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공의 3남 10녀 자녀들.....

야촌(1) 2007. 10. 10. 19:50

익재공(益齋公)의 3남(男) 10여(女) 자녀들.....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의 묘지명에 따르면 익재공의 자녀는 3남 10녀이나, 익재공파보(益齋公派譜)에는 3남 9녀의 자녀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측실에서 소생한 둘째 딸이 익재 묘지명 기록 당시에 아직 어리다란 기록만 있고, 그 후 출가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면 이분이 족보에 누보된 것으로 보인다.

1.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〇장남 서종(瑞種)과 차남 달존(達尊)외 3녀를 생산.


▶장녀 :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풍천인(豊川人) 임덕수(林德壽)에게 출가하였다.
    임덕수의 부(父)는 시중(侍中-광평성, 내사문하성, 중서문하성, 문하부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1품)이고, 아들 송

   (松)은 순의 판사(純義判事), 임(任)은 순례낭장(純禮郎將)이다.



▶차녀 : 중정대부(中正大夫) 전농정(典農正). 연안인(延安人) 이계손(李係孫)에게 출가하였다.
    부(父)는 통례(通禮-국가의 의식에 관한 일을 담당) 지(漬)이고 아들 언?문(좌변부+小아래 馬.文)은 삼사
좌사

    (三司左使-전곡의 출납·회계사무를 총괄하던 정2품 관직)이고 량전(亮典)은 의감정(醫監正-전의감에 딸

    린 정3품 당하관)이다.

 

▶3녀 :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簽書樞密院事翰林院太學士) 언양인(彦陽

    人)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였다. 그녀는 훗날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작(封爵)되었다. 부(父)는 우의정

    (右議政) 윤(倫)이다.

 


2. 수춘 국부인(壽春國夫人) 춘천 박씨(春川朴氏)   

  〇창로(彰路)외 3녀 생산


▶장녀 :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영해인(寧海人)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다.
    부(父)는 판서(判書) 원계(元桂)이다. 장자 경(經)은 판사(判事)이고 차자 위(緯)는 목사(牧使)이며 3남 수문(殊

    文)은 정랑(正郞)이다.


▶차녀 :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진천인(鎭川人) 송무(宋懋)에게 출가했다.
    부(父)는 찬성(贊成) 지백(之伯)이고 아들 면(勉)은 군수(郡守)이다.


▶3녀 : 공민왕(恭愍王) 후비(后妃)인 혜비(惠妃)로,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후

    비(后妃)이다.

3 서원 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

딸만 2녀 생산


▶장녀 :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우윤(三司右尹) 광주인(光州人)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 했다.
    부(父)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광리(光利)이고 유랑장(維郞將)에서 현감(縣監)이 된 김직(金織), 김효복
(金孝

    福), 김효로(金孝老)는 중랑장(中郞將)이다.



▶차녀 : 봉선대부(奉善大夫) 전의부정(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 했다.

4. 측실(側室)
   〇딸만 2녀 생산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 하였다.
▶차녀는 익재 묘지명 기록 당시에 아직 어리다란 기록만 있고, 그 후 출가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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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내용]

국부인(國夫人) - 고려시대에는 여자는 품계가 없었으나 문무관의 처인 경우 국부인, 군부인, 현부인 등으로 고

    관의 부인들에게 불리웠고 조선시대에는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 숙인 등으로 품계가 정해졌다.

 

김희조(金希祖)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언양이다.

  그는 언양군(彦陽君) 좌정승(左政丞) 윤(倫)의 여섯째아들로 문과에 급제 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軍簿判書), 1356년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고 1359년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 왔을 때 왕의 남행(南幸)에 호종(扈從), 수복 후 평장사(平章事) 이공수(李公遂). 참정

  (參政) 황상(黃裳)과 함께 수도(開京)를 지켰다. 또한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나 얼마 후순천(順天)

  에 유배되었다.    「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 전한다.



언양읍지(彦陽邑誌)

  「언양읍지, 1916」의 기록에는 김희조에 대하여 수사도상주국언양백(守司徒上柱國彦陽伯) 검교시중(檢校

    侍) 경직(敬直)의 아우로 되어 있고, 또「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문

    시중(門下侍中)이며 도강백(道康伯)으로 봉해져 도강 김씨(道康金氏)의 관조(貫祖)로 되어 있는데 동일인 인

    지의 여부는 미고(未考)이다.

도강(道康) : 전남 강진의 옛 지명
택주(宅主) : 고려시대에는 제군(諸君-군(君) 칭호를 받은 자)의 정처를 택주(宅主)라 하였는데 김희조는
군(君)

    이 아데도 부인인 경주이씨가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작(封爵)되었다. 이는 고려 말에 조선 태종 때 2품의 정

    처에게 내린 택주 별호를 고려 말에 이미 2품 관직의 부인에게 봉작 하였음을 알수 있다. 단 2자 명(二字名)을 붙

    여 제군의 정처와 구분하였다, 예) 의화택주(義和宅主), 수성택주(綏城宅主), 정화택주(靜和宅主) 등...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아들이 없자, 재상들이 명가의 딸로서 자식 둘 자를 청하였는데, 이에 익재공의 딸이 뽑혀 혜비로 봉하여졌다.  이 때문에 노국공주가 분하게 생각하여 진수(珍羞)를 진상하지 않고 참소와 고자질이 다투어 일어났는데 이는 노국공주가 투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말기에 홍륜(洪倫)·홍관(洪寬)·한안(韓安) 등 자제위(子弟衛)의 무리들이 제비(諸妃-여러 후비)를
강제로 욕보일 때에 혜비· 정비(定妃)· 신비(愼妃)는 완강히 거절하여 따르지 않았다. 공민왕이 시역(弑逆 : 부모나 임금을 죽임)을 당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