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집안의 광개토태왕 비 - 옮겨진 것이 확실하다.

야촌(1) 2012. 2. 20. 18:22

지안(集安) : 고구려의 400년 도읍지이다.

 

■ 집안에 있는 광개토태왕 비, 옮겨진 것이 확실하다 

    역사왜곡을 위해 거대한 태왕비까지 옮긴 중국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비문에 새겨진 광개토태왕의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석이다.  

 

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의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②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여하튼 이 광개토태왕 비는 우리 고대사의 숙제를 풀어줄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치가 분명 옮겨진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을 자기네 조상의 수치로 여겨 전부 훼손해 버렸고, 이 비문을 일부 위조해 일제의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이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기도 했다.

 

 

 

1) 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의 오기로 본다. 아불란사 터 석주의 높이가 약 10척이고, 호태왕비의 높이는 20척이다. 그렇다면 1872년 이전에 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의 주 강역은 분명 산서성 중남부였다.

 

그런데 태왕묘와 호태왕비가 한참 떨어진 집안에 있었다니 잘 믿기지는 않는지만 그럴 수도 있다.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가 산재해 있다. 원래 대전 현충원과 같은 신성한 소도와 같은 분묘도시이기 때문에 집안에 태왕의 묘를 세울 수도 있으나 워낙 멀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호태왕비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와 조선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비문의 기록과 다르게 평지에 있는 비석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 9일 을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은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다른 왕이 다른 어느 시대인가 있었거나,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능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어느 왕조 누구의 능인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중국 땅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른 평지에 비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산서성 최남부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永樂鎭)에 있던 영락궁(永樂宮)에서 옮겨진 것이 아니가 생각된다. 만일 옮겼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집안이란 압록강변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던 산서성 황하변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배를 이용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김성겸선생이 해석한 남당유고집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태왕을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황산의 위치는 현재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황성현(黃城縣)의 동북쪽에 설치한 영락진이라는 지명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부 참조) 

 

 

↑1900년대 초의 비석.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관석과 대석도 없이 서 있다. 옆에 민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비

   문에 나와있는 산릉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듯 민가도 있었는데 왜 1876년 이전에는 발견 안 되었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수하 장수를 시켜 추격하니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죽령에 이르러 유유와 밀우장군이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는 활약이 나온다. 

 

관구검에게 함락된 고구려의 당시 수도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산서성 남부에 있었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집안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조작으로 보인다. 방 30cm 정도 되는 작은 유물 옮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환도는 안시성과 아주 가까운 곳으로 <삼국사기>에 환도=안시라고 기록되어 있고, 아래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안시 남쪽으로 압록수가 흘러야 한다. 고대 압록수가 산서성을 가로지르는 분하이므로 안시는 신강현에 있는 마수산임이 확실하다. 환도산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제목) 안시성, 환도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3)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석도 있나?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된 비석을 세우려면 당연히 지반침하를 막아야 하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대한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재 가로 세로 2.7m x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받침대 가운데 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제원사진참조).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불과 약 120년 사이에 그 정도 침하되고 훼손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1900년대 초의 태왕비는 받침석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복원신문>

 

↑현재 37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깨어져 있는 받침석. 120년 정도에 이렇게 깨진 받침석은 원래 것이 아니다.

 

4) 관석도 없는 비석이 있나?  보통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관석이 씌어져 있다. 일반인의 묘비에도 반드시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이건 개인이 아닌 조직이 동원되어 관석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에다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관석은 그냥 어딘가에 버리고 비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커서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그냥 세운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 비의 맨 윗부분은 가공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 비, 누가 언제 옮기고 비문 조작했을까? (3/8부)

중국은 선비족 정벌을, 일제는 왜 정벌 기록을 삭제했다.

<역사복원신문>기사입력 2011. 11. 30 14 : 42

 

(1부)에서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다. 사실 물증은 아직 없으나 가능성은 100% 확실하다.

왜냐하면 아시아를 호령한 대제국 고구리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광개토태왕의 비가 길림성 집안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으며, 또한 고구리의 도읍은 산서성 중부이며 최남단 황하변에는 광개토태왕의 사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영락궁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1부)에서 언급한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 ‘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이 운동과정에서 분명 ‘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광개토태왕 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명나라 영락제 때 실시한 역사상으로 가장 중요한 지명인 갈석산의 위치이동과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다.

 

 

또한 중국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 : 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인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산서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는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다. 연나라 왕의 신하였던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는 말은 역성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가 들어서야 하나, 같은 연나라로 이어진 것을 보면 연나라는 고구려와 예로부터 동족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중국은 광개토태왕비를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겨다 세워놓았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나중에 좁은 집안의 평지에서 15km2 밖에 안되는 곳을 고구려인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했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산 정상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했다.

 

왜 그랬을까? 광개토태왕비나 점제현신사비나 둘 다 이른바 중국과 일제가 각각 추진한 역사왜곡을 유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음모이며 흉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광개토태왕 비가 서있는 길림성 집안은 고구리의 도읍지인 국내성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에 의해 집안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을 단 한 개도 볼 수 없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도읍에서 볼 수 없는 일식이 기록으로 남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과학적으로 집안이 고구리의 도읍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일제에 의한 비문 조작

 

나중에 광개토태왕비를 수중에 넣은 일제는 관동군 정보장교 사케오가케노부(酒句景信)가 가져온 원본 탁본을 보고는 학자들에게 연구를 시킨다. 그리고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고 탁본을 떠서는 만천하에 공개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은 철저히 없애버리고, 신묘년 기사를 위조해 조선 지배의 정통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라일본부설을 임의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은 1895년에 비를 답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912년 비를 재답사한 계연수선생은 비문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선생은 계연수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는 1895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광개토대왕비에서 횃물이 흘러내리고 있다.<역사복원신문>

 

일제가 비문을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며, 한일 간 동양사학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기도 하다. 아래는 비문징실의 내용으로 빨간색 부분이 왜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가 없애버린 글자이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환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六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우리의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항상 열등감이 많았던 섬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서도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문화재를 가져가는 등 온갖 역사 만행을 저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던 일제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보이자 미리 계획한대로 역사말살 음모부터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혈안이 된 일제가 비문내용인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고, 고구리가 왜를 군(식민지)로 삼았다."는 기록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식민사학은 이미 <환단고기>와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으로 허구임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도 강단사학계는 일제식민사학에 중독되어 위대한 민족사를 밝힌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고 있다.

해방 61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민족정신과 얼인 역사를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사학계의 파렴치한 행위는 이제는 고쳐져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가 열릴 것이다.