우 운 주공스님, 조선 초 사대부들이 앞 다투어 두보의 시를 배우고자 스승으로 모셨던 의침스님 등이 바로 그들이다.

 

대사(大師)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유교뿐만 아니라 일부 스님들도 도탄에 빠진 민중들과 사회를 구원 내지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고려 말 불교계가 자정능력을 잃고 성리학에 사상계의 주도권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는 학계의 정설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스님처럼 불교계도 자각운동을 전개하여 탕화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구원하고자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불교나 불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사를 바로 아는 길이기도 하다.

 

황인규/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